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그리스 전국일주를 마감하는 날이다. 그냥 인사없이 보내주기가 안타까웠을까? 새벽에 창밖에서 같이 놀자고 나오라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계속 소리를 지르더라. 노래도 부르더라. 춤도 추더라. 좋구나~^^;
해가 뜰 때까지 계속 그렇게 노는데, 아무도 창밖으로 조용히 하라는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도 문화의 차이일까? 대단한 체력들이다. 아침 7시쯤 되니까 조용해지더라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였다.^^ 옆의 작은 식당이 주말에는 밤샘 영업을 하는 것 같았다. 의자들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는데, 건물 입구에 맥주병과 캔 몇 개가 버려져 있는 것이...
아테네도 참 답답하긴 하겠다. 이런 기둥하나 남아 있으면 부근의 개발은 없다. 2세기 경 로마 목욕탕의 기둥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기둥이다.
내 가슴이 다 아파온다. 레인지 로버, 워쩐다냐...
맞은편 건물 앞에 사람들이 잔뜩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탈리아 고고학 스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었다. 일요일인데... 특강이라도 있었나?
8시 40분. 옆지기가 서두른다. 로비로 짐을 모두 챙겨 내려왔다.
8시 58분. 버스는 떠난다. 신타그마 광장의 국회의사당을 지나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을 방문하고 아테네를 떠났다. 영영 떠났다.
9시 15분. 원래 왕궁으로 건설되었으나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앞을 지난다. 그런데...
의사당 전면에 위치한 '무명 용사의 기념비' 앞에서 근위병들의 교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리스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용사들을 기리는 곳이다. 1932년에 완공하였는데, 벽에는 그리스 군이 참전한 전쟁과 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KOREA"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전쟁에 4,992명이 참전하여 188명이 전사하였다. 바로 앞에서 일반인들도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분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없애려고 드는 무뇌아들의 나라 국민으로서 부끄러워졌다.
사진에서 근위병의 등쪽으로 주욱 가면 보이는 "KOPEA"가 그리스 알파벳으로 "KOREA"를 적은 것이다.
9시 17분. 아테네 대학교 앞을 지나친다.
아테네 국립 도서관.
9시 27분.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입장하면서 보안검색을 제대로 한다. 주머니 검사도 한다.
마지막으로 사용하게 되는 그리스식 입장권이다. 참 못생겼다.
신석기 유물관은 문을 닫았다. 키클라데스 문명관에서부터 시작한다. BC 32 세기의 초기 청동기 문명이다.
BC 16세기에 시작되었던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 문명의 유물과 유물이 발견된 장소를 표시한 자료이다. 이만큼이나 다양한 지역들과 교류를 하였다는 증거가 되시겠다.
지도만 보면 이러하다. 당연히 지도에 트로이에도 미케네 유물이 표시되어 있다.
재밌는 '인형' 조각품들. 돌을 다듬은 것이다.
석공들의 뛰어났던 기술을 확인해볼 수 있다.
뛰어난 도공들의 작품. 도기의 모양이 신기하다. 어떤 용도였을까?
금속 세공 기술의 세계가 왔다.
싸우자!
금가면. 금판. 금그릇. 금칼.
금 소.
칼집을 장식한 금붙이의 가공 수준이 엄청나다. 사자 사냥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쩐다~
사자 한마리는 사냥에 성공했고, 두마리는 도망가는 중이다. 그리고 사냥과정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까지 묘사하고 있다. 당시 도구로 사자를 사냥하는데 다친 사람이 하나도 안나온다는 것이 말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대단한 작품이다.
크레타 문명의 선문자.
와~ 컵을 장식하고 있는 문양들의 세공 상태는 감탄을 자아낸다.
미케네 문명에서 남자들의 장례에 금 가면을 사용하는 것이 독특하다.
커다란 도기의 표면에 그려진 문양과 그림.
세세한 근육 묘사가 뛰어난 청동상이다. 오른손에 삼지창 '트리아이나'를 들었으면 포세이돈, 번개창 '아스트라페' 들었으면 제우스를 묘사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즉, 누군지 모른다는 이야기.
산토리니의 아크로티리 유적지의 벽화.
대리석으로 조각된 '사이렌'. 아테네 케라메이코스의 고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완전 무장을 갖춘 아테네 젊은 병사의 모습.
이쪽 사람들은 근육 움직임만 관찰했나? 종자가 말을 달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은 그냥 달려서 튀어 나갈 것만 같다. 부조 밖으로...
이 작품도 유명하다. 하지만 페르세우스 인지 파리스 일지......
아프로디테, 판, 에로스 조각상. 아프로디테가 추근대는 판을 샌달로 한대 치려는 듯한... 상황... 일 것 같은데, 아프로디테는 웃고 있다. 시방 뭐하자는 것이여...
11시 20분. 박물관 관람을 마친다.
11시 30분. 버스 탑승. 이제 무선 수신기 쓸 일이 없을 것이라며 회수한다.
11시 39분. '헌법'이란 뜻을 갖고 있는 신타그마 광장 맞은 편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앞에 위치한 무명 용사의 기념비 앞에는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고 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까 보다 많아졌다.
아테네 시내에는 아주 다양한 교통 수단이 이용되고 있다. 일반 버스, 트롤리, 트램, 지하철, 굴절 버스 등등.
아테네 시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떠난다. 싱숭생숭~~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며 경관을 구경하다가 근사한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발칸 반도의 최남단인 수니온 곶에 위치한 포세이돈 신전을 멀리서 조망하고 아테네 국제공항으로 달렸다. 그리고 떴다.
11시 55분. UN 묘지가 보였다.
12시 15분. 식당 하차.
1시 20분.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른다. 달린다.
2시 10분. 에게 해로 뻗어나온 수니온 곶에 위치한 포세이돈 신전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서 거리가 꽤 된다. 드론을 날려봄직 하지만, 수화물에 포장을 시켜버린지라 꺼낼 수가 없다. ㅎㅎ
그리고 바람이 너무 거세어 손에 드론을 들고 있었어도 쫄려서 못날렸을 것 같기도 했다.
2시 20분. 간다.
2시 33분. 해안의 양식 시설이 보였다.
물이 너무 깨끗하여 해초가 자라질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양식이 굉장히 어려운 실정인데 어떻게 극복하고 양식업을 하는가 모르겠다. 가두리 양식장에서 흑돔 등을 주로 양식한다고 한다.
오후 3시 16분. 공항에 도착하였다. 버스 기사와 작별하고 바로 체크인을 서둘러 진행한다.
세관 및 보안 검색 통과. A08 게이트 부근의 스타벅스에 한잔 마시면서 휴식...
5시 30분. 보딩을 시작한다.
EK210편 B777-300ER편의 45D,E 좌석에 앉아 두바이로 날아갔다.
3,274km를 날아갔다. 4시간 12분을 날아갔다.
10시 23분에 착륙했는데, 두바이 시간으로는 11시 23분이라 한다. 아테네와 1시간의 시차가 난다.
보안 검색 후 탑승 게이트에서 대기하다가 면세품 1점을 구입했다. 트래블 월렛 카드에 달러를 충전하고 구입하려 했더니 안되길래 아랍에미레이트 통화인 다르함으로 충전했더니 결재가 되었다. 그래서 트래블 월렛 계좌에 잔전이 쪼끔 남아 있다.
2시 50분. 보딩을 시작했다.
EK0322편 A380-800 비행기의 65D,E 좌석에 앉아 6,735km를 날았다.
비행기에서 건강상태조사서 양식을 나누어주었다. 얼마 전부터 작성 안하던 것인데 왜 나눠주는지 의문만 가졌다. 입국하는데 중동 지역에서 입국하는 사람들은 메르스 때문에 작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5시. 인천공항으로 접근하고 있는 EK0322편 여객기 A380. 꼬리 날개에 달린 카메라 화면 서비스.
12시 8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서울 시간으로는 오후 5시 8분. 두바이와 5시간의 시차가 난다.
입국 수속을 짐을 찾는 순으로 인사하면서 헤어졌다.
공항버스 표를 미리 구입해야 하는데, 매표소 위치를 기억하지 못한다. 가끔 이용하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사이에 날짜들이 휘이익 날아갔다. 벌써 5월 25일이 되었다. 집 떠난 지 열 밤이 지났구나.
5시 50분에 기상하여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동네 구경을 해본다. 좁은 도로의 양쪽이 모두 주차 공간으로 이용되는 곳. 길가에 주차된 차량의 상태를 보니 좀 오래 운행을 안한 것으로 보인다. 지하 주차장이 없으니 이런 새의 테러를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동네인갑다.
그동안 여정을 함께 하면서 유독 자주 같은 테이블을 사용하였던 멋진 분들을 만났다. 지난 밤에 아크로폴리스를 한바퀴 도셨다고 하네. 이제 길을 아시는 분들이시다. 안내를 해주시기에 따라 나섰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서 아크로폴리스를 조망하고는 계속 걸어서 한바퀴를 돌았다. 상쾌한 아침 운동이 되었다. 약 1시간 정도 걸리더라.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라고 하는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의 입구 부분이다.
8시에 아크로폴리스를 개장한다. 개장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줄을 서고 있다. 햇살이 뜨거워지기 전에 관람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있는 작은 언덕인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서 아크로폴리스 방면으로 본 모습. 아레이오스 파고스와 아크로폴리스의 두 언덕은 모두 석회암 덩어리이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은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일 것으로 생각된다. 곳곳에 지난 밤 젊은이들이 이곳을 즐겼던 흔적(쓰레기들)이 널려 있더라. 그 동네 아짐씨가 도와달라 하여 아테네 정화 봉사활동을 의도치 않게 하기도 했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은 법정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주로 살인 사건을 다루었다. 이런 상태가 그대로 법정이었던 것은 아니고 석재를 이용해 단의 형태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파손되고 원래의 기반암이 그대로 드러난 것일게다.
하늘을 보니 오늘 하루도 매우 뜨거울 것 같다.^^
이곳은 51년에 사도 바울의 설교가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언덕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아래 석판에 그의 설교 내용이 새겨져 있다. 심판을 하겠다는 내용이니 일독을 권해본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헤파이스토스 신전'과 그 앞쪽의 '아테네의 아고라' 유적.
아크로폴리스를 한바퀴 산책하는데 총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바로 걷기만 하면 40분 정도에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어 다음에 다시 또 걸어보기로 다짐했다. 다짐을 했다. 다짐!
숙소 앞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햇볕이 있어야 사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햇볕을 받기 위해 베란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단다. 집의 크기는 작아도 돌출된 베란다가 모두 설치되어 있으며 또 너무 강한 햇볕을 차단하기 위한 차양막을 설치하고 있다.
좁은 골목에는 소형차들이 가득 주차되어 있다. 동네 사람들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다.^^
9시 반에 로비에 집합하였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서 오전 일정을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숙소에서 가까운 곳이기에 버스를 타지 않고 그냥 걸어 가기로 했다.
숙소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주유소이다. 따로 넓은 공간을 마련할 수 없는 동네이기 때문에 아파트 건물의 1층을 주유소로 이용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예전에 사용하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 위에 위치한다. 공간이 좁아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큼지막하게 새로 지었다. 그런데 땅을 파면 여러 시대의 유적이 나오는 동네라 함부로 팔 수 없었다. '새' 박물관의 위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파서 유적을 박굴하고 유적지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박물관을 건축한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셈이다.
서울시 종로구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건물의 지하층으로 유지되는데 이 박물관은 아예 그냥 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직원이 밖에 나와 단체 예약 관람객 팀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단체팀과 개인들이 들어가는 문이 서로 다르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가면 가방을 모두 보관해주는 서비스를 해준다. 즉, 모두 맡겨야 한다는...
각 시기별로 아크로폴리스의 변모 과정을 보여주는 모형이 제작,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 역사와 신화, 문명에 대한 학구열을 불태우는 관람객들. 아크로폴리스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대부분은 레도데스 아티쿠스 극장 일대에서 발견되었다.
BC 30세기에서 6세기 사이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956년 오래된 우물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나이키 조각상.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공공 건물의 장식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폴로, 헤르메스, 춤추는 님프들. 왼쪽 끄트머리에 '판'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님프와 판의 성역'에서 출토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장식하던 것들이다.
샌들을 신은 남자와 그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뱀이 묘사되어 있는 유물은 '실론의 헌신'이라 한다.
아스클레피오스, 데메테르 여신과 그녀의 딸인 페르세포네가 저명의 의사들을 접견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부조.
페리클레스 음악당에서 출토된 올빼미 상. 올빼미는 아테네의 수호여신인 아테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전시된 카리아티드를 감상하고 있는 방문객들. 카리아티드는 신전 등의 건축물에서 기둥을 대신하는 여인상을 말한다.
이 카리아티드들은 원래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에레크테이온의 남쪽 현관을 장식하던 것이었다. 제작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페이디아스의 제자인 알카메네스 공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박물관에 5개가 전시 중인데 하나는 터키 군의 대포알에 맞아 부서졌다. 여섯번 째 것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하고 있던 박공을 비롯한 조각상들을 엘긴 경이 훔쳐가서는 대영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그래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는 모형만을 전시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는 했다.
박물관 창밖으로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저기에다가 대포질을 해댔던 사람들은 무슨 심뽀였을까?
3층에 카페와 기념품 판매점이 있다. 이곳에서의 아크로폴리스 전망이 좋다고 하더라.
2세기 경 아테네는 이 정도였었다고 한다. 거주 인구는 10만 명쯤?
아테네 인들은 이미 BC 5세기부터 지중해 동부를 장악하고 번영기를 누리고 있었다. 고대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모두 현재의 아테네를 기준으로 하면 해안에 가까운 남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부 아테네는 1800년대 초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인 오토 왕이 아테네를 수도로 지정한 이후에 발전이 이루어졌다. 당시 건축가들이 새로운 유럽 스타일의 도시계획을 하면서 파네피스티미우 가, 아카디미아스 가 같은 가로수가 늘어선 대로를 구상했고 신고전주의적인 대형 공공건물들과 저택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남부 아테네에는 아크로폴리스와 고대 아테네의 심장부 역할을 했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플라카와 모나스티라키는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 지역으로서의 역사적 뿌리를 자랑하며, 수많은 비잔틴 교회와 박물관들을 품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 전체 인구의 약 40%인 400만 명이 아테네에 살고 있다. 그래서 대도시가 일반적으로 안고 있는 교통, 주거 문제가 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여름에는 특히 숨이 막힐 듯한 한낮의 더위와 대기오염, 혼잡한 교통 등으로 여행객은 물론 주민들도 힘겨워 한다.
11시 50분.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을 나섰다.
건물이 박물관 옆에 있으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하는가보다. 니케 여신상 그림이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남쪽으로는 부겐빌레아가 무성하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12:00. 점심 식사를 하러 간다. 우리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도로 건너편으로 '하드리아누스의 문'이 보인다. 그 뒤로 위치한 제우스 신전은 나무들에 가려 안보인다.
12시 20분. 근대올림픽경기장에 잠시 멈추었다. 경기장 바닥을 제외하고, 관람석 전체를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대리석이 넘치는 나라답다.
1896년 4월 5일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렸던 칼리마르마로 스타디움이었다.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란다.
12시 40분. 길이 너무 막힌다. 버스는 나아가지 못하고 시간은 마구 달리고 있어서 멀지 않으니 그냥 버스를 내려 걸어가자고 할 정도였다. 아테네의 도로 체증이 상당하다. 공기밥 두공기를 먹었다. 잘 들어가더라.ㅎㅎ
원래 예정되었던 일정에는 '한식'이 없었는데 고린도 왕복 일정이 변경되면서 포식을 하게 되었다.
1시 30분. 식사를 마치고 길가의 오렌지 열매 아래서 버스를 기다린다. 지나는 사람들 아무도 열매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트램이 달린다.
1시 57분.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2시 입장하기로 예약되어 있다고 하더라.
아크로폴리스 입장권이다. 20유로인데, 내년에는 30유로로 인상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2025년 4월부터 한방에 50%를 인상한다. 쎄다.
지도에 세가지 경로가 있다. 아크로폴리스 관람 경로가 첫번째고, 두번째는 아크로폴리스 뒷편의 '플라카' 거리이다. 고대와 중세와 현대의 세계가 뒤섞여 살아가는 현장이라고 현지 가이드가 소개하더라. 세번째는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야경을 기다리며 즐기던 정찬이다. 까다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복장에 신경을 써달라고 했던 식당이다.
Hellenic Heritage 공식 사이트에 등재된 아크로폴리스의 사진이다. 아크로폴리스 남서쪽에 위치한 필로파포스 언덕에서의 조망이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크로폴리스 뷰"가 가장 좋은 곳일지언데... 지도를 보고 이 언덕을 올라가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역시 다짐으로 그쳤다. 에효~ㅠ.ㅠ
아크로폴리스는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발고도가 156m에 불과해 산이라기 보다는 작은 언덕에 가깝다. 아크로폴리스의 지질 구조 단면이다. 이 일대에 넓게 나타나는 기반암인 편암의 상층에 석회암이 피복되어 있는 형국이다. 풍화, 침식으로 주변이 모두 제거되고 언덕으로 남은 부분이 아크로폴리스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노란색 부분은 석회암봉우리 위에 토사를 쌓아 평평하게 인위적으로 조성한 부분이다.
(M. Regueiro, M. Stamatakis, K. Laskaridis, 2014, The geology of the Acropolis (Athens, Greece), European Geologist, 38, p.48)
하층의 편암 부분과 상층의 석회암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구분된다. 정상부가 평평하지 않았기에 남쪽과 북쪽으로 상당한 면적에 걸쳐 성토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아래 지도에서 흰색 부분).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주변부에는 절리가 발달하여 침식으로 다른 부분이 분리, 제거되기가 쉬웠을 것이다.
(M. Regueiro, M. Stamatakis, K. Laskaridis, 2014,The geology of the Acropolis (Athens, Greece),European Geologist, 38, p.49)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라 불리는 페리클레스 시대(BC 495~429)에 파르테논, 에레크테이온, 아테나, 니케 신전이 지어졌고, 온 그리스의 성역이 되었다. 종교의 중심지이자 강력한 요새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 아테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모든 종교적 의미가 퇴색되었다. 게다가 1687년에는 베네치아와의 전쟁 때 베네치아 군의 포격을 받아 모든 건물들이 크게 손상되었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입구의 블레 게이트는 2~4세기에 석조로 만들어졌다. 유명한 건축가 므네시클레스가 설계한 전문까지 대리석 계단으로 이어지며 남서쪽의 우아한 이오니아식 건물인 아테나 신전, 니케 신전과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의 자료. 원래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란 것이다.
①번의 전문까지 이르는 대리석 경사로는 소실되고 없다. 멋진 전문을 장식하던 지붕은 붕괴되어 거의 소실되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전문(프로필레아)의 현재까지 복원된 모습.
②번의 아테나-니케 신전의 남아 있는 모습이다. 건물의 군데군데 하얀색이 보이는데, 새로 채워넣어 복원한 것이다. 깨졌던 부분의 대리석 부분을 그 원래 모양대로 잘라내어 붙였다. 대단하다.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곤 했던 아테네 인들은 이 신전에 승리의 여신 니케를 모시고 승리를 기원했다. 이 신전이 갖는 건축양식 면에서의 의미는 아크로폴리스의 수많은 건물들 중 처음으로 이오니아 양식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기둥이 가늘고 길며 주두의 우아한 장식이 두드러진다.
⑤번의 건물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복원하기는 했지만 수천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기둥이 굵어 힘찬 인상을 주며 동시에 간소하게 느껴지는 도리아 양식의 건축물 중 최고봉으로 꼽힌다. 세계에서 가장 균형잡힌 건축물로 일컬어지는 이 신전은 그리스의 다른 신전들과 비교할 때 규모면에서도 최대를 자랑한다.
1975년부터 무너지고 부서졌던 조각들을 짜맞추고 틈새를 메우는 복원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2020년에 마칠 예정이었지만 2024년에도 계속하고 있더라.
사라진 조각을 만들면서 완성해나가는 직소 퍼즐 맞추기가 쉽지 않은지 언제 끝날 지는 미정이라 한다. 재밌는 것은 파르테논 신전 건축이 사실은레고로 만들어 조립했었다는 사실이다. 와~ 소~오름~
남아 있는 부분에 맞추어 '새' 대리석을 이렇게 깍아내고 짜맞추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파르테논 사진에는 크레인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480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된 아테나 신전을 대신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 6세기 말부터는 교회로 이용되었었고,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뒤인 1460년대 초에는 모스크로 변모되고 첨탑도 세워졌었다. 1687년 이곳을 침공한 베테치아 군의 포격으로 신전 앞에 쌓아두었던 화약더미가 유폭되면서 신전 건물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1806년에는 영국의 엘긴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락을 받고 많은 대리석 조각품들을 영국으로 가져갔다. 1816년 대영 박물관이 구입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그리스 당국이 돌려달라고 계속 졸라대는 데도 영국은 거부하며 버티고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파르테논'이 어디서 온 단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하더이다.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의 왼쪽이 '아테나 프로마코스' 청동상이 있었던 곳이다. "앞장서서 싸우는 아테나"라는 뜻이라는데, 전쟁의 신다운 이명이라 하겠다. 동상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에레크테이온이다.
⑥번 건물인 에레크테이온이다.
BC 420~39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도리아 식이 가미된 이오니아 식의 보기 드문 건축 양식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카스티아드로 장식된 주랑이 특색. 건물의 주랑을 장식하는 여인상인 카스티아드들이 멀리 보이는데 모조품이고, 진품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다섯, 대영박물관에 하나가 있다. 1837~1846, 1902~1909, 1979~1987의 세번에 걸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아크로폴리스의 다른 건축물에 대해서도 '보존적 개입'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에레크테이온 앞쪽으로 주춧돌이 널려 있는 공간은 헤카톰페도스 신전이 있던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어떠한 정부가 차지하는가에 따라 용도가 달라져왔다. 오늘날의 그리스 정부는 아크로폴리스를 국기 게양대로 활용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8시 개장 전에 의장대가 먼저 올라와 국기 게양을 하더라.
국기 게양대는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구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앞쪽에 대리석을 어떻게 떼어냈을까 라는 질문에 답을 보여주는 예가 전시되어 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아크로폴리스 남쪽으로 보이는 필로파포스 언덕. 다음엔 꼭 올라가보아야지!!
아크로폴리스 남쪽 아래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
그리스 극장의 표준이라 할 정도로 정형화된 것이다. 시민 집회와 음악, 연극 공연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디오니소스 극장 동쪽에는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이 위치한다.
현재 남아있는 극장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으로 꼽히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대부호인 헤로데스가 건축해 기증한 것으로, 지금도 오페라, 연극, 음악 공연이 이루어진다. 2024년 5월 25일에도 무슨 공연인가를 위해 열심히 준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높은 언덕'인 아크로폴리스에서 아래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의 모습이다. 1,2층과는 달리 3층의 방향이 살짝 비틀려 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의 방향과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독특한 설계 개념이다.
저 멀리 방문해보지 못한 제우스 신전이 모습이 보인다. 봤으니 본 것으로 치자.
3시 20분. 전문 아래 위치한 블레 게이트. 아크로폴리스를 나선다.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이 보인다. 사람들 가득 올라서서 아크로폴리스의 경관을 감상하고 있다.
북서쪽에 헤파이스토스 신전과 아고라의 유적지가 보인다.
거북이가 한마리 숲에서 걸어나와 떠나는 길손들을 배웅해준다. 이곳의 명물인 모양이다.^^
3시 50분. 걸어서 호텔에 도착하였다.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린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버스가 가버렸다. 나중에 배달해 줌.
첫날에는 객실에 생수가 제공되었는데, 둘째 날에는 없더라. 잊고 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영어 좀 되는 분께 부탁하여 생수를 달라고 했다. 몇 차례의 통화 끝에 가져다 주더라. 그런데 5유로 75센트를 달라고 할 줄은 진정 난 몰랐었다. 헐~
객실에 퍼질러져 쉬다가 5시 반에 로비에 집합하였다. 또 출동이다. 아테네의 명물인 플라카 지구를 돌아보기로 한다.
플라카 지구는 아크로폴리스 북쪽 언덕 아래 동네를 말한다. 아크로폴리스 동쪽에서 주욱 이어지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늘 활기가 넘기는 곳이다. 국회의사당과의 사이에는 세련된 상점과 오래된 그리스 정교회 건물들이 묘하게 어울린다. 작은 광장과 좁은 골목들이 어울려 있는데, 5~15세기 비잔틴 시대에 건축된 건물들이 많은데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방문객들이 많이 찾는다. 아크로폴리스 가까이에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시대의 유적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플라카 지구를 걷다보면 과거 세계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가보자~
5시 40분. 리시크라테스 기념비가 있는 리시크라테스 공원에서부터 시작한다.
좁은 골목을 아기자기하게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상점들이 반겨준다.
골목 안쪽의 수많은 상점과 수많은 식당들이 방문객을 기다린다.
갑자기 넓은 공간이.... 메갈리 파나기아 성당의 유적이다.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입구의 열주.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유적지 앞의 노점상들.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의 유적인 열주 옆으로 1759년에 지어진 모스크가 보인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Museum of Modern Greek Culture.
판타나싸 성당의 건물은 좀 연식이 있어 보인다.
지하철역 모나스티라키. 표가 없어 안으로는 들어가보질 못하였다.^^ 비행기 그림이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아테네 국제공항까지 연결되는 노선인 것으로 보였다.
예쁘게 채색된 그리스 정교회 건물 위로 아크로폴리스가 깨끗하게 보인다. 휘날리는 그리스 국기. 기둥이 보이는 건물이 에레크테이온이다.
판타이노스 도서관 유적.
아테나 에레체게티스 문.
로마 포럼. 고대 아고라 유적지.
바람의 탑.
어.... 아크로폴리스 북쪽에는 서쪽 전문의 경사진 길과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이제서야 실토한다.^^;
자그마한 '아고라 광장'. 역시나 식당가로 이용되고 있다.
가죽 제품 신발이 유명하다 한다. 옆지기에게 사줄까 했더니 싫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마디, 플라톤의 한 마디, 소크라테스의 한 마디.
골목길에서 큰 길로 나서 보았다. 하드리아누스의 문이다.
성 케더린 정교회에서는 결혼식이 열렸던 모양이다. 축하 축하 축하~
그리고 다시 리시크라테스 기념비. 집합 시간을 기다린다.
7시 10분. 모두 모여 달려갔다. 디오니소스 조나 레스토랑.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리니.... 오, 예!!!
한 점 먹고 고개 돌리고, 한 점 먹고 고개 돌려보고....ㅎㅎ
아크로폴리스가 석양 빛에 물들기 시작한다.
와인 한 잔 들고, "기아마쓰!" 외치고 또 고개를 돌린다. 곳곳에 인공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7시에 식사. 근사한 식당이다. 숙소를 참 좋은 곳으로 잡은 것 같았다. 식당이 멋있어서...^^
9시반에 출발한다고 하여 시간 여유가 생겼다. 잠시 하늘을 날아보았다.
햇살이 강하여 피라 마을 쪽은 거의 구별이 안된다. 드론의 카메라가 촛점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더라.
Athinios 방면의 '산토리니의 하트' 주변이 아닐까 한다. 태양신 헬리오스, 당신이 이겼소.ㅠ.ㅠ
방향을 돌렸다. 칼데라 복판의 네아 카메니 섬, 그 왼쪽의 팔라이아 카메니 섬이 보인다. 모두 무인도이다. 그 뒤로 테라시아 섬이 보인다. 이아 마을에서 페리로 연결되는 섬이다.
테라시아 섬까지 날아가볼까 했는데 거리가 6km가 넘더라. 자그마한 꼬맹이 드론으로는.... 가도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 같아 귀환시켰다.
하얗게 빛나는 건물들. 지난 밤을 신세진 숙소. 사진 오른쪽 아래의 건물들이 우리 숙소였다. 왼쪽 아래 숙소가 더 좋아보인다.ㅎㅎ
피라 마을 쪽을 다시 살펴본다.
이아 마을을 다시 한번 본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으랴...
화장실 물품 세트가 이렇게 깔맞춤 되어 있다. 좋은 숙소였다. 별이 다섯 개.
셀피 사진을 찍는 방법.
숙소를 출발하여 남쪽 능선 반대편에 위치한 아크로티리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걸어서 레드 비치의 절경을 감상하였다. 산토리니의 새로운 명소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는 '산토리니의 하트'를 들러보았다. 근사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아테네로 날랐다. 산토리니와 이별했다.ㅠ.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동네의 길가에 보이는 식물들. 포도이다. 산토리니가 포도 및 와인으로 유명한데, 바람이 워낙 강하여 지지대를 세워 덩굴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그냥 둔다고 한다.
땅바닥에서 열리는 포도라니... 신기하다.
9시 38분. 아크로티리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입장료는 12유로. 우리나라의 두, 세 배는 받아가는 듯하다.
아크로티리 유적지. 보존을 위한 조치가 아주 잘 되어 있다.
현재는 육지 안쪽에 있지만 아크로티리 유적지는 산토리니 섬의 남쪽 해안에 위치하던 항구도시였다. 지형 변화에 의해 오른쪽 지도의 색칠한 부분이 당시에는 바다였던 것이다. 에게 해의 복판에 위치한 산토리니는 주변 여러 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하였다.
이 지역의 주거 유적은 신석기부터 나타난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 도시로 성장하였다. 에게 해를 넘어 동부 지중해 전역과 교역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에 다양한 시설이 남아 있으며 상하수도 시설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BC 17세기의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여 붕괴 전보다 더 진보된 도시를 구축하였다. 부유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주거지를 그림 등으로 장식하려 했던 모습이 드러난다. 17세기 말에 닥친 강력한 지진과 화산 폭발에 따른 엄청난 화산재와 부석에 매몰되면서 아크로티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이곳이 다른 화산재에 의해 매몰된 지역과의 차이점은 시신이 발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폼페이 같은 경우에는 갑자기 재앙이 닥치면서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아크로티리 지역의 경우에는 사전에 심각한 전조 증상이 계속되자 주민들이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전에 모두 탈출하였던 때문으로 해석된다.
발굴 작업을 보여주는 사진들. 그리고 발굴된 유물들을 정리하여 박물관에 전시된 과정까지 볼 수 있다.
수천년 간 매몰되어 있던 유적지의 지표가 서서히 침식되면서 유적의 일부가 드러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1967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에서 아서 에번스가 저지른 것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서둘지 않고 서서히 계속되고 있다.
유적지 모형.
천장을 만들어 유적지를 보호하는 한편 관람객들의 편의를 극대화한 야외 유적지라고 보인다. 또한 곳곳에 사진과 그림, 지도를 포함한 설명 자료를 게시하여 관람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 노력한 점도 매우 긍정적으로 판단되었다. 관람 동선도 잘 정비되어 있다. 모범적인 유적지가 아닌가 한다.
계단의 벽을 따라 인체 크기의 벽화로 장식되었던 곳. 복원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봄의 프레스코'화가 발견된 부분.
중앙 부분에서 유적지 일부 구간을 방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 차단하기도 한다. 거꾸로 일까?
도기가 여러 점 발굴된 동부 섹터.
다양한 도기들. 채색이 이루어져 있다.
서부 섹터의 전형적인 가옥인데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였다. 내부에서 화장실도 발견되었다.
벽화의 세세한 묘사와 색채의 사용이 상당히 뛰어나다. 아크로티리가 해안선에 바로 인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의 바닥에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보존될 수 있던 작은 산양 모양의 금 조각상. 아크로티리에서 발굴된 유일한 금붙이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산토리니 선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프레스코화들은 아테네의 국립 고고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미노아 문명의 한 단면을 살펴본 듯 하다.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에서는 궁정의 높은 사람들의 터전, 이곳 아크로티리에서는 일반인들의 삶터를 엿보았다 할 것이다.
11시. 관람을 마치고 나와 인근에 위치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500m? 걸어간다.
해변가 식당에서는 고기가 숯불에 익어가고 있다. 맛있겠다.
해안 가까이에 솟은 산지에 드러난 기반암이 온통 붉은 색이다. 적색사암?
티라 당국에서는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 것을 권한다.
살짝 돌아가면........ 빨갛다. 그래서 '레드 비치'이다.
그 앞에 앉으니 옷도 뻘겋게 변한다.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요트를 장만하여 이런 조용한 바닷가에서 시간을 즐긴다. 부럽다. 많이 부럽다.
뜨거운 햇볕을 계속 받으면서 암석 내부에 있던 물질이...................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돌담이 산지를 가로질러가고 있다. 어떤 기능을 갖고 있을까?
도로 공사를 하면서 드러난 노두. 아크로티리에 재난을 가져왔던 물질들.
11시 35분. 버스에 탑승하여 아크로티리를 떠난다.
11시 54분.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산토리니의 하트'를 방문한다.
이렇게 바다의 모양이 하트가 된다는 것인 줄 알았는데...
화산재 퇴적층이 풍화되면서 형성된 구멍이었다. 촬영자가 예리하게 잘맞추면 어찌 하트 모양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일행 팀의 하트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12시 20분. 버스 출발.
12시 25분. 식당 도착. 근사한 식당이다. Garden Restaurant이다.
식당의 전망도 기가 막히다.
구운 돼지고기를 종이호일에 싸서 접시에 담았다. 육향을 그대로 가져왔다. 맛있다.
식사 후 가이드가 전하길 여기 직원이 드론을 해도 된다 하더라고 하더라. 공항에 가까운 곳이라 안될텐데 왜 해보라고 하는 것이지 하는 의문을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띄워 보았다.
역시나 당장 착륙하라고 하면서, 안하면 99초 내에 강제 착륙시키겠다는 메시지가 조종기 화면에 뜨더라. 좀 황당했다. 역시 그냥 하지 말아야 하는 곳에서는 누가 뭐라 꼬득이더라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
1시 6분. 버스 탑승 후 출발.
1시 21분. 공항 도착.
체크인 후 바로 보안검색대로 갔다. 걸렸다!!! 나오란다!!!
손바닥과 옷, 가방의 안과 밖 몇 곳을 시약이 묻은 검사지로 툭툭 건든다. 그리고 검사기로... 가라고 하더라.
그리스에서 두번 걸렸다. 간이 ETD 검사라는데, 무작위로 실시한다. 그리스 국내선을 세번 이용했는데 두번 걸리니 좀 찜찜하다.
4번 게이트에서 대기하다가 3시에 탑승하였다.
AIRBUS A320-200 비행기. 20E,F 좌석.
3시 25분. 이륙하여 아테네로 쭈욱 날아갔다.
4시. 아테네 공항 착륙.
아테네에 도착해 숙소에서 쉬면 되는 일정만 남았다.
4시 49분. 버스 탑승. 공항 주차장의 차량 정체.
아테네 시내의 도로는 도로는 좁고, 정체도 엄청나다.
5시 47분. 근대 올림픽 경기장 앞을 지난다.
6시. 아크로폴리스 아래 위치한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도 유적지 위에 올라타 있다. 지하실을 발견된 유적 보전 시설로 만든 것이다. 서울시 종로구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생각났다.
2024년이다. 5월달이다. 23일이다. 목요일이다. 산토리니를 가는 날이다!!!!!!!!!!!!!!!!!!!!!!!!
5시 반에 기상하여 6시반에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모두 챙겨 7시 15분에 호텔 로비에 집합하였다.
7시 28분. 항구에 도착하여 하차.
7시 35분. 표를 받았다. 승선한다. 지정좌석제. 109, 110B 좌석에 나란히 앉아 날아간다.
8시. 출항하여 날아간다. 크레타를 두고 달린다.
쾌속선인데 의외로 롤링이 심했다.
서양 젊은이들 참 약하더라. 여기저기서... 음. 승무원이 아예 봉투를 나누어준다. 한 사람이 서너개씩 챙기기도 한다. 이런!
여기저기서 불편한 그것을 하는 소리, 냄새가 진동한다. 승무원이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수거하러 다닌다. 장난아니다. 화장실 앞에는 널부러진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줄을 "서"지 못하고 바닥에 "늘어져" 있다. 이런!
점차 배가 안정되고 사람들도 안정되더라. 나중에 크레타 섬에서 산토리니 섬까지의 항해 궤적을 보니 이렇다.
편서풍이 심해 배가 많이 흔들렸던 것이었고, 북서쪽으로 틀어서 항해하다 북동쪽으로 바람을 타고 항해하면서 배의 흔들림이 줄어들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중간중간 조금씩 끊어지기는 했어도 좌석이 선실 안쪽이었음에도 GPS 궤적을 그래도 잡아냈다. GPS data logger가 이번에도 일을 해주었다.^^;
10시 43분. 산토리니 신항구에 도착하였다. 사람들이 부지런히 하선한다. 하늘 참 파랗다. 바다도 그렇다.
짐을 던져 놓고 터미널의 화장실부터 찾는다. 1인당 1유로를 내라 한다.
산토리니 섬의 생활 터전은 절벽 윗쪽에 주로 위치한다.
해안에서 절벽 위의 도로까지 꼬불꼬불 오르는 버스들이 힘겨워 보인다. 나중에 보니 이러한 경사지의 급회전 구간에는 늦게 진입하는 차가 한참 전에 정차하여 먼저 진입해 회전하는 차량이 쉽게 빠져나가도록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산토리니 신항구에 하선하여 버스로 환승해 '이아 마을'을 먼저 방문하였다. 점심 식사를 하고 마을과 섬, 바다 경관에 빠졌다. 버스로 피로스테파니 마을에 하차하여 피라 마을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산토리니를 즐겼다. 저녁 식사 후에 아크로리티 방면의 숙소로 이동하였다.
산토리니의 4개 마을 중에서 이메로비글리 마을을 빠트렸다. 패키지 여행이라 어쩔 수 없다. 다음 기회에~
티라 섬이라고도 하는 산토리니 섬은 에게 해 남쪽에 자리잡은 작고 둥근 모양의 화산 군도이다. 키클라데스 제도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산토리니는 발칸 반도의 그리스 본토에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BC 16세기를 전후로 발생한 강력한 화산 폭발로 섬의 중간 부분이 사라져 형성된 크레이터이다. 바닷물이 채워지면서 산토리니는 초승달 모양의 섬이 되었고 크레이터의 안쪽에 해당하는 서쪽은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은 경사가 완만하다.
(M. Vespa, et. al., 2006, Interplinian explosive activity of Santorini volcano (Greece) during the past 150,000 years, Journal of Volcanology and Geothermal Research, 153, p.264.)
해저의 지중해 바닥의 모습까지 함께 살펴보면 이런 모양이 된다.
(Nomikou P. & Vouvalidis K. & Pavlidis S., 2019, The Santorini Volcanic complex, Pre-Conference Field Trip Guide of the IAG RCG2019 – Regional Conference of Geomorphology, p.1)
11시 48분. 주차장에 하차하여 이아 마을을 향해 걸어간다.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다.
이아 마을의 좁은 골목이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지구 사람들이 다 여기 모인 것 같다.
이아 마을의 만남의 광장인 파나기아스 아카티스토스 찬송 정교회.
하얀 건물, 파란 하늘, 뜨거운 태양. 지중해다.
지중해의 이아 마을이다.
성모 승천 교회.
또...
이아 마을, 여행자들.
이아 마을은 아르메니 만에 연해 있다.
이아 마을의 만남의 광장인 파나기아스 아카티스토스 찬송 정교회.
피라 마을은 공항에 가까워서 안되고 이아 마을에서는 드론이 가능할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그리스로 날아왔다. 오메~
'드론 금지' 표지판에만 신경쓰고 있었는데 그 위로 "여러분에게는 휴양지이지만, 우리에게는 집이다. 여러분을 환영하지만 우리 이아 주민도 존중해달라."는 애처로운 게시판도 있었다.
검색해보니 이렇게 생긴 것이었다.
1시 식당에 도착하였다. 옥상 자리로 올라간다. 기가 막힌 곳이다. 따봉~!
마시따!
식당 전망. 왼쪽에 보이는 섬이 시키노스 섬, 오른쪽에 보이는 섬이 호라 섬이다. 호라 섬에는 호메로스의 무덤이 있다.
산토리니 여행 사진이라 하면 꼭 등장하는 명소이다. 아기오스 니콜라오스 교회.
하이얀 건물들 사이로 파아란 머리를 가진 교회의 돔형 지붕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ㅠ.ㅠ.... 다음에는 제대로......
예쁜 '이아 마을의 풍차'.
신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마을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화산이 뻥 터져서 살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고 나니 다시 사람들이 찾아들어와 이렇게 삶터를 이루고 있다. 바다에서의 어업, 육지에서는 포도 재배가 유명하다. 화산재가 비옥한 토양이 된다 하니 화산이 터짐으로써 많은 인명 피해가 있겠지만 그 이후에는 또 인류 번영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신항구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쾌속선. 바다가 아주 파아랗다.^^
이아 마을의 풍차를 배경으로...
나도!
이아 마을 남쪽 끄트머리 곶 부분에 '이아 성'이 있다.
4시 20분. 이아 마을을 떠나 피로스테파니 마을로 이동한다. 피라 마을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산토리니를 즐긴다.
4시 50분. 피로스테파니 마을의 아기오스 게라시모스 교회. 이곳에서부터 피라 마을 방면으로 걷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보이는 이메로비글리 마을. 산토리니 섬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360m 정도에 이른다. 마을 앞쪽으로 보이는 톡 튀어나온 바위는 '스카로스 바위'. 화산 분출물인 '스코리아'이다.
화산 위에 달라붙은 마을은 봐도봐도 신기하다.
건물 옥상에 배 한척이 올라와 있다.
크루즈가 입항하고 있다.
피라 마을.
가까이 가보자. 아니 확대해보자. 마을 아래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구항구에서 나귀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이다. 사진 왼쪽으로 살짝 케이블카 시설도 보이기는 한다.
나귀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대단하다.^^
피라 마을의 랜드 마크, 주교좌 대성당.
랜드마크.
산토리니 구항구와 피라 마을을 연결하는 케이블 카.
피라 마을의 꽃길.
피라 마을의 쉬어가는 길.
피라 마을에서 썬탠하는 길.
급경사 아랫쪽에 위치한 가옥은 이렇게 대문만 만든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집은 대문이 이렇게 된다.
걷다가 힘들면 앉으면 된다.
저 뒷쪽 도로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으나 아랫쪽은 좀 한갓지다.
아이 ♥ 싼토리~니.
누구 똥이 굵은가?
6시 반. 피라 마을의 식당에서 식사.
8시 10분. 식사를 마치고 이동한다.
해가 넘어간다. 8시 20분에야 해가 넘어간다.
9시. 숙소의 객실이 '피라 마을 뷰'이다. 피라 마을과 구항구 사이의 케이블카와 계단, 그리고 크루즈 선박의 조명이 멀리 보인다. 나름 야경이라고...
객실에 생수와 함께 와인 한병이 얼음 속에 쉬고 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O^
호텔 길 건너쪽에 작은 키오스크가 있는데 지붕에 "CANDIA"라고 써 있다. 맥주 광고판이다. 그리스는 오랜 기간동안 로마,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칸디아'라는 것도 이탈리아 인들이 크레타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것을 그냥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수백년 지배했던 이들에 대한 심리적인 반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그것 자체가 역사라서 그런 것인지...
숙소가 시내 한복판에 있어 완벽한 '시티뷰' 객실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 옥상에 굴뚝이 많이 보인다. 아직 난로, 화덕 혹은 화로를 사용하는가???
크레타에서 하루를 보내는데 일정은 간단했다. 크레타 문명, 미노스 문명, 미노아 문명의 유적지를 모두 돌아보며 공부하는 것은 짧은 일정으로는 곤란하다.
그래서 대표적인 유적인 크노소스 궁전을 방문하고, 크레타에서 출생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된 니코스 카잔자키스 박물관과 무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미노스, 미노아, 크레타 문명의 정수를 모아놓은 고고학박물관을 방문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크레타 섬의 기반암이 거의 석회암이라 석회동굴도 곳곳에 유명한 곳이 많은데, 한군데도 가보질 못하고 크레타를 떠나야 했다. 오마로스 폴리예 같은 지형도 보질 못했다. 사마리아 협곡 같은 절경 근처에도 가보질 못했다. 그렇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이었다.ㅠ.
크레타는 그리스의 13개 주 가운데 하나이며 가장 큰 섬이다. 지중해 전체에서는 5번째 크다. 고대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시작이 이곳 크레터에서 이루어졌다. 미노스 왕의 궁전이 유명하여 크레타 문명이라는 이름 이외에 미노스 문명 혹은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부른다.
일찍부터 인류의 정착지로서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하여 미노아 시대의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유적, 고르티스 유적, 하니아 항과 베네치와 옛 도시, 레팀노의 베네치아 성과 사마리아 협곡 등 다양한 유적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수백년 간 이 섬은 이탈리아 이름인 '칸디아'로 알려졌는데, 크레타 섬의 수도인 이라클리온의 중세 명칭이 '칸닥스'에서 나온 것이다. 흔히 '크레타'라고 부르는 이름은 고전 라틴어에서 나와 영어권 및 라틴 문화권에서 통용화된 것이다. 튀르키예에서는 '기리트'라고 부르고 있다.
에게 해 일대의 고대 문명들. 육지의 토지가 비옥하지 않아 충분한 식량을 얻기 어려워 일찍부터 해양을 통해 교류하고 교역을 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받아들여 해양 문명을 꽃피웠다. 에게 문명은 전기에는 크레타, 후기에는 미케네 문명으로 나뉘어진다.
BC 30~14세기에 크레타 섬에서 번성하였는데, 동지중해 가운데 위치하여 오리엔트의 앞선 문명, 즉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 서양 최초의 해양 문명을 완성한 것이다. 그렇게 크레타의 청동기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BC 20세기 경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으며, 섬 전체에 지배권을 확대한 미노스 왕이 유명하다. 크노소스 궁전을 비롯한 많은 궁전을 건축하였으나 BC 17세기의 지진으로 대부분 붕괴되었다. 곧 새로운 궁전들을 건축하면서 이후 2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이룬다.
한편 그리스 본토에서는 BC 20~16세기 사이에 북쪽에서 남하한 이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를 잡고 미케네, 티린스, 필로소 등의 소왕국을 형성하였는데 미케네 왕국이 가장 강성하였다. 이들은 서서히 세력을 키워 BC 15 세기에 크레타 섬을 침략하였고, BC 14세기에 크레타 문명은 파괴되고 만다. 그리고 크노소스를 비롯한 각지의 궁전은 모두 약탈 당하고 파괴되었다.
미케네는 크레타 문명을 흡수하여 지중해의 여러 세력을 모아 해상 문명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미케네의 해상 활동을 하고 나선 세력이 트로이였다. 그래서 둘이 한판 붙은 사건이 트로이 전쟁이었다. BC 1193년의 일이었다.
조용한 지중해의 아침이다. 6시 기상, 7시 아침, 9시 출발...
그리스 일정 중 처음으로 같은 호텔에서 연박을 한다. 아침에 부랴부랴 짐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너무 좋다.^^ 이틀 숙박이 이러할진데 1주일, 보름씩 같은 숙소에 지내면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꼬...
그런데 내일은 아침 7시 20분에 짐을 다 챙겨 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여 김을 팍 새게 한다. 아! 쫌!!
9시 20분. 크노소스 궁전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크레타에는 큰 궁전만 네 곳이란다. 그 중의 하나 크노소스만 방문한다.
그리스 유적지의 입장권은 참 그 맛이 없다. 어느 나라든 대부분 유적지 입장권은 그 유적지의 특징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그림 등을 넣고 있다. 헌데 그리스는 QR 코드가 다 이다. 자기들의 업무처리 용도일 뿐 유적지를 비용을 내고 방문해준 관광객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해외 여행을 하면서 입장권을 가능하면 모아오고 있는데 그리스는 의미없다. 에효~
유적지와 궁전의 복원의 4단계? 유적을 여기저기 더 많이 복원하였다는...
크노소스 학술 위원회에서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의 문제점은 초기에 너무 일찍 현대적으로 복원시켜 놓아 원래의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질 못하고 있단다. 그래서 마음놓고 더 '복원'에 매달리는 것인가???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의 서쪽 출입구로 입장하여 한바퀴 돌았다.
9시 30분. 크노소스 궁전 유적이다. 사람들이 아주 많다.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 발굴을 주도한 아서 에번스 경의 동상이 한켠에 있다.
쿨루라(kouloures)는 파이스토스(Phaistos), 크노소스(Knossos), 말리아(Malia)의 미노아 궁전을 포함하여 고대 크레타 섬 내의 특정 정착지에서 발견되는 돌담이 있는 원형 지하 구덩이를 가리킨다.
1903년 크노소스 유적을 발굴하던 아서 에번스 경이 구덩이 모양이 둥근 그리스 빵과 비슷하다며 그 빵의 이름을 유적지에 가져다 붙인 것이다.^^ 도대체 당시에 이런 구덩이를 왜 만들었을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곡물창고의 기능을 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줄지어 크레타의 미노스 문명 속으로 들어가보자.
크노소스 궁전의 북쪽 기단 부분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확인할 수 있는 크노소스 궁전의 예상 복원도이다.
BC 20~17세기 경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미노스 왕의 궁전이다. BC 17세기에 지진 등에 의해 붕괴된 후 BC 15세기 경에 규모를 확장해 이전보다 더 큰 궁전을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이 이 두번째 궁전이다. 동서 170m, 남북 180m 정도의 장방형 구조이며 크레타 문명의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장방형의 중앙 정원을 중심으로 수많은 작은 방들이 둘러싸고 있다. 계단과 회랑이 많은 구조인데 경사지를 활용하여 1,500개가 넘는 방들을 건축하였기에 더욱 건물의 구조는 복잡해졌다. 그래서 '미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많은 방들에는 환기와 채광 시설, 상하수도, 욕조가 딸린 욕실, 수세식 화장실, 베란다, 물저장 탱크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천 년 전에 그러한 시설을 고안하여 설치하고 있었다는 문화 수준이 감탄한다. 궁전의 서쪽은 주로 신전으로 활용되었고, 왕궁의 용도는 동쪽에 집중되었다.
크노소스 궁전의 발굴을 1878년에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한 사업가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체계적인 발굴 작업이 1900년 아서 에번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2년 만에 왕궁의 발굴 작업은 거의 완료되었다. 그런데 발굴하고 보니 땅속에서 드러난 유적지의 유물들이 쉽게 풍화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아서 에번스는 아주 튼튼하게 복원을 했다.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보강한 것이다. 그런데 보강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렇게 생겼었을꺼야 하고 상상하는데로 콘크리트를 칠해버린 것이다. 나중에서야 잘못 해석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이미 콘크리트가 되어 되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ㅠ.
(출처: 유적지 안내판의 설명 자료. 왼쪽 사진이 원래 상태였는데, 콘크리트의 도움으로 오른쪽 모습으로 만들었다.)
콘크리트로 보강하고 나무 구조물인 것 처럼 페인트를 칠하면서 "복원"한 크노소스 궁전. 잘 했어요. 아서 에번스~
그런데 콘크리트 부분이 부식되면서 내부의 보강재인 철근이 드러나는 부분도 있다. 불량 시멘트를 사용했나 보다.ㅠ.ㅠ 석재와 목재로 된 부분이 콘크리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건물이 붕괴될 위험에 있어 서둘러 보강 공사를 해놓기도 했다.
회랑의 서쪽 돌출 현관 일대의 유적이다. 석재를 사용하였기에 벽의 두께가 두껍다. 그러면서도 방 하나 하나의 크기는 작다. 당시의 건축 기술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밖에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지하나 반지하에 수많은 방과 통로를 배치하여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조인 미로(迷路) 혹은 미궁(迷宮: labyrinth)은 이집트 12대 왕조 아메넴헤트 3세가 최초로 건축했다고 한다. 지중해 무역을 하며 이집트의 문물을 전해 받은 미노스 왕은 아테네 출신 다이달로스(Daidalos)에게 궁을 짓도록 했다는데, 당시의 건축 재료와 구조 상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하면.... 신화의 나라 그리스에서 매우 섭섭하다. 하여 역사에 신화가 스며들었다.
미노스 와의 왕비 파시파에가 매우 음탕하여 황소와 관계한 후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낳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추려고 미궁을 짓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하지만 신화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크레타 보다 국력이 약했던 아테네에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인신공양을 하도록 했는데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달아나자 미궁을 만들었던 다이달로스를 미궁에 가두었다. 다이달로스가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날개를 만들어 달고 날아가다가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파생되고, 테세우스가 크레타의 공주인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갈 듯 하다가 낙소스 섬에 두고 귀환하면서 배에 검은 돛을 달아 아버지 Aegeus가 바다에 투신, 그 바다 이름이 에게 해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나이든 테세우스의 아 히톨리포스와 새엄마 파이드라 사이에 그렇고 그런 일이 생겨 이러한 비정상적인 관계를 Paedra Complex라 하게 되었고, 이를 재해석한 그리스 영화 "페드라"가 세계적으로 대박 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죽어도 좋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상영되었다.......음... 머 그렇다.
그렇게 정신이 없던 와중에 또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일이 생겼으니...
공작새 여러 마리가 울어대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들이 미노스 문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크노소스 궁전의 건축 양식 중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둥들의 모양이 일반적으로 보던 것들과 많이 다르다. 위가 굵고 아래가 가늘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크레타 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이 콘크리트 보강을 통한 수천 년 전의 유적 복원이라는 아이디어는 진짜 해도해도 너무했다.
크노소스 궁전에는 멋진 벽화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도 또 유명하다. 벽에 석회 칠을 한 뒤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서 물감이 자연스럽게 벽에 스며들게 하는 기법을 이를 프레스코화(Presco)라고 한다.
프레스코 기법은 이후 널리 유행하여 중세 유럽의 대부분 궁전, 성당의 천정과 벽화가 프레스코화로 제작되었으며, 중국·한국·일본 등 아시아 각국에서 그려진 불교 벽화들도 프레스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궁전에서는 여러가지 저장을 위한 커다란 도자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도공의 작업장도 있다.
중앙 정원에 사람들 다 몰려 있다. 게다가 줄을 서 있다. 왕의 알현실에 왕좌가 남아 있는데 그것을 직접 보기 위해 줄서 있는 것이다.
독특한 양식의 멋진 다양한 프레스코 화들이 궁전의 여러 방벽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스 문명에서는 소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미노타우로스 이야기, 투우하는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 화, 여러 곳에 등장하는 소 머리 상 등... 올림포스 신화 속의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에도 소가 많이 등장한다.
프레스코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누구를 그린 것인지 어떤 직종의 사람들인지 조차 불명확하다. 알려진 개인 초상화도 없다. 그냥 불특정한 상류층 여성을 그린 것이다 하는 정도의 그림. 빠리 스타일의 머리 장식이라고 '르 파리지앵'이라 한다.^^
'황소 뛰어넘기'를 하는 남녀. 왼쪽의 여성은 황소의 두 뿔을 잡고 있다.
프레스코화가 오래 보존되기는 하지만 수천년 전의 것이 현재 보는 것처럼이 색이 뚜렷하지는 않았다. 후대에 대부분 복원된 것이다. 95% 정도가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복원된 것이라..... 그래서 사실 고증에 맞지 않다는 비판도 많다. 아서 에반스가 스위스 예술가 에밀리아 길레론에게 벽화 복원을 맡겼는데, 이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성을 발휘하여 마음대로 뜯어고친 것이 많다고 한다. 원숭이였는데 소년으로 바꾸고, 풍경 속에 사람을 그려넣고 하는 등등...^^;
비바람으로부터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되어 있다. Phase IV??
복잡한 계단을 통해 연결되는 '중앙 법정'.
법정을 통해 여러 방향의 방들로 연결된다. 궁전과는 직통으로 연결되고.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들의 모습은 역시나 위가 굻고 아랫쪽이 가늘다. 독특하다.^^
중앙 법정의 동쪽 건물에는 계단이 많다. 'Grand Staircase'.
'양날 도끼의 성지, Shrine of the Double Axes'.
양날 도끼는 그리스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미노아 문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크레타에서 양날 도끼는 종교적 제의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나비 모양의 도끼는 탄생, 죽음, 재탄생과 연관되는 것으로 여겼다.
크노소스 궁전의 핵심 '왕의 거실, 양날 도끼의 홀'을 구경하려는 인파.
독특한 장식의 도자기들로 채워진 저장고.
왕좌가 있는 알현실을 구경해보려는 인파.
돌로 만든 의자이다. 상당히 불편해 보인다. 양옆으로 역시 돌로 만든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맞은 편에도 돌로 된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위로 뜷려 있어 자연 채광 및 환기가 이루어진다.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소를 숭배하여 많은 유물을 남겼다. 제대로 된 원본 그림은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우리는 사진을 남겼다.
'극장' 자리. 자그마하다.
쭉 뻗은 '로얄 로드'.
크노소스 궁전과 주변 지역의 상상 복원도이다. 궁전에 남아 있는 저장소 등을 토대로 당시 인구를 3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11시 35분. 출구 옆의 화장실로 달린다. 크레타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그런데 화장실은 한 곳이고 시설 규모도 너무 작다. 줄, 특히 여자 화장실의 줄이 어마어마무시무시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가 박물관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버스에 탑승해 달린다. 너무한다! 조르바!!
카잔차키스 무덤의 비석에 "나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저기요~ 우리는 화장실을 원해요. 우리는 무지막지하게 길게 늘어선 화장실 앞의 줄을 두려워해요~ 화장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12시 6분. 그리스가 낳은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동네 건물의 벽에 그의 그림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그의 육필 원고.
두번째 부인. 엘레니 사미우.
서가에 전시된 책들 중에는 한글로 번역된 책들도 있다.
1955년에 함께 사진을 남긴 친구 슈바이처.
슈바이처 사인.
영상실에서 그에 대한 다큐 영화를 감상하였다. 한글 자막 있다.
그의 시절 지도가 보였다. 'Candia'라고 되어 있다.
12시 59분. 니코스 카잔차키스 박물관을 출발하였다.
1시 40분. 바닷가의 시원한 식당 '와인과 바다'에 도착하였다. 식사 이후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딴 도시 이라클리온의 시내 답사를 진행하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2시 53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포츠단지'에 도착했다. 옆길을 통해 동산 위로 걸어 올라간다. 좀 햇살이 뜨겁다.^^
작은 동산 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가 위치한다.
유명한 묘비명 "나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남긴 것이라 한다.
주변을 산책하면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세상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남쪽으로 멀리 크레타에서 가장 높은 산인 프실로리티스 산이 보인다. 그렇다고 하자....
오후 3시. 니코스 카잔차키스 무덤을 떠난다. 햇볕이 참 많이 아주 강렬하게 따숩다. 지중해다.
3시 17분. 버스 하차. 고고학박물관 인근의 카페로 일행을 이끈다. 날이 아무리 더워도 "아!아!"
3시 58분. 고고학박물관으로 재충전된 일행들이 입장하고 있다.^^
입장료는 12유로였었다.
미노스 문명은 도자기 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미노스 문명은 금속 세공 기술이 아주 뛰어났다고 한다. '벌 펜던트'.
'파이스토스 원반'. 찰흙판에 필기도구로 그린 것이 아니라 크레타의 원시 상형문자가 새겨진 도장 같은 도구로 찍어낸 것이라서 일종의 인쇄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쇄물?
소머리 모양의 술잔. 왼쪽 부분은 복원한 것이다.
대지모 여신상과 뱀의 여신상. 뱀은 풍작을 상징하였다.
크레타의 문자...
'라일락의 왕자' 프레스코화.
'파란색 아가씨들'
BC 2세기~2세기 사이의 동전들. 당시 부호의 은닉 재산. 아주 잘 숨겨두어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고고학 박물관 뒷편에도 발굴 작업을 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유적지의 발굴을 피하면서 건축을 하기가 아주 어려운 동네인 크레타.
5시 40분. 사자 광장의 모로지니 분수. 분수대에 사자 장식이 되어 있다. 그래서 사자 광장인 듯하다.
다이달로스 거리. "나는 자유다."^O^
테오토코폴로스 공원에 '엘 그레코'의 동상이 있다. 그런데 낙서 장난이 좀...
엘 그레코는 스페인에서 활동한 그리스 화가이다.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 공원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엘 그레코'는 스페인 말로 '그리스 사람'이란 뜻이란다. 근세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왔다고 하여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고 그냥 그는 '그리스 사람'이었을 뿐이었나 보다.
관청으로 이용되고 있는 '베네치안 로기아'.
성 티투스 정교회 성당.
촛불을 하나 봉헌하는...
정교회 성당은 신자들이 앉는 세상과 신의 세계 사이가 구분되어 있다. 예배가 있을 때만 두 세계 사이의 문이 열린다.
성당 옆의 작은 분수대에서 놀면서 '자유 시간'을 자유롭게 보냈다.
6시 50분. 식당에서 조용히 저녁을 모셨다.
식사 후에 여행사 가이드가 전하더라. 지나던 주민이 식사를 위해 들어오려다 정원에 단체객들이 있는 것을 보고 걱정을 했단다. 다행히 나갈 때까지 단체 여행객들 답지 않게 소란스럽지 않아 그 손님이 만족스러워 했다고 주인이 만족스러워 했다고...우리 일행도 소고기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어 만족스러웠고...^^
길가의 식당들 중 일부에 붙어 있는 마크. 지나는 오토바이에도 이러한 마크가 불터 있는 것들이 보였다. 배달음식 파트너.
8시 20분. 호텔에 도착하여 내일을 준비한다.
내일 아침은 6시 반부터 제공한다고 한다. 7시 20분에 출발한다. 산토리니를 향하여. "하이호! 실버!"
에게 해의 바닷물은 짙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그리고.......... 멀리 북동쪽으로 육지가 흐릿하게 보인다. 튀르키예 땅이다. 로도스 섬은 그리스 본토보다 튀르키예에 훨씬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가 18km 정도 밖에 안된다. 저쪽은 물라 주의 Marmaris 지방이 아닐까...
해변에 나가 아침 햇살을 즐긴다.ㅎㅎ
9시 30분. 린도스를 향해 버스는 출발했다. 린도스를 다녀왔다. 1시간 정도 달리면 된다.
린도스의 아크로폴리스를 방문하고, 로도스 시로 돌아와 고고학박물관을 관람한 후 크레타 섬으로 날아갔다.
10시 13분. 린도스의 아크로폴리스가 멀리 보인다.
지난 해 7월에 로도스에 큰 화재가 발생했었다. 많은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대피하느라 곤혹을 겪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올리브, 소나무, 사이프러스 정도의 나무들이 드믄드믄 자라는 정도인 것 같은데도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다니...
린도스의 아크로폴리스는 들락날락 하던 바닷가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무려 125m 정도.
10시 30분. 하차하여 화장실부터 다들 찾는다. 이 동네도 화장실이 박하다. 없다. 있는 곳도 부족하다.
그리스는 관광지에 화장실 시설을 대폭 확장하라~! 확장하라~!
아크로폴리스 아래의 마을 광장에 있는 게시판에서 지도를 촬영하였다. 아크로폴리스 쪽은 5천 년쯤 역사를 갖는 곳이고 아랫쪽의 하얀색으로 칠해진 마을은 원래 어부들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은 상가로 개변했다.
마을로 들어선다. 정교회 종탑 뒤로 멀리 보이는 성채의 모습이 지퍼의 이빨처럼 보인다.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계단을 찾아 아크로폴리스를 향한다. 길을 잃을 염려는 그냥 놓아두어도 된다.
잘 찾아보면 이렇게 곳곳에 표시판이 되어 있다. 그리고 동네가 작아서 그냥 다니다보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잘못 가서 아니다 싶으면 그냥 되돌아와도 된다. 로도스 섬에 입도한 관광객은 반드시 찾아오는 곳이라서 사람들은 참 많다. 좁은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지나온 마을의 모습은 참 예쁘다.
'현대'라는 시대의 관광지로 변모한 작은 어촌 마을의 어지러운 골목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면 '중세'라는 시대의 성채와 '고대'라는 시대의 유적지로 들어가는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계단을 오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의 언덕 아래로 보이는 린도스 비치의 바닷물 색깔이 영롱하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중세 성벽 입구의 계단.
입장권이 필요한 순간이다.
방어에 최적화된 견고한 성채는 로도스를 점거했던 성 요한 기사단의 작품이다. 옛날 서양 사람들은 모두 건축 기술자였을까? 의료 봉사를 하던 사람들이 군사 조직으로 변모하더니 건축도 잘해?
'린도스 아크로폴리스'를 검색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게 되는 그림이다. 린도스의 복원 상상도. 혹은 상상 복원도. 이런 자료들을 세트로 파일철에 갖고 다니며 보여주며 설명해준다.
성벽의 기초가 된 천연의 바위 아랫 부분에 작품이 남겨져 있다. 고대 그리스의 노잡이 전함 갤리선의 이물 부분이다. 당대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였던 피토크리토스가 BC 180 쯤에 만든 것이라 전한다. 왼쪽의 받침대 위에는 로도스 해군 지휘자였던 하게산드로스 장군의 동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것도 저것도 다 전하기만 한다. 맞나?
이제 돌계단이 제대로 지중해의 강렬한 햇볕에 달구어졌으니 찬찬히 올라간다. 뜨겁다.ㅎㅎ
현대 세계에서 중세를 지나 고대 세계로 들어간다.
네덜란드 팀이 발굴 작업을 했단다. 흙으로 덮여 있던 부분을 파헤쳤단다. 무엇인가 나올 때까지 그냥 팠단다. 그래서 계속 파다보니 자연석인 기반암이 노출되었고, 그때서야 아차싶었을까? 발굴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 대단한 것이 나올 때까지 그냥 판 것이니까. 그래서 원래 어떤 상태였는지를 이제는 알길이 없다. 그냥 이렇게 던져져 있다.
가이드는 그렇게 설명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중세에 성 요한 기사단이 성채를 쌓으며 고대 세계의 구조물을 손대지 않았을까? 성채의 재료로 좀 빼다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며 뜨거운 햇볕 아래 달구어진 뜨거운 돌덩어리 위를 돌아다닌다.
초기 헬레니즘 시대의 성소 모습이다. 지금과 같은 외곽은 성채가 없었던 시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사라진 석재가 어디로 갔을지 상상을 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BC 3세기에 만들어진 도리아식 기둥들로 장식된 유적이 보인다. 린도스 아크로폴리스이다. 파란 하늘이 너무도 시원스럽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 로도스, 그곳에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있다.
이전에 있던 신전이 화재로 파괴된 이후, BC 4세기 쯤 건축되었으며 원래는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도리아식 기둥으로 장식된 80×20m 크기였으며, 전실과 신실, 후실로 구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후실의 기단 부분이며, 서쪽 벽의 많은 부분과 동쪽 벽의 일부이다. 건축 재료로는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암을 사용했다.
(안내판에 게시된 흐린 사진. 이런 사진을 보다 깨끗하게 드론으로 촬영하고 싶었으나 유적지라 드론을 날릴 수 없었다. 주차장 쯤에서는 가능하겠지만, 패키지 여행이라 버스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다시 가야해~~ㅎㅎ)
신전 오른쪽으로는 Psithyros 스토아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그런데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에 왜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아크로폴리스에 자리하게 된 것일까. 린도스는 아테나 여신을 위한 첫번째 성소라고 한다. 아테나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지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재밌다. 그리하여 아테나가 태어났을 때 헬리오스와 로도스 여신 사이에 태어난 남정네들이 아테나를 위한 제물을 바치자 흡족하여 뛰어난 솜씨와 지혜를 선물했고, 제우스는 황금의 비를 뿌렸다. 그리하여 로도스가 풍요롭고 지혜로운 도시가 되었다나... 하여 그리스 전역에서 큰 축제가 열렸는데, 아테나를 수호여신으로 섬기는 아테네에서는 '땅 위의 아테나 축제', 린도스를 중심으로 로도스에서는 '바다 위의 아테나 축제'라고 하였다.
헬리오스와 로도스 사이의 일곱 아들들 중에서 이알리소스, 카메이로스, 린도스의 셋이 로도스를 나누어 관리했고 그들의 이름이 지명으로 섬에 남아 있다. 로도스가 현재는 가장 큰 도시이지만 당시에는 린도스가 중심지였기에 아크로폴리스에 신전을 세운 것이었다. BC 6세기 린도스의 참주였던 클레오불레스가 세웠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7 현인' 중의 한 명이었다고 전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방문하고 신전에 참배했다. 이후 그가 승승장구하자 아테나 여신의 가호 덕분이라 여긴 후계자들이 줄줄이 이곳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아크로폴리스 아래의 예쁜 호수처럼 보이는 작은 만이 사도 바울이 전도를 위해 로도스 섬을 방문했을 때 도착했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헬레니즘 시기의 스토아 유적.
스토아는 원래 신전 아랫쪽에 이렇게 대규모로 조성되었던 것이란다.
현지 가이드가 여러번 언급했다. 영화 "나바론 요새"가 린도스에서 촬영되었다고. 찾아보았다. 특공대의 침투 과정에서 '스토아' 의 70년도 더 이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화질이 않좋아 리마스터 된 UHD 블루레이를 아마존에 주문했다. 다시 확인해보고 싶다.^O^
영화 "나바론 요새"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요새'의 모습이다. 포대를 린도스 아크로폴리스 옆에 그림으로 합성하였다. 마을 부분은 로도스 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덧붙여 합성하고.^^
스토아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창고들의 내부 모습.
날 더울 때 뜨거운 돌덩어리 위로 걸음을 옮기기 힘들다면 당나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고대의 아크로폴리스를 나와 중세 성벽을 지나 현대의 상가가 가득한 마을로 내려간다. 시간여행 쉽다.^^
아크로폴리스를 뒤돌아본다. 멋진 곳이다. 멋진 곳이라 영화의 배경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나바론 요새'도 그렇단다. 찾아보아야겠다.
마을 입구의 광장이다. 차량은 더이상 진입을 하지 못한다. 주차장이 있으나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 그래서 진입했던 차량들이 그대로 회차하여 나가고 있다.
이곳에 모여 있으라고 하더라. 마을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태워주더라. 요금도 내주고. 뭐 이런 여행사가.....^^
땀을 흘리던 일행들이 모두 칭송하더라~~~^^
12시 20분. 주차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버스에 탑승했다. 에어컨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싫다.
1시 17분. 하차하여 로도스 성을 다시 들어간다. 당부아즈 게이트를 다시 들어간다. 반갑구나. 모자를 챙기지 않고 나왔더니 강렬한 햇볕도 반갑구나~~
찾아보니 고전 영화 "나바론 요새"에서 잠깐 당부아즈 게이트가 보였다.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군 차량의 이동 모습. 야간 장면이라 많이 어둡다. 화질이 엉망이다.ㅠ.ㅠ 주문한 블루레이로 다시 보아야겠다...
점심 식사를 하고 고고학박물관을 방문한 후 자유롭게 산책을 하는 시간을 좀 가졌다.
1시 34분. Mezzeluna 식당에 도착하여 지중해의 물고기를 접시 위에서 만났다.
2시 20분. 식사를 마치고 나와 소크라테스 거리를 답사한다.
2시 30분. 어제 그랜드 마스터 궁전을 방문하고 반납했던 표를 다시 나누어 받는다.
로도스 고고학박물관으로 입장한다.
과거에 병원이었던 곳이라는데 대포알을 마당에 쌓아놓고 있다.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병원이었으며 내부에 묘지도 있다.
한가하게 보이는 박물관이다.
유물을 꼼꼼하게 감상하면서 관람한다.
로도스의 비너스로 알려진 '목욕하는 아프로디테' 조각상. BC 3세기 디오달사스의 작품이다.
2시 50분. 1시간의 자유 시간. 히포크라테스 광장이 집결지. 로도스 구시가에서 방황을 자유롭게 시작한다.
파나이아 게이트 부근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 교회' 유적.
여객선 터미널로 가는 길가에 돌고래 몇마리가 뛰어놀고 있다.
부두에 정착한 대형 크루즈 선이 보인다. 크루즈 선 몇 대 들어오면 로도스 섬이 관광객으로 가득찬다고 하더라~~
항구 가운데 위치하여 이름이 '바다 게이트'.
성 바울 게이트.
부둣가의 성벽에는 구멍이 좀 뚫려 있다.
'바다 게이트' 옆에 '퍼블릭 화장실'이 있길래 방문해 보았다. 2명이 이용하면 1유로.
3시 45분 집결지 집합 완료. 4시 23분 공항 도착. 체크인, 보안 검색, 스타벅스 한잔, 12번 게이트. 6시 16분 비행기 탑승.
스카이익스프레스 항공사의 AR 42/72라는 프로펠러 비행기이다. 7C,D 좌석. 로도스 섬에서 크레타 섬으로 날아갔다.
2024년 5월 20일 오후 1시 25분. 보딩. A3 7580편. A320-200 비행기의 21A,B 좌석에 앉아 잠시 졸았는데 데살로니키 공항을 출발하여 하늘을 날고 있더라.
2시 30분. 기내식. 난기류로 인해 기내식 배식이 자꾸 중단, 지체되었다.
3시 10분. 로도스 랜딩. 로도스다. 로도스 섬에 왔다.^O^
3시 32분. 버스에 탑승하였다. 바로 로도스 섬의 로도스에서의 일정을 시작한다. 로도시와 고대 유적은 로도스 섬의 북동쪽 끝부분에 위치한다. 섬 중간에 위치한 공항에서 금방이다. 작은 섬이다.
로도스 섬은 도데카데스 제도의 가장 큰 섬이면서 그리스 섬들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연중 300일 이상 맑은 날씨가 나타나 1년 내내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찾는다. 섬의 크기는 우리나라 제주도의 3/4 정도이다.
로도스에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가 있었다. 항구에 있었다는 전설로 남은 헬리오스 코로스 거상이 그것이다. BC 290년 경부터 10여 년에 걸쳐 제작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진으로 파괴되고 치워져 그만한 크기의 거상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불가사의이다.
4시. 로도스 성에 도착하여 하차하였다. 당부아즈 게이트를 통해 들어간다.
'로도스'를 지중해를 품은 중세 도시라고 이야기한다. 로도스 시 한쪽에 14세기에 성 요한 기사단이 견고하게 쌓은 성곽과 요새가 그대로 남아 있어 중세 도시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로도스 섬'은...
이것이었다. "로도스 島 戰記". 판타지 소설의 시조 근처에 해당하는 작품. 소싯적에 빠져 있었던 작품이 "로도스"라고 하여 그 로도스가 이 로도스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당부아즈 게이트를 통해 입성하여 그랜드 마스터 궁전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거리 저거리를 구경하고 약간의 자유시간을 즐긴 후 예정된 숙소로 향하였다.
성채의 모습과 구시가지가 일목요연하게 표현된 지도가 있어서 가져와 보았다.
요새의 모습만 간략하게 보여주는 지도이다.
로도스 성채의 전체 길이는 4km이고 성벽의 두께가 12m 달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수백년이 지났음에도 옛모습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자연스럽게 성벽이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계선이 되었다. 기사단이 이곳을 지키던 시절에는 성벽을 8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방어를 했다. 기사단이 출신지에 따라 프랑스, 오베르뉴, 프로방스, 아라곤, 카스티야,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 8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주둔하던 위치에 이름이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탈리아 탑, 프랑스 탑, 스페인 탑 등과 같이...
성채에는 해자까지 있어 어떠한 적도 침입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초기 비잔틴 시대에 방어를 위해 만들어졌던 성채를 차지한 성요한 기사단은 자리를 잡기 전에 낡은 성채를 보수하고 강화 및 개조하는 작업을 거쳤다. 1309년부터 1522년까지 성요셉 기사단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성으로 들어간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성이다. 연세가 오래 되시어 아프신 부분이 많다. 깁스.....
빨간 모자를 쓴 시계탑. 랜드마크 중의 하나인 '중세 시계탑'이다.
4시 11분. 왔다. 그랜드 마스터 궁전에...
카스텔로(Kastello) 라고도 불리는 이 궁전은 중세 도시의 가장 높은 지점인 북서쪽에 지어졌으며 그 규모가 도시와 항구를 압도한다. 그것은 요새와 연결되어 도시 방어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 도시가 적에게 침략당할 경우 주민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궁전은 넓은 안뜰(약 50×40m)을 중심으로 설계된 대략 정사각형 건물(80×75m)이다. 초기 비잔틴 요새의 성채 역할을 하기 위해 7세기 말에 지어진 이 성은 비잔틴 시대와 성 요한 기사단 시대 (1309-1522) 기간 내내 성채로 기능을 계속했다. 14세기 초부터 기사단은 비잔틴 성채를 수리하고 이를 그랜드 마스터의 거주지이자 행정 중심지로 활용했다.
정문은 남쪽 정면에 있으며, 그 옆에는 두 개의 인상적인 탑이 있다. 서쪽 정면은 문으로 뚫려 있으며, 그 앞에는 그랜드 마스터 Pierre d'Aubusson(1476-1503)의 작품인 높은 정사각형 탑이 우뚝 솟아 있다. 북쪽에는 창고 역할을 하는 지하 방이 있는데,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주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층에는 정사각형 안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아치형 방들이 배치되었다.
19세기 중반쯤 2층은 완전히 무너졌고, 1937년 복원 작업이 시작될 때까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맞은 편에 위치한 성 요한 교회 지하에 비밀리에 숨겨져 있던 대량의 화약이 폭발하면서 그랜드 마스터 궁전까지 대부분 파괴된 것이다. 화약을 얼마나 많이 숨겨두었길래... 이탈리아가 로도스를 지배하던 시절에 가져갔던 재물 중에 성의 설계도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 지은" 것이다. 2층에는 대의회실 , 식당 등 다양한 공식 방과 마가리타로 알려진 그랜드 마스터의 개인 숙소가 있었다 . 이탈리아 통치 기간 동안 2층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 오른쪽에 예배당이 세워졌는데, 그 안에는 '바리'에 있는 도나텔로의 작품을 복제한 성 니콜라스의 동상이 세워졌었다. 2층의 많은 방에는 후기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닥 모자이크가 놓여 있으며, 대부분은 코스 섬에 있는 건물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영화 "나바론 요새"에서 로도스 성의 그랜드 마스터 궁전의 정문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된 영화의 야간 장면이라 화질이 많이 아쉽다. 그래서 4K UHD 블루레이를 새로 주문했다. 도착하면 다시 감상해보아야겠다.
로도스의 네 곳을 방문할 수 있는 입장권이다. 네 곳 중 두 곳을 방문할 예정이라 버리거나 흘리거나 잊거나 하면 안된다는 주의를 들었다. 한 곳은 오늘, 다른 한 곳은 내일 방문할 예정이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궁전을 나서면서 가이드가 보관하는 것으로 했다. 궁전을 방문했다고 한 쪼가리를 떼어갔다.
그랜드 마스터 궁전은 넓은 안뜰을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건물이 배치되었다.
궁전의 중정. 동상들이 아치형 방에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에 숨어 있는 우리 일행.^^
이탈리아 파쇼 팀이 기가막힌 유적 복원 방법을 사용했다. 다른 곳에 위치한 유적지의 유물을 들어다가 엉뚱한 곳에다가 깔아버린 것이다. 코스 섬에 있는 로마 유적지를 장식하던 모자이크를 뜯어다가 깔았다. 멋지다! 뭇쏠리니!!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창문이 채색 유리가 아니다. 얇은 대리석인데 빛을 투과시키는 것이란다. 알라바스터라고 부른다고 한다네.
'라오콘 군상'이 로도스 섬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로마가 집어갔다.
BC 100년 정도에 로도스 섬의 조각가들인 아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의 합작으로 "라오콘 군상"으로 만들어졌는데 헬레니즘 조각의 최대 걸작으로 불린다. 이 조각상은 네로 황제가 자신의 황금궁전에 진열하려고 로도스 섬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로마의 멸망 후 소실되었다가, 1506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인근 포도밭에서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는 건축가 상갈로의 손을 거쳐 교황 율리오 2세의 컬렉션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기념하여 1506년을 바티칸 미술관의 기원으로 삼았으며, 2006년에 500주년 기념행사를 하기도 했다.
거긴 그렇지만, 원산지에는 모조품만 쓸쓸하게 전시되어 있다.
돛을 이용하기도 하고 노를 저어 움직이기도 했던 갤리선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 사용되었던 "La Capitana"호의 모형이다. 예루살렘에서 로도스로, 다시 크레타를 거쳐 몰타로 후퇴했던 성 요한 기사단도 이러한 형태의 선박을 이용했을 것이다.
성 요한 기사단은 십자군 원정과정에서 조직되었다. 1099년에 성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하는 기사단이 결성되었고 1103년에 교황의 승인을 얻게 된다. 교황의 승인도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이었을 정도로 초기에는 의료 활동을 주로 하였으나 점차 군사 조직화되었다. 1291년 이슬람 군에게 패전하면서 생존자들은 배를 타고 키프러스 섬으로 탈출하였다. 이곳에서 의료 사업에 치중하면서 이슬람 측의 선박을 해적질하는 활동을 하다가 비잔틴 제국의 로도스 섬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근거지로 삼게 된다. 이때 '로도스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북쪽에 위치한 코스 섬과 레고스 섬도 병합하면서 세력 범위를 넓히기도 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대군을 맞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역병이 오스만 군을 물러나게 했다. 이틈을 이용하여 기사단은 요새를 보강하고 강화하여 로도스 성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1522년 슐레이만 대제가 이끌고 온 대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7,000명이 100,000명의 공격을 6개월이나 버텨낸 것이 대단했다. 슐레이만 대제는 생존자의 탈출을 보장하는 댓가로 항복을 허용하였고, 생존자들은 크레타로 이동하였다가 시칠리아를 거쳐 1530년 몰타에 정착하게 된다. '몰타 기사단'이 된 것이었다.
'기사의 거리'를 걷는다. 중세의 도시이다. 당시의 도로 포장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대단하다. 수백년이 지났지만 그대로 사용이 가능하다. 물빠짐을 위해 도로 가운데를 따라 배수로를 만들었다.
건물 옥상의 빗물을 배출시키는 시설.
번화가인 '소크라테스 거리'의 풍경.
중심지인 '히포크라테스 광장'.
에브레온 마르티론 광장.
여러 그루의 벤자민이 이러한 어마어마한 모습을 만들고 있다. 그늘이 좋다.
로도스 섬의 이름은 '장미'에서 온 것이라 한다. 로도스 섬 지도가 그려진 장화 모양의 잔에 담긴 맥주는 참 맛있었다.^^;
식당 아저씨가 '로컬 비어'라고 추천한 것이다. 그런데 두 잔에 19유로를 내놓으라더라. 지도가 그려진 맥주잔을 몰래 가져와버릴 것을....ㅎㅎ
5월 20일은 그동안 일정에서의 다른 날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여정을 시작하는 날이다. 그래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잘 자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새벽에 창밖에서 지속적으로 들리는 소음에 잠을 깼다. 대형 트럭의 경적, 구호, 노래, 함성, 폭죽 소리 등이....아우~~~
호텔 바로 앞의 도로를 점거하고 소란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호텔을 점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새벽 3시 경이었다.ㅠ.ㅠ
대책이 없어 걱정만 하다가 잠들려고 하는데 워낙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검색을 시작했다. 유럽 사람들을 미치게 한다는 그것을 검색했다. 역시나 그랬다. 그리스 데살로니키에 축구 클럽이 둘이 있는데, 둘이 붙어서 데살로니키가 이긴 것이었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7시. 밤은 소란스러웠으나 아침은 조용하였다.
그리스 제2의 도시인 데살로니키는 그리스 '공동 수도'라는 명예 지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데살로니키는 BC 315년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이 그의 부인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BC 168년 마케도니아 왕국이 로마에 의해 멸망하자 데살로니키는 로마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고 1913년까지 2천 년 이상을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에 의해 정복된 이후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발달하였으며 남동부 유럽의 교통 요지가 되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숙소.
데살로니키 시내의 여러 시대 유적을 방문하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로도스 섬으로 날아갔다.
8시 25분. 호텔을 출발하였다. 신트리바니 광장을 지난다. 근사한 탑이 세워져 있다.
작은 오벨리스크와 함께 만들어진 대리석 분수대이다. 1866년에 술탄 하미드가 데살로니키 시에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다.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파손되었던 것을 1977년에 원형대로 다시 만든 것.
그냥 길가. 데살로니키에는 지하 주차장이 한곳도 없다고 한다. 땅을 팔 수가 없단다. 파기만 하면 아무데나 유적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주차 문제가 심각하고 오래된 도시라 도로가 좁아 교통 체증도 심한 도시이다. 유적이 워낙 많아 길가 아무데나 유적이 널브러져(?) 있다.^^
비잔틴 성벽 부근이니 그 관련 시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8시 43분 하차. 데살로니키의 아크로폴리스 아랫쪽을 휘도는 비잔틴 성벽의 일부 구간이 보존되어 있다. 성벽의 '메인 게이트'.
BC 4세기 경에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세워진 성벽이다. 고대 데살로니키 건축 양식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베네치아가 지배하던 시절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투르크 지배 시절에도 성벽 강화 작업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1870년 이후 도시 확장 공사를 하면서 해안쪽을 시작으로 서부와 동부의 성벽의 대부분을 철거하여 일부만 남게 되었다.
메인 게이트에서 '트리고니오우(체인) 타워' 방면으로 가벼운 산책을 한다.
타워 앞의 전망대에서 데살로니키 시가지 전망을 즐길 수 있다. 멀리 원기둥 모양의 '로톤다' 사원이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구별되어 보인다. 에게 해의 일부인 떼르베 만에 데살로니키 항구가 위치한다.
원통형 건물을 저쪽 동네에서는 그냥 '로툰다', '로톤다'라고 부른다. 일반명사이다.^^
트리고니오 타워 입장료가 6유로라고 되어 있는데 문을 열었단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혜초가이드가 입장료를 내버리더라. 할 수 없이 타워를 올라갔다.ㅎㅎㅎ
체인 타워라고도 불린다. 베네치아 인들에 의해 16세기에 원래 있던 성벽을 개조하면서 만든 것이다. 화이트 타워, 바르다리오 타워와 마찬가지로 현재 형태로 완성된 것은 이후 투르크 인들에 의해서 였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도시 전체를 조망하면서 숨막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안내자료에 써 있다.
멀리 아크로폴리스 쪽으로 요새로 사용되었던 '헵타피르기온'이 보인다. 멀리 보인다. 해발고도 400m.
'일곱 탑들의 요새'라는 뜻을 갖고 있는 헵타피르기온이 너무 멀리 보여 드론을 띄워보았다. 트리고니오 타워에서 출발~
헵타피르기온의 모습이다. 외곽의 방어선이 무너졌을 때 도시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한 때 감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조금더 가까이....^^
슈우웅~
현지의 현지인 가이드가 갖고 있던 데살로니키 지도. 그리스 가이드들은 지도를 잘 활용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서점에서 사면 된다는 안내도 받았다.^^
지도를 보면 아크로폴리스와 구도시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비잔틴 성벽'을 잘 확인할 수 있다. 정상부에는 '헵타피르기온'이 위치하고 있다.
트리고니우 타워에서 신시가지와 항구 방면을 조망한다. 그리스 정교회의 '성바울 교회'가 두드러져 보인다.
비잔틴 성벽의 남아 있는 구간.
'일곱 탑들의 요새'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10개의 탑들이 있었으며, 성벽의 길이는 8.7km 정도였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은 2개이다.
"화장실 가실 분~" 하고는 현지 가이드가 사람들을 몰고 간 곳. 그때 그시절의 화장실이다. 구멍을 잘 맞추어야만 했을 것 같다.^^;
비잔틴 성벽의 Anna Palaiologina gate를 지나가 보자. 보행자용 게이트이다.
메인 게이트는 차량용이다.
9시 20분. 버스 탑승. 버스가 달리는 사이에 또 우리 현지 가이드 남 가이드는 쉬지를 않는다. 우릴 쉬게 하지 않는다.^^;
아기오스 디미트리오스 이야기.
2층의 베란다가 건물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북방식 건축 양식의 가옥 이야기. 튀르키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1917년에 있었던 데살로니키의 대화재 이야기.
9시 35분.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성당. 지하에 유적을 품고 있다.
비잔틴 교회 건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5세기 경에 파괴된 폐허 위에 7세기 경에 세워진 교회이다. 1917년 대화재 때 파괴되었다가 1948년에 재개장되었다.
성당 내부.
대화재 사건 이후의 발굴 과정에서 유적이 드러났다. 로마 등 다양한 시기의 유적들을 지하게 품고 있다. 목욕탕 위에 교회, 그 위에 성당이 지어졌던 것.
10시. 로만 아고라, 포럼.
1962년에 버스 정류장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발견된 유적지이다. 2~3세기 경에 완공되었다가 7세기 이후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도시 관련 기록이 새겨진 명문이 발굴되었는데 사도 바울의 전도 관련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유적지의 동쪽에 조폐국, 도서관, 극장, 중앙 광장의 남쪽에는 상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 작업이 완료되지 않았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남동쪽 구석에서 발견된 목욕탕 유적. 전문가들은 이곳이 1세기 경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보고 있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 대리석 계단, 포장 도로, 하수도 파이프, 은화, 다양한 조각상 등이 함께 발굴되었다.
10시 18분. 로톤다. 원통형의 로마 사원이다.
로툰다는 직경 24.5m, 높이는 30m에 이른다. AD 306년에 갈레리우스가 만들었는데, 제우스 혹은 카베이로스의 신전이나 영묘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5세기 경에는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다. 1591년에는 앞에 첨탑을 세우고 모스크로 바뀌었다.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295~305년 사이에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 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0시 33분. 화이트 타워에 두번 째 방문한다.^^
투르크에 의한 학살 현장이었다고 한다. 학살 피해자들의 피가 너무 많이 묻어 '피의 탑'이라 불렸었는데, 흰색 페이트를 칠해 피를 지우고서는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동상을 모시고...
10시 45분. 버스에 탑승하고 공항으로 달린다.
11시 5분. 공항 도착.
바로 체크인을 하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였다. 공항청사의 식당들을 모두 방문하여 비교한 후 가장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식사하였다. 진열대에서 먹고 싶은 품목을 하나씩 골라 담아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5월 19일이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밖으로 나와 메테오라의 위용을 감상한다. 멀리 바위 위로 수도원이 하나 보인다. 니콜라스 수도원이 아닐까 싶다.^^
5월 19일. 칼람바카에서 대 메테오른 수도원을 방문하고 메테오라 수도원이 분포한 지역을 순회하였다. 베르기나 왕릉 박물관을 방문하고 데살로니키로 향했다.
드론을 날려보았다. 멀리 핀두스 산맥 방향. 새벽이라 공기가 안정되어 구름층이 좌악~
메테오라 방향. 구름이 많이 덮여 있다.
7시반. 조용한 시골 마을.^^
퇴적암이 기반암이라 타포니가 쉽게 형성될 수 있었나보다.
작은 봉우리 위로 성 니콜라스 수도원의 꼭데기만 살짝 보이고 있다...
바위 뒷편으로 드론이 들어가면 신호가 끊겼다며 자꾸 숙소 방향으로 되돌아 온다. RTH 기능이 아주 잘 작동하더라.^^
바위 봉우리 위로 넘어가면 될 것 아니냐? 안되더라! EU 국가들에서 DJI의 미니 PRO 드론들은 고도제한을 시켜버렸다. 120m위로 1m도 더 높게 날리질 못한다. EU의 요구로 DJI가 그렇게 제한을 걸어버렸다는...
8시 52분. 출발하였다. 대 메테오론 수도원 내부를 방문하였다. 다른 수도원들은 두 곳의 전망대에 정차하여 '전망'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6개의 주요 수도원들의 내부 개방 요일과 시간이 서로 달라 하루에 모두 방문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하더라. 며칠 묵으며 천천히 천천히 즐겨야 하는 곳으로 보인다. 다시 가보고 싶으다.
급경사의 바위산 위에 위치한 수도원들로 유명한 메테오라 지역의 멋진 경관과 역사, 문화를 만나보는 날이었다. 날아랏! 끼얏호~!
완전 초보 드론 조종자라 원하는 영상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왜 옆으로만 왔다갔다 했을까?ㅎㅎㅎ 위로도 좀 올라갈 수 있었는데... 그냥 눈앞에 보이는 신기한 경관이 넋이 빠졌었던 모양이다. 다시 가야할 이유이다.^^
8시 56분. 바위산 일대에 구름이 낮게 깔려 있다.
'메테오르'의 복수형이 '메테오라'이다. 메테오르는 "유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형용사로 "공중에 뜬"이란 의미도 있다. 그래서 '메테오라 수도원'은 "공중 수도원"인 것이다. 바위산을 형성하고 있는 지형은 퇴적암으로서 역암, 사암이 주로 나타난다. '아토스 성산 자치구' 처럼 수도사들이 바위산의 '타포니' 구멍의 기도처과 꼭대기의 수도원에 모여들었다. 11세기 즈음부터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동굴 수도 생활을 하다가 수도자들이 많아지면서 수도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4세기 수도원도 남아 있는데, 24개까지 이르렀던 수도원의 숫자가 지진 및 노후화, 투르크 및 독일과의 전쟁 과정 등에서 파괴되어 6개만 남아 복원되어 있다. 기도원 이외의 동굴 수도처는 30여 군데에 이른다. 수도원 일대를 연결하는 도로는 1960년대 이후에 건설되었다. 수도원을 오르내리는데 필요한 다리와 계단이 1920년대에야 설치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암벽을 직접 오르거나 사다리, 두레박 등을 이용했었다고 한다.
애정하는 영화 "007 For Your Eyes Only"에서 두레박에 사람 3명이 타고 올라가는 장면이 묘사된 적이 있다.
이러한 바위 틈새도 기도처로 이용되었다.
9시 8분. 바위 위에 위치한 '니콜라스 수도원'이 보인다. 숙소에서 멀리 보였던 수도원이다.
과거의 수도사들은 이곳을 기도처로 삼았는데,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더라. 암벽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멀리 '바를람 수도원'이 올려다 보인다. 수도원이 위치한 바위산과 인접 바위산들 사이에 퇴적층의 층리가 잘 구별된다.
'바를람 수도원'이 길 옆으로 보인다. 도로와 수도원 사이에는 깊은 절벽이...
대 메테오론 수도원과 바를람 수도원 사이로 루사노 수도원이 멀리 보인다. 퇴적암의 층리와 지면과 수평을 이루지 않고 약 3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참고: Anne Ewing Rassios 외 5인, 2020, Meteora: a Billion Years of Geological History in Greece to Create a World Heritage Site, Geoheritage, 12:83, 7쪽.)
9시25분. '대 메테오론 수도원'에 도착하였다.
절벽을 내려가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른 다음 동굴 통로를 통해 올라가면 된다. 그리고 또 계단이 계속 된다.
케이블카를 통해 물자를 보급받는다. 현대화되었다.^^;
'화요일' 방문은 안되요. 복장 조건을 지켜주세요.
역암과 사암으로 구성된 퇴적암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방문자가 많아 계단이 정체되었다. 뒤돌아보니 바를람 수도원의 장관이 멋지게 눈에 든다.
입장권을 챙겼으니 입장을 할 수 있다. 입장을 해보자.
수도원 내부 모습.
부엌의 모습.
화덕.
성화.
또 멋진 바를람 수도원의 모습이다.ㅎㅎㅎ
바를람 수도원은 메테오라에서 두번째로 큰 수도원으로, 1541~1542년에 세워졌다. 은둔자 바를람에 의해 세워졌으며, 세 명의 주교를 기리는 돔으로 된 십자형의 교회가 있으며, 유명한 성화가인 프랑고스 카텔라노스가 1548년에 그린 성화가 장식되어 있다. 교회 북쪽의 1627년에 세워진 식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목조 십자가와 성골함, 성화 등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를람 수도원과 함께 사진 하나...
카스트라키 마을 방면의 전망. 멋지다. 시원하다. 조그맣게 지난 밤 묵었던 숙소도 보인다.
수도원에 있는 교회 건물이다. 돔형의 지붕 높이가 24m.
대 메테오론 수도원을 나서는데 또 멀리 바를람 수도원이 보인다. 아무래도 꼭 방문해보아야 할 것만 같다.^^;
대 메테오론 수도원을 뒤돌아본다. 또 돌아본다. 아쉽다.
대 메테오론 수도원은 메테오라의 첫 수도원으로, 1382년 이전부터 아타나시오스에 의해 건립되기 시작하여 수도사 요하사프에 의해 완공되었다. 대 메테오론 수도원은 카스트라키 마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가장 해발 고도가 높으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래되었다. 14세기 중반에 세워진 24m 높이의 둥근 천정을 가진 교회가 내부에 위치한다. 그리스도의 일생을 묘사한 프레스코 화가 유명하다. 본당 맞은편에는 이곳에서 사망한 수도사들의 해골과 뼈가 보존된 방이 있다. 16세기 식당으로 사용되었던 돔 건물은 오늘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상과 필사본, 판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오래전 직장생활을 함께 하며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을 만났다. 둘이 함께 여행하고 있다더라. 세상 참....ㅎㅎ
11시 7분. 버스 탑승.
11시 15분. 창밖으로 루사노 수도원의 모습이 예쁘게 보인다.
수녀와 개종한 성 바바라를 기리기 위해 14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이다. 1545년 경에 이오안니나에서 온 두 수도사 요하사프와 막시모스에 의해 확장되었다. 계곡 아래의 경관이 기가막힌 곳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 대한 포스터나 가이드북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11시 16분. 메테오라 뷰포인트에 하차하였다.
멀리 협곡의 왼쪽에 대 메테오론 수도원, 오른쪽으로 바를람 수도원이 보인다. 가까이 위치한 수도원은 루사노 수도원이다.
경관이 멋진 전망대에 왔으니 인증 사진을 만들었다.
멀리 황폐화되어 파손된 수도원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드론을 날릴까 띄울까 고민을 하는 사이에 출발한다고 버스 타라 하더라잉~
카트라스키 마을 방향으로 거대한 암괴가 가로막고 있다.
11시 30분. 메테오라 전망대를 지나쳐 '성 삼위일체 수도원' 주변의 도로가에 정차.
조 멀리 '아기오스 스테파노스 수도원'이 보인다. 메테오라 수도원들 중에서 도로에서의 접근성이 가장 좋은 곳이다. 그래서 옛날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에서 걷는 것을 불편해하는 출연자도 내부 방문에 성공한 곳으로 유명하다.^^
멀리 핀두스 산맥을 따라 흐르는 '피네이오스 강'이 보인다.
성 스테파노 수도원과 반대로 접근성이 가장 떨어지는, 방문하기 위한 난이도가 가장 높은 '성 삼위일체 수도원'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멋진 곳이다. 그래서 영화 "7인의 독수리",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007 For Your Eyes Only"의 한 장면. 암벽을 맨손으로 기어 오른다는 기가막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역시 제임스 본드이다. 물론 실제 암벽타는 장면은 다른 곳에서 촬영했다. 역시 007이다.^^
메테오라에 왔다으아~~~~~!!
아무래도 이렇게 그냥 갈 수는 없겠다 싶었다. 부지런히 드론을 꺼내어 띄운다.
수도원 가까이 날아가지 않으면서 수도원의 모습을 담아본다.
수도원 뒷쪽으로 보이는 칼람바카 마을의 건물들 지붕이 모두 같은 색깔이라는 것이 재밌다. 적색 사암이 일반적인 지역이라 그것으로 기와를 만들었고, 모두들 기와를 지붕재료로 이용하니 같은 색이 나온다.
사진 파일을 100% 확대해보았다. 넙데데한 봉우리의 윗부분을 여기저기 평탄화 작업하여 수도원의 각종 건물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물자를 바구니로 끌어올렸던 설비가 있는 건물도 바로 앞에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본 수도원의 모습.
역시나 다른 멤버들은 먼저 버스에 탑승했다. 서둘러 착륙시키고 따라 탑승하며 "죄송합니다~ㅠ.ㅠ"
한바퀴 돌리고 다양한 마스터 샷을 시도해보았어야 하는데 너무 아쉽다. 아무래도 다시 가보아야만 할 것 같다.ㅎㅎ
11시 50분. 출발.
암벽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 있다. 바위 표면에 색이 변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인기 등반 코스인 것 같다.
12시 6분. 식당 도착. 어제 저녁 식사를 했던 식당의 길 건너에 위치한다.
메인 메뉴는 예미스타.
1시 9분. 점심 식사 시간이 1시간 씩 걸린다. 베르기나로 달린다.
'베르기나'의 옛 이름이 '아이가이'였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였다. 천 개 이상의 고분들이 있으나 석실 고분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도굴되어 남은 것이 별로 없단다.
2시 30분. 도로가의 주차장에 잠시 쉬어간다. 간이 화장실만 있고 다른 시설은 없다.
2시 53분. 도로 주변에 보인 대규모 태양광 발전 시설. 햇볕이 강한 동네.
2시 58분. 멀리 보이던 아기오스 디미트리오스 발전소.
그리스도 배산임수 입지? 평야의 농경지를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마을이 산밑에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하더라.
아이가이 왕릉군 박물관만 방문하고 나왔다. 부근에 왕궁도 있다는데......
3시 42분. 아이가이 왕릉군 박물관에 도착. 입장권에 '헬리닉 헤리티지"라고 나온다. 마케도니아의 유적이니 헬레니즘이 맞을 것이다.
13m 정도 높이의 언덕이었다. 그래서 고분인 줄 몰라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BC 7~4세기 동안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던 곳이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로마에 점령당하면서 서서히 잊혀진 곳이 되었다. 1977년 유적이 발굴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양한 높은 수준의 유물들을 통해 당시 번영했던 마케도니아의 문화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곳이다.
구멍이 둘 뚫려 있다. 한쪽은 입구, 다른 쪽은 출구.
고분 발굴하던 모습을 남겨놓았다.
거대한 벽화.
엄청난 금. 세공 수준이 기가 막히다.
묘실.
조각품의 수준도 높다.
5시. 버스에 탑승하여 데살로니키로 달린다.
5시 40분. 도로 주변에 논이 보인다. 벼농사를 꽤 한다고 한다.
6시 30분. 오래된 도시 데살로니키 시대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도로가 좁은데 일부 도로 구간에 통제까지 이루어지면서 체증을 경험하고 있다. 창밖으로 '갈레리우스 개선문'이 보인다. 저멀리 둥근 건물은 '로톤다'라고 하는 로마 시대의 사원이다.
그리스 제2의 도시인 데살로니키는 BC 4세기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이 건설한 이후, 로마, 비잔틴 제국이 서로 차지했던 도시였기 때문에 수많은 문명이 거쳐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레프코스 피르고스는 요새, 감옥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박물관이자 랜드마크가 되었다. 해안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과 그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2024년 5월 18일 토요일에 아라호바의 숙소에서 출발하여 델포이를 향했다. 박물관과 유적지를 방문한 후 동쪽으로 달려 아라호바 전망대를 지나 한적한 교외 식당에서 맛있는 수플레 요리로 점심 식사를 했다.
겨울철 스키장으로 유명한 작은 산골 마을 아라호바를 걸어서 이골목 저골목 다녀보다 모여서 버스 탑승. 델포이를 지나 칼람바카로 항했다. 어제 지나온 것까지 포함하면 델포이를 세번 방문한 것이 된다.ㅎㅎㅎ
델포이 쪽 골짜기. 골짜기 아랫쪽에 올리브 나무로 가득한 흐리사 평야가 펼쳐진다. 햇볕을 받는 골짜기의 북쪽 사면에도 올리브 나무가 가득하다.
길가에 흔하게 보이는 노란색 꽃이 아네몰리아 호텔 주변의 산지 경사면에 한껏 피어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Sparto라고 부르고, 우리나라에서는 '암골담초'라고 하는 것 같았다.
9시 출발 예정이라 했다. 다들 일찍 나와 짐을 싣고는 8시 46분에 출발하였다. 넘 부지런하다. 늦는 사람이 있어 방에 전화하여 뭐하냐 하는 등의 안부를 묻는 감성이 없다.ㅎㅎ
델포이 유적지, 이동 경로.
9시 6분에 박물관 도착. 박물관 외부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바로 안으로 들어간다.
그냥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매표하여 표를 확인받으며 들어간다. QR 코드 리더기를 통하면 된다. 그런데 요금이 왜 0으로 되어 있지???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아폴로 신전을 중심으로 한 유적지의 복원도이다. 머리카락 보인다~~
올림피아와 함께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성지였던 델포이는 태양신 아폴론의 신전 유적이 있는 작은 도시이다.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70km 떨어진 포키스의 깊은 산속에 있다.
신화에 의하면 이 지역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딸 테미스가 지배하고 커다란 뱀의 모습을 한 파이톤이 지키는 성스런 땅이었다. 아폴론이 파이톤을 퇴치하고 델포이 땅과 예언의 힘을 차지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르나소스 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믿었고,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 배꼽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폴론 신전에 Omphalos('배꼽'이라는 의미)라는 대리석 덩어리를 놓아두게 된 것이다. 원래는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토해냈던 '성스러운 돌'이 옴팔로스였다. 제우스와 아버지 크로노스와 어머니 레아와의 사이에 돌덩어리가 끼인 사정은 신화 참조...ㅎㅎ
아폴론 신전 아랫쪽에 '옴팔로스' 모형이 놓여 있다.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 중의 하나인 여성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도리아식 주두 장식을 한 기둥 위에 서 있다. 낙소스의 스핑크스이다.
BC 560년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낙소스 섬의 부유한 주민들이 델포이 성역의 아폴로 신전에 봉헌한 것이라 한다. 낙소스 섬은 디오니소스 신앙의 중심지였다.
카이아티드. 돌기둥으로 사용된 여인상이다. 시프노스 보고를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고스 형제, 클레오비스와 비톤. '쿠로이'라고도 하는데, 소년들이라는 뜻이다. BC 590년 경 작품으로 근육질 체형을 표현했지만 인체 조각 수준이 낮고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악보라고 한다. 이 악보에 의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현지 가이드와 현지인 가이드. 많은 나라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단체로 입장할 때 '현지인' 가이드 동반을 필수적으로 하는 있는 경우가 많다. 고용 효과 만점이다. "법"이 그렇다고 하니 뭐라 할 방법이 없다.
아폴론 신전 북동쪽에서 발견된 옴팔로스. 파손된 부분을 살짝 복원하였다. 원래의 진품은 아니다. 헬레니즘 시기 혹은 로마 시기의 복제품으로 추정된다. 표면의 장식은 성스러운 물건을 묶은 밧줄을 표현한 것이다.
BC 3세기 경에 세작된 미소 소녀상. '웃는 소녀상'. Marble statue of a smiling girl. 몸체와 머리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접합한 것이다.
기간토마키아를 묘사한 부조. 왼쪽이 올림푸스 팀, 오른쪽은 자이언트 팀.
안티노오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청년.
나일강에 익사한 후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영웅이 되고 제국 동부 지역에서 반신으로 숭배되었다. BC 5~4세기의 전통을 따른 조각이지만 원형의 내적 활력은 부족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폴론 신전을 중심으로 한 유적지의 복원 모형이다. 박물관 전시물 중 하나.
상상도로 그리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독점 상점들이 입점한 스토아를 지나 성소에 입장하면 보물창고가 있다.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추첨으로 순서를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순서를 무시할 수 있는 위력이 있었으니 바로 金力이라... 많은 봉헌물을 바친 도시국가의 시민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그러하니 보물창고는 항상 가득찰 수 밖에...
델포이 유적을 감싸고 있는 절벽을 '파이드리아데스'라고 하는데, "빛나는 절벽"이라는 뜻이다. 절벽 사이에 자리잡은 아폴론 신전은 남쪽의 햇볕을 가장 잘 받는 곳이다. 유적지의 가장 높은 곳에는 경기장이 있는데, 4년마다 이곳에서 피티안 제전이 열렸고 운동경기 외에도 음악, 시, 연극 등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축제였다고 한다. 올림픽 경기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알려진 월계관은 이 피티안 경기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던 것이었다.
유적지 동쪽의 '플레부코스'(불타는 바위) 아래 위치한 김나지움이 보인다. 김나지움의 오른쪽으로 '아테나 프로나이아 신전'이 살짝쿵 보이고 있다. 이번엔 현지 가이드가 이곳은 소개해주지 않았다.
도로변에 작은 주차장도 있어서 멈출 수 있었는데... 쏠로스가 세 개가 있고 그 세곳의 쏠로스를 모두 보게 된다며 일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곳 아테나 프로나이아 신전에도 쏠로스가 있다. 사진에서도 쏠로스의 남아 있는 세 개의 기둥이 보인다. 이곳을 왜 뺐을까 궁금하다. 다음엔 소개해줄까나?
로만 아고라.
아르기아 인의 봉헌물.
타란티니안 봉헌물.
시프노스 인의 보물창고 유적.
이렇게 생겼었을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카이아티드로 입구가 장식되었었다.
아테네의 보물창고. 복원한 건물이기에 멀쩡해 보인다.
기단에 새겨진 글을 살펴보았더니 BC 478년 페르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 인들이 전리품을 보관하기 위해 세웠다고 되어 있다.
아테네 스토아.
아폴론 신전의 유적.
아폴론 신전은 BC 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BC 6세기에 지어졌던 원래의 신전 유적 바로 위에 세워졌다. 화재를 겪으며 붕괴된 신전을 재건했는데 지진으로 다시 붕괴되었다.
신전은 도리아 양식으로 건축되어 전실, 후실, 신실 3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신전 안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높이 19.5m, 총 120개의 원기둥이 두 줄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현재는 6개의 기둥만이 남아있는 정도이다. 이곳에서 유명한 델포이 신탁이 이루어졌다.
델포이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이 신탁의 ‘영험함’ 때문이다. 이곳 아폴론 신전의 신탁이 다른 어떤 신탁보다 영험했기 때문에 그리스는 물론 주변국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신탁을 받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먼저 성역에 들어가기 전, 카스텔리아 샘에서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했다. 그다음 일종의 세금인 패리노스를 지불하고 양 같은 희생 제물을 바친 뒤 신탁을 통한 예언을 받고 싶은 사항을 석판 따위에 적어서 신관에게 건넸다. 아폴론 신의 여사제인 피티아는 신실 안에서 신탁의 결과를 말하고 신실 밖의 신관이 이를 받아 적은 후 의뢰자에게 건넸다. 전성기의 델포이 신탁은 군대의 파견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델포이 성역에는 세계 각국에서 헌납한 건축물과 각종 기념비들이 즐비했다.
키오스의 제단.
BC 5세기에 Chiots 사람들이 만든 제단으로 아폴론 신전의 동쪽 전면에 위치한다. 제단의 기저에 그리스의 다른 국가들보다 우선적으로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 promanteia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제단 옆에 부러진 청동 기둥이 서있다. 세마리의 뱀 머리 위에 '삼발이 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파손되어 반토막난 기둥 아랫 부분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것도 가짜라고 한다.
진짜는 투르크 제국에서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2008년 1월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 본 기억이 난다. 성소피아 박물관 앞의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신전의 윗쪽에는 고대 원형 극장이 남아 있다. 재밌는 곳이다.
원형 극장 앞쪽에서 팔을 벌리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관리자가 금지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찍어달라고 하여 해주었다가 잠시 곤혹을 겪었다. 쫓아와서는 그런 사진은 지우라고 요구하는 재밌는 곳이다. 왜?
델포이 신전은 약 300년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지진으로 일부 성역이 파괴되어 BC 362년 마지막 신탁을 끝으로 전성기가 막을 내렸다. BC 191년에 로마에 정복당한 이후 수많은 유물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델포이 신전은 종교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는데,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쇄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며 매몰되어 잊혀졌다. 1892년 프랑스 고고학 팀이 델포이 유적지임을 밝혀내고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1시 59분. 도로 변을 따라 달리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울트라 마라톤이 진행 중이었다고 하더라.
12시 9분. 아라호바 마을이 잘 보이는 곳이다. 잠시 멈추어 인증을 해야 한다.
인증을 해본다. 드론아~
#아라호바 글자를 가운데 두고 인증을...... 아저씨!!! 쫌!!!
마라톤이라고 하는 것이 꼭 계속 힘들게 뛰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담소를 나누는 시간도 필요하다.
12시 19분. 식당 Aggelos taverna.
1시 10분. 점심 식사후 아라호바에서 자유시간을 즐긴다.
먼 옛날에 방영되었던 "태양의 후예"라는 작품에서 두 주인공이 키스를 나눈 곳이라는 아라호바의 작은 시계탑을 배경으로 남겨본다.
해당 드라마 배경이 되었던 시계탑이 하나 더 있다.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교회이다.
교회 내부를 방문해보았다.
하늘이 심상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경험하는 황사와 유사하다.
황사는 서쪽에서 오는데, 그리스는 남쪽에서 온다. 아프리카에서 온다. 사하라의 선물이다.^^
남쪽으로부터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황사' 비슷한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오메~~~
2시에 아라호바를 출발하여 칼람바카를 향한다.
흐리사 평야를 다시 만났다. 올리브 나무의 세상.
칼리드로모 산지를 넘으니 평야가 나타난다. '테르모필레'라는 작은 도시가 나타났다. 영화 '300'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곳이다. 페르시아 군과 스파르타의 결사대가 맞붙은 곳이었다. 페르시아 군을 완전히 격퇴하지는 못했지만 스파르타 군의 희생이 그리스 다른 도시국가들의 항전 의지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에는 해안에 인접하였었는데 빠른 속도로 퇴적 작용이 이루어져 해안선이 점차 후퇴하였다.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으며, 온천으로 유명하다.
3시 40분.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간다. 음료수 자판기를 시험 작동해본 곳이다.
테살리아 평야 지대에 진입하였다.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5시 27분. 핀두스 산맥을 따라 깔린 구름대가 근사하다.
5시 38분. 숙소에 도착했다. 세상에나. 기가 막힌 위치이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던지자 마자 뛰쳐 나왔다.
드론이 날았다.
바위 위에 어떤 시설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하나인 성 니콜라스 수도원이다.
메테오라 일대는 6천만 년 전 해저에서 형성된 퇴적층이 사암, 역암으로 구성된 퇴적암이 되었는데, 육지화 된 이후에 비바람에 깎이면서 독특한 바위산을 형성하였다. 테살리아 평야의 북서쪽에서 핀두소 산맥 부근의 계곡 한가운데 바위산들이 솟아있어 독특한 경관으로 눈에 띤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위에 자리잡은 수도원은 거의 접근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이다.
14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메테오라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점차 숫자가 증가하였다. 200여 년이 지나자 마치 새둥지 같은 수도원이 20여 곳에 달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서도 원시적인 밧줄이나 밧줄을 엮은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힘겹게 수도원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러한 지형은 온나라를 휩쓸고 다니며 방화와 약탈을 일삼던 도적이나 군인들의 침입을 막아주었을 뿐 아니라 종교와 정신적 수양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16세기 이후 많은 수도원들이 버려지고 방치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수도원이 관광명소가 되면서 이전과 같은 고적함과 명상적 평온함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수도원의 규율은 지금도 엄격하게 준수되고 있다. 관광객이 방문할 때 민소매 티셔츠나 짧은 바지, 치마를 입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바위산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역암이 풍화되면서 형성된 '타포니' 지형이다. 이 구멍들이 수도사들의 은둔 기도처로 많이 이용되었다.
Meteora Hotel At Kastraki. 멋진 곳에 위치한 깔끔한 호텔이었다.
6시 40분. 저녁 식사를 하자. 메테오론 파노라마 식당. 50유로 짜리 와인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