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1592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왜군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 및 의병활동,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에서 발을 빼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놈들이 강화협상에서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결렬되자 정유년(1597년)에 재침략을 저지른 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은 다음 해인 1598년 12월에 종결되었다.
1597년 왜군이 14만 병력으로 침략하여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점령을 목표로 칠천량 해전, 남원 전투, 전주성 함락 이후 전라도, 충청도 지역으로 침투하였다.
하지만 충청도 직산(천안)에서 대패한 왜군이 남해안 일대를 점령하고 버티자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작전 전술을 이용해 순천 지역 등지에서 공격을 진행하였다.
순천왜성(왜교성) 전투는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제독의 조명연합군이 검단산성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진린의 명수군이 1598년 9월부터 60여일 간 최후의 총격전을 펼친 전투 이후 일본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해전에서 무너뜨리고 승리하여 7년 간의 전쟁이 종결되게 된다.
그 역사의 현장인 검단산성과 순천왜성, 그리고 이순신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를 2025년 3월 17일 오후에 방문하였다.
정유재란에서 중요한 뽀인트였던 검단산성을 방문하기는 조금 불편하다. 가까운 곳이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길건너의 공장이 바로 옆의 버스 회사에 주차를 부탁하려다가 그냥 검단산 아래의 등산로 초입에 차를 박았다.
저 아래 차를 두고 조금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오른다.
백제때 만들어진 석성인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의 지휘부가 주둔하였던 성으로 여수반도와 순천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자그마한 쉼터가 하나 마련되어 있다.
검단산성에서는 건물지, 집수정, 저장구덩이, 성벽 등의 유적과 유물지 발굴되었다.
검단산성에서 동쪽으로 멀리 보이는 순천왜성을 바라보며 그시절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는 방문객.
검단산성에서 동쪽의 광양만 방면 조망. 멀리 순천왜성이 작게 보인다.
확대 사진. 왜성의 천수각이 있었던 기단. 그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현재인 거대한 공업단지.
2시 15분. 정유재란역사공원에 도착하였다.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지였던 순천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민초들의 모습과 전란의 아픈 기억을 안고 평화로 한걸음 다가서는 어머니와 해맑은 아이들의 형상을 통해 치유와 함께 추모의 의미를 담은 '평화군상'이 먼저 반겨준다.
혼자 근무하시던 분께서 친절하고 상세하게 안내를 해주셨다.
장군님!!!
2시 45분. 순천왜성에 도착했다.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당이 왜군이 호남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된 성으로 1598년 9월부터 종전 때까지 60여일 간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주차장 한켠에 정왜기공도가 그려져 있다.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활약상을 그린 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전쟁의 주요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전투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정왜기공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쟁의 진행 과정, 전투 상황, 인물 정보 등을 담고 있어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은 명나라의 종군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본의 소장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78년 콜롬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가 공개한 11장의 사진으로만 알려져 있다.
정왜기공도에 묘사되어 있는 왜교성의 '해자'.
실제로 남아 있는 해자의 흔적.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사이의 해자(垓字)는 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 해자에 다리를 놓아 필요할 때만 사용했는데, 멀리서 보면 성과 육지가 다리로 연결해 놓은 모습이어서 ‘왜교성(倭橋城)’으로도 불렸다.
왜교성의 문지 1. 석성의 축성 방식이 조선 시대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왜성'이다.
왜군은 조선 남부의 해안 일대에 20개의 왜성을 축성했는데, 그 중 8개가 정유재란 당시에 만들어졌다. 1597년 음력 12월에 세워진 순천왜성은 6만여 평의 면적에 외성의 성벽 길이가 2,500m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다. 1만5천여 명의 왜군이 주둔했었으며 성의 동쪽에 선착장을 설치해 선박들이 출입하면서 군사와 물자를 실어날랐다.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를 공량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방어전을 펼쳤던 곳이었다.
복원된 성벽 위에 올라가 본다.
문지 2. 천수에 이르는 주 출입문으로 방어를 위해 "ㄱ" 자 형태로 꺾어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다.
3시 10분. 천수기단은 점령되었다.
천수기단에서 바라본 검단산성.
천수기단에서 놀고 있는 빨간 모자.
왜성은 빠르게 축성할 수는 있지만 견고하지 않아 세월이 지나면서 쉽게 붕괴된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왜성들이 있었지만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순천왜성의 보존상태가 그나마 가장 나은 축에 든단다.
1598년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군사들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새끼"들이었다. 이들을 구원하겠다고 부산 방면에서 500여 척의 왜군이 달려오자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노량에서 맞서 싸운 것이 역사에 남은 노량해전이었다. 왜군의 전선 200여 척을 격침시켰지만 고니시는 도망가는데 성공하고, 안타깝게도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고 말았다.
순천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대규모 육상 전투였고, 노량해전은 마지막 해전이었다. 이후 왜군이 물러나면서 7년 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순천왜성과 앞바다에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용장과 병사들,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백성들의 충혼이 스며있는 곳이다.
그래서...
3시 40분.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무사를 찾았다.
충무사 사당.
귀한 곳에 방문했다. 기록을 남기는 여행자.
4시 20분. 광양이 바로 옆인데 여정을 짜다보니 광양을 놓치게 되었다. 그래서 한방에 해결하기 위해 찾은 곳이 구봉산 전망대이다.
안내도를 보면 멋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3월17일 현재 파헤치고 있는 않았다. 그래서 관계자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전망대까지 올라가 보았다.
광양시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구봉산전망대 사진자료이다. 광양만 일대를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명소이다.
구봉산 전망대는 해발 473m의 구봉산에 설치된 전망대로 순천, 여수, 하동, 남해까지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정상에는 9.4m의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어 새로운 일출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정상에 설치된 스틸아트 조형물. 광양을 상징하는 빛, 철, 꽃, 항만 등을 소재 활용하여 매화꽃으로 개화하는 꽃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봉화의 이미지를 담았다.
전망대에서는 광양만 일대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이순신대교.
2025년 3월 17일의 여정을 마무리 하기 위해 예약한 숙소가 순천만의 화포항 인근인데, 너무 외진 곳이더라.
주변에 펜션들만 있고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사장님께 주변의 괜찮은 식당 안내를 부탁드려 다녀왔다.
원래 계획은 뒷산인 봉화산(235m)의 순천만일출일몰전망대에서 멋진 전경을 드론으로 담아보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늦고 피곤하다는 당면문제에 밀렸다. 좁은 숙소에서 그냥...
여행 중 옆지기가 숙소 상태로 불만을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다. 경치나 전망이 좋은 곳이라고 지나치게 광고하는 숙소는 앞으로 좀 피하려 노력해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숙소였다.^^
6시 50분. 순천만의 물이 많이 빠졌더라.
화포항의 낙조.
3월 17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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