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틈에 1월 10일이다. 화요일이다. 날이 밝았다. 쨍하게 밝았다.
산티아고 데 쿠바는 쿠바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도시라고 한다. 산티아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집.
산티아고에는 백인보다 흑인이 더 많다. 아이티에서의 이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유입 때문이다. 노예들은 사탕수수, 커피 생산에 동원되었다. 커피는 아이티에서 이주한 프랑스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아이티에서 노예들에 의한 독립 전쟁이 일어나 승리하면서 커피 플랜테이션을 하던 프랑스인들이 인근의 쿠바로 이주한 것이었다. 그들이 산티아고 데 쿠바에 모여 정착한 곳이 티볼리 타운이다.
쿠바 혁명의 주역 피델, 그리고 그가 존경한다고 하여 쿠바 전역이 동상이 깔린 호세 마르티 그들의 묘역인 세멘테리오, 그리고 시내의 주요한 뽀인트를 둘러보았다.
장묘 문화는 문화다. 나라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다. 하여 해외 여행을 할 때면 해당 지역, 국가의 독특한 장묘 문화를 볼 때마다 신기함을 느끼게 된다. 쿠바는 어떠할까.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산티아고로 미루었다. 에빌리오가 그랬다.
그렇게 미루고 기대하게 한 산티아고의 세멘떼리오이다. 1868년 건설된 가장 오래된 공동묘지. 쿠바 초대 대통령, 자본주의 기간의 대통령, 피델, 호세 마르티 등의 묘가 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일단 보는 이들을 긴장하게 한다. 피델과 호세 마르티 묘 앞에는 경비병이 있는데 30분 마다 교대식을 거행한다. 볼거리이다.
그렇다. 이곳은 쿠바에서 제복을 입고 어찌해야 하는 곳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묘역이다.
게다가 그 피델 카스트로가 가장 존경한다고 하여 쿠바 전역에 동상이 깔린 호세 마르띠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세 마르띠의 시선은 저 아래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는...
자신의 묘가 있다. 쿠바 국기로 덮는다.
제대로 하는지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쿠바인들, 관광객들.
쿠바의 역사 시대는 간단하다. 인디오 시대, 식민 시대, 자본주의 시대, 혁명 시대. 이 묘역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그런 곳에 쿠바 혁명의 상징 호세 마르티의 묘역이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생가의 가족 묘역을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이 곳 묘지는 근사하다.
Plaza Antonio Maceo Grajales.
Complejo Monumental Antonio Maceo.
1997년부터 쿠바는 관광 개방을 시작하였다. 다른 지역은 개방 이후 주민들의 의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공산혁명이 시작된 산티아고는 아직도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혁명의식 수준이 높다고 한다. 하여 아바나 등지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비판적인 대화가 가능하지만 이곳 산티아고에서는 그러다가는 혼난다고 한다.
광장 옆 길가에 버스가 정차하고 손님을 태운다. '버스'다.
10시 30분. 쿠바 혁명이 시작된 현장을 찾았다. 바티스타 군대의 주둔지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면서 기세를 올리게 된 현장이다.
치열한 전투의 현장은 뻥. 건물은 리모델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총탄 자국도 적절히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적 현장을 쿠바 당국은 다양하게 이용하고 있다. 시설 자체는 박물관이다. 몬까다 박물관. 하지만 그렇게만 이용하기에는 시설이 너무 크다. 그래서 나머지 시설을 학교로 이용한다. 또 그렇게 하면서 이념 교육과 홍보의 현장이기도 하다. 박물관 들어가는 입구에 교실을 하나 두고 있다. 홍보용이다. 초등 6학년 과정의 학생들 한 학급이 들어가 있다. 우수 학급이다. 손님들이 들어왔을 때 언제든 수업 과정은 공개된다.
매쓰매티카 수업 시간이다. 대체로 학생들이 너무 쉽다고 이야기 한다. 즉 이 교실에 들어 있는 학생들은 정구 교육과정을 뛰어 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초등 6학년 과정인데 방문객들과 영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부럽다.
성공했으니까 '혁명'이 되었다. 자료 사진들.
지금은 없다. 대충 나무 한 그루 심어 놓았다.
La Paz, 라파스. '평화'라는 것은...
미서 전쟁.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을 마감하는 종전 협정 조약 장소. 에스파냐 어와 영어로 조약의 내용을 모두 새겨놓았다.
산티아고 데 쿠바도 항구도시이다. 최근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항구 도시이다. 그 때는 해적을 비롯한 외적의 침입이 현실이었다. 그러한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 모로 요새를 본다. 아, 점심부터 먹고.
모로 요새 턱 밑에 El Morro라는 식당이 있다. 화장실 입구에서 서비스 요금을 받는다. 꼭 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San Pedro de la Roca Castle라는 정식 명칭이 있지만 모로 요새라고 불리운다. morro는 입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러니까 河口 쯤 되겠지. 하구에 만들어진 요새. 적절한 이름이다. 아바나 항구의 입구에 만들어진 요새도 모로 요새이다. 그러니까 모로 요새라는 이름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로 보면 되겠다.
평면도. 1643년 스페인인들이 항구 방어를 위해 건설한 요새이다. 400여 명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대.
요새를 건설한 석재는 대부분 석회암이다. 석회암이기는 하지만 탄산칼슘의 함량이 적어 카르스트화 작용이 적어 오랜 기간 변형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요새에 깔린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찌된 것인가 했더니 이 아가씨들의 작품이다. 계속 아름다운 화음으로 노래를 들려준다. 물론 앞쪽에 작은 바구니가 있다.
주변 지형을 그려두었던 지도.
산티아고 시내로 들어온다.
오후 3시 10분. Santa Rita 거리를 걷는다. 학생들이 보인다. 하굣길의 학생들.
쿠바 혁명 박물관의 하나이다. 지하 투쟁 박물관이라 안내가 되기도 한다. 공산혁명 이전에는 경찰서였다고 하는데.
11월 30일...
쿠바의 공산 혁명은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시작되어 아바나를 향하게 된다. 박물관 내부의 기록물.
오후 3시 50분. 유명한? 유명한가? Escalinata de Padre Pico 계단이다.
티볼리 거리. 산티아고에 들어왔던 프랑스인들이 집중 거주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벨라스케스 저택의 하나. 언덕위의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전망이 좋다.
벨라스케스 발코니. 산티아고 항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멀지 않은 곳에 '까사 벨라스케스'도 있었는데(나중에 지도에서 확인) 그곳도 가보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건물에는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식민지 시절의 인물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시내에는 철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저 멀리 보이는 '트럭 버스'의 육중한 모습.
오후 4시 10분. Cespedes Park. Hotel Casa Granda. 옥상에 전망대가 있다.
대성당 및 그 내부의 모습.
까사 그란다 호텔 옥상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성당.
산티아고 주변 산지의 이곳 저곳에서 연기가 발생하고 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자연적인 산불이 아닌 것 같다. 무엇인가를 소각하는 것일지도.
산티아고 시내를 달리는 트럭 버스.
Hotel Imperial Santiago.
저녁 식사는 Ire a Santiago(나는 산티아고에 간다)에서. 양고기, 스파게티, 돼지 고기 중에서 택1. 양고기가 가장 나은 평가를 받았다.
호텔 주변 골목길.
고생한 하루를 편히 쉬고, 아바나로 날아갈 날이 밝아오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 정전이란다. 창밖을 보니 호텔이 포함된 블럭만 정전인 것 같다. 항구 쪽은 불빛이 살아 있는데...
편히 쉬기도 어려운 쿠바의 밤을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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