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1일. 7시반.
투루판 역에 부시시 눈을 비비며 내린다. 시계탑을 포도 여신이 들고 있다. 포도의 동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랍어가 많이 보인다. 회교, 이슬람 동네에 온 것이다.
역전앞 광장에 모이고 있는 일행.
광장 한쪽에는 하룻밤을 지샌 분이 누워 있기도...
8시20분. 투루판 시낼 달린다.
8시 50분. 투루판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푼다. 아침도 푼다.
투루판 관광안내도가 벽에 보이더라.
투루판 동쪽을 먼저 답사하고, 서쪽을 마무리하였다.
호텔 앞의 포도 가로수길.ㅎㄷㄷㄷ
9시반. 길을 나선다. 도처에서 뽐뿌질이다. 기름 동네다.
뽐뿌 뽐뿌하면 기름이 퐁퐁 솟는다. 기름이 쏟아져 나오니 중국에서 서부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일 것이다.
건조한 기후, 간헐적으로 내리는 폭우는 산지를 격렬하게 침식할 것. 그래서 화염산은 만들어진 것이고.
조밀하게 심어진 백양나무들 사이로 수로가 있다. 시원한 물이 흐른다.
투루판은 위구르어로 '파인 땅'이라는 의미이다. 투루판 분지에서 가장 낮은 아이딩(艾丁)호 수면은 해수면보다 158m나 낮다.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 분지인 투루판은 한낮 최고 온도가 50℃ 이상 올라가기도 그런 날의 지표면은 70℃까지 오르기도 하는 살벌한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물길이 있고, 그 물을 이용하는 포도 농사가 성할 수 있는 것은 지하 관개 수로 때문이다. 이란 등지에서 카나트라고 부르는 지하 관개 수로를 이 지역에서는 카얼정이라고 부른다. 시스템은 똑같다.
투루판 북쪽에 해발 4~5,000m의 준봉들이 있는 보궈더 산맥(博格達山脈)의 정상부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는데, 녹은 물이 지하수로 스며들고 그 지하수면의 물을 땅굴을 파서 투루판까지 끌어들인 것인다. 땅굴을 판 이유는 워낙 기온이 높고 건조하기 때문에 지표수는 금새 말라 버리기 때문이다.
장이 섯나 보다. 길가의 이동식 고기 판매점.
냉장 보관을 하지 않아도 워낙 건조하기 때문에 고기가 상한다던가 하는 고민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10시. 고창고성에 도착하였다. 투루판에서 동쪽으로 45km 정도 떨어져 있다. 완전 비포장 동네. 먼지가 엄청 발생하여 구난 조치를 취하였다.
완전 비포장 동네. 고창고성 자체가 흙벽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주변이 통째로 흙덩어리이다.
마을이 있는 입구에서 고성이 있는 곳까지 뙤약볕의 먼지나는 길을 손쉽게 이동하라고 나귀차가 제공된다. 유료로...
오잉~ 예쁜 양산들~
주변부도 성의 일부였을 것이다. 수백년의 세월 속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수많은 여행객을 반복해서 운송하는 교통로.
앞서 달리는 나귀차. 한 대에 8명씩 타라 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0시 40분. 그나마 상태가 좋은 성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도 누군가 자신이 방문했던 흔적을 남기고 갔다.
고창은 서역의 불교국가로 번성하였는데 몽골과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아 13세기 경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각형의 불탑, 성벽, 성문 등의 일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폐허로만 남아 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같이 사진 찍자고 한다. 그런데 유료이다.
폐허의 공간에 현재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
고창의 고성 축조에 사용된 벽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나뭇가지나 풀을 섞었는데, 왕국이 멸망한 이후 주변의 농부들이 벽돌을 깨 비료로 사용하는 바람에 더욱 황폐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아시스를 배경으로 번영했던 왕국의 멸망 과정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왕국 무상이다.
고창고성의 폐허 뒷쪽으로 화염산이 보인다.
주변에 많이 보이던 식생. 아주 작은 수박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 낙타가 먹는다고 한다.
화장실.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화장실. 뜨거운 열기에 의해 화장실 아랫부분에 보이는 통속의 물질들에서 증기가 발생한다. 사정이 급하여 들어가 일처리 하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질식할 수준. 아우~
흔적을 남기고 흔적을 보면서 돌아선다.
마을에서 작은 기념품을 팔고 사고 한다.
11시45분. 아스타나 고분군에 도착하였다.
투루판의 기후 자료가 게시되어 있었다. 1월 평균 기온은 -20℃쯤 되고, 7월 평균 기온은 50℃ 가까이 된다. 평균 기온이..
연평균 강수량은 16mm 정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증발량은 3000mm 정도란다. 역시나 살벌한 곳이다.
참관 안내도.
아스타나 고분군은 동서 약 5km, 남북으로는 약 2km 정도의 범위에 걸쳐 있다. 건조한 환경이기 때문에 시신이 대부분 미이라 상태로 발굴되었다. 중국 6조때부터 수, 당의 5백여 년 동안 귀족들의 가족 묘지였던 곳이다. 현재 투루판은 이슬람 교가 성하지만, 이 무덤들은 중국의 불교 양식을 갖추고 있다. 벽화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은 영국의 스타인이 다 털어갔다고 하며, 일부 유물이 투루판 박물관과 우루무치의 신강위그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당시 주민들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미술품, 생활용품, 여행증명서, 관용문서, 민간인의 탄원문서까지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재 공개되고 있는 묘 안에는 몇 개의 벽화와 불상이 있던 흔적 정도만 남아 있다.
12시 25분. 베제클리크 천불동을 향한다.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잠시 정차하였다.
박격달봉이 있는 박격달 산맥쪽에서 지하수가 용출한 후 흐르는 계곡이다.
계곡의 양 사면은 단단한 암석이 아니라 퇴적층으로 구성되어 동굴을 파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 화강암을 파내는 것보다 그렇단 것이다.
만불궁.
계곡 양사면에서는 풍화물질이 계속 매스 무브먼트를 하고 있다.
12시40분. 베제클리크 천불동.
계곡 아랫쪽으로 내려가면 절벽에 많은 동굴들이 만들어져 있다.
이쪽 말고...
저쪽에....
6~14세기 경에 지역 주민들이 만든 석굴이다. 약 83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57개가 확인된다. 그런데 천불동?
벽화만 40여 개에 달하여 투루판에서 동굴이 가장 많고 벽화 내용도 제일 풍부한 불교 석굴 유적이다. 아쉽게도 불교를 숭상하던 회홀고창국이 사라지면서 많은 훼손이 이루어졌다. 근세들어 문화재 도굴꾼들이 들끓으면서 약탈이 이루어졌지만 남아 있는 불상이나 벽화만으로도 세계 불교 유적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동굴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엄금". 谢谢合作.
내부 촬영이 안되니 외부 촬영만...
돈황의 천불동도 물이 가끔 흘러주는 물길을 배경으로 거대한 동굴군의 형성이 가능했다.
이곳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천불동도 마찬가지로 물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토대로 한 것이다.
현지 가이드가 온도계를 보여주었다. 55℃. ㅎㅎㅎㅎ
1시 30분. 화염 같은 열기 속에 화염산을 찾았다.
우마왕이 저 안에???
화염산 앞을 지나는 312번 고속도로. 화염산은 그대로 이지만 내 머리 속에서 화염이 이글거린다^^
너무나도 뜨거운 날씨. 투루판의 열기에 답사 열기가 더해지니 더 뜨겁다. 그래서 호텔로 대피하였다. 에어컨 속에서 시에스타를 조금 즐기고 열기가 수그러들 때 오후 일정을 지속하기로 한다.
5시 43분. 투루판 토도구 풍경구를 찾았다.
재밌게 생긴 차량들이 돌아다닌다. 꼬맹이 차. 삼륜차이다.
시방이 포도인 동네이다. 동네 뒷산의 뒷편으로 희미하게 박격달 산맥이 보인다. 이 동네의 풍요는 그곳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포도 덩굴로 덮이게 될 것이다.
농가. 이슬람 스따일.
수로 빨래터.
당나귀와 함께 하는 일상.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포도원.
수로의 물길이 대단허다.
햇볕이 워낙 강하니까 포도가 매우 맛있게 익는다고 한다.
손 닿으면 마음대로 따 먹으라 한다.
포도 기념 사진.
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
한 송이에 도대체 포도 알갱이가 몇 개가 달린 것인지... 세다가 포기했다.
땀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짜내지는 것만 같다.
포도가 너무 많다.
포도 동네를 떠난다.
뒤로 보이는 포도구.
6시. 투루판 시내의 민가 방문 시간을 가졌다.
여러 품종의 건포도.
양탄자의 세상.
빵굽는 시간.
달구어진 화덕 안쪽에 반죽한 난을 붙여두면 금세 금세 익어서 나온다.
마당 가운데를 지나는 물길. 생명줄이다.
민속 공연 시간도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라 시범을 보여주더니.....
함께 예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렵지 않아요...이러엏게~ 이렇게~
동네 골목. 뭐라고 써 있는 것일지...
동네 관청.
8시. 교하 고성의 실크로드는 어떠할까...
교하고성은 투루판의 서쪽 10km 정도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물의 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형태상으로는 하중도의 모습을 보인다. 섬과 같다.
하천의 침식 작용에 의해 섬의 주변부가 모두 30여 미터의 절벽을 이루어고 있어 방어 매우 유리한 형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의 토후로부터 거점으로 점찍혔을 것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곳에서 교하국이 번성했었다. 천산남로와 천산북로의 실크로드 경로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지로서 번성했었다. 남쪽에 오르내릴 수 있는 입구가 있다. 동서 300m, 남북 1650m 정도의 크기인데 내부에는 사원, 불탑, 불전, 관청, 감옥, 민가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그런데 건축물들을 벽돌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지표에서 아래로 파내려가며 만들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도시 전체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교하고성 남쪽의 입구에서 걸어 올라갈 수 있다.
고창고성에서와 마찬가지로 폐허가 반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와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이 없다. 버려진 도시, 유령 도시 분위기.
토사의 퇴적으로 구성된 지표였기에 공사가 그나마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교하고성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는 대원들.
목재 도구. 얘가 왜 여기서 나왔을까?
8시 25분. 햇님이 피곤하시단다. 넘어가시려 한다. 베이징 기준 단일 시간대 사용의 문제. 오후 8시 반인데도 해가 남아 있다니. 베이징으로부터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나타나는 현상이다.
흙 더미 폐허 더미.
역사를 느끼며 지리를 탐구하며 교하고성의 탐방로를 걷는다.
동문. 폐쇄되었다.
속에 스피커가 숨어 있다.
저 윗쪽에서 파내려와 이런 통로를 만든 것이다. 10여 미터 깊이를 파내었다. 최성기에 6천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던 공간이라 하니 대단하다.
하늘에는 달님만...
주변은 30여 미터 높이의 깎아지는 절벽을 이룬다.
뒤로 한 걸음 만 더~ 한 걸음만~
교하고성이 위치한 맞은편도 교하고성과 비슷한 높이의 단애를 이룬다. 그 사이를 물길이 흐르면서 깊은 골짜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9시 반. 늦은 저녁 시간이다. 양 한 마리를 잡았다.
자기, 아~~
부족장이 대표로 먼저 한 입 먹고, 고기를 자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더니 문화예술공연이 이어진다.
함께 하자고 한다.
그렇게 투루판에서의 하루가 저물었고, 배는 채워졌다. 즐거웠던 하루~ 끄읏~
'아시아 >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년 8월2일 실크로드의 우루무치에 들어섰다 (0) | 2020.09.13 |
---|---|
2006년 8월2일 실크로드의 투루판을 살피고 떠나다 (0) | 2020.09.13 |
2006년 7월31일 돈황에서 실크로드를 즐기다 (0) | 2020.09.12 |
2006년 7월30일 실크로드의 돈황에 빠졌다 (0) | 2020.09.12 |
2006년7월29일 서안의 실크로드를 보았다 (0) | 2020.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