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군에서 시행하는 "반값가족여행"의 혜택을 입었다. 2024년 4월 초에 신청하고 22일~24일 간 2박3일의 여행을 즐기고 바로 비용 정산 신청을 했고, "강진사랑상품권"으로 받았다. 다시 강진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문화의 두께를 더해 온 강진의 명소 몇 곳을 찾았기에 간단히 정리해 두려 한다. 아래 지도에서 파란 선은 22일의 이동경로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강진군의 북쪽의 명소들을 방문하였다. 강진읍의 숙소에서 쉬고 23일에 강진만의 서쪽 지역(붉은색)을 여행하였다. 24일에는 강진만의 동쪽 지역(노란색)을 여행하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1. 백운동 원림
2023년 가을에 중국 강남의 정원 몇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가각의 과식원, 동리의 퇴사원과 진주탑원, 소주의 졸정원의 네 곳을 방문하였는데 정원 속에 각종 자연을 가져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것저것을 모아 놓다보니 이것저것이 다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어 번잡하게만 보였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라 중국과 차별화된다 하였다. 그러한 전통 정원을 강진에서 찾았다. 白雲洞 園林은 강진군 성전명 월하리의 월출산 옥판봉 자락에 위치하며, 17세기 말 조영된 전통 別墅이다. 원림의 조영자는 이담로이며, 만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과 함께 백운동에 은거한 이래 11대에 걸쳐 이어져온 유서깊은 원림이다. 2004년 11월1일 향토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으며, 2009년 착공된 복원사업으로 원림의 골격이 회복된 상태이다. 2019년에는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드론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월출산 강진다원의 넓게 펼쳐진 차밭 사이에 짙은 숲 속에 백운동 별서 정원이 숨어 있는 듯 하게 보인다.
백운로 변에 새롭게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쉬게 하고 차밭의 경관에 감탄한다.
헌 잎위로 새 잎이 열심히 돋아나고 있다. 찻잎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더 아래로 내려가야 원림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는데, 중간을 뚫었다. 화장실도 새로 만들고 있었다.
몇 걸음 안걸어도 쉽게 별서 정원으로 접어들 수 있다.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을 끼고 원림이 조영되어 있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는 자연 속의 정원이다.
여기가 내집이다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들어간다. 보는 사람도 없다.^^
현재 복원된 백운동 원림 구성도이다.
(출처: 박율진 외, 2011, "강진 안운마을 백운동원림의 승경과 수공간의 조영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제29권 2호, 105)
백운동 원림의 안채에 해당하는 自怡堂.
사랑채 건물이다. 산허리에 작게 만든 방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다 하여 백운동 12승경 중 제9경인 翠微禪房으로 선정!
백운동 12승경은 다산이 꼽은 것이다. 백운동 원림은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등에 의해 차 문화의 산실이 된 곳이었다. 백운동의 경치에 반한 정약용은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2곳의 아름다운 경승을 칭송하는 시를 남겼으며, 이는 '백운첩'에 담겨 있다.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가 백운첩에 담겨 남아 있다.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을 수로를 통해 원내로 끌어들여 마당의 작은 연못을 돌아 다시 방향을 꺾어 흘러 나가게 만든 독특한 조경을 하였다. 백운동 12승경 중 제5경인 '유상곡수'.
제11경인 '정선대'에 올라 제1경인 월출산의 '옥판봉'을 바라볼 수 있다. 좋다! 怡悅!!!
제12경에 해당하는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2. 다산 초당
백련사에서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 다산초당까지 약 900미터라고 한다. 걸어야 한다. 그런데 차를 어찌 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다산초당 초입의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배고팠다.ㅠ.ㅠ
'다산손맛집'이라는 식당이 보여 들어가서 주문하고 나서 정신 차리니 다산초당을 찾아 걷고 있었다. 식당 사진이 없다. 아침을 굶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 정신이 없어진 때문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온 것 같다. 오르는 길이 너무 좋아졌다.
그런데 이건 무엇일지 의아했다. 흙탕물인데 물바가지가 있다? 왜?
'서암' 그리고 뒷쪽으로 '다산초당' 건물이 살짝 보인다.
다산초당과 주변 건물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은 經世致用, 利用厚生, 實事求是를 모두 겸비하여 실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나 정조 서거 후 천주교 박해사건에 휘말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茶山艸堂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 10여 년 동안 기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학문을 연마한 곳이다.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의 경세론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대저술이 바로 이곳, 다산초당에서 이루어졌다.
이름처럼 원래는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6년에 노후화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기와집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茶山艸堂"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남긴 것......이 아니라 그의 글자를 집자하여 모각한 것이다.
능선에 위치한 '천일각'에서는 강진만의 바다 경치까지 아주 잘 보인다. 옆의 오솔길은 백련사까지 이어진다.
3. 사의재
1801년 겨울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도착했다. 18년간 이어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당시엔 숙박업소가 없었다. 다산을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갈데 없는 다산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숙소를 제공해준 것이 주막의 주모였다. '동문매반가'라는 강진읍의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이었다.
다산은 이곳을 거처로 삼으면서 '생각, 용모, 말, 행동의 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아 四宜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주막의 골방을 4년간이나 내주어 지낼 수 있도록 해준 마음이 한없이 넓었던 주모.
다산은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사의재에서 주모와 그 외동딸의 보삼핌을 받으며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나갔다. 이곳에서 『兒學編訓義』를 집필하였고, 황상 등 모두 6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 주막에서 지낼 때 다산은 바지락전과 아욱된장국을 즐겨 드셨다고 한다.
강진군은 2007년 오랜 고증을 거쳐 동문 안쪽 우물가 주막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현재 사의재 내에 함께 복원된 동문매반가는 다산이 즐겨 먹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주막으로 운영 중이다.
메뉴판.
주변에는 사의재 저잣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다산이 머물던 시대의 옛거리 모습으로 사의재 주변에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4. 강진다원
강진 월출산은 큰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산세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특히 큰 일교차와 강한 햇빛을 막아주는 맑은 안개 등 차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지리적 특성을 갖추어 일찍부터 떫은 맛이 적고 향이 좋은 재래종 차나무가 자라던 지역이다.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많은 자연환경이 차 생산에 적절한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다. 월출산에는 지금도 야생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정도이다. 월남사 등 월출산 주변의 고려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많이 재배되기도 했다.
이러한 천혜의 조건과 조선시대 학자들의 차 애호 정신이 더해지면서 강진의 차 문화가 확산되게 된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긴 유배 시절 동안 차를 마시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고 당대 유명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번째로 좋은 차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유서깊은 차문화 역사를 배경으로 1982년에 10여만 평 규모로 설록다원, 월출산 다원, 강진 다원(이름이 여럿이다.)이 조성되었다.
전체 차밭 중 8만 평은 일본 품종인 야부키타 종이 심어져 있으며, 1만 9천 평에는 재래종이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공기로 인한 냉해를 방지하기 위해 차밭 중간 중간에 많은 바람개비를 설치해놓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람개비들이 모두 산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냉기를 불어내리기 위해서 이다.
5. 영랑 생가와 세계모란공원
2024년 4월 23일 아침을 굶고 강진읍내의 영랑생가를 찾았다.
넓직한 대지를 보니 영랑은 부잣집 자손이었을 것만 같다.ㅎㅎ
영랑 김윤식은 1903년 강진의 5백석 지주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청산학원 영문과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휘문의숙에 재학 중이었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고, 1920년 동경으로 유학하였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강진에서 김현구, 차부진, 김길수 등과 '청구'라는 문학동인지를 발간하였고, 1930년 동경 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다.
영랑은 1930년 3월에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함께 우리 현대시의 새 지평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그의 생가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던 것을 1985년 강진군이 전남 도비 지원으로 매입하여 연차적으로 복원사업을 벌여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형 그대로의 복원은 아니었으며, 공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복원공사가 부실했는지..................ㅠ.ㅠ
생가 옆으로 '시문학파기념관'이 위치한다. 오전 8시 반에는 운영을 안한다.
그리고 생가 뒷편 언덕 위에 '세계모란공원' 조성되어 있으며 생가에서 바로 연결통로가 있는데, 연결하고 있지는 않다. 폐쇄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돌아서 돌아서 돌아서 세계모란공원을 가보았다.
"감성 강진의 하룻길"은 강진의 대표 시인 김현구의 시들로 읽으며 지날 수 있다.
세계모란공원에는 모란꽃이 많다.
아주 커다란 꽃도 있다.
잘 생긴 영랑과 함께 사진을 남길 수도 있다. 빨간 쓰레받기가 눈에 확 띤다.^^
전망대에 오르면 강진읍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강진만 바다까지 보인다. 생태공원이 보인다.^^
온실에서 세계 여러나라의 모란을 감상할 수 있다. 참 모란은 향기가 있나, 없나???
영랑은 남도의 사투리를 음악성 있는 시어로 표현한 서정시인이었다. 또한 단 한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민족시인이기도 했다.
6. 고려청자박물관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고려청자박물관과 고려청자디지털박물관이 위치한다.
고려청자박물관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은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 약 200여 개에 이르는 청자 요지가 분포하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9세기에서 14세기까지 고려 청자를 제작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청자의 시작부터 발전, 쇠퇴까지 그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청자의 산실이자 보고이다.
2007년 태안 죽도 해저발굴에서 耽津('강진'의 고려시대 지명)이 쓰여있는 木簡이 발견되면서 2만 3천여 점의 고려청자의 생산지가 강진임을 증명해준 바 있다.
고려청자박물관은 1970년대에 고려청자 재현을 위한 고려청자사업소로 시작한 이후 지금은 국내 유일의 청자 전문 박물관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강진군에서 '1주일 살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입장료가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7. 사인정
강진현 고지도에서 '병영'의 뒷산인 수인산 자락을 따라 남쪽으로 쭈욱 내려가보자.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의 탐진강과 산줄기의 끄트머리가 만나는 부분에 '사인암치'라고 적혀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서 같은 위치에 '사인암', '사인점' 표시가 있다. 이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지도를 확대하면서 찾아보았다.
현재는 행정구역이 장흥군으로 바뀌어 있으며, '사인정'이 남아 있다. 그래서 "장흥 사인정"이라 한다.
단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雪岩 김필이 계유정난 뒤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은거하다가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웠다. 김필이 이곳 강가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는 뜻으로 겨울이면 암벽에 단종의 진영을 그렸다고 한다. 그가 죽자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며 사인이란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정이라 하였다.
산기슭의 기암을 배경으로 하고 탐진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웠다. 단층 목조 팔작지붕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m 정도 높이의 석축 기단 위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고 각 주두마다 장식을 하였다.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사방을 마루로 둘렀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5호이다.
자연 속의 설암각 건물.
오래된 영정각의 기둥들에서 싱싱한 자연산 구멍들이 보였다. 딱따구리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자연산 다람쥐들도 놀이터로 삼고 있다.
사인정 동쪽, 이끼로 덮여 있는 바위에 "제일 강산"이라고 각자가 되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로 보고 있다고 한다.
사의정에서 탐진강 방면의 조망. 이제는 나무가 무성하여 시야를 좀 가리는 듯하다.
사인정을 만든 김필의 신도비가 도로변에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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