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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백제로 가고 있습니다"

 

 

2017년 5월 27일에는 백제의 두 도시 답사를 하였다. 

그렇다. 백제의 두 도시이다. 공주와 부여.

 

서울 중동고등학교 지하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답사 차량에 몸을 던졌다. 06:30에서 조금 일행이 될 뻔한 분들을 기다리다가 출발한다. 남으로 남으로 저위도 지방으로 차는 달린다.

다른 지방에서 오신 분들과 공주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단다. 정안휴게소에서 한번 정차하였다. 지난 밤 몇몇 분들과 뱃속 괴롭히기를 한 후유증 때문에 내내 불편하였다. 머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쿠데타. 하지만 라면 한 그릇 먹으니 진정된다. 라면의 마법!

정안 휴게소는 '알밤휴게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공주, 부여 지역에서 밤이 많이 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공주종합버스터미널을 휘이 돌아간다.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 주차장으로 향한다.

 

금강교. 30여 년 전에 처음 와보았던 곳. 그리고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곳. 요즘 차량이 지나다니기에는 좁기 때문에 차량이 편도로 이용하고, 남은 부분은 자전거 도로가 되어 있다.

그렇게 백제에 도착하여 답사를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남으로 달려 공주에 도착, 공산성에서 공주 분지 일대의 답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공주보에 들렸다가 점심 식사를 하고, 우금치를 거쳐 부여분지로 향하였다. 그리고 성흥산을 올라 오늘의 답사를 마감하였다.

 

이날 들렸던 답사 경로와 답사 뽀인트들이다.

 

오늘의 답사를 시작했던 공산성과 공주보 일대의 인공위성 영상에 답사 경로를 그려보았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지도에 실린 공주 부분 확대도이다.

 

공산성을 올라 성벽과 성안 마을을 걷는 답사를 하였다.

 

공산성 성벽에 올라 내려다본 주차장의 모습. 주차장에서 오늘의 답사팀원들이 모였다. 건너편으로 상가 건물들이 보이나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활기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는 답사대원들. 입장료는 1,200원이다. 20명 이상이 되면 "단체요금"을 적용받을 수 있다. 1인당 100원씩 빼준다.

 

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된 것은 방어의 목적이 가장 컸다고 한다. 급경사 사면은 산성을 쌓고 방어하기에 적합했었으리라. 답사객은 공격하는 병사가 아니니 살살 올라간다.

 

UNESCO에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고 한다. 표지석.

 

역사가 좀 되었다 하는 곳을 가보면 각종 공덕비가 넘쳐난다. 인근의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제민천교영세비'가 눈에 든다. 이것은 일반 관리가 자신의 "공덕"을 "송덕"하는 것이 아니라 1817년에 발생한 여름 홍수에 제민천 일대의 제방과 교량이 붕괴되는 피해를 입자 일대를 복구하고 제민천교를 만드는데 공이 있는 10여 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라고 설명이 적혀 있다.

 

주차장에서 공산성을 올라 성문 위의 누각에 모였다. 이곳에서 민석규 박사님의 강의가 있었다. 인근 지역의 지형과 역사 등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협소한 편마암 분지를 이룬 곳이라 한 나라의 수도로서 사람들이 생활하기에는 불편하였을 것임에도 이곳을 수도로 선정한 것은 그만큼 방어의 필요성이 컷을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성문에서 북쪽의 금강변을 향하여 축성된 성벽이다. 깃발들.

 

어린 학생들이다. 단체로 나와 지도교사로부터 '소리'를 배우고 연습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열심이다. 남도 답사를 할 때면 종종 볼 수 있는 뿌듯한 모습. 기특하다.

 

성벽을 걸으며 아래 쪽을 보니, 또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입장하고 있다. 귀엽다.^^

 

성벽을 오르니 녹음과 바람이 모두 시원하게 느껴진다.

 

금강이다. 금강을 건너는 철교가 옛날의 '금강교', 서쪽의 다리는 새로 만든 '백제큰다리'이다.

 

언덕에 새로운 누각이 보인다.

 

금강철교가 놓이기 전에 배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18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면서 금강철교를 건설하였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공주갑부 김갑순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새로 만들어 놓은 누각. 이곳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소리'를 배우고 있었다.

 

답사객들은 금강변을 따라서 성벽을 걷는다.

 

새는 금강 위를 난다.

 

금강을 건너는 나룻터를 지키는 곳이었을 것이다. 공산성의 북쪽에 있는 공북루.

 

공북루에 올라 역사와 지리를 아우르는 강의를 듣고 있다.

 

'성안마을'이었을 곳에 있는 안내자료.

 

하지만 마을은 없고, 텅빈 공터만 남아 있다. 30여년 전에 왔었을 때는 잡초만 무성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공산성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체험. 활쏘기 체험장. 비용은? 웅진통보 1냥!

 

성내의 이곳저곳을 들러본다. '고지도로 본 공산성'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안내자료.

 

왕궁이 있었던 정확한 뽀인트는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추정지만 발견되었다.

 

연못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공주 구시가지를 북으로 흘러 금강에 합류하는 지류인 제민천이 범람하면 그 피해가 막심했던 것 같다.

 

공산성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백제의 병사들(?)이 성벽 방어를 위해 투입되고 있다. 투입되면서 여러가지 창술 시범을 보인다. 그림 그려진 옷이 아니라 조금 더 신경 써서 투자하여 진짜처럼 보이는 군복을 입고 시범을 보이면 관람객들이 더 좋아할 것 같다. 나도 그렇다. 중국 실크로드 여행 중에 보이는 시범조들 보면 참 열심히 한다는 생각을 들게 된다. 가욕관의 공연도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공연하는 젊은이들...

 

병사의 배치가 완료되었다. 관광객들은 병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공산성 아래 주차장 앞에 있던 버스 정류장 표지이다. Gong-Mountain fortress?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두대의 답사용 차량에 나누어 타고 공산성을 출발한다. 금강변으로 나갔다가 제민천을 따라 이동한다. 물을 뿜어내고 있는 시설이 보인다. 공주보이다.

 

공주보를 차량으로 건너 공주보사업소 건물 앞쪽의 주차 공간에서 4대강사업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누었다.

 

봉황 힘찬 날개짓을 왜 강물에서 하나 모르겠다. 구만리 장천에서 할 일이지.

 

말들 참 잘 만든다. '말'만...

 

서쪽에서 본 공주보의 모습이다.

 

공주보 제원

 

옆에는 기상관측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공주보는 물을 저장하여 보의 상류부 수위를 높이는 기능을 하며, 하천을 건너는 육상 교통로로서의 기능도 갖는다.

 

또한 수력발전도 한다고 한다.

 

조 아래에 수력 발전 시설이 있는 갑다.

 

발전 시설 쪽으로 유입되는 강물. 물색은? 참담하다.ㅠ.ㅠ

 

보에서 물은 왜 뽑아올려 다시 뿜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력을 생산한다는 것을 뽐내는 것인지....그냥 멋? 물을 식히는 중??

 

공주보 사업소의 건물은 근사하다.

 

2017년 6월 8일자 신문에 올라왔다. 6월 1일부터 공주보를 상시 개방하기로 했다고 한다.

 

 

12시 10분. 이동 경로의 문제 때문에 이른 점심을 들었다.

 

명태조림. 좀 짜기는 했지만 맛있었다. 바로 해서 나오는 밥도 맛있고.

 

공주 지역이 밤 생산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 밤이 좀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음료를 조금 시음해 보았다. 아~주 조금.

 

우금치를 걸어서 올랐다. 차량은 아래에 건설된 터널을 이용하여 통행한다.

 

우금치. 긴 역사의 현장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르면 탑이 보인다.

 

우금치 전적비이다. 전적지에 대한 안내문.

 

역사의 현장에서 구조선의 배열에 대해 논하고 있다. 지각 운동에 의해 땅이 갈라진 단열(fracture)을 따라 산지의 낮은 안부가 형성되고 그러한 곳은 험준한 산지를 넘는 교통로가 된다. 그러한 예의 한 곳이 우금치 되시겠다.

 

우금치의 분수계에 섰다. 물을 뿌려본다. 양쪽으로 갈라진다.

 

지금은 사람들의 통행이 없는 곳에 장승들을 세워 놓았다.

 

누가 몰래 장승들 옆에 개를 묻었다. 곧 없앨 것이라는 안내문이 옆에 있다. 또한 이런 것을 만드는 것은 불법이라는 계도 내용도 함께 있다.

 

우금치로 사람들이 다니지 않게 된 것은 아래 쪽으로 터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차들이 쓩쓩 달린다.

 

만수리 구하도. 구하도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새로운 유로는 대화원 쪽으로 형성되었다. 유로 변경이 하천의 하방침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하천의 유로 변경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금강과 합류되는 작은 하천이다. 용성천. 그 작은 물길이 새롭게 유로를 변경하여 흐르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하천이 흐르면서 침식한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각 운동의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용성천 양안의 절벽이 가파르다.

 

인근 산지에서는 한창 공사중이다. 어느 있는 집안의 묘지 조성일까?

 

중생대 백악기 퇴적된 역암을 살펴보는 답사원들. 만수리 구하도 지역에서는 역암 외에도 적색사암도 발견된다고 한다. 경상도 일대의 경상계 퇴적암과 같은 시기에 퇴적된어 형성된 것이라 한다.

 

돌 속에 자갈이 있다. 역암이 확실하다.ㅎ

 

과거 언젠가 물이 흘렀던 구하도. 지금은 논으로 개간되어 있다.

 

차가 달린다. 잠이 쏟아진다. 눈이 감겼다. 밤으로 만든 식품을 조금 먹으면 졸린가보다.

 

수도를 빼앗겼으니 국가의 운명이 걸렸다 생각했었으리라 그래서 방어에 최적인 공주를 수도로 삼았었다. 하지만 점차 나라가 안정되자 협소한 공산성의 한계를 느껴 웅진 시대를 마감하고 보다 넓은 평야를 품고 있는 부여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사비성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협소한 편마암 분지에 위치했던 수도를 넓은 화강암 분지 지역으로 옮긴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역사가 새겨진 곳에 왔다. 부소산성. 낙화암, 사자루 등을 답사하였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안내지도에서 부여 부분의 확대지도이다.

 

백제의 왕도 부여. 부소산성.

 

세계유산이다.

 

부소산성은 요렇게 되어 있다.

 

길을 따라 걷는다. 길옆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 나온다. 좋다.

그런데, 계속 걷다보니 시끄러운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재능기부 중이었단다. 좀 시끄럽게 기부하고 있었다.

 

낙화암 쪽을 먼저 찾았다. 백화정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삼천 명쯤 되겠다.

 

백화정 아래 쪽이 낙화암이다.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던 날 백제의 여인들이 적군에게 사로 잡혀 치욕스런 삶을 이어가기 보다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졌던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옆의 비석에 적혀 있다. 레알?

 

셀피나 하나 박고....

 

요 쪽으로 돌아가면..........

 

고란사가 나온다. 그 고란사다. 달밤이 아닌 것이 아쉽구나.

백~마강~에 고요한 다~알 밤에 

고란사에 종소리~이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처~언 궁녀를~

 

아담하다. 예쁘다. 기와불사다.

 

전설 속의 샘물이다.

 

금강변의 절벽에 기대어 있는 아담한 절집.

 

걷는 것을 싫어 하지만 언제 또오랴 싶다. 부지런이 발을 옮긴다. 부소산 정상에 사자루가 있다.

 

지난 달의 답사에서 누각, 정자 등을 사진으로만 찍고들 돌아서는데, 올라서 보라는 조언을 들었었다. 올라가 금강인지 백마강인지 하는 쪽으로 눈을 두어 본다. ㅠ.ㅠ

나무님들께서 완벽하게 가려주신다. 내려간다.

 

원래는 이렇게 보여야 했나보다. 왼쪽부터 부산, 금강, 왕흥사지, 백제문화단지라고 적혀 있다. 부여분지 내부의 저기복 구릉대의 모습이 대충 보인다. 특히 부산은 들 한가운데 불쑥 솓아 있는 독립 구릉인데, 한자로 뜰 '부' 자를 쓴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그래서 물에 떠내려온 것이라는 전설도 있고.

 

사자루를 나서며 아쉬움에 셀피 하나 남긴다. 노출 차이가 심하여 각 잡는데 애먹었다. 머리털이 안보인다...ㅠ.ㅠ

 

저 문을 나서면 부소산성과 또 이별이다. 다음에 보자꾸나.

 

부소산성을 나서 성흥산으로 향하였다. 

 

성흥산에서는 대조사와 성흥산성(가림성)을 답사하였다.

 

대조사이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좀 올라야 한다.

 

큰 새가 날아든 곳이라 대조사라 하였다고. 미륵석불이 유명하다.

 

계단을 오를 때 왼쪽으로 보이는 자그만 종각이 예쁘다.

 

원통보전. 그 앞의 석탑도 유명한 것이라고 한다.

 

원통보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

 

원통보전 뒤편에 서 계신 부처님. 자연 상태의 화강암괴 일부를 조각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 고려 시대 호족들의 정치적인 욕심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부처님이 많이 아프시다. 보수 공사중이다.

 

부처님 바로 옆의 바위에 낙서한 이 분들은 누규?

 

인간들이 그래 놓았음에도 부처님은 무표정~

 

샘에 얽힌 재미난 사연.

 

대조사가 위치한 성흥산에는 산성이 있다. 백제의 것이란다. 표지판이 많다.

오늘 하루에 오르는 세번째 산성이다. 공산성, 부소산성, 성흥산성(가림성).

 

 

화강암 산지. 암벽이 드러나 있다.

 

위쪽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인다. 와~

크다. 그늘이 넓다. 향토유적으로 지정해 놓았다. 보통은 보호수로 지정하는 것 같던데..

또 전국으로 흩어져야 하기에 이곳에서 오늘의 답사를 마감한다. 역사와 지리가 함께 하는 하루였다.

 

2017년 5월 27일. 편마암 분지인 공주 일대와 화강암 분지인 부여 분지 일대의 답사 경로도. 카메라 아이콘이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니 그곳이 이동을 멈추고 '답사'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경 중에는 화장실이 궁금하여 안성휴게소에 잠시 정차하였었다. 그리곤 서울로!

 

중동고등학교 지하주차장을 빌려 차를 맡겨 놓았었다. 밤에 도착하여 차를 빼려 하는데, 입구의 차단기 전원이 꺼져 있어 황당했다. 오늘의 해프닝~

 

한 두달에 한번 이런 답사가 있기에 일년이 후다닥 가는 것 같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하는 것 같다는 자기 위안도 되고...

 

(투 비 콘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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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5-06 : 동해안 지형 답사 - 현무암, 화강암, 석회암

 

 

9월4일 밤에 서울을 출발하여 속초에서 잤다. 설악산 아래에서...
 
 
 
그리고 5일 토요일부터 답사 시작. 속초에서 시작해 동해안을 따라 주욱 속초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서울로...
인솔 및 해설, 강의는 민석규 박사님이 맡아주셨다.
 

 

고성, 속초 방면에서의 이동경로이다. 운봉산 - 미시령 옛길 - 속초의 석호들

 

주빙하 환경에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화석 지형인 현무암 주상절리와 암괴류를 볼 수 있는 운봉산(강원도 고성권 토성면 학야리 164-8 일대)으로 먼저 달렸다.

주변은 기반암이 화강암이지만 운봉산 일대만 신생대 제3기 현무암이 분포한다.

다른 지역의 현무암에 비해 삭박된 정도가 심하다고 하며, 그 결과 주상절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특한 암설 지형(애추 및 암괴류)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지역의 현무암에 대해서는 아래 사이트 참고.

http://www.dmzgeopark.com/sub02/sub02_03_02.php

 

운봉산의 모습. 사면의 암괴류가 이곳 저곳에 보인다.

 

암괴류의 모습.

 

답사중인 대원들의 모습.

 

 민박사님은 열심히 강의해주시고...

 

 나는 셀피 만들고...

 

위성 영상으로 본 운봉산

 

 

미시령 옛길을 따라 미시령 계곡을 올랐다. 

 

울산바위가 근사하게 보인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돌산. 마그마의 유물.

 

 옛길이다. 길을 오가는 차량들이 격감하면서 사람들로 북적이던 휴게소도 문을 닫았다.

 

넓은 주차장은 그대로 이고, 간이 화장실이 운영되고 있었다. 사진 속의 뚜껑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된다. 두 가지를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에서 구멍을 사용하지 않을 때 막아두면 시각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될 것 같다.^^

 

날이 좋지 않아 동해안 쪽의 조망이 그리 밝지 않다. 같은 화강암이지만 풍화와 침식을 견디고 남은 곳에는 울산바위를 이루고 있고, 풍화가 심하게 진행된 곳은 평지로 남았다. 속초에서 농경지로 이용되었던 학사평(鶴沙坪)이 그곳이다. 하지만 기반암이 드러나고 토양층이 얇기 때문에 비옥도는 떨어지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딱딱한 벌판이라고 '딱사벌'이라 불렸는데, 학이 내려앉은 곳이라는 의미의 학사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답사 일행의 일부. 강의 준비중.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들은 동서 방향의 단층선으로 따라 형성된 계곡을 이용하는 것이라는 말씀.

 

영랑호변의 리조트를 들렀다. 전망대가 있는 고층에 올라가 주변을 조망하고 영랑호변의 암괴를 관찰하였다. 

다음에 청초호변의 엑스포 타워를 올랐다. 오랬동안 관리가 안되었던지 자물쇠를 여는 열쇠에 문제가 있어 조금 황당하였다.

그리고 유명한 물회집에서 점심 식사. 나는 섭해장국을 주문하였다.

 

 

영랑호. 비가 제대로 내리기 시작하여 답사를 불편하게 한다. 

 

비에 젖은 영랑호...

석호: 사주와 같은 작은 장애물에 의해 바다로부터 분리된 연안에 따라 나타나는 얕은 호수를 말한다. 해안에서 연안류의 작용으로 사취(砂嘴), 사주(沙柱) 등에 의하여 바다와는 전연 분리되어 형성된 호수이다. 이는 하천의 유입으로 점차 염분이 적어지고, 주변의 식물에 의하여 소택지(沼澤地)화 되어 중국에는 육지화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천연호의 대부분은 이에 속하고, 강릉 이북의 해안에 많이 발달되어 있다. 경포, 청초호, 향호, 매호, 화진포, 소동정호, 광포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석호는 수심이 얕고 바다와는 모래로 격리된 데 불과하므로, 지하를 통해서 해수가 섞여드는 일이 많아 염분이 높다. 바다와 수로로 연결된 것도 있으며, 담수호에 비해서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부영양호가 많다.(출처: 네이버)

 

범바위. 화강함 풍화 지형이다. 토르라고 한다.

토르는 참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북유럽 신화에도 나오고 단위이기도 하고, 러시아의 미사일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형 용어이다.

토르는 차별적인 풍화작용을 받은 결과 그 지역의 기반암과 연결되어 지표에 노출되어 형성된 독립성이 강한 암괴 미지형을 말한다. 형태적으로는 똑바로 서 있는 석탑이라는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는데, 이는 본래 영국의 다트무어(Dartmoor) 지방의 화강암괴를 지칭하는 지방어(켈트어)였다가 현재는 세계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토르 [tor] (자연지리학사전, 2006. 5. 25., 한울아카데미)
 
토르의 형성과정을 이야기할 때 흔히 사용되는 그림이다. 화강암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렇게 저렇게 속병이 들어서 망가지고 남은 흔적이 토르이다.

 

 

 

영랑정이라는 정자가 예쁘게 만들어져 있다.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문화해설을 자원봉사로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바로 인접한 청초호로 간다.

 

속초 엑스포 타워이다. 예쁜 엉덩이를 갖고 있다.

 

 

속초 관광안내지도.

 

엑스포 타워에 오르면 청초호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속초항이 예전에는 석호인 청초호 안쪽에 있었는데, 석호 밖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퇴적이 진행되어 석호의 크기가 작아지고 얕아졌기 때문에 항구로 기능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리라.

 

 

속초의 아주 유명한 물회집이다. 내리는 비를 참으며 기다리다가 겨우 입장을 하였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다른 손님들에 방행된다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자꾸 그랬다. 밖에 비가 오는데? 이래서 손님들이 몰리는 식당에 대한 기억은 자꾸 안좋은 쪽으로 남게 된다. 여튼...

찾는 손님들이 많으니 일일이 식탁을 치우고 닦고 하는 시간이 아까우리라. 그래서 식탁 위에 비닐을 미리 잔뜩 덮어두고 한번에 한장씩 벗겨내며 사용하는 것 같았다. 오후였는데 이 정도가 남았으면 오전엔 얼마나 깔아두는 것인지...

 

물회다. 이 식당의 대표 메뉴.

난 섭해장국에 대한 기억이 오래전부터 남아 있어 그것을 주문했다. 속이 안좋다고 죽을 시킨 일행분도 계셨다.

 

점심 식사후에는 양양 인구리 해안의 타포니 지형과 인근의 휴휴암 해안에서 화강암 풍화 지형을 답사하였다.

 

 

인구리. 염풍화 작용에 의해 형성된 타포니를 바다를 향한 바위 표면에서 볼 수 있다.

 

죽도 안내문. 

 

어촌계가 변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타포니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화강암처럼 광물입자가 큰 광물에서 잘 발달하는 것이 타포니라고 한다. 광물입자와 입자 사이의 물질이 풍화되면 커다란 광물입자가 분리되니 이처럼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모양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Tafoni (singular: tafone) are small cave-like features found in granular rock such as sandstone, granite, and sandy-limestone with rounded entrances and smooth concave walls, often connected, adjacent, and/or networked. They often occur in groups that can riddle a hillside, cliff, or other rock formation. They can be found in all climate types, but are most abundant in intertidal areas and semi-arid and arid deserts. Explanations of their formation include salt weathering, differential cementation, structural variation in permeability, wetting-drying, and freezing-thawing cycles, variability in lithology, case hardening and core softening, and/or micro-climate changes and variation (that is, moisture availability). Tafoni have also been called fretting, stonelace, stone lattice, honeycomb weathering, and alveolar weathering. Tafoni features have been found across the Earth, with dramatic forms found in the Jodhpur-Ajmer section of India's Thar Desert, Petra, Jordan, Coastal California and Australia, and even in the Arctic regions, and Antarctica (Paradise 2011). The etymology of the word "tafoni" is unclear. Tafoni may come from the Greek word taphos, "tomb", or it may stem from a Corsican or Sicilian word for "holes", taffoni, or from tafonare meaning "to perforate". The earliest known publication of the term “tafoni” was in 1882. Conventionally, the word 'tafoni' is the plural form of 'tafone'.(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afoni)

 

 

주말이라 그런지 휴휴암을 찾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휴휴암에서의 답사 이동 코스.

 

우리 일행은 법당이 있는 곳은 그냥 주욱 지나치고 바닷가로 나간다.

해안에는 거대한 토르와 너럭바위, 화강암 돔, 나마(gnamma) 등의 다양한 화강암 지형을 관찰할 수 있다.

 

토지를 둘러싼 이권관계가 복잡한 것 같다. 지금은 해결되었으려나....?

 

방생산업이라고 밖에는....

 

 

 

 

 

화강암으로 구성된 넓은 너럭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단층선 및 풍화의 흔적들이 보인다.

 

나마(gnamma)는 화학적 풍화작용에 의해 기반암의 표면에 형성된 접시 모양의 풍화혈(와지)이다. 화강암의 기반암 표면에 가장 잘 형성되며, 주로 벽면이나 사면상에 형성되는 타포니와 구별된다.

 

화강암 단열

 

바위 표면에 밭고랑 형태의 홈이 보인다. 그루브(groove)라고 한다. 화강암의 지중 풍화 과정에서 형성되는 미지형이다.

 

발가락 바위? ㅎㅎㅎ

 

방생 산업의 결과일까? 연화법당이라 불리는 너럭 바위 부근에 물고기가 가득하다.

 

동해안을 따라 평지가 이어진다. 평지에서는 높은 곳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찾은 건물. 안에서는 무슨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관계자가 아니니 들어가지 않고 건물 외벽의 계단을 따라 오르고 올랐다. 그리고 이쪽 저쪽을 조망하였다.

 

 

석호인 향호 변에 위치한 강릉시청소년해양수련원. 

 

 

정동진이다. 강릉에 오면 정동진을 들러볼지어다. 이날은 시간이 늦어 후다닥 지나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안단구.

 

 

다들 둥근 자갈 찾기를 하고 있다.

 

 

인근에 건물 공사를 위해 땅을 파헤친 노두가 있었다. 페이스북에 좀 아는체 했다가 많이 아는 사람한테 쪽 당한 기억이 아직도 난다(ㅠ.ㅠ).

 

날이 저물었다. 비는 온다. 오늘 밤을 지낼 숙소가 문제다. 결국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깃발은 꽂았지만, 많이 방황하였다. 처음 예상했던 곳에는 지낼만한 곳이 없어서, 삼척 시내를 들어갔더니 일행중에 아주 어린 멤버도 있는데 보여주기 거시기한 상태라서 기피 대상이 되었다. 대충 시내에서 식사를 하면서 고민하다가 시내에서 여관업을 하시는 분의 소개를 받아 괜찮다는 펜션을 찾아갔다. 해변의 산봉우리 부근에 있다. 겨우 찾았다.

 

 

 

건물을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깔끔하고 좋았다. 여러 명이 대충 씻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흩어졌나?

모여서 떠든 것 같기도 하다. 어두운 밤에 비탈길을 내려가 술과 안주거리를 마련해서 올라왔다. 숙소 가격은 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9월 6일의 이동 경로이다. 먼저 아침 식사를 해변의 식당에서 하고, 성남동에 발달한 돌리네群을 답사하였다. 곡류천이 절단된 곳에서 시내를 조망하고 동굴박물관을 들렸다. 그리고 추암해변.

 

삼척 시내 부분 확대.
 

 

아침에 깨어 창밖을 보니 눈에 들어온 풍경. 비가 밤새 내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병안에 고인 물은 얼마되지 않았다. 이것이 병목현상일까? 

 

지난 밤에 들어오면서는 안보여서 몰랐는데 이 펜션은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항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멘트 공장과 선착장도 보인다. 그렇다. 삼척은 시멘트 공업 발달 지역이라고 학교에서 가르친다. 사진 속의 공장은 동양시멘트 삼척공장이다.

시멘트의 원료는 석회석이고, 삼척에 우리는 석회석 풍화 지형을 보러 온 것이었다. 

 

해변에 내려가 찾은 식당. 아침 식사 메뉴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옴마니반메움 음악을 들었던 것은 기억난다. 

 

성남동 일대에 펼쳐져 있는 돌리네群 답사 경로이다. 걸어다닐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돌리네들이 하늘에서 본 영상에는 잘 구별된다.

 

돌리네. 노출된 석회암이 빗물에 서서히 녹으면서 형성된 낮은 저지대가 돌리네이다. 밭농사로 이용된다.

 

 

 

삼척고등학교 이전 공사 현장이라고 들은 것으로 기억한다.

 

동굴탐험관과 동굴박물관.

 

석회암의 풍화 지형인 라피에.

 

페인트 흘러내리는 것 같은 모양인데, 저것이 동굴박물관이란다.ㅎㅎㅎㅎㅎㅎㅎㅎ

 

석회암 풍화 지형 및 삼척 시내를 흐르는 오십천 주변 지형 변화에 대한 강의 진행중.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지형도의 삼척 도면 중 일부이다. 오늘날 오십천의 유로가 변경되었다. 지도에 화살표한 곳으로 유로가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동그라미가 있는 쪽의 구하도는 매립되어 신시가지 조성에 이용되었다.

 

 

다음 코스는 추암이다.

 

 

해변이다. 날씨 봐라... 바람이 거세니 파도가 높다.

 

에? 왠?

 

기반암이 석회암인 해변이다. 절리가 무진장 발달해 있다. 

 

파도는 쎄다. 그 결과 부서질 놈은 부서지고 남을 놈은 남아 시스택을 남겨 놓았다. 시스택이 무엇?

 

 

이거다. 이것이 추암. 촛대바위.

 

김홍도 아저씨가 이곳에서 감동 먹었나보다. 작품을 남겼다. 

金剛四郡帖 - 凌波臺라는 작품이다. 전망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김홍도가 본 촛대바위이다. 오늘날보다 남아 있는 바위가 더 많다. 그 사이에 파랑에 의해 침식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겠지. 오스트레일리아에도 나름 이름있는 시스택이 있다. "12사도 바위"라고. 원래는 "엄마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라고 이름지어졌던 것이란다. 그런데 좀 있어 보이기 위해 12사도 바위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그 12개의 바위들도 지금은 8개만 남아있다고 한다. 하나둘 파랑에 부셔져 사라진 것이다. 이런 바위들을 시스택이라 한다. 

 

남겨보자.

 

파도 봐라. 시스택 다 죽겠다. 

 

이것은 사빈. 모래 해변이다. 흔히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 공간이다. 여름에.....

 

 

해변에 이렇게 대피 방향 표지판이 있다. 평소에 미리미리 확인해두어야.

 

화장실에서 재밌는 장면을 목격했다. 석회질이 많은 모래가 많이 날려왔기 때문일까? 석회동굴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종유석의 형성 장면이다. 천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유석이 자라고 있다.

 

 그리고 그 물방울이 떨어지는 화장실 바닥에서는 석순이 자라고 있다.^^

 

다음 답사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해산하였다. 달렸다. 서울로.


 
 

 

대충 이 정도로 답사가 진행되었던 것 같다. 1년이 지나서 기록을 하려니 막막하다.

다음부터는 답사 정리를 미루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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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7일(수)의 이동 경로. 괴산을 떠나 음성 지역 답사를 하고 진천을 거쳐 귀경하였다.

 

넓은 진천분지의 북동부는 음성군. 남서부는 진천군에 속한다.

진천분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고.

http://webbook.me.go.kr/DLi-File/F004/000/140210.pdf

 

27일 아침이 밝았다. 늦잠을 자도 되는데, 그럴수록 잠은 일찍 깨더라.

'방송출현 맛집'에서 올갱이해장국으로 아침 해결.

괴산을 뜬다.

 

음성군청을 목적지로 했는데, 가장 큰 길인 '시장로'가 막혔다. 장날이라고 도로를 통제하고 장이 선다. '포터' 트럭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어서 판을 벌리고 있었다.

음성군청을 찾았는데, 네비게이션의 지도에 향교가 보인다. 음성향교 - 수봉초등학교 - 음성군청 - 장터 순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미타사와 가섭사, 양촌권근 3대 묘소를 들렸다가 진천으로 향했다.

 

음성현지도(1872년지방도)

 

음성향교. 위의 지도에 '향교'가 표시되어 있다.

 

홍살문. 하마비.

 

역시 닫혀있다. 역시 담넘어로 카메라 디민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향교마다 은행나무가 있다. 음성향교의 은행나무에는 은행이 엄청 달려 있다.

 

공덕비들. 줄을 서시오~~~

 

향교 서쪽에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음성현지도에 표시되어 있어 혹시 관련 유적이나 문화재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수봉초등학교에 들렀다.

 

역시 개교 100주년은 기본이다.

 

옛지도와 관련되는 유적이나 문화재는 찾질 못했다. 아름다운학교 뽑기대회? 별 것이 다 있었다 싶다.

 

군청이다. 규모가 엄청크다. 문화홍보과에 자료 제출받으러 동행자가 올라갔다. 3층이니 올라갔을 것이다.

 

꽤 넓은 주차장이 세 곳이나 된다.

 

지진가속도 계측시스템이 군청 앞의 공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2013년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아래 링크 참조.http://www.jbknews.co.kr/news/view.asp?msection=5&ssection=8&idx=66580

http://usjachi.com/detail.php?number=12657&thread=27

활력을 위해 담배피는 시설도 있다.

 

음성읍을 지나는 음성천의 일부구간을 복개(1994~1997년 공사)하여 주차장으로 이용한다. 이용료를 따로 징수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좋다.

 

1997년에 음성천을 복개한 구간이다.

 

장날이라고 하여 장구경을 나섰다.

 

껍데기, 닭발 요리를 준비중이시다. 모델료 내야 한다고 자꾸 말씀하셔서.......도망쳤다.

 

옛지도에 음성의 동쪽에 수정산이 있고, 정상부에 수정산성이 표시되어 있다. 네비게이션이 수정산성을 입력하고 달렸다. road end.

수정산과 수정산성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더라.

아래 링크 참조. 정리가 아주 잘되어 있다. 훌륭한 블로거들 참 많다. 좋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LKA&articleno=17181637&categoryId=730139®dt=20110313202426

 

가섭산 미타사를 향했다.

 

우와~~~~~~~~~~~~~~~~~~~~~~~

 

우와와아~~~~~~~~~~~~~~~~~~~~

 

납골묘였다. 거대한 지장보살께서 보살펴주시는.

 

셀피.

 

동양최대크기의 지장보살 입상.

 

혹시 금박을 입힌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진짜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극락전에서 법회가 한창이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630년(신라 진덕여왕 8)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고증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은 전하지 않는다.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여 명으로 적군을 물리치자 나라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그러나 1742년(영조 18)에 불이 난 뒤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1964년 수덕사에 머물던 비구니 명안(明岸)이 중창을 시작하여, 이듬해 4월 8칸의 법당을 세웠다. 이 때 절터에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백자 조각이 많이 수집되었다. 1973년에는 경내에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상이 출토되었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1979년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우고, 1980년에 선방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삼성각·선방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아미타삼존불과 극락후불탱화·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폐사된 절터에 버려져 있던 석조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1964년 충주시에 사는 한 무당(巫堂)이 이 석조불좌상에 대한 꿈을 꾸고는 석불을 가져가려고 산 밑까지 옮겼다가 갑자기 심신이 괴로워져서 운반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 뒤 산 아래 비산리 마을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다시 절터로 옮겨달라고 하므로 마을사람들이 다시 원래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명안이 이 절에 머물며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절에서 700∼800m 떨어진 곳에 있는 미타사마애불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거대한 화강암 동쪽면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얼굴과 어깨가 두드러지게 강조되었고 머리가 크며 관모를 썼다. 상호는 풍만하나 눈과 입의 표현이 간략하며 코도 납작하다. 바위 높이는 535cm이고 불상 높이는 405cm이다. 이밖에 1976년 법당 앞 채소밭에서 발굴된 지름 170cm의 초대형 맷돌이 전하는데, 아랫부분만 남은 것으로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타사 [彌陀寺] (두산백과)

 

 

 

가섭산의 다른 사면에 위치한 가섭사로 달린다. 미타사는 산자락의 끝부분 완경사지에 입지하고 있지만, 가섭사는 정상부에 가깝다. 급경사를 올라간다. 운전하기 무서웠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365년(공민왕 14)에서 1376년(우왕 2) 사이에 나옹(懶翁)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벽암(碧巖)이 중건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응진암(應眞庵)이라 불렀다. 1938년에 불탄 뒤에는 주지 윤원근(尹元根)이 중건하였다. 1985년 미륵석불을 조성하였고, 1986년 대웅전이 무너져 위치를 옮겨 지금의 자리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었다. 1990년 삼성각을 개축하였고, 요사를 옛 대웅전 자리에 지었으며, 1988년 일주문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의 극락보전과 3칸의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높이 90㎝의 아미타여래좌상은 음성읍 용산리 상봉악사(上鳳岳寺)가 폐사되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과, 음성군 감우리 성주사(聖住寺)가 폐사된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그 재료는 나무라는 설과 싸리나무로 엮어서 만든 부처라는 설이 있지만, 현재 개금되어 있어 확인할 수가 없다. 이 밖에도 6폭의 탱화와 1930년에 주조한 종, 조선시대에 만든 길이 150㎝의 석조(石槽)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섭사 [迦葉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인데 금박으로 인해 정확한 재료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삼성각일 것이다. 절벽에 붙어 있다. 멋지다.

 

가섭산 정상 가까이의 급사면에 입지하였기에 음성읍내 쪽으로의 전망이 아주 좋다.

 

양촌 권근 3대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 묘역은 1만8000평 정도로, 권근을 비롯하여 그 아들인 권제(權踶), 손자인 권람(權擥)의 3대 묘소가 함께 있다. 묘소는 작은 구릉 위에 위치하며 맨위 권근의 묘부터 차례대로 내려썼다. 대개 봉분의 높이는 180㎝·둘레 2,500㎝이며, 석상·묘비·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문인상을 세웠다. 구릉 아래 좌측 평지에는 신도비가 보호각 안에 있으며, 우측으로 300m 아래에 사당이 있다.

권근의 신도비는 1447년(세종 29)에 세웠는데 비문은 이개(李塏)가 짓고 서거정(徐居正)이 썼으며, 권람의 신도비는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권반(權攀)이 글씨를 썼다. 권근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권제(1387∼1445)의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 또는 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로 권근의 둘째 아들이며, 사헌부감찰·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권람(1416∼1465)의 자는 정경(正卿), 호는 휴한당(休閑堂)이며, 시호는 익평(翼平)으로 권제의 아들이며,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앞장섰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촌권근삼대묘소 [陽村權近三代墓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은 언덕 위에 3대 묘가 있다.

 

사당. 멋지다.

 

신도비와 비각.

 

열심히 일한자, 먹어라. 점심 때가 되었다. 꽤 유명하고 큰 식당이다. 유명해서 그런지 간판도 보이질 않는다.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질 않아도 손님들이 몰리니까 밖에 대문짝만한 간판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간판이 요렇게 쪼꼬만하다.

선지국 먹자고 갔는데, 난 내장탕을 시켰다. 눈치보니 내장탕이 대표메뉴 같아서. 들어온 다른 손님들 대부분 내장탕을 시키길래, 따라하기. 괜찮다. 하지만 비싸다. 이것이 일만원 하고도 이천원을 더 받는 내장탕이다. 읍 단위의 비싼 식당인데도 손님들이 넘쳐난다. 큰 식당의 많은 자리가 부지런히 순환된다. 하지만 난 쌍문동 한우마을의 6천원짜리 내장탕이 더 좋다.

 

먹고 났으니 가자. 진천으로 가자. 농다리로 가자.

 

생거진천, 들어본 유명한 문구이다.

충청북도 진천에 사는 허주부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시어머니가 곳간 열쇠를 안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시어머니는 곳간에 아무것도 없어서 어딜 갈 때에도 곳간 열쇠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다녔다. 허주부의 딸은 ‘곳간에 아무것도 없으니 열쇠를 안 주는구나!’ 깨닫고 남편과 열심히 일을 했다. 일한 만큼 소득을 올리니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시부모가 돌아가시고 남편 또한 세상을 떠나자 허주부의 딸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길을 떠났다. 허주부 또한 ‘이것이 남편을 잃고 어떻게 사나!’ 하고 궁금하여 딸을 보고자 길을 나섰다. 죄전고개를 넘어가던 허주부가 힘이 들자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진천서 젊은 유생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마침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고개를 올라오자 유생은 여인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뜰 수가 없으니 눈 좀 불어 주시오.” 하였다. 이에 여인은 유생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허주부가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제 딸이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일로 허주부는 ‘저런 괘씸한! 외간 남자하고 두 번이나 입을 맞춰!’ 하면서 오해를 하게 되었다. 허주부는 딸이 집으로 돌아오자 노발대발하면서 가라고 호통을 치며 그 집 귀신이 되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연유도 모르고 남편을 원망하며 겨우 딸을 하룻밤 재워 보냈다. 허주부의 딸은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낙방하고 돌아오던 유생을 만났다. 유생은 “지난번 내 눈을 불어 주던 여인이 아니오?” 하며 “나는 아직 장가도 못 갔으니 같이 삽시다.” 하였다. 그리하여 허주부의 딸은 유생과 함께 진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허주부의 딸은 아들도 낳고 딸도 낳아 잘 살고 있는데, 용인에 살던 자식이 건장하게 자라서 외갓집에 와 어머니를 찾았다. 외할머니가 “네 어머니는 진천으로 시집갔느니라.” 하고 알려주자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가서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천에 있는 아들딸들도 어머니를 뺏기고 싶지 않자 용인 자식과 진천 자식 사이에서 싸움이 났다. 그러자 원님이 “살아서는 진천에서 거하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거하라!”는 판결을 내려 주었다. 여기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진천 지방은 예부터 평야가 넓고 비옥하며, 가뭄의 해가 없어 농업 경영이 순조로워 살기 좋은 곳이기에 생거진천 사거용인’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생거진천 유래」 [生居鎭川 由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진천 농교(농다리)

 

공갈 폭포. 물이 없다. 세금으로 물 퍼올려 산비탈에 흘려버리면 돈이 나오냐? 건너편에는 초평저수지가 있다. 그 물을 끌어다가 공갈 폭포를 만드는 것일 것 같다. 아마도.

 

농다리.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다리'라고도 한다.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이다. 30㎝×40㎝ 크기의 사력암질 자석(紫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으나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원래는 28수를 응용하여 28칸의 교각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양쪽 2칸씩이 줄어 24칸만 남아 있다. 그 위에 길이 170㎝, 내외 넓이 80㎝,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 1개나 길이 130㎝, 넓이 60㎝, 두께 16㎝ 정도의 장대석 2개를 나란히 얹어 만들었다.

교각에서 수면까지 76㎝, 수면에서 하상까지 76㎝로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로 하상이 높아졌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천 농교 [鎭川籠橋] (두산백과)

 

다리를 건너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되돌아나와 차로 들어간다. 빗방울이 굵다.

비가 온다고 그냥 서울로 갈까 하는 의견을 내는데, 기각시켰다. 김유신 출생지 이야기를 음성에서 진천으로 오는 내내 했는데 그냥 갈수는 없다. 빗속을 달렸다. 둘이서.

 

요기다. 입구를 지나쳤다가 되돌아왔다. 직진본능. 네비게이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구를 일찍 나가버리거나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 동행자를 불안하게 했다. 어쨓든 직진은 잘하니까....☞☜....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안내.

 

 

 

 

탄생지는 이곳이나 태실은 다른 곳에 있다. 그런데 태실이 뭔데?

아래 링크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78686

왕자도 아니면서 태실을, 김유신의 미친 존재감.

아래 링크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4240

 

진천현 지도. 진천만 빼먹기 그러하여 그냥 추가한다.

 

서울로 달렸다. 새로 개통된 강남순환고속도로를 처음 이용해보았다. 양재IC에서 진입하는데 차가 많아 애먹었다. 애먹을 것도 없지만...신호를 여러번 대기해야 했다. 땅굴로 들어가 금방 관악 출구로 나왔다. 서울대 정문 앞이 공사판이었다.

 

집에 왔더니, 인사가 '옥수수 안사왔냐' 였다. 괴산에 다시 가야할 것 같다.

ㅠ.ㅠ

 

 

 

2016년 7월 27일(수)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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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해서 이현군 박사와 괴산 지역 답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지금은 괴산군 하나이지만 옛지도를 토대로 하면 괴산, 청안, 연풍 세 지역을 1박2일로 답사를 하게 된 것이다.

 

7월 26일(화) 괴산 일대에서 필요한 지역을 답사하고 청안을 거쳐 연풍을 지나 다시 괴산으로 돌아왔다.

 


중부 내륙 지방은 고추? 괴산군도 음성군도 고추를 지역 특산물이라며 상징으로 삼고 있다.

괴산 고추.

 

음성 고추.

 

괴산군의 지역브랜드 이미지에서 고추만지며 자랑하고 있는 이는 임꺽정이다.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가 괴산사람이란다. 이번 답사의 시작 지점인 이탄유원지 내의 제월대 앞에 문학비가 건립되어 있다.

 

 

1902년에 편찬된 괴산읍지에 포함되었던 지도이다.(옛지도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가져왔다.)

 

첫번째 답사지. 이탄 유원지에 제월대 그리고 고산정이 있다.

 

괴산 고산정 및 제월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충청북도 기념물 제24호. 1596년(선조 29)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유근(柳根)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별서(別墅)를 꾸며 만송정(萬松亭)이라 부르다가 광해조에 이르러 어려운 정치를 피하여 이곳으로 하향, 고산정이라 개칭하였다. 맑은 냇물이 발 아래로 굽어보이는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동남에는 제월대(霽月臺)라 이름한 암반이 있어서 정자 남쪽에 전개된 야산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인조 때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올 때 유근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가 시문(詩文)의 교류가 두터워 태화가 「고산정사기(孤山精舍記)」를 지어 보내니 지금까지 명문(名文)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현판에 새겨 정자 안에 걸어놓았다. 그 밖에도 사부사(謝副使)가 지어 보낸 「만송정팔경시(萬松亭八景詩)」가 있는데, 만송정팔경은 일명 고산팔경(孤山八景)이라고도 하며, 만송정을 비롯하여 영객령(迎客嶺)·제월대·관어대(觀魚臺)·영화담(映花潭)·황니파(黃泥坡)·창벽(蒼壁)·은병령(隱屛嶺)의 여덟가지 경관을 일컫는다. 정호현판(亭號懸板)은 이원(李元)의 글씨이고, 「호산승집(湖山勝集)」의 현판은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괴산 고산정 및 제월대 [槐山孤山亭─霽月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산정 아래로는 달천(괴강)이 흐르고 있으며 건너편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분지 지형 내에 위치한다.

 

다음으로 괴강관광지였다. 한창 공사중이다. 찾아보니...조감도만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괴산읍내로 향하였다. 괴산향교 - 읍사무소 - 도서관 - 경찰서 순으로.

 

먼저 괴산향교를 들렀다.

 

홍살문이 반겨준다. 날 더운데 고생 많다고....

 

말에서 내렷!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간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주차장 정도 표식이 아니었을까?

 

오랜 지역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라 그런지 오래된 나무가 많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었다. 괴산향교의 보호수는 괴산5호. 1982년 지정 당시 220년이었으니 이제 수령이 250년 넘는다.

 

명륜당

 

입구는 잠겨 있다. 담 넘어로 내부 모습 한 컷. 동재와 서재, 내삼문 뒤로 대성전이 조금 보인다.

 

괴산유림회관. 향교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교회 괴산지부이며 전통혼례식장, 인성교육장 등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지나는 시커먼 답사객.

 

옛지도를 들고 동헌을 찾는다. 혹시 읍사무소에 있을까? 없다.

대신 수준점이 있다.

 

읍사무소 부근에 도서관이 있다. 부근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가본다. 있다. 옆에 깨끗하게 보호되고 있다. 

 

괴산 보호수 1호님 되시겠다. 800년이 넘었다고. 도서관에 있다.

 

괴산동헌.

 

깔끔하다. 역시 잠겨 있다. 관리하는 곳을 찾아 열고 들어가볼까 하다가 안해주었을 때의 심리적 충격을 미리 예상하고는 그냥 참기로 했다. 대신 담 너머로 카메라를 디밀고 찍어본다.

 

괜찮다. 이렇게 보존하려면 역시 그냥 잠가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바로 옆에 괴산경찰서가 있다. 예쁜이들이 어서 와보라 한다. 이곳에도 보호수가 있다. 느티나무.

 

괴산 보호수 2호 되시겠다. 500년도 안되었는데(^^) 2호이다.

 

괴산버스터미널에 있는 주차장식당을 찾았다. 소개받은 곳이다. 점심으로 올갱이해장국을 먹었다. 사진은 다음날 아침에 찍은 것이지만 같은 메뉴라서 비슷하다. 올갱이에 계란을 한번 입혀 끓여내었다. 30여 년전에 처음 먹어보았을 때와의 아주 사소한 차이랄까.

 


괴산에서 청안으로 달린다. 지도는 26일의 이동 경로. 카메라 아이콘들 있는 뽀인트가 답사한 곳이다. 아니, 사진 찍은 곳들이다.

 

1872년 지방지도의 일부인 청안현지도.

 

독립된 현이었지만 이제는 괴산군 청안면이 되었다. 일부는 증평군에 포함되고.

 

청안초등학교를 찾았다. 동헌이 위치했던 경우가 많기에. 개교100주년이 넘은 학교이다.

 

역시나 대단한 나무가 있다. 무려 천연기념물이다. 165호.

 

 

담장 넘어에 면사무소가 있다. 7년 연속 인구증가를 축하합니다!!!

 

만세운동유적비.

 

역시 보호수. 회화나무. 68호.

 

동헌이다. 아주 잘 보전되어 있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 1405년(태종 5) 청안현에 도안현(道安縣)이 합병될 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마지막으로 1915년에 중수되었으며, 한때 청안지서로 사용되어 건물이 개조되었던 것을 1981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낮은 석축기단 위에 전면과 우측에는 네모로 가공된 주춧돌을 놓고 후면은 자연석 추춧돌을 놓았으며 기둥은 주로 두리기둥을 세우고 내부에 일부 네모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성은 전면 한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그 뒤로 왼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 도합 6칸의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4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동쪽의 측면 한칸도 툇마루를 두었으나 여기에는 문짝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의 동헌건물이 익공집에 겹처마건물인데 비하여 이 건물은 민도리집에 홑처마로 하여 격식을 낮추었는데 이는 청안현이 큰 고을이 아니었음을 반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안동헌 [淸安東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곳은 살며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마루에 손바닥 딱 한번만 대보고 나왔다. 어쨓든 손 댄 것인가...

 

옆에 위치한 파출소에도 대단한 나무가 있다. 고려초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이다. 그런데 보호수 리스트에는 빠져 있다. 왜일까? 천년 가까이 되는 나무인데..

 

청안면은 행정구역으로는 괴산군에 속한다. 그런데 증평농협이다. 왜 그럴까?

괴산군 증평읍이 증평군으로 승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인 것 같다. 아래 링크 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6499940

 

다음에는 청안향교를 찾았다.

 

역시나 닫혀있다.

 

역시나 담 넘어로 카메라를 디민다. 명륜당과 대성전이 보인다. 그러나 동재와 서재는 없다.

 

괴산향교에는 사마소가 함께 있다. 사마소는 결과적으로 지역유지들의 압력단체로 변질되어(원래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16세기 초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儒林)이, 그 당시 지방자치 기관으로서 수령의 자문기관 노릇을 한 훈구파(勳舊派)의 유향소(留鄕所)에 대항,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자체 협의기구이다. 대개 각 고을의 관아 근처에 자리잡고 하나의 특수기관처럼 행세하면서, 생원·진사의 친목과 학문, 정치토론 및 교육활동 등을 펼침으로써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유향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수령의 지방통치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또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여 재산을 늘이고, 향리·백성을 함부로 잡아다 형벌을 주는 등의 폐단을 가져왔는데 이런 폐단은 특히 호남·영남 지방에서 심하였다. 결국, 이러한 폐단과 유향소와의 끊임없는 마찰이 문제가 되어, 1603년(선조 36) 류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폐지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 그릇된 습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소 [司馬所] (두산백과)

 

청안을 떠나 들린 곳은 우암송시열묘 신도비.

 

 

옆의 은행나무도 괴산군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묘로 올라가는 계단. 여기까지...날이 매우 덥지만 않았다면 올라가보는 것인데, 너무너무너무 더워서...

 

화양계곡의 우암송시열유적도 찾아보려했었다. 그런데, 아 그런데 계곡을 올라가는 길을 막고 주차장 장사를 하고 있었다. 승용차 한대에 주차비를 5000원 내라고 했다. 동행자가 그냥 가자고 했다. 말씀하시는대로...

 

화양구곡과 우암송시열유적에 대해 깔끔하게 잘 정리해놓은 자료가 있어 그것으로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을 채워보자. 아래 링크 참조.

http://blog.ohmynews.com/cornerstone/147743

 

 

다음 답사지는 각연사

 

일주문 안쪽까지를 차로 들어가자는 의견을 제시한 멤버가 있었으나, 기각시키고 그냥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었다. 산사에 방문하여 요만큼 걷는 것은 참 좋지 아니한가?

 

각연사 경내의 모습. 조용하다.

 

기와불사를 해야할 사정이 있는데, 아무도 없다. 할 수 없이 다음 기회로 미룬다.

 

대웅전이다.

 

 

살짝 지붕만 보이는 저 곳이 각연사에서 유명한 곳이다. 바로~ 바로~

 

비로전이다.

 

비로전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각연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통일대사부도탑을 찾았다. 채소를 수확하시던 스님께 여쭈었다. 오신지 얼마 안되어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신다고?

검색하였다. 아래 링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4423&cid=46656&categoryId=46656

이상하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 (태성리)에 있다고 나오는데, 주소를 검색하여 나오는 결과는 스님이 모르시면 안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다음 답사지인 연풍으로 향한다. 지도는 1872년지방지도의 일부인 연풍현지도.

 

연풍에서의 답사 경로. 면사무소 - 연풍향교 - 연풍초등학교 - 연풍성지

 

 

연풍향교.

 

역시 잠겨 있어 담넘어로 카메라 디밀기. 명륜당 건물.

 

연풍초등학교 내에 동헌이 보존되어 있다. 동헌이 있던 곳에 초등학교를 만든 것이겠지.

연풍초등학교 내에도 역시 보호수가 있다. 두 그루이다.

 

학교 역사 100년은 기본이다.

 

동헌. 풍락헌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연풍초등학교 옆에 연풍성지가 있다.

 

 

 

다섯 성인상.

 

연풍성지에는 연풍향청도 함께 있다. 지금은 천주교 행사 장소로 이용된다.

 

김홍도가 연풍현감을 지냈었다는 것 때문일까 벽화로 작품들을 게시해놓았다.

 

연풍장날은 2, 7일.

 

수옥정을 찾아간다. 실패. 도로가 없다.

조령관을 찾아간다. 실패. 산길을 이리저리 한참 올라갔는데 도로가 공사중이라고 차단시켰다. 내려오다가 옆길이 있어 한참 올라갔는데, 길없음 상태. 흠...

 

수옥정 정자를 찾았으나 사람들은 관광지만 알려준다.

 

쉼터. 저 아래로 들어가지 마시오 하는 담장 틈새로 내려가면 계곡이 나온다.

 

수옥정 이야기는 이후 검색한 블로그의 내용으로 채워본다. 아래 링크.

http://m.blog.naver.com/esilvia/60165572500

 

유명한 맛집전문가가 추천한 민물매운탕집을 찾아갔다. 찾아서 갔다. 도착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 그런데....아무도 없다. 전화도 안받는다. 하필 그날 그때 바쁜 일이 있으셨나보다.....

 

그래서 대웅식당을 찾았다. 돼지갈비. 좋았다.

 

영빈파크에 숙소를 정하고...

 

씻고 빈둥거리다가 잤다.

 

2016년 7월 26일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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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6일 토요일. 예정되었던 평창 답사.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빗 속을 뚫고 달린다. 어둠 속에서 저 빛의 세계로!

 

비오는 날은 역시 여행이나 답사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라는 것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이젠 비밀도 아니다. 고속도로가 미어터진다.

 

서울에서 열심히 달려 평창에서 강원도지역 선생님들과 랑데뷰하여 평창, 대화 쪽을 답사하였다.

 

구글지도에서 '지형' 옵셥을 주면 지도가 이렇게 지형 기복을 보여준다.

 

이쪽 동네는 왜 강이 꼬불꼬불? 이렇게 만들어진 땅덩어리라서 그러하다.

(자료: 서원명. 아래의 어려운 자료들 모두)

 

이 동네 지질도도 추가해둔다.

 

평창 가는 길목에 안흥이 있다. 안흥이 유명한 것은 찐빵이다. 김샌다.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 하기 위해!(동명성왕의 후손 김동명 선생님이 쏨)

 

진빵을 먹다보니 평창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속초,고성,양양 지역 지리교사들(모임 이름이 SKY)과 랑데뷰하였다. 오늘 안내를 맡아주신 서원명 선생님과는 2년 만에 만났다.

 

비가 많이 내려서 예정하였던 일정 진행과 관련한 관계자 대책 회의. 특히 첫번째 장소인 장암산의 활공장(활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활공하는 곳이다^^)이 문제였다. 비가 계속 많이 내리면 '조망'을 전혀 할 수 없으므로. 하지만 지리과다. 간다. 급할 것도 없다. 올라가서 개이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 갔다.

 

지도를 보면 평창강이 평창읍을 휘돌고 있고, 그 동쪽으로 장암산이 위치한다.

 

장암산에 올랐다. 아스팔트 포장길이다가, 시멘트 포장길이다가, 비포장길로 바뀐다. 작은 흙탕물 구덩이도 있다. 역시 오프로드. 산길을 꼬불꼬불 올랐다. 4륜구동 작동!

 

장암산 위에 평창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위치한다. 이곳에서 평창읍 쪽으로의 조망이 기가 막히다.

 

평창읍을 휘돌아 흐르는 평창강과 평창강 상류의 지형을 조망하기 위해서 활공장에 올라왔다!

기가 막힌 전망이다! 막힌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렸다.

 

기다렸더니 잠시 비가 주춤할 때는 아래가 언뜻언뜻 보인다. 평창읍을 휘도는 곡류하도 평창강의 모습이 보인다.

 

장암산 쪽은 변성암 산지이고, 평창읍 쪽은 석회암 산지라고 한다. 변성암 산지에 비해 석회암 산지는 뾰족뾰족하여 대충 구별된다고 한다.

 

사전답사에서 드론을 사용하여 촬영한 평창읍의 모습(남호석)을 찾아보며, 구름 속에 숨어 속을 보여주지 않던 평창의 아쉬움을 달래본다. 평창강이 사진의 오른쪽에서 흘러내려오기 때문에 노성산과 만나는 부분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여 절벽을 이루고 있다. 노성산의 반대쪽은 침식 작용이 약하여 완경사지와 평야가 형성되었다. 하안단구 지형이다. 그곳에 평창읍이 발달한 것이다. 

 

 

평창읍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노성산이다. 그 일대는 평창강의 하안단구에 해당한다고 한다. 기반암이 석회암인 하안단구 위쪽에 석회암이 용식작용을 받아 형성된 큼지막한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그 내부에 노성정이 있고, 활쏘는 곳을 만들었다.

 

쩌어쪽에 과녁이 있다. 국궁의 과녁은 양궁보다 두배 정도가 더 멀다. 145미터. 화살을 쏘아 과녁을 맞추면 된단다. 화살이 꽂히는 것은 아니고...

 

노성정의 모습. 지금은 평창정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아담하고 예쁘다. 아..새거다. 노성정의 아래에 활쏘는 사대가 있다.

 

서원명 선생님이 여러가지 자료를 사용하면서 평창 및 인근 지역의 지형에 대한 강의를 환타스틱하게 해주셨다.

 

대화고등학교 부근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여튼 뽕나무 백숙이었던 것을 보니... 하박국 식당이 아니었을까싶다.

 

2016년에 방문하였으니.......

 

 

식후에 대화면 배골마을로 이동하였다.

 

대화고등학교 맞은편 낮은 구릉지의 정상부에는 동-서 방향의 단열을 따라 긴 배 모양의 용식 와지가 발달되어 있다. 이 용식 와지는 여러 돌리네가 연결되어 형성된 것이다. 돌리네 doline가 여럿 연결된 것은 우발라 uvala라고 부른다. 와지의 사면은 산지로 연결된다. 

 

위성 영상으로 확인해보자. 다섯개의 돌리네가 합체되었다는 것을 뚜렷이 구별된다. 골짜기 아랫쪽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배골마을은 평창군 대화면 대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화천 좌안으로는 면사무소가 위치할 정도로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 대화천 우안은 산기슭을 이루며 석회암 산지이다. 배골마을이 들어선 지형은 우발라 주변 산은 해발고도 550~700m 정도이고, 농경지로 이용되는 곳은 해발 485m 정도이다. 우발라의 길이는 약 700m, 폭은 120m 정도이다.

 

돌리네의 토지이용은 밭농사. 배수가 잘되어 지표수가 부족하기에 논농사에는 어려움이 있다라고 한국지리 교과서에 나온다. 수확이 이미 끝난 농경지.

 

배골 마을 와지의 동쪽 끝 부분에는 입구가 1.5미터 정도되는 싱크홀(sink hole)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싱크홀은 와지인 돌리네 내부의 물이 지하로 스며드는 커다란 구멍인데, 이곳의 싱크홀은 호우시의 원활한 배수를 위해 인위적으로 확장시킨 흔적도 있다고 한다.

 

모여서 출석부 만들기.

 

대화 일대. 대화의 왼쪽 사면쪽으로 배골이 위치한다.

 

태백산지에서는 곡류하천 주변에 곡저 평야를 발달시키기도 한다. 평창강과 대화천, 안미천 세 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대화면 안미리 일대에는 예단평야로 불리는 넓은 곡저 평야가 있다. 이 평야는 평창강 유역이 발달한 곡저 평야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서쪽 산지를 감싸며 곡류하는 하천이 평창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대화천, 동쪽에서 흘러 합류하는 하천이 안미천이다. 합류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넓은 곡저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지도에서 평창강을 따라 이어지는 424번 도로에서 남서쪽 산지의 골짜기에 위치한 한국전통직업전문학교 쪽으로 평창강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다. 미날교이다. 미나리가 많이 서식하여 마을 이름이 미날이었다고. 이곳에 다리가 연결되기 이전에는 평창강을 건너는데 줄배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74년8월23일 집중호우가 내리자 단축수업을 마친 안미국민학교 아이들 20명과 주민 2명이 오후2시30분경 함께 강을 건너다 나룻배가 전복되면서 주민 2명과 어린이 7명이 익사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던 곳이란다. 이 사고도 정원 15명의 배에 22명이라는 초과승선이 문제가 될 수 있었고, 아이들 7명을 구하고 숨진 의인 이야기도 있고... 이후에야 강을 건너는 미날교가 만들어졌다고. 미리 알았으면 걸어가보았을텐데...

 

카카오맵에서 예단평야 일대를 찾아보았다.

 

예단평야의 중심지인 안미리 일대의 옛날 지형도.

 

상안미1리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비가 계속 내리니 평창강은 흙탕물이다.

 

수로 조절용 시설...

 

예단평야를 답사하는 답사객들.

 

옥수수가 잘 자라고 있다.

 

곡저 평야도 일종의 범람원이기에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국에 흔하디 흔하게 깔린 인삼밭이 여기도 있다. 논의 벼도 잘 자란다.

 

여전히 비는 내려주고.

 
평창강의 상류쪽으로 이동하였다. 개수리에 멈추어 거문산을 바라본다.
변성암 산지가 비에 젖고 있다.
 
구름 사이로 살짝 살짝 기반암을 노출시켜준다.

 

개수리를 떠나면서 곡류단절과 구하도를 확인했어야 하는데, 놓쳤다.ㅠ.ㅠ 답사가서 집중을 안해요, 집중을!

찾았다.

평창강을 따라 424번 도로를 통해 북상하여 면온IC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금당산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봉평면 유포리에 평창강(이곳에서는 금당천이라고 부름)의 유로가 변경된 흔적이 보인다. 424번 도로가 곡류가 절단되어 형성된 구하도를 따라 지나고 있다.

 

개수리에서 속초,고성,양양 지리교사 모임팀과 헤어졌다. 서울팀은 면온IC를 거쳐 고속도로를 열심히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7시30분에 중동고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오후 7시 20분경 원위치하였다. 약 12시간, 약 430킬로미터 이동.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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