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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의 도읍지였던 국내성 유적을 집안에서 답사하였다.

이후 백두산을 향해 숙소인 송강하로 달려갔다. 이동 거리는 약 5시간 정도.

 

숙소에서 출발하여 고구려의 고분군의 벽화로 유명한 5회분5호묘를 방문하였다. 광개토대왕비와 왕릉을 답사하고, 장군총을 살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북한식당에서...

 

1980년대 초 집안에 남아 있는 국내성 고구려 고분들을 중국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였다. 생동감 넘치고 수려한 채색이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찬란했던 고구려 예술의 정수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집안의 고구려 벽화는 장천 1호분, 집안 4호분, 5호분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5호분을 방문하였다. 

 

이북상품 장뇌삼이 반겨준다.

 

우산 귀족묘지 안내도.

 

두꺼비가 수줍게 반겨준다.

 

오회분(五盔墳) 5호묘.

 

5호묘로 들어가는 입구.

고분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 따라서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직접 촬영한 사진 대신에 남이 촬영한 사진으로 대신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링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6&content_id=cp042600780001

 

5호묘 안내문.

 

9시17분. 광개토대왕님을 뵈러 왔다.

 

광개토대왕비. 보호각의 유리 속에 갇혀 계시다. 얼마나 답답하실꼬...

 

중국에서 호태왕비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

 

보호각의 유리와 비문 사이의 거리가 꽤 되고, 유리면의 반사 때문에 비석이나 비문을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만들려면 제대로나 만들어 놓았으면... 공조 장치나 제대로 되어 있을지도 걱정된다. 미덥지가 않다.

 

 

유리로 차단되기 이전의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들.

 

광개토대왕릉. 보존 및 관리 상태가 아주 메롱이다. 입장료를 그리 받아 챙기는데 누가 먹는지 모르겠다. 관리 좀 제대로 하지.

 

광개토대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 녹슨 철문을 설치해놓았다. 녹슨 철문....ㅎㅎㅎ 고구려 시절의 유물일까??

 

좁은 입구에 경비원이 앉아서 관리한다. 역시나 내부 모습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곳에서 멀리 룽산(龍山) 아래의 장군총이 보인다.

 

광개토대왕릉 주변의 담장 밖에서 노점상들이 부른다. 중국 아저씨는 배를 깐다.

 

 

10시45분. 장군총으로 장수대왕님을 뵈러 왔다.

"집안시 고구려문물 전시세터를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합니다"며 환영해준다.

 

현지 가이드가 단체 여행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틀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오늘은 아주 좋다. 햇볕 쨍쨍.

집안 지역에 남아 있는 만 이천여 개의 묘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왕릉이다. 

밑변 32미터, 높이 12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피라미드형 방단계단적석묘이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길이 5.7미터에 이르는 화강암 1100여 개를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

 

피라미드형의 장군총. 왕릉을 주변에 12개의 자연석이 놓여 있는데, 그 용도와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고 한다. 왕릉 사방에 놓인 돌들이 기단석이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받침돌이라는 설, 12지를 상징한다는 설 등이 있었는데, 실제로 받침돌로서의 기능은 전혀 하고 있지 않으며, 왕릉 축조 당시에는 12간지가 전해지지 않은 시기라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 뭐지? 모른다.

 

가장 작은 돌의 무게가 15톤 정도라는데, 이런 거대한 자연석을 왜 기대어 놓은 것일까?? 왕릉의 동서남쪽 면에는 3개씩 있으나 북쪽면에만 2개가 놓여 있다.

 

바로 옆에는 고인돌도 있다.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 민족 정권입니다. 고구려 나라가 그의 건립 및 발전 과정중에 혈액 및 불, 영혼 및 육체간의 싸움을 거쳤습니다. 또한 많은 전기적인 색체 짙고 신화 같은 이야기를 가졌습니다. 고구려 28대 임금의 집권 책략, 평생 전적 및 신기적인 인색이 고구려 역사에 낯내게 보탰습니다. ......" 이게 뭔 말이고???

 

 

점심 식사 후 식당 앞쪽의 도로 변에 남아 있는 국내성의 흔적을 살피고는 압록강 변으로 이동하였다. 강 건너의 북한 모습을 보고 환도산성으로 이동하였다.

 

12시25분.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집안 시내로 돌아왔다.

식당 묘향산. 중국과 북한의 국기가 입구에 걸려 있다.

 

식당 입구의 환영 문구.

 

두어 개의 나라에서 북한 식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공통점은 모두 중간에 공연을 한다는 것.

손님들이 굉장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만석이었던 듯. 그래서 손님을 맞는 직원들이 정신없이 땀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 공연은 언제 하는 것이냐고 자꾸 재촉하니까 공연을 하더라. 이곳은 공연을 담당하는 팀이 따로 있지 않았다. 써빙을 하던 직원들이 옷을 갈아 입고 나오더니 마이크를 잡고 공연을 했다. 드럼 연주자는 여전히 홀 써빙할 때의 복장 그대로다.^^

"장군님 사랑~ 장군님 사랑~" 그런 정도의 가사만 귀에 들렸었다. 체제 선전 일꾼들이었더라...

 

 

길가에 쌓여 있는 돌담이 국내성의 흔적이라고 한다.

 

그냥 동네 축대처럼 보인다.

 

1시 40분. 또 압록강변으로 나섰다.

 

안내 표지석

 

안내 표지석 뒤면. 압록강국경여유구소개.

 

재밌는 자전거가 놓여 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북한땅. 현지 가이드가 소개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산속의 좁을 길을 구비구비 돌다가 보이는 산이 중국땅인지, 북한땅인지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알려준 말. 산에 나무가 많으면 중국땅, 나무가 없으면 북한땅이라 했다. 얼마나 나무를 베어댔으면 이런 말이 나돌 정도인지.. 안타깝다. 그런데 진짜로 휑허니 나무가 없기는 하다.

 

산 밑으로 보이는 마을의 가옥들. 똑같이 생겼다. 마을 뒷쪽의 경사지에는 옥수수를 심어놓은 것 같다.

 

오후 1시51분. 환도산성을 찾는다. 시내에서 멀지 않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해당하는 곳이다. 환도산성.

원래 이름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불리었으나, 중국에서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산성자산성으로 바꿔버렸다. 이후 산의 이름이 환도산으로 바뀌면서 성의 이름도 환도산성이 되었다고 전한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 위나암성은 전시에 사용하는 산성의 세트로 구성된 것이었다 전한다.

 

산성의 대부분은 허물어지고 남측성벽과 망대 등 일부만 남아 있다. 

 

산성 아랫쪽으로는 넓은 옥수수밭과 고분군이 있다.

 

산성하귀족묘지시의도. 

 

무덤떼라고 부르더라.

 

차량에 탑승 후 달렸다. 통하를 경유하여 송강하로 달렸다.

 

오후 6시50분. 송강하(松江河).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드는 쑹화강의 지류이다.

 

늦게 출발하여 장거리를 달렸다. 늦게 천사(天賜) 호텔에 도착하여 피로를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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