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정 원림은 철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사애 민주현이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전통적 정원형식의 원림을 조성한 곳으로 국가유산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2025년 3월 19일 오후 1시. 물염정을 방문하였다.
창랑천의 화순적벽을 찾아왔다. 물염적벽을 찾아왔다.
물염정은 화순적벽 중 하나인 물염적벽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 물염 송정순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정자이다.
물염정전승비 등 많은 비석들이 주변에 세워져 있다.
명승 화순적벽과 물염정.
김삿갓도 찾았던 곳이라고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3월19일 오후 3시. 송석정에 도착했다.
송석정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송석정은 학포 양팽손의 증손자인 양인용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613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주변의 뛰어난 경치와 어우러진 곳이라 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가면서 150여 개의 시액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30개의 시액만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의 글로 알려진 "송석정" 편액도 있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팔작지붕 정자이며, 정중앙에 1간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이 지역 정자 건축의 규범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어서 역사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3월 19일 오후 3시 30분. 연주산 아래를 흐르는 지석천을 건너는 능주역 부근의 철교 옆에 위치한 영벽정을 찾아왔다.
映碧亭은 지석천의 맑은 물에 투영된 연주산의 경치를 운치있게 바라볼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25년 3월 19일. 규봉암, 화순적벽, 연둔리 숲정이 등을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구경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1시. 무등산 자락에 들어앉은 아름다운 '도원명품마을'을 방문하였다.
도원마을은 안양산과 무등산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데, 멀리 보이는 규봉암을 조망해볼 수 있는 곳이다.
규봉암은 무등산 입석대 아래 남동쪽 1.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석대, 설법대, 은신대, 송하대 등 여러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어 신비로운 경관을 뽐내는 곳이다. 화순군이 자랑하는 "화순8경" 중에 제6경이 규봉암이다.
약 8,7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멋진주상절리지형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인데, 무릎이 흔들려 해발 900m를 오르지 못하고 멀리서 사진 확대만 하고 있다.ㅠ.ㅠ
멋진 산을 올라 기가막힌 경관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종만 치며 돌아섰다.
11시 30분. "화순8경" 중의 제1경인화순적벽에 도착하였다.
무등산권 지오파크에 속한 곳이다.
그런데, 문을 닫았다. 차량 뿐 아니라 도로로 들어가볼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숨겨진 곳이 궁금하다.^^
남해로 흘러드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보성강으로 흘러드는 동복천의 상류, 이 동네에서는 창랑천이라고도 부르는 곳에는 곡류하면서 흐르는 하천의 공격사면에 해당하는 쪽에 높고 가파는 절벽이 여럿 나타난다.
옹성산 서쪽으로 가장 규모가 큰 장항적벽(노루목적벽이라고 불린다.), 망향정 서쪽 아래의 보산적벽, 창랑천 변의 창랑적벽, 물염정 맞은 편의 물염적벽이 네 곳이 유명하다.
화순적벽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동복천 상류의 약 7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화순적벽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이는 신재 최산두(1483∼1536).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돼 동복으로 유배를 왔던 그는, 화순적벽의 풍광이 “중국 양쯔강(楊子江)의 적벽에 버금가는 천하절경”이라고 감탄했다.
화순적벽 풍광이 아무리 좋아도 사화에 분통이 터진 그는 술로 소일하는 날이 많았다. 술은 근심을 잊게 해주는 ‘망우물(忘憂物)’이라 했던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좋았던 그는 만취하면 운명의 역린을 배설하듯 시를 읊었다.
화순적벽 건너편엔 ‘물염정’이란 정자가 있다. 물염정은, 물염공 송정순(1521~1584)이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고 티끌 없이 살겠다(勿染)”라며 지은 띠집이 나중에 정자가 된 곳이다. 이 물염정에 최산두가 남긴 시 두 줄이 또 하나의 적벽처럼 남아 있다.
아프고 슬픈 사연의 이력으로 치면 화순적벽을 품은 동복천도 비할 데가 드물다. 동복천은 백아산에서 물길을 일으켜 세운 창랑천과 무등산 동쪽에서 발원한 영신천이 만나 한 내를 이뤘다. 수량이 맑고 풍부한 동복천은 사람들은 ‘달천’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적벽을 휘감고 흐른다 하여 ‘적벽강’이라고도 불렀다. 유려한 물의 흐름이 어찌나 좋았던지 1982년에는 ‘전남지방문화재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역설적으로 더없이 맑고 깨끗하고 풍성한 물이었기에 동복천의 수난사는 시작되었다.
인근 광주시와 화순읍민의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섬진강 지류인 동복천에 동복댐이 건설된 것이다. 1970년의 1차 공사, 1983년의 2차 공사가 끝났지만, 1984년에 바로 댐 높이를 2배 이상 높이는 확장 공사가 진행되어 1985년 높이 44.7m, 길이 188m 규모의 동복댐이 세워졌다.
그 결과 당시 관광명소였던 화순적벽의 절반가량을 물에 잠기게 만들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찾던 노루목적벽은 현재의 수면 아래로 30~40m는 더 아래로 내려가야 적벽의 온전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노루목적벽은 옹성산 서쪽 아래로 위치한다. 물에 잠긴 현재의 모습으로도 위용이 대단하다.
노루목적벽의 건너편에 망향정이 건립되어 있으며, 화순군에서 운영하는 '적벽투어'를 신청하여 이곳에서 노루목적벽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2025년 3월 중에는 운영하지 않고 있어 아쉬웠다.
물 아래 잠긴 것은 화순적벽의 풍광만이 아니었다. 동복댐 공사로 대대로 살아오던 15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이서면 서리, 월평마을, 장월마을, 보산마을, 난산마을, 장항마을, 학당마을, 창랑마을, 물염마을, 석림마을, 석보마을, 전도마을, 야사리의 일부, 백아면 와천리, 다곡리, 임곡리 일부. 동복댐 공사로 마을이 완전 수몰되거나 일부 수몰된 마을들이다. 동복댐 건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화순군 이서면과 백아면 15개 마을, 약 800세대, 약 6,000명의 주민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황망하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이 '동복댐 이주민협회'를 1995년에 설립하고, 1999년 화순적벽 맞은편에 '망향정'과 '망향동산'을 조성하였다.
(※ 화순적벽과 관련된 사연에 대해서는 화순군에서 발행한 이주빈 저 <화순 인문여행>을 아주 많이 참고하였다.)
망향정에서는 노루목적벽을 감상하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바로 서쪽 아래 위치한 보산적벽은 볼 수 없는...
화순 "적벽투어"는 이서면 야사리의 동면중학교 이서분교장(폐교)에서 출발한다. 3~11월 사이에 운영한다고는 되어 있는데, 2025년 3월에는 아직이었다.
12시 20분. 두부요리로 유명한 큰 식당을 들렀다. '국보'급이다.^^
창랑적벽, 물염적벽을 볼 수 있는 창랑리로 이동하던 중 살짝 담양군 가사문학면을 걸쳤다가 지나간다.
1시. 물염적벽과 너무나도 아름답게 어울리게 자리잡은 물염정을 찾았다.
물염정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화순적벽 중 한 곳인 물염적벽을 조망하는 산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물염정은 명종 때 문과급제하였던 勿染 송정순이 16세기 중엽에 건립한 정자라고 알려져 있다. 후에 외손자들에게 물려 주었고 수차례 중수와 보수를 하였다.
명승지에 위치하여 많은 명사들이 찾았으며 그들이 물염정과 물염적벽을 노래한 시액들이 다수 걸려 있다.
물염정 앞에는 김삿갓의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동복천인 창랑천의 한쪽 벽을 이루는 절벽이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적벽'이다.
그런데 이렇게 물염정과 함께 하면 그때 '물염적벽'이 완성된다. 참으로 멋진 곳이다.
물염정에서 창랑천을 따라 동복호 쪽으로 한구비 돌면 창랑적벽이 나타난다.
도로 옆에 약간의 주차 공간과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창랑적벽의 경치를 맛보고 지나갈 수 있다.
창랑적벽의 암석층이 잘 드러나 있다.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기는 하지만 얇게 차곡차곡 쌓인 모습을 보인다. 퇴적층이 잘 드러나는 퇴적암이다. 화산 폭발로 분출된 화산재, 화산진, 암석 조각 등이 쌓여 굳어진 퇴적암의 일종인 응회암이다. 화산쇄설암이라고도 불리며, 독특한 생성 과정과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화산적벽 일대에 나타나는 응회암층을 따라 "적벽응회암"이라 칭하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숲정이'란 "마을근처 숲"이라는 순 우리말로 2002년에 동복면 연둔리 숲정이는 '아름다운 마을숲'에 선정되었다.
숲정이가 있는 둔동 마을은 1550년경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을 앞을 흐르며 생활용수 및 농업 용수를 공급해주는 동복천이 종종 범람하여 큰 피해를 주곤 했던 모양이다. 동복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현재 마을 앞쪽 남북 방향으로 약 1km에 걸쳐 숲정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제방을 보호하기 위해 아홉군대에 인공구조물인 防川(둑)을 만들었는데, 홍수 발생시 물의 흐름을 조절하여 강둑의 범람을 막고, 나무와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조상들의 치수 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연둔리 숲정이는 국가유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둔동 마을에서 동복천을 건너는 보행교. 멋진 다리다.
보행교에서 놀고 있는 여행자들.
마을사람들은 나무를 보호하고, 나무는 모여서 마을과 사람들을 보호하는 상호 시스템이 잘 운영되고 있는 곳을 방문하였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2025년 3월 20일 아침. 너릿재옛길을 들렀다가 화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 기억을 찾아 세량지로 달려갔다. 그랬다. 그런데... 아... 그런데....
만연사는 고려 희종 4년(1208년)에 만연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만연선사가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가는 길에 현재의 절 부근에서 잠시 쉬다 잠이 들었는데, 꿈에 십육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시려고 불사를 하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내려 많이 쌓여 있었으나 자신이 누웠던 자리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를 신비롭게 여겨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다가 절을 세웠다는 창건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탱화인 "만연사 괘불탱"이 유명하며, 보물 제1345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앞에 근사하게 자란 베롱나무에 열린 예쁜 등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만연사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인 절집이라 하겠다.
2025년 3월 20일. 10시. 운주사를 방문하였다.
운주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의 천태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영귀산 아래 자리잡고 있다. 더러는 '배가 가는 길'이라며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하고,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며 운주사(雲住寺)라고 한다.
운주사는 '천불천탑'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수많은 석불과 석탑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그 역사와 문화적 가치로 인해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운주사의 설립 시기와 주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여러 설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국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전설이다.
이후 고려 시대에 이르러 불교 문화의 중요한 유산으로 자리 잡았으며, 현재 남아있는 석불과 석탑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주사 창건설화 중 가장 널리 퍼진 게 도선국사 창건 설이다. 하지만 까칠한 연구자들은 도선국사 창건 설에 바로 이의를 제기한다. 도선국사는 9세기에 살았던 인물인데 운주사 유적들은 12~13세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궤를 같이하는 것이 13세기 창건 설이다. 고려를 쳐들어온 몽골은 고려인들의 저항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려 불교의 상징이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을 불태워 버린다. 황룡사 구층목탑을 대신할 항몽의 상징물을 급히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운주사와 천불천탑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산등성이와 계곡에 100분의 돌부처와 21기의 석탑들이 안치되어 있다. 화순군에 따르면, 1942년까지만 해도 석탑은 30기, 석불은 213기가 있었다고 한다. 중종 25년(1530)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綾城縣) 편에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천 개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래서 "천불천탑"이라 했던 것이며, 능성현은 지금의 능주다.
일주문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운주사9층석탑과 7층석탑이다. 사천왕문 같은 의례적인 관문이 없다.
9층석탑의 동쪽에 운주사 층상응회암의 노두가 드러나 있다. 노두 앞에는 돌부처들이 기대어 있다.
운주사의 가장 큰 특징은 투박하면서도 독특한 형태의 석불과 석탑들이다. 정교하게 조각된 일반적인 불상과는 달리, 운주사의 석불들은 거칠고 소박한 형태를 띠고 있다. 잘 깨지고 부스러지기 쉬운 응회암을 활용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7층석탑 다음으로 석조불감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797호이다.
돌로 만든 팔작지붕 형태로 그 안에는 두 분의 돌부처가 벽을 사이에 두고 등을 대고 앉아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석재로서 거대한 불감을 조성한 것은 아직 그 유래를 보지 못하고 있는 바 건축학적으로도 주목되는 유품이다.
일명 연화탑이라고도 불리는 원형다층석탑은 보물 제798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지대석 기단부부터 탑신과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다. 기단면석 만은 10각도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원에 가까워 원형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운주사의 대웅전.
기와 작품전??
떡시루를 중첩시켜 놓은 것 같은 모습의 특이한 석탑이다. 원구형석탑이라 한다. 대웅전 뒷편 위쪽에 위치한다.
4층석탑(명당탑).
비탈을 조금 올라가면 절벽에 마애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운주사의 범종각, 대웅전 그리고 여행자.
지혜당 전통찻집.
찻집에서 이상한 빵을 먹으며 차한잔 마시고 있는 엄청난 숫자의 대규모 단체객들이 몰려왔다. 그 물결을 이리 저리 피하면서 다녀야했다.^_^
운주사를 대표하는 와불을 뵈러 나섰다. 골짜기에서 서쪽의 산등성이로 올라가면 된다.
7층석탑이 보인다. 5층석탑은 안보이네...
시위불 혹은 협시불.
보통 '와불'이라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운주사 와형석조여래불이다.
두분이 나란히 누워 계신다.
12시. 운주사를 나선다. 일주문의 안쪽에 '천불천탑도량'이라 적혀 있더라. '화순8경' 중에서 제2경이었더라.^^
배고프다. 식당으로 달렸다.
이번 여정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었다. 고생했던 옆지기의 비원을 받아들여 피로를 풀어주고 달리기로 했다. 온천의 따스한 물에 좀 담그고는 서울로 달렸다.
그렇게 화순에서의 2박3일, 전체적으로는 6박7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피곤하긴 하더라.^^;
이 마주 앉아 컵라면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조촐한 소반이다. 날이 완전히 밝았다. 길을 나선다.
화포항에서 출발할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학산해안길은 눈길 드라이브가 되었다. 선암사로 가는 길의 상사호길, 낙안읍성으로 이어지는 조정래길, 초연정 원림을 찾는 길 모두 눈발과 함께 했다. 멋진 경험이었다.^0^
7시 50분. 화포항 포구로 내려가보았다.
화포항은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또 눈발이 날리운다.
항구에서 학산해안길을 따라 순천만의 바다를 즐길 수 있도록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학산해안길은 차량이 달리는 주요 도로가 아니라서 순천만의 바다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해변길에서 위로 올라오면 일출길과 만난다. 일출길을 따라 달리다가 장산길과 만나는 곳에 짱뚱어가 한마리 뛰어 오르고 있다.
3월 18일 아침에는 짱뚱어가 눈을 맞고 있었다.
8시 40분. 상사호 휴게소에 들러 쉬어갔다.
커피 한잔을 하려 시도했지만 카페는 문을 열지 않았고, 자판기는 작동을 거부하더라.ㅠ.ㅠ
안쪽의 경치가 멋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상사호 물문화관.
주암다목적댐 안내자료.
상사호의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몇 곳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어랏!
9시35분. 선암사에 도착했었는데, 오늘은 화순까지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고로 조계산의 명사찰 중에 선암사는 여러번 방문했었는데 송광사는 가본 적이 없으니 그쪽으로 집중하자는 핑계를 대면서 그냥 나왔다.
조정래길의 폭설이 환영해주더라.
선암사 방면에서 조정래길을 따라 남하하다가 보면 낙안읍성 도착 전에 오공치라는 고개가 있다. 그 고개 너머에 오공치전망대가 있다. 멋진 곳이다. 그곳에서 낙안읍성이 있는 분지 전체를 조망하면서 작은 드론을 한번 날려보려 했었다. 촬영허가도 받았었다. 그런데... 아! 그런데!!!
낙안읍성은 금전산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모습을 잡고 싶었는데, 폭설과 강풍으로 인해 실패하다니... 아! 읍성 내부 상공에서의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오다 가다 주운 사진이다.ㅎㅎㅎ)
눈이 멈출 때까지 기다릴까 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바람도 모질게 부는지라 포기했다.ㅠ.ㅠ
10시. 낙안읍성에 도착했다.
낙안읍성에서 폭설을 만났다.
눈을 맞으며 3월 18일에 낙안읍성을 산책하였다.^^;
눈 속의 홍매화.
눈이 내리기 핀 꽃들이 더 예뻐보이더라.
11시. 이른 시간에 점심을 챙긴다. 식당을 찾기 어려운 길을 달려야 하기에....
12시 30분. 송광사에 도착했다. 여전히 눈이 내린다.
불일암에 이르는 무소유길에도 눈이 펑펑 내린다. 옆지기가 등반의견을 '인용'하지 않아 그냥 송광사로 향했다.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보자.
송광사 배치도.
너무 작아서 잘 안보이나... 경내만 확대해보자...
그래도 작은가?ㅎㅎ
조계산에서 발원하여 송광사 옆을 흘러 내려가는 송광천에 두발을 담그고 있는 육감정의 모습이 예쁘장하게 보인다.
사천왕문으로 이어지는 우화각.
침계루는 송광천과 나란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자루라고도 한다.
종고루 앞의 베롱나무 가지에 눈에 걸쳐 있다.
눈이 내리니 대웅보전이 더욱 멋지게 보인다.^^
송광사는 통도사, 해인사, 수덕사, 동화사, 범어사, 쌍계사와 함께 7대 총림(叢林)에 속하는데, 1969년에 조계총림으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한 승보전.
불교에서 귀하고 값진 세가지 보배 佛, 法, 僧을 삼보라고 한다. 한국 불교에 이 삼보를 상징하는 삼보사찰이 있으니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이다. 통도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모시고 있어 법보사찰, 송광사는 한국 불교의 승맥을 잇고 있어 승보사찰이라고 한다.
한국 불교의 승맥을 잇는다고 하는 것은 보조국사의 정혜결사 근본도량이자 보조국사를 포함한 16국사를 배출한 수행도량이자 이를 이어 현대의 효봉, 취봉, 구산, 일각선사 등 많은 스님들의 수행으로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관음전.
송광사 3대 명물 중의 하나인 비사리구시. 응향각 앞에 놓여 있다.
절에서 큰 재를 모실 때 사찰로 모여든 대중들을 위해 밥을 짓는 취반소에서 사용한 나무로 만든 대형 용기이다. 다른 두가지 명물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9호인 능견난사, 천연기념물 88호인 쌍향수가 있다.
계속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여행자의 따스한 눈...^^
눈이 내리는 연꽃세상에서 따스한 차 한잔...
2시. 송광사에서 주암호 건너편의 삼청리 골짜기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초연정을 찾아왔다. 역시나 눈이 내리고 있다.
초연정과 원림의 모습을 하늘에서 구경해보았다.^^
보통 정자는 강변이나 구릉에 위치하여 확 트인 멋진 경관을 감상하도록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초연정은 모후산의 깊은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정자와 다른 특색을 보인다.
주변의 자연 계곡의 숲을 원림으로 하고 있어 정원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잘 보여주는 예에 해당한다. 또한 자연경관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어 조경이나 경관으로서의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18번 국도를 따라 주암호 주변 경치를 감상하다가 순천고인돌공원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서재필기념공원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다가 기념공원의 조각품들을 감상하고 화순군으로 이동하였다. 순천의 멋진 눈길 드라이브를 경험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임진년(1592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왜군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 및 의병활동,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서 발을 빼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놈들이 강화협상에서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결렬되자 정유년(1597년)에 재침략을 저지른 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은 다음 해인 1598년 12월에 종결되었다.
1597년 왜군이 14만 병력으로 침략하여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점령을 목표로 칠천량 해전, 남원 전투, 전주성 함락 이후 전라도, 충청도 지역으로 침투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직산(천안)에서 대패한 왜군이 남해안 일대를 점령하고 버티자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작전 전술을 이용해 순천 지역 등지에서 공격을 진행하였다.
순천왜성(왜교성) 전투는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제독의 조명연합군이 검단산성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진린의 명수군이 1598년 9월부터 60여일 간 최후의 총격전을 펼친 전투 이후 일본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해전에서 무너뜨리고 승리하여 7년 간의 전쟁이 종결되게 된다.
그 역사의 현장인 검단산성과 순천왜성, 그리고 이순신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를 2025년 3월 17일 오후에 방문하였다.
정유재란에서 중요한 뽀인트였던 검단산성을 방문하기는 조금 불편하다. 가까운 곳이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길건너의 공장이 바로 옆의 버스 회사에 주차를 부탁하려다가 그냥 검단산 아래의 등산로 초입에 차를 박았다.
저 아래 차를 두고 조금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오른다.
백제때 만들어진 석성인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의 지휘부가 주둔하였던 성으로 여수반도와 순천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자그마한 쉼터가 하나 마련되어 있다.
검단산성에서는 건물지, 집수정, 저장구덩이, 성벽 등의 유적과 유물지 발굴되었다.
검단산성에서 동쪽으로 멀리 보이는 순천왜성을 바라보며 그시절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는 방문객.
검단산성에서 동쪽의 광양만 방면 조망. 멀리 순천왜성이 작게 보인다.
확대 사진. 왜성의 천수각이 있었던 기단.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현재인 거대한 공업단지.
2시 15분. 정유재란역사공원에 도착하였다.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지였던 순천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민초들의 모습과 전란의 아픈 기억을 안고 평화로 한걸음 다가서는 어머니와 해맑은 아이들의 형상을 통해 치유와 함께 추모의 의미를 담은 '평화군상'이 먼저 반겨준다.
혼자 근무하시던 분께서 친절하고 상세하게 안내를 해주셨다.
장군님!!!
2시 45분. 순천왜성에 도착했다.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당이 왜군이 호남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된 성으로 1598년 9월부터 종전 때까지 60여일 간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주차장 한켠에 정왜기공도가 그려져 있다.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활약상을 그린 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전쟁의 주요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전투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정왜기공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쟁의 진행 과정, 전투 상황, 인물 정보 등을 담고 있어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은 명나라의 종군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본의 소장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78년 콜롬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가 공개한 11장의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다.
정왜기공도에 묘사되어 있는 왜교성의 '해자'.
실제로 남아 있는 해자의 흔적.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사이의 해자(垓字)는 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 해자에 다리를 놓아 필요할 때만 사용했는데, 멀리서 보면 성과 육지가 다리로 연결해 놓은 모습이어서 ‘왜교성(倭橋城)’으로도 불렸다.
왜교성의 문지 1. 석성의 축성 방식이 조선 시대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왜성'이다.
왜군은 조선 남부의 해안 일대에 20개의 왜성을 축성했는데, 그 중 8개가 정유재란 당시에 만들어졌다. 1597년 음력 12월에 세워진 순천왜성은 6만여 평의 면적에 외성의 성벽 길이가 2,500m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다. 1만5천여 명의 왜군이 주둔했었으며 성의 동쪽에 선착장을 설치해 선박들이 출입하면서 군사와 물자를 실어날랐다.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를 공량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방어전을 펼쳤던 곳이었다.
복원된 성벽 위에 올라가 본다.
문지 2. 천수에 이르는 주 출입문으로 방어를 위해 "ㄱ" 자 형태로 꺾어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3시 10분. 천수기단은 점령되었다.
천수기단에서 바라본 검단산성.
천수기단에서 놀고 있는 빨간 모자.
왜성은 빠르게 축성할 수는 있지만 견고하지 않아 세월이 지나면서 쉽게 붕괴된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왜성들이 있었지만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순천왜성의 보존상태가 그나마 가장 나은 축에 든단다.
1598년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군사들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새끼"들이었다. 이들을 구원하겠다고 부산 방면에서 500여 척의 왜군이 달려오자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노량에서 맞서 싸운 것이 역사에 남은 노량해전이었다. 왜군의 전선 200여 척을 격침시켰지만 고니시는 도망가는데 성공하고,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순천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대규모 육상 전투였고, 노량해전은 마지막 해전이었다. 이후 왜군이 물러나면서 7년 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순천왜성과 앞바다에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용장과 병사들,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백성들의 충혼이 스며있는 곳이다.
그래서...
3시 40분.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무사를 찾았다.
충무사 사당.
귀한 곳에 방문했다. 기록을 남기는 여행자.
4시 20분. 광양이 바로 옆인데 여정을 짜다보니 광양을 놓치게 되었다. 그래서 한방에 해결하기 위해 찾은 곳이 구봉산 전망대이다.
안내도를 보면 멋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3월17일 현재 파헤치고 있는 않았다. 그래서 관계자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전망대까지 올라가 보았다.
광양시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구봉산전망대 사진자료이다. 광양만 일대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명소이다.
구봉산 전망대는 해발 473m의 구봉산에 설치된 전망대로 순천, 여수, 하동, 남해까지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정상에는 9.4m의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어 새로운 일출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정상에 설치된 스틸아트 조형물. 광양을 상징하는 빛, 철, 꽃, 항만 등을 소재 활용하여 매화꽃으로 개화하는 꽃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봉화의 이미지를 담았다.
전망대에서는 광양만 일대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이순신대교.
2025년 3월 17일의 여정을 마무리 하기 위해 예약한 숙소가 순천만의 화포항 인근인데, 너무 외진 곳이더라.
주변에 펜션들만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사장님께 주변의 괜찮은 식당 안내를 부탁드려 다녀왔다.
원래 계획은 뒷산인 봉화산(235m)의 순천만일출일몰전망대에서 멋진 전경을 드론으로 담아보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늦고 피곤하다는 당면문제에 밀렸다. 좁은 숙소에서 그냥...
여행 중 옆지기가 숙소 상태로 불만을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다. 경치나 전망이 좋은 곳이라고 지나치게 광고하는 숙소는 앞으로 좀 피하려 노력해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숙소였다.^^
원래 간단하게 아침을 제공하는 비지니스 호텔인데, 월요일에는 생략한단다. 오늘이 월요일이다~~^^;
8시 35분. 순천역 앞의 전경을 창밖으로 보면서 오늘 하루의 여정을 천천히 준비한다. 바람이 쎄다.ㅠ.
9시. 순천역 부근의 동천변에 위치한 여순10.19평화공원을 찾았다.
여순10.19평화공원은 여순사건의 역사적 아픔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여순사건 관련 사진과 상황 설명 전시하고 있는 평화의 벽.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거부하며 일으킨 여순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으며, 그 후유증은 오랫동안 지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편하게 앉아 찬찬히 자료를 살펴볼 수 있도록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상징 조형물로, 이념 갈등으로 인한 비극을 표현한 뒤틀린 총구 조형물. 커다란 핏방울이 매달려 있다.ㅠ.ㅠ
공원 조성 위치는 여순사건 당시 봉기군과 경찰이 처음으로 충돌한 격전지인 장대공원 일대이다.
공원 바로 옆에는 동천을 건너는 단선 철도가 지난다. 경남 밀양에서 광주송정역을 잇는 경전선 구간의 일부이다.
관리원이 없다고 막 들어가면 안된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 방송이 나온다.
9시 30분. 여순10.19평화공원 바로 인근에 위치한 죽도봉공원을 찾았다.
봉화산(356m) 자락의 죽도봉(101m)은 순천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천 쪽 언덕에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강남정이라 한다.
대나무를 스치는 날카롭고 차가운 바람을 귀로 느끼며 몸을 떨며 데크길을 걸었다.
팔각정인 강남정은 현재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전망대에 올라 순천시의 전경을 조망할 수는 있다.
남쪽의 국가정원과 습지 방면의 전망.
국가정원의 식물원이 빛을 발한다.^^
서쪽의 남산(347.5m) 방면. 순천부의 역사가 깃든 곳이다. 순천시청도 보인다.
죽도봉공원 내의 팔마상과 연자루. 팔마상인데, 한마리만 있다.
공원 아랫쪽으로 기념물들이 여럿 보였다.
김계선선생동상, 백우탑, 강계중선생동상이 나란하게 세워져 있다.
조금 더 오랜 순천의 과거 속으로 들러가보자. 1872년에 전국적으로 제작된 지방지도들 중 순천부 도폭의 일부이다. 읍성 부분을 확대해보았다.
구도심의 '읍성'이었던 지역은 "문화의거리"로 지정되어 있다.
순천행동우체국, 순천청년센터 앞에 팔마비각에 세워져 있다. 주차 공간을 찾기가 어려워 남문터광장 지하주차장을 이용했다.
팔마비는 청백리 비의 효시라고 한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지방 수령에게 말을 여덟마리나 바쳐야 했다는 그때 이야기가 가슴아프다.
순천부 읍성의 남문이 있었던 공간은 남문터광장으로 바뀌었다.
지하에 상가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옥천서원, 옥천동의 일본식 가옥, 순천향교, 서문안내소 등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었는데 너무 욕심이 과했나보다. 다음으로 미루고 동천을 다시 건너가기로 한다.
11시 25분. 순천 드라마오픈세트장을 찾았다.
순천드라마촬영장 관광안내지도.
원래 군부대가 위치하였던 곳인데, 부대를 이전한 자리에 2006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 세트장이 조성된 이후 2024년 5월 기준 87편에 이르는 작품들이 촬영된 오픈세트장이 되었다.
60년대 순천 읍내 거리, 70년대 서울 봉천동 달동네, 80년대 서울 변두리거리를 구획별로 재현해놓아 그 시절을 살았던 세대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느끼게 하고, 이후 세대에는 60~80년대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장이 되고 있다.
관광안내소 앞의 지도를 기웃거리니까 근무하시던 분이 나오셔서 친절하고 상세하게 안내를 해주셨다.
'순양극장' 골목부터 시작하여 그 시절 속으로 들어가보았다.
일단 영화 간판부터 좀 그려보고...
60년대 순천의 모습이었...
70년대의 봉천동 달동네를 방문했다.
달동네에서 소망을 담아 종을 울리고, 희망을 담은 물을 깃는 아낙.
80년대 봉천동의 모습을 기억할 것만 같은 아낙.
육군7391부대 5대대 사격장이었던 곳이 드라마세트장으로 변모했더라...
12시30분. 순천의 맛집을 찾았다. 대기해야 했다. 내부에 대기 공간이 없어 넓은 야외의 공간에서 찬바람에 떨면서 기다렸다.
도토리 요리 전문점이었다. 대기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순천만 국가정원 부근에 위치한 맛난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 식사를 하고 순천의 전쟁사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