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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비가 살짝살짝 내린다. 그래도 짐을 싸고 버스에 싣고 길을 나선다. 8시 반이었다.

 

날이 좋으면 해바라기 밭도 볼만한 곳이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비를 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나 그냥 훈화 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들... 아니 해바라기들...

 

비 때문이다. 레이니즘.....

 

甘肃省张掖市民乐县马蹄乡으로 달린다. 장예시에서 기련산맥 쪽이다. 산골짝이다. 마제사라는 사찰 때문에 동네 이름이 马蹄乡(Matixiang)이 된 것 같다. 인근에는 马蹄河이라는 하천도 있다.

 

입구에 천불동이 먼저 나타난다. 千佛까지는 아니지만 절벽에 굴을 파고 많은 부처를 모셨다.

 

마제사를 접수하러 가는....

 

마제사는 1,600년 전 北凉때 조성된 석굴 예술과 아름다운 기연산의 경치가 잘 어우러진 사찰이다. 먼 옛날 天馬가 이곳에 내려와 물을 마시다가 발자국을 남겼다고 해서 마제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가 내리면 여행하기에는 불편하지만 여행하다가 비가 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면 그것보다 더 운치있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좋다!!!

 

세월이라는 시간에 더하여 문화파괴라는 것이 이루어진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지붕에 흙을 덮어 놓았다. 가장 저렴한 최고의 단열 재료를 사용한 것이다. 네이쳐!!!

 

건물 벽 곳곳에 노래 가사를 적어 놓았다. 여럿이 서서 음미하였지만 가사의 의미 해석에 어려움을 겪었다. 권세가!

 

마제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스투파에 있다. 한바퀴 돌며 마니차를 돌려본다.

(참고 : 마니차(摩尼車, 티베트어: འཁོར་)는 주로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되는 불교 도구이다. 마니차는 원통형으로 되어 있으며, 측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다. 내부에는 롤로 경문이 새겨겨 있다. 크기는 다양하며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사원에 있는 마니차는 몇 미터에 달할 정도로 큰 것도 있다.)

 

마제사풍경명성구 지도 되시겠다.

 

마제사 석굴 아래에서... 기념 사진을 찍을 때는 비가 오더라도 우산을 접어주어야 한다.ㅠ.

 

천불동과 마찬가지로 절벽에 동굴을 파고 그 안에 부처를 모셔 놓았다.

 


참불전 소개

 

내부에는 많은 파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제사가 마제사인 이유는 마제전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다. 이것이 말발굽 자국처럼 생겼다고 해서 고이 모시면서 마제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다. 天馬의 흔적이다!!!

 

여럿이 움직이는 패키지 관광의 문제.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알고 있으면서도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집합 시간을 정해준다. 그 시간 안에 줄을 서서 저쪽을 갔다 올 수는 없다. 왔다가 그냥 가는 허전함.

 

 

돌아보니 너무 급하게 그냥 나온 것 같은 느낌이라는 필링이 터치된다. '비' 때문이었을까.... 다시 가고 싶어진다.

 

낮은 능선을 따라 타르초가 이어져 있다. 장관이다.

 

얼렁뚱땅 지나왔지만 식사는 해야 한다. 위구(裕固)족 자치현이다. 위구족 전통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위구족[裕固族 , Yùgùzú , Yugur ]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56개 민족의 하나로 2000년 통계상의 인구는 약 1.37만에 불과하다. 거주지는 간쑤성(甘肃省)의 허시주랑(河西走廊)의 중부 및 치롄산(祁连山, 기련산) 북단지역 즉, 쑤난위구족자치현(肃南裕固族自治县, 숙남유고족자치현) 및 주취안시(酒泉市) 황니바오위구족향(黄泥堡裕固族乡, 황니보유고족향)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목축업을 위주로 생활하고 있다. 유고족은 2종의 자체언어, 즉 돌궐어족(突厥语族)에 속하는 서부유고어(西部裕固语)와 몽고 어족에 속하는 동부유고어(东部裕固语)를 사용하나 문자가 없어 일반적으로 한자를 사용하며, 라마교를 믿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구족 [裕固族, Yùgùzú, Yugur] (중국행정구획총람, 2010. 8. 1., 도서출판 황매희)

 

 

손님 맞이 행사. 노래를 부르며 술 한잔씩 나눠주고, 목에 흰 스카프를 하나씩 걸어준다. 그리고 식사. 식사가 끝난 후에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쇼 타임이 있었다.

 

갈 때는 기념사진 찍는 타임도 있다. 아구 이뻐라~

 

 

기련산맥으로 접어든다. 청해성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장족, 즉 티베트 족의 거주 범위가 넓게 나타난다.

 

마제향은 해북장족자치주에 속한다. 문원에서 하루 묵고, 시닝시에서 하루 묵었다. 해남장족자치주에 속한 청해호를 지나 차카염호에서 하루 묵었다.

 

티베트족의 거주 범위를 보여주는 지도이다.(출처: 네이버캐스트)

참고로. 재밌는 중국의 출산 정책. 기본적으로 한족은 1명, 일반 소수민족은 2명까지 낳을 수 있지만 3,000m 이상의 산지나 고원에서 사는 티베트족은 3명까지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외국에서 장거리 여행하는데 비가 내리는 것은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데 어쩌랴. 핑계김에 버스 안에서 잔다. 깨우는 소리에 나가보니 이렇다. 원래 노란 유채가 지천으로 있어야 하지만 올해는 일찍 꽃이 져서 이렇단다.

 

원래 노란 유채? 이것이다. 강스카 설봉을 배경으로 노란색의 물결이 펼쳐지는 것!

백리유채화해라 불린다. 백리에 걸친 유채꽃의 바다. 그렇게 불릴만 하다. 화장실 벽에 걸린 사진을 촬영하였다.

 

구글 지도에서 캡쳐하였다. 저 초록색 부분이 노란 유채꽃으로 물드는 광경이란! 문원은 기련산맥 속의 분지에 들어선 도시이다.

 

 

도로 변에 만들어진 휴게소. 간단한 먹거리들을 팔고 있다.

 

화장실은 유료이다. 1인당 1원. 돈 내기 싫으면? 화장실 뒤에 가서 기련산맥을 향해 쏘면 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 보면서 1원이 아깝기도 했지만 그래도...소변의 품격이 있지....

 

편도구풍경구로 빠지는 길을 지나니 주변의 경관이 확 바뀐다. 급경사의 절벽이 보인다. 그런데 그 절벽에 양들이 달라붙어 있다.

 

절벽 밑에 비맞는 사찰도 있다. 석불사.

 

엄청난 숫자의 양들에 놀란다...

 

양들 혹은 야크가 있는 주변에는 그 동물들의 주인이 임시로 사용하는 숙소인 텐트가 종종 보였다. 전형적인 유목 생활의 모습.

 

버스에서 고무타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멈추어 확인하더니 다시 출발한다. 그런데 출발하다가 멈춘다. 버스가 멈춘 것은..

 

이렇게 룽다를 뿌리며 즐기는 시간을 가지라고 멈춘 것이 아니었다.

 

버스 고장이었다. 뒷바퀴 쪽에 동력 전달 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멈추었다. 비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3500m 고도의 기련산맥 속 고갯길에서 53인승 버스가 멈추어 버린 것이다.

 

비상용 버스를 수배하였다고 한다. 밖에 나가서 구멍속에 들락거리는 '우는 토끼'들과 놀기 시작했다. 근처에 아무 것도 없어 안전하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풀을 뜯어 먹더라.

몸무게가 140g밖에 안되는 작은 몸으로 티벳의 혹독한 환경을 견디고 살아가는 신기한 동물이다. 귀가 작아 쥐 종류인 줄 알았는데, '우는 토끼'란다. 야크 배설물을 먹고 산다고 하는 희한한 놈들이다.

 

이놈 저놈을 쫓아 다녔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구멍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뛰어 다닐 수도 없다. 이곳의 높이? 해발고도가 약 3500m이다. 고산증세 주의 구간.

 

야크 똥이다. 그러니까 우는 토끼들은 겨울에도 활동량을 최소화하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서 야크 똥을 먹고 그것으로 버틴다는 것이다.

 

우는 토끼들은 땅을 이렇게 파헤치는 것은 토양을 건강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 시간 가까이 되어 버스가 도착하였다. 그냥 길막고 버스를 유턴시킨다. 막힌 차들의 빵빵은 기본.

 

여전히 이 동네는 양들로 북적인다. 중국의 청해성 일대의 양 사육량이 엄청나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이곳에 와보고서야 할게 되었다.

 

밤늦게 문원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하였다. 호운반점 귀빈루. 힘든 시간이었지만 중간에 버스가 고장난다는 귀중하고 어려운 체험을 했다. 대체로 다른 사람들도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긴 것 같았다. 이런 긍정적인 사람들!

역시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숙소에 도착하여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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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의 마지막 날이다. 부지런히 일어나 돈황에서의 둘째 날을 즐긴다.

 

9시 20분. 돈황 막고굴이다. 大泉河라는 하천이 흘러야 하는데, 물이 말라 하천이었던 흔적만 보여준다. 이 메마른 건천의 건너편에 구멍이 뽕뽕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구릉 위에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이었던 돈황에는 구법승, 대상, 병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융성 뿐만 아니라 돈황 예술도 꽃피울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흔적이 세계적인 불교 유적지로 유명한 막고굴이다.

 

돈황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며, 시냇가의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이 막고굴은 366년 승려 樂樽이 석굴을 파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이후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 들이 드나들면서 하나 둘씩 굴을 판 것이 천개에 가깝게 된 것이다.

 

천 여 개의 굴이 있다 하여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에는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한결같이 어떤 종교적 고행의 흔적이 느껴지며, 종교와 예술의 피땀어린 결정체이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굴 속의 유물들은 일찍이 약탈을 당해 수만 점이 해외로 유출되어 현재에는 10여 개 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9시 30분. 막고굴 입구에 도착하였다.

 

다큐 제작중.

 

막고굴 서점.

 

입구에 만들어 놓은 불탑들.

 

여기 저기 여러 곳에 불탑이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줄 알았는데, 세계문화자연유산이란다.

 

막고굴, 천불동 앞쪽을 흐르는.... 아니 물이 흐르지 않고 있는 건천. 하천의 이름은 찾질 못했다.

 

막고굴 입구의 패루.

 

입장에 필요한 입장권. 100원에다가 외국어 통역해준다고 20원이 덪붙여져 있다.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보호를 위한 조치라고 하는데, 이해된다.

 

비천상이 여럿 보인다.

 

드디어 왔구나 막고굴에. 그런데 입구에서 들어가면서 카메라와 헤어져야 했다. 실내 촬영 엄금. 천불동 내부의 사진은 없다.

 

외국 관광객이 오면 해당 외국어가 가능한 안내원이 나와 안내를 해준다. 보통 10여 개 정도의 동굴을 개방하여 안내한다. 한국어가 가능한 안내원 중에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었던 것 같은데, 돈황연구원에 근무한다 했었다. 열쇠를 들고 다니며 일반인들의 경우보다 조금 더 많은 동굴을 개방해주었다.

 

가장 규모가 큰 96호굴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앞에서 기념 사진을 다들 남기고 간다.

 

나도 남들처럼 남겨 보았다.

 

사진을 직접 찍지 못하였고, 15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정리를 하려니 막막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 숨겨져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할 수 없어 조만간 다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2012년에 한번 더 갔었지만 부족하다. 또 다시 가자~

 

돈황연구원

 

1900년 경 돈황에서 도교사원을 지을 곳을 찾던 왕위앤루(王圓籙)가 이곳 석굴까지 찾아들었고, 그의 조수가 16호 굴에서 다른 벽과 소리가 다른 벽을 찾아내어 그 벽을 헐면서 17호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막고굴이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나 황실에서는 이 유물에 관심을 갖질 않자 왕원록은 다시 석굴을 막아버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왕원록에게 푼돈을 주고 설득하여 1907년 25 상자 분량의 고서들을 추려 영국으로 반출하였다. 왕원록은 양 한마리 값을 받고 위치 정보를 누출하였단다. 으이구~

같은 해 프랑스의 고고학자 펠리오는 일일이 문서를 확인하여 알짜들만 골라 29 상자나 반출하였다. 그 속에는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었다. 얼마 후 펠리오의 둔황 고서 발견은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불관에서도 천불동에 있던 문화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 오오타니 고즈이가 약탈한 문화재가 강점기 박물관에 보존된 채로 해방을 맞으면서 우리나라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오오타니는 원래 승려였는데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중앙 아시아 탐험에 나섰고, 돈황과 쿠차 등지에서 많은 문화재를 털어왔다고 한다. 영국에 유학가서 좋은 것 배워 온 놈이었던 것이다. 으이구~

그런 문화재 도둑놈들 이야기를 절절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 이곳 돈황연구원의 전시실이다. 전시실에서 안내를 하면서 이 문화재는 누가 훔쳐갔고, 이건 누가 훔쳐갔고 하는 식으로 이야길 해준다.

 

2시반.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 돈황 골목 구경에 나선다.

 

돈황 재래시장.

 

 

돈황 시내의 비천상.

 

3시 10분. 돈황 박물관을 찾았다.

 

좀 많이 썰렁했다.

 

3시 30분. 명사산으로 들어간다. 사구들이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이동하는 소리가 많은 날이면 멀리까지 들린다고 하여 명사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명사산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상가 때문에 꽤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서 이동해와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에서 보장하는 명사산월아천풍경명승구 되시겠다.

 

입구이다. 여길 지나가려면?

이게 필요하다. 80원이었다.

 

입구를 통과하여 들어왔다. 명사산이닷!

 

안내도. 

 

사구의 곡선은 언제 보아도 유려하다.

 

번호표를 뽑고 있다.

낙타표. 내가 1번이었다.

 

이렇게 줄지어 낙타를 타고 사구를 오른다. 거리도 꽤 되고 높이도 높다. 그냥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젊었을 때는 가능했을지도..ㅎㅎ

 

낙타의 발걸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카메라를 품에 안고 사진을 만들었다. 내가 찍힌 사진은 없다.^^

 

일행의 뒷 쪽으로도 차알칵~! 33명 일행이다보니 낙타 행렬이 기이일다~

 

걸어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두었다. 땀 좀 날듯...

 

4륜 바이크도 준비되어 있다. 물론 옵션이다. 

모래썰매는 1회 이용했다고 되어 있다.

 

월아천

 

명사산 안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가 월아천이다. 남북 길이가 100m, 폭이 25m 정도이다.

 

 

월아천을 향해 걷는다.

 

소만호. 인공호라고 한다.

 

명사산을 걸어서 오르는 젊은이들. 젊은이들~

 

월아천.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원천인 지하수가 용출하며, 광풍이 불어도 월아천은 모래에 덮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막 오아시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뭔가 알 수 없는 유적일 것 같기도 하다.

 

명사산의 그림같은 사구들과 인사를 한다. 다시 또 보자꾸나~~

 

곤륜산맥 언저리에서 이제 천산 산맥 언저리를 향한다. 유원역에서 침대 열차를 이용하여 투루판으로 이동한다. 내일 아침은 투루판에서 먹게 될 것이다. 쭉 뻗은 빈 도로를 질주한다.

 

잠시 쉬어가기~ 목화밭이 보였다.

목화가 열심히 자라고 있다.

 

유원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목화밭' 노래를 같이 불렀다. 내가 기억하는 가사 부분은 "목화밭~ 목화밭~" 전부인데..

 

유원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역에서 8시20분 쯤에 탑승 수속을 하였다. 역에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열차에 탑승하여 4인 1실 배정 받아 웃고 떠들다가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소주병이 참 많았었다.

(시체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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