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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0일 금요일. 탐방 연수의 닷새째가 되었다. 교토의 금각사, 광륭사를 탐방하고, 아스카로 이동하여 아스카 문화를 '연구'했다.^^

 

12월 10일에도 아침 식사는 6시 30분에 시작되었다.

8시 30분. 덴포잔의 부두를 출발하여 14대의 버스들은 교토로 달렸다.

 

10시. 교토 시내에 진입하였다. 일본의 재난 대비용 아파트라고 설명하더라. 재난 발생시 필요하면 '붉은 삼각형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은 박살내고 진입해도 된다는 것이라고.

 

10시 10분. 길가의 '엔 샵'. 처음 보았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천원 샵' 같은 것이 생기더니 '다이소'로 진화했다.

 

교토는 平安 시대부터 明治 유신까지 거의 천년 동안 왕성이 있던 곳으로 역사의 도시 奈良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관광도시이다. 교토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12세기 말까지이며 6세기 한반도를 통해 전래된 불교 문화의 영향이 크다.

 

10시 20분. 킨카구지 金閣寺에 도착하였다. 원래 이름은 로쿠온지 鹿苑寺인데, 사리전인 '金閣'이 워낙 유명하여 금각사라고 흔히 불린다.

원래는 가마쿠라 鎌倉 시대의 사이온지 긴쓰네 西園寺公経의 별장이었는데, 무로마치 室町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満가 물려받아(쇼군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자꾸 밝히니까 눈물을 머금고 자발적으로 헌납당함?) 산장인 기타야마도노 北山殿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금각을 중심으로 한 정원건축은 극락정토를 구현했다고 일컬어지며, 유명한 잇큐 一休 선사의 부친인 고코마쓰 後小松 천황을 초대하거나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무대로서, 이 시대의 문화를 기타야마 北山 문화라고 부른다. 요시미쓰 義満 쇼군이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절이 되었으며 무소 소세키 夢窓 국사가 개산하여, 요시미쓰 義満의 법호 로쿠온인도노 鹿苑院殿에서 두 글자를 따 로쿠온지 鹿苑寺라고 명명한 것이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금각사 경내도. 한글판 금각사 리플릿에서 스캔하였다.

 

금각 앞에 위치한 鏡湖池를 중심으로 아시하라시마 葦原島 등 크고 작은 섬과 당시의 지방 영주들이 헌납한 名石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쪽의 衣笠山을 배경을 한 이 정원은 무로마치 室町 시대의 대표적인 池川回遊式 정원이다.

 

주지가 머무는 方丈 북쪽에 위치한 교토 3대 소나무 중 하나라는 리쿠슈노마쓰 陸舟之松 소나무. 배의 모양으로 보이도록 손 본 소나무다. 교토를 대표하는 3대장 중의 하나라면 조금 더 그럴싸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랫쪽에 받침대를 대서 억지로 만들어놓고는... 거긴 눈을 주지 않나보다.

 

녹원사라는 원래의 이름보다 금각사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

1950년에 견습승려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며 불을 질러 전소되었었다고 한다. 1955년에 복원되었는데, 대충 작업했는지 금박이 박리되는 문제가 생겨 1980년대에 2차, 1990년에 3차 복원을 실시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을 참고해보자. 이것이 더 멋스럽다. 복원이 아니라 흉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진 출처: https://ganshoji.com/publics/index/45/detail=1/b_id=1304/r_id=5984/)

 

榊雲.

 

불당인 不動堂. 본존으로 석부동명왕이 모셔져 있다. 

 

11시 20분. "전차를 주의"하면서 우리 버스는 교토 시내를 달린다.

 

11시 30분. 코류지 廣隆寺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講堂을 탐방하기 시작한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강당, 왼쪽의 나무들 속에 숨어 있는 건물이 쇼타쿠 태자를 모신 태자전이다. 중간의 작은 구조물은 태진전이다. 왜는 6세기 중반에야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에서 경쟁력으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쇼타쿠 태자는 불법을 받아들이면서 신라인 하타(秦)씨 집안사람 秦河勝에게 절을 경영하도록 하였고, 蜂岡寺가 창건되었다.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다가 廣隆寺가 되었다. 태진전은 광륭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는 秦河勝의 공덕을 기리는 곳이다.

 

영보전을 새로 지어 신영보전이라 하더라.  영보전에는 여러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삼매에 몰입하여 느끼는 환희가 넘치면서 얼굴 전체에 웃음이 피어난 것이다. 신라에서 조성한 불상인데,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같은 시기에 모셔졌을 것으로 보이는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대한민국 국보 제83호)을 보자. 똑같다. 다른 부분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왜 그럴까요?

 

11시 50분. 광륭사 주차장. 대나무가 거하게 자라고 있었다.

 

12시 30분. 광화소학교에서 신입생을 모집하는가보다. 원서배포중~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면서 아스카로 달려갔다. 바쁜 하루였다.

 

오후 2시 50분. 아스카 석무대에 도착하였다.

飛鳥 아스카는 일본의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6~7세기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꽃피웠던 곳으로 고문화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아스카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석무대, 고송총 고분, 飛鳥寺 등이 있다. 아스카의 역사적 풍토와 문화재의 보존 활용을 위해 1975년 개관한 아스카 자료관은 불교가 전해진 6세기부터 나라로 수도가 옮겨진 8세기 초까지의 飛鳥와 萬葉集, 飛鳥의 宮, 돌, 고분, 사찰, 다카마쓰 고분 출토품을 비롯하여 飛鳥寺 탑과 궁터, 절터의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어 아스카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곳이다. 

시기적으로는 6세기 말에서 약 100년 간을 가리키지만,  '아스카 시대'라고 하면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대혁명이 이루어져 귀족의 연합체였던 국가가 천황제 율령국가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일본의 국가성립의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스카 지역 일대의 문화 유적지 분포 안내도. 넓은 지역에 많은 유적지가 분포하고 있다. 석무대 ⇒ 다카마쓰 고분 ⇒ 아스카 자료관 순으로 관람을 진행하였다.

 

石舞台古墳의 모습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커다란 네모난 모양의 고분이다. 봉토가 완전히 없어지고 거대한 석실이 노출된 상태이다. 천정돌이 넓고 평평하여 옛날에는 춤추고 노는 곳인 줄 알고 石舞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아무나 들어가 볼 수 있다. 3차에 걸친 발굴 조사결과 집형태의 석관판이 발견되었고, 돌로 축조된 웅덩이에 둘러싸여 있으며 작은 고분군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석무대 주변에 모여 강의를 열심히 수강중인 탐방객들. 고분의 축조는 7세기 초 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6세기 후반에 정치 권력을 장악했던 소나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경 씨족 집안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에 가장 강대한 세력을 일군 것이 蘇我 씨족이었다고 한다. 蘇我 씨 집안은 불교의 수입을 매개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고대국가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의 수용 여부를 놓고 다른 강대한 파벌 세력과 격렬한 권력다툼을 30년이나 이어갔는데, 소나노 우마코 蘇我馬子 시대에 이르러 정적을 타도하고 승리하여 불교를 공인받게 되었다. 왕실에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까지 세력이 컸기에 왕릉을 능가하는 석무대 고분의 주인공이 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스카는 과거에 왕도였지만 지금은 1,500호 정도에 인구가 7,000여 명인 한적한 농촌이면서 '유적의 마을'이다.

 

3시 40분. 다카마쓰 고분의 모습이다. 공사중이었다.

천황의 묘라는 오랜 기록도 있기는 했다지만 1972년의 정식 발굴조사에 의해 아름답고 뛰어난 채색 벽화가 있음이 드러났다. 현재는 벽화 보존을 위해 내부 관람은 금지되어 있다. 고분 자체는 도굴당해 매장품이 대부분 손실됨으로써 피장자나 축조 연대를 판명하기 어렵지만 7세기말~8세기초로 추정되며, 당연히 상당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벽화 양식에 일본에 없던 것이라 역사상 대발견으로 여겨진다.

 

고분의 네 면에 모두 벽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작이 위치하는 남쪽벽이 도굴 통로로 이용되면서 파손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결과이다. 청룡, 현무, 백호 방향의 벽에 아름다운 채색 벽화가 남아 있으며, 모사된 작품을 '고분벽화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동쪽 벽면의 벽화이다.

 

서쪽 벽면의 벽화이다.

 

고분이 남북 방향으로 길고 동서 방향으로는 짧아 북벽에는 현무 그림만 남아 있다. 그래서 남벽에는 주작의 그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백호 머리 위에 그려진 달 속에 동물을 그린 것,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 것, 인물상의 얼굴 모양과 모자 등의 복식 등을 보면 덕흥리, 수산리 고분, 쌍영총 벽화 고분 등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너무나 유사하다. 때문에 백제계의 정착지로 알려진 아스카 지역에 고구려계 세력이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것을 반영하는 유적이라 일본의 고대사 해석에 혼란을 주고 있단다.

 

오후 3시 50분. 날이 흐려 12월이 더욱 쓸쓸한 겨울(?)로 느껴지는 역사의 도시 아스카.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스카. 비닐 하우스들이 보이고, 과수원에서는 귤의 수확도 이루어지고 있더라.

 

오후 5시. 奈良文化財研究所飛鳥資料館 아스카 자료관에 도착하였다.

여기에는 飛鳥宮, 飛鳥石, 飛鳥 고분, 다카마쓰 高松塚 고분, 飛鳥寺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똑같은 모양의 백제 기와와 飛鳥 기와가 나란히 전시되어 飛鳥 문화가 곧 백제 문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6시. 오사카 항구로 돌아가던 중 고속도로 요금소. 

요금소에 근무자가 모두 노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자리 나누기의 일환이라 하더라. 우리나라 처럼 장시간의 혹독한 근무 조건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짧은 시간으로 나누어 여러 사람들이 근무하는 형태라고 하더라.

 

밤 9시 30분. 오사카 남항에 정박중인 집(?)으로 찾아간다. 원래 6시에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는데, 열심히 탐방 연수에 몰두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2004년 12월 10일의 하루가 저물었다. 탐방 연수 5일째가 저물었다.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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