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루판 역에 부시시 눈을 비비며 내린다. 시계탑을 포도 여신이 들고 있다. 포도의 동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랍어가 많이 보인다. 회교, 이슬람 동네에 온 것이다.
역전앞 광장에 모이고 있는 일행.
광장 한쪽에는 하룻밤을 지샌 분이 누워 있기도...
8시20분. 투루판 시낼 달린다.
8시 50분. 투루판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푼다. 아침도 푼다.
투루판 관광안내도가 벽에 보이더라.
투루판 동쪽을 먼저 답사하고, 서쪽을 마무리하였다.
호텔 앞의 포도 가로수길.ㅎㄷㄷㄷ
9시반. 길을 나선다. 도처에서 뽐뿌질이다. 기름 동네다.
뽐뿌 뽐뿌하면 기름이 퐁퐁 솟는다. 기름이 쏟아져 나오니 중국에서 서부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일 것이다.
건조한 기후, 간헐적으로 내리는 폭우는 산지를 격렬하게 침식할 것. 그래서 화염산은 만들어진 것이고.
조밀하게 심어진 백양나무들 사이로 수로가 있다. 시원한 물이 흐른다.
투루판은 위구르어로 '파인 땅'이라는 의미이다. 투루판 분지에서 가장 낮은 아이딩(艾丁)호 수면은 해수면보다 158m나 낮다.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 분지인 투루판은 한낮 최고 온도가 50℃ 이상 올라가기도 그런 날의 지표면은 70℃까지 오르기도 하는 살벌한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물길이 있고, 그 물을 이용하는 포도 농사가 성할 수 있는 것은 지하 관개 수로 때문이다. 이란 등지에서 카나트라고 부르는 지하 관개 수로를 이 지역에서는 카얼정이라고 부른다. 시스템은 똑같다.
투루판 북쪽에 해발 4~5,000m의 준봉들이 있는 보궈더 산맥(博格達山脈)의 정상부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는데, 녹은 물이 지하수로 스며들고 그 지하수면의 물을 땅굴을 파서 투루판까지 끌어들인 것인다. 땅굴을 판 이유는 워낙 기온이 높고 건조하기 때문에 지표수는 금새 말라 버리기 때문이다.
장이 섯나 보다. 길가의 이동식 고기 판매점.
냉장 보관을 하지 않아도 워낙 건조하기 때문에 고기가 상한다던가 하는 고민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10시. 고창고성에 도착하였다. 투루판에서 동쪽으로 45km 정도 떨어져 있다. 완전 비포장 동네. 먼지가 엄청 발생하여 구난 조치를 취하였다.
완전 비포장 동네. 고창고성 자체가 흙벽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성이었다. 주변이 통째로 흙덩어리이다.
마을이 있는 입구에서 고성이 있는 곳까지 뙤약볕의 먼지나는 길을 손쉽게 이동하라고 나귀차가 제공된다. 유료로...
오잉~ 예쁜 양산들~
주변부도 성의 일부였을 것이다. 수백년의 세월 속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수많은 여행객을 반복해서 운송하는 교통로.
앞서 달리는 나귀차. 한 대에 8명씩 타라 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0시 40분. 그나마 상태가 좋은 성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도 누군가 자신이 방문했던 흔적을 남기고 갔다.
고창은 서역의 불교국가로 번성하였는데 몽골과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아 13세기 경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각형의 불탑, 성벽, 성문 등의 일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폐허로만 남아 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같이 사진 찍자고 한다. 그런데 유료이다.
폐허의 공간에 현재의 사람들이 섞여 있다.
고창의 고성 축조에 사용된 벽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나뭇가지나 풀을 섞었는데, 왕국이 멸망한 이후 주변의 농부들이 벽돌을 깨 비료로 사용하는 바람에 더욱 황폐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오아시스를 배경으로 번영했던 왕국의 멸망 과정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왕국 무상이다.
고창고성의 폐허 뒷쪽으로 화염산이 보인다.
주변에 많이 보이던 식생. 아주 작은 수박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 낙타가 먹는다고 한다.
화장실.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화장실. 뜨거운 열기에 의해 화장실 아랫부분에 보이는 통속의 물질들에서 증기가 발생한다. 사정이 급하여 들어가 일처리 하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질식할 수준. 아우~
흔적을 남기고 흔적을 보면서 돌아선다.
마을에서 작은 기념품을 팔고 사고 한다.
11시45분. 아스타나 고분군에 도착하였다.
투루판의 기후 자료가 게시되어 있었다. 1월 평균 기온은 -20℃쯤 되고, 7월 평균 기온은 50℃ 가까이 된다. 평균 기온이..
연평균 강수량은 16mm 정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증발량은 3000mm 정도란다. 역시나 살벌한 곳이다.
참관 안내도.
아스타나 고분군은 동서 약 5km, 남북으로는 약 2km 정도의 범위에 걸쳐 있다. 건조한 환경이기 때문에 시신이 대부분 미이라 상태로 발굴되었다. 중국 6조때부터 수, 당의 5백여 년 동안 귀족들의 가족 묘지였던 곳이다. 현재 투루판은 이슬람 교가 성하지만, 이 무덤들은 중국의 불교 양식을 갖추고 있다. 벽화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은 영국의 스타인이 다 털어갔다고 하며, 일부 유물이 투루판 박물관과 우루무치의 신강위그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당시 주민들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미술품, 생활용품, 여행증명서, 관용문서, 민간인의 탄원문서까지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재 공개되고 있는 묘 안에는 몇 개의 벽화와 불상이 있던 흔적 정도만 남아 있다.
12시 25분. 베제클리크 천불동을 향한다.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잠시 정차하였다.
박격달봉이 있는 박격달 산맥쪽에서 지하수가 용출한 후 흐르는 계곡이다.
계곡의 양 사면은 단단한 암석이 아니라 퇴적층으로 구성되어 동굴을 파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 화강암을 파내는 것보다 그렇단 것이다.
만불궁.
계곡 양사면에서는 풍화물질이 계속 매스 무브먼트를 하고 있다.
12시40분. 베제클리크 천불동.
계곡 아랫쪽으로 내려가면 절벽에 많은 동굴들이 만들어져 있다.
이쪽 말고...
저쪽에....
6~14세기 경에 지역 주민들이 만든 석굴이다. 약 83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57개가 확인된다. 그런데 천불동?
벽화만 40여 개에 달하여 투루판에서 동굴이 가장 많고 벽화 내용도 제일 풍부한 불교 석굴 유적이다. 아쉽게도 불교를 숭상하던 회홀고창국이 사라지면서 많은 훼손이 이루어졌다. 근세들어 문화재 도굴꾼들이 들끓으면서 약탈이 이루어졌지만 남아 있는 불상이나 벽화만으로도 세계 불교 유적으로 큰 가치를 갖고 있다.
동굴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엄금". 谢谢合作.
내부 촬영이 안되니 외부 촬영만...
돈황의 천불동도 물이 가끔 흘러주는 물길을 배경으로 거대한 동굴군의 형성이 가능했다.
이곳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천불동도 마찬가지로 물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토대로 한 것이다.
현지 가이드가 온도계를 보여주었다. 55℃. ㅎㅎㅎㅎ
1시 30분. 화염 같은 열기 속에 화염산을 찾았다.
우마왕이 저 안에???
화염산 앞을 지나는 312번 고속도로. 화염산은 그대로 이지만 내 머리 속에서 화염이 이글거린다^^
너무나도 뜨거운 날씨. 투루판의 열기에 답사 열기가 더해지니 더 뜨겁다. 그래서 호텔로 대피하였다. 에어컨 속에서 시에스타를 조금 즐기고 열기가 수그러들 때 오후 일정을 지속하기로 한다.
5시 43분. 투루판 토도구 풍경구를 찾았다.
재밌게 생긴 차량들이 돌아다닌다. 꼬맹이 차. 삼륜차이다.
시방이 포도인 동네이다. 동네 뒷산의 뒷편으로 희미하게 박격달 산맥이 보인다. 이 동네의 풍요는 그곳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포도 덩굴로 덮이게 될 것이다.
농가. 이슬람 스따일.
수로 빨래터.
당나귀와 함께 하는 일상.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포도원.
수로의 물길이 대단허다.
햇볕이 워낙 강하니까 포도가 매우 맛있게 익는다고 한다.
손 닿으면 마음대로 따 먹으라 한다.
포도 기념 사진.
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
한 송이에 도대체 포도 알갱이가 몇 개가 달린 것인지... 세다가 포기했다.
땀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짜내지는 것만 같다.
포도가 너무 많다.
포도 동네를 떠난다.
뒤로 보이는 포도구.
6시. 투루판 시내의 민가 방문 시간을 가졌다.
여러 품종의 건포도.
양탄자의 세상.
빵굽는 시간.
달구어진 화덕 안쪽에 반죽한 난을 붙여두면 금세 금세 익어서 나온다.
마당 가운데를 지나는 물길. 생명줄이다.
민속 공연 시간도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라 시범을 보여주더니.....
함께 예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렵지 않아요...이러엏게~ 이렇게~
동네 골목. 뭐라고 써 있는 것일지...
동네 관청.
8시. 교하 고성의 실크로드는 어떠할까...
교하고성은 투루판의 서쪽 10km 정도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물의 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형태상으로는 하중도의 모습을 보인다. 섬과 같다.
하천의 침식 작용에 의해 섬의 주변부가 모두 30여 미터의 절벽을 이루어고 있어 방어 매우 유리한 형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의 토후로부터 거점으로 점찍혔을 것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곳에서 교하국이 번성했었다. 천산남로와 천산북로의 실크로드 경로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지로서 번성했었다. 남쪽에 오르내릴 수 있는 입구가 있다. 동서 300m, 남북 1650m 정도의 크기인데 내부에는 사원, 불탑, 불전, 관청, 감옥, 민가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그런데 건축물들을 벽돌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지표에서 아래로 파내려가며 만들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도시 전체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교하고성 남쪽의 입구에서 걸어 올라갈 수 있다.
고창고성에서와 마찬가지로 폐허가 반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와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이 없다. 버려진 도시, 유령 도시 분위기.
토사의 퇴적으로 구성된 지표였기에 공사가 그나마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교하고성의 역사와 지리를 탐구하는 대원들.
목재 도구. 얘가 왜 여기서 나왔을까?
8시 25분. 햇님이 피곤하시단다. 넘어가시려 한다. 베이징 기준 단일 시간대 사용의 문제. 오후 8시 반인데도 해가 남아 있다니. 베이징으로부터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나타나는 현상이다.
흙 더미 폐허 더미.
역사를 느끼며 지리를 탐구하며 교하고성의 탐방로를 걷는다.
동문. 폐쇄되었다.
속에 스피커가 숨어 있다.
저 윗쪽에서 파내려와 이런 통로를 만든 것이다. 10여 미터 깊이를 파내었다. 최성기에 6천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던 공간이라 하니 대단하다.
하늘에는 달님만...
주변은 30여 미터 높이의 깎아지는 절벽을 이룬다.
뒤로 한 걸음 만 더~ 한 걸음만~
교하고성이 위치한 맞은편도 교하고성과 비슷한 높이의 단애를 이룬다. 그 사이를 물길이 흐르면서 깊은 골짜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9시 20분. 돈황 막고굴이다. 大泉河라는 하천이 흘러야 하는데, 물이 말라 하천이었던 흔적만 보여준다. 이 메마른 건천의 건너편에 구멍이 뽕뽕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구릉 위에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이었던 돈황에는 구법승, 대상, 병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융성 뿐만 아니라 돈황 예술도 꽃피울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흔적이 세계적인 불교 유적지로 유명한 막고굴이다.
돈황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며, 시냇가의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이 막고굴은 366년 승려 樂樽이 석굴을 파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이후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 들이 드나들면서 하나 둘씩 굴을 판 것이 천개에 가깝게 된 것이다.
천 여 개의 굴이 있다 하여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에는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한결같이 어떤 종교적 고행의 흔적이 느껴지며, 종교와 예술의 피땀어린 결정체이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굴 속의 유물들은 일찍이 약탈을 당해 수만 점이 해외로 유출되어 현재에는 10여 개 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9시 30분. 막고굴 입구에 도착하였다.
다큐 제작중.
막고굴 서점.
입구에 만들어 놓은 불탑들.
여기 저기 여러 곳에 불탑이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줄 알았는데, 세계문화자연유산이란다.
막고굴, 천불동 앞쪽을 흐르는.... 아니 물이 흐르지 않고 있는 건천. 하천의 이름은 찾질 못했다.
막고굴 입구의 패루.
입장에 필요한 입장권. 100원에다가 외국어 통역해준다고 20원이 덪붙여져 있다.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보호를 위한 조치라고 하는데, 이해된다.
비천상이 여럿 보인다.
드디어 왔구나 막고굴에. 그런데 입구에서 들어가면서 카메라와 헤어져야 했다. 실내 촬영 엄금. 천불동 내부의 사진은 없다.
외국 관광객이 오면 해당 외국어가 가능한 안내원이 나와 안내를 해준다. 보통 10여 개 정도의 동굴을 개방하여 안내한다. 한국어가 가능한 안내원 중에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었던 것 같은데, 돈황연구원에 근무한다 했었다. 열쇠를 들고 다니며 일반인들의 경우보다 조금 더 많은 동굴을 개방해주었다.
가장 규모가 큰 96호굴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앞에서 기념 사진을 다들 남기고 간다.
나도 남들처럼 남겨 보았다.
사진을 직접 찍지 못하였고, 15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정리를 하려니 막막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 숨겨져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할 수 없어 조만간 다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2012년에 한번 더 갔었지만 부족하다. 또 다시 가자~
돈황연구원
1900년 경 돈황에서 도교사원을 지을 곳을 찾던 왕위앤루(王圓籙)가 이곳 석굴까지 찾아들었고, 그의 조수가 16호 굴에서 다른 벽과 소리가 다른 벽을 찾아내어 그 벽을 헐면서 17호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막고굴이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나 황실에서는 이 유물에 관심을 갖질 않자 왕원록은 다시 석굴을 막아버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왕원록에게 푼돈을 주고 설득하여 1907년 25 상자 분량의 고서들을 추려 영국으로 반출하였다. 왕원록은 양 한마리 값을 받고 위치 정보를 누출하였단다. 으이구~
같은 해 프랑스의 고고학자 펠리오는 일일이 문서를 확인하여 알짜들만 골라 29 상자나 반출하였다. 그 속에는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었다. 얼마 후 펠리오의 둔황 고서 발견은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불관에서도 천불동에 있던 문화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 오오타니 고즈이가 약탈한 문화재가 강점기 박물관에 보존된 채로 해방을 맞으면서 우리나라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오오타니는 원래 승려였는데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중앙 아시아 탐험에 나섰고, 돈황과 쿠차 등지에서 많은 문화재를 털어왔다고 한다. 영국에 유학가서 좋은 것 배워 온 놈이었던 것이다. 으이구~
그런 문화재 도둑놈들 이야기를 절절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 이곳 돈황연구원의 전시실이다. 전시실에서 안내를 하면서 이 문화재는 누가 훔쳐갔고, 이건 누가 훔쳐갔고 하는 식으로 이야길 해준다.
2시반.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 돈황 골목 구경에 나선다.
돈황 재래시장.
돈황 시내의 비천상.
3시 10분. 돈황 박물관을 찾았다.
좀 많이 썰렁했다.
3시 30분. 명사산으로 들어간다. 사구들이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이동하는 소리가 많은 날이면 멀리까지 들린다고 하여 명사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명사산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상가 때문에 꽤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서 이동해와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에서 보장하는 명사산월아천풍경명승구 되시겠다.
입구이다. 여길 지나가려면?
이게 필요하다. 80원이었다.
입구를 통과하여 들어왔다. 명사산이닷!
안내도.
사구의 곡선은 언제 보아도 유려하다.
번호표를 뽑고 있다.
낙타표. 내가 1번이었다.
이렇게 줄지어 낙타를 타고 사구를 오른다. 거리도 꽤 되고 높이도 높다. 그냥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젊었을 때는 가능했을지도..ㅎㅎ
낙타의 발걸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카메라를 품에 안고 사진을 만들었다. 내가 찍힌 사진은 없다.^^
일행의 뒷 쪽으로도 차알칵~! 33명 일행이다보니 낙타 행렬이 기이일다~
걸어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두었다. 땀 좀 날듯...
4륜 바이크도 준비되어 있다. 물론 옵션이다.
모래썰매는 1회 이용했다고 되어 있다.
월아천
명사산 안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가 월아천이다. 남북 길이가 100m, 폭이 25m 정도이다.
월아천을 향해 걷는다.
소만호. 인공호라고 한다.
명사산을 걸어서 오르는 젊은이들. 젊은이들~
월아천.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원천인 지하수가 용출하며, 광풍이 불어도 월아천은 모래에 덮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막 오아시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뭔가 알 수 없는 유적일 것 같기도 하다.
명사산의 그림같은 사구들과 인사를 한다. 다시 또 보자꾸나~~
곤륜산맥 언저리에서 이제 천산 산맥 언저리를 향한다. 유원역에서 침대 열차를 이용하여 투루판으로 이동한다. 내일 아침은 투루판에서 먹게 될 것이다. 쭉 뻗은 빈 도로를 질주한다.
잠시 쉬어가기~ 목화밭이 보였다.
목화가 열심히 자라고 있다.
유원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목화밭' 노래를 같이 불렀다. 내가 기억하는 가사 부분은 "목화밭~ 목화밭~" 전부인데..
유원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역에서 8시20분 쯤에 탑승 수속을 하였다. 역에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열차에 탑승하여 4인 1실 배정 받아 웃고 떠들다가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7월29일 늦게 돈황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신세진 돈황국제대주점, 돈황국제호텔의 근사한 자태.
8시. 호텔 앞 길가에 나와서 동네 산책.
간판의 超市라는 단어가 궁금했다. 뭔가 했는데, supermarket이었다...기가 막히다.ㅎㅎ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공사중 판떼기 앞에서 쉬고 있는 아저씨. 아침 시간인데..... 만만디??
공사 중인 앞쪽에서 안내판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루 종일 맡은 것 같다. 훌륭한 분업이다.
9시 30분. 돈황 교외를 달린다. 사막이다. 멀리 거대한 명사산의 사구가 보인다. 돈황시의 남쪽 전체가 명사산이다.
돈황은 감숙성에 있는 도시이다. 타림 분지 동쪽 변두리를 북류하는 唐河강 하류의 사막 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중국와 중앙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고대의 동서 교역, 문화 교륙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기원전 1세기 한 무제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 기지로 삼아 둔황군을 두고 부근에 옥문관과 양관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과 한인의 식민을 투입하였는데, 이후 둔황은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오아시스 도시가 변경 도시가 됨으로써 한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9시 33분. 사고 현장을 만났다. 아직 현장 수습이 안된 상황이다. 운전자가 크게 다쳤을 것 같다.
9시 33분. 뭐지?
9시 53분. 옥문관 매표소. 버스 기사 아저씨가 계산한다.
옥문관을 향하는 도로.
10시 43분. 옥문관에 도착하였다.
옥문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국에서 서역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한다. 호탄에서 생산된 玉이 이 문을 통해 들어온다고 하여 옥문관이라 이름 붙였다는 설이 있고, 양관과 대비하여 여자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붙였다는 설도 있다. 돈황 북서쪽 방향 70km 지점에 위치한다. 차량으로 이동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옥문관 안내판.
옥문관이 이런 상태로 남아 있다. 진짜 관문 맞나??
옥문관문물진열전이 열리는 작은 전시장이 입구에 있다.
전시장의 내부 모습. 좀 썰렁하다. 주로 글자들을 전시하고 있다.
밖에 나오니 건조 기후 환경의 상징인 낙타들이 보인다.
눈썹 위를 털이 덮고 있어 조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앞쪽에 얼씬거리면 침을 뱉는다니 조심해야 한다.
얘네들 똥이다. 아직 싱싱한....
사막 식생.
옛날에 만든 옥문관 안내 표지석
기단 아랫쪽이 깊게 파여 있다. 건조 기후 환경에서 지형을 변화시키는 주요 요소인 바람에 의해 침식된 것으로 보인다.
천정이 없이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사각형의 흙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옥문관이다. 2천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원래의 구조물이나 시설을 모두 파손, 유실되고 남아 있다는 것이 이 정도이니 원래의 모습을 유추하기는 지난한 상황이다.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 크기인 구멍.
문 모양이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할 틈새 구멍도 있다.
그리고 옥문관 북쪽으로 녹색 지대가 보인다.
그 녹색 지대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촬영 기사님들.
녹색 지대는 옥문관이 있는 지대보다 고도가 낮다.
물이다. 물이 있다. 물가에는 하얀 색이다. 소금이다. 즉, 염호인 것으로 보인다.
돈황은 기련 산맥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당허(唐河)강의 북쪽 하류 부분에 위치한 도시이다. 당허강의 물이 모두 중간에 메말라버리지 않으면 그 북쪽을 흐르는 疏勒河(Shule River)와 만나며, 疏勒河는 서쪽으로 옥문관 북쪽 부분을 지나며, 계속 흘러 타림 분지로 흘러든다. 疏勒河가 물이 부족하여 흐르지 못할 때는 군데 군데 염호를 이루며 플라야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염분이 많은 물이라 사람은 이용할 수 없다. 하지만 주변에 남아 있는 발자국의 주인들은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때마침 그들, 발자국의 주인들이 나타났다.
부근에 보이는 유목민의 거주지.
염소 떼다.
疏勒河변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유목으로 키워지는 염소는 어느 정도의 염분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며 疏勒河를 떠나는 답사객.
한 때 지오트립 홈페이지 표지 모델이기도 했었다.^^
옥문관을 떠났다. 중간에 신기루가 보여 차를 멈추었다. 빛이 밀도가 서로 다른 공기층에서 굴절함으로써 멀리 있는 물체가 거짓으로 보이는 현상을 신기루라고 한다. 사진에서 멀리 섬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뜨거운 햇볕에 의해 달구어진 지표면의 상태를 관찰, 촬영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답사대원들.
도로 주변으로부터 모래 등이 바람에 도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로를 따라 둔덕을 조성하여 놓았다.
길......
11시 40분. 한대 장성을 향한다. 옥문관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져 있다고 한다.
11시 50분. 왔다. 한대장성유지에 왔다.
전국시대에 각 제후국들이 방어를 위해 변경 지역에 성을 축조한 것이 장성의 기원이다.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각 제후국들의 장성을 하나로 잇고 보수하여 완성한 것이 만리장성이다. 전한 시대에는 진나라 때의 장성을 보수하고 확장하였다. 한장성의 대부분은 주변에서 자라는 갈대를 흙과 모래를 섞어 쌓았는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 기후 환경이라 오랜 세상이 지났음에도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한장성은 주로 흉노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농업 지역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천 년 가까이 원형이 보전될 수 있는 지리 환경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는 답사대원들.
사막의 열기를 견디는 버스.
한장성 관련 시설일 것이다. 내부 공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즉, 문을 닫은 상태.
파괴된 한장성의 일부.
1시 25분. 양관 부근의 포도 농장을 찾았다. 점심 식사를 위하여.
대막정원의 풍광 속에서 양관농가의 맛을 즐기시라~
포도가 머리 위에 널려 있다.
맛있겠다~
남쪽에서 고산 지대에서 스며나오는 물을 모아 오아시스 농업을 대규모로 하고 있다.
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
식당이 천정이 포도이다.
맥주 한잔 하실라우???
해바라기도 있다. 중국인의 간식꺼리.
인구 밀집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건조 기후 지역이기에 싱싱한 포도를 그대로 소비지로 출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건포도를 만든다.
포도를 수확하여 건조장에 널어두기만 하면 그냥 건포도가 된다. 워낙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햇볕으로 나오면 숨이 막힌다. 조금이라도 그늘 속에서 버티고 싶은 기후 환경.
아직 수확철은 아닌 것 같다. 건조장 밖에 건조 설비를 내어 놓고 있다.
물길을 따라 방풍림 및 그늘 조성 역할을 하는 백양나무가 워낙 잘 자란다. 적절히 자라면 솎아내어 건조장 설비로 이용한다.
물만 있으면 사막이 사막이 아니게 된다. 녹색 지대.
돈황시정신문명건설위원회로부터 10성 중 여덟 개의 별을 받은 훌륭한 집에서 식사를 한 것이었다.
열심히 자라고 있는 포도밭.
2시 30분. 뜨겁고 메마르고 숨막히는 양관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양관은 옥문관과 마찬가지로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으나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다. 한 무제 때 수비를 위한 시설이었고 봉화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막 위에 우뚝 솟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래서 심심해할 관광객들을 위해 준비했다. 장군님을~
근무 서기 위해 출발하는 위병들. 행군하는 모습은 완전히 당나라 군대이다. 아... 한나라 군대일까?ㅎㅎㅎ
고증이나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냥 뭔가 대충 만들어 놓았다.
진짜 대충 만들었다. 외양은 새 것이었는데.... 부서진다.
양관박물관이다.
위진서역이라는 현판.
양관문물 안내도.
'양관'인 것 처럼 만들어 놓았다.
맞다니까!!!!
있었음 직한 병영도 대충 만들어 놓았다.
양관 병영에 둔전병으로 근무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
양관 봉화대 흔적을 찾아 이동하는 셔틀 차량.
길 옆에 '양관'이라고 써 놓았다. 써 놓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까.
그렇단 '말'이야.
양관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붕괴, 훼손 위험이 커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책을 만들어 놓았다.
말타는 소년. 다가와서 자기 말을 돈내고 타보라고 권하고 다니던 소년이었다. 알아 듣진 못했지만 그런 의사를 표현 것이라고 친다.
말 좀 타소~^^
말 타쉐여~~
주변은 그야말로 온통 말라 비틀어진 땅덩어리이다.
관측 초소가 있었음 직한 곳에 관측소 건설.
그늘을 제공하지만 공기가 워낙 뜨겁다.
양관박물관, 그리고 그 앞으로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오아시스.
양관 유적, 그리고 건조 기후를 즐기는 답사객들.
누군가가 남긴 유기물을 발견했다.마르고 나니 섬유질이 많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것을 모아 연료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오아시스, 양관박물과, 양관 유적.
양관 유적과 그 주변.
양관에서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고산 지대. 기련 산맥의 서쪽 끝, 혹은 곤륜 산맥의 동쪽 끝 쯤 되었을 것이다.
물이 있는 세상과 물이 없는 세상이 너무 극과 극으로 다르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홀로 나아간다. 저쪽으로.
'수봉관양'. 양관 봉수대 표지석이다.
셔틀 차량이 참 재밌게 생겼다.
양관 병영,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4시 반. 당하 저수지를 들렀다. 양관에서 돈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다. 돈황은 당하의 하류에 위치하고 상류 쪽에서 물길을 막아 어마어마한 저수지를 조성했다.
크리스탈 클리어 워터는 아니다. 녹조가 보인다.
댐의 아랫부분까지 계단으로 내려가볼 수 있다.
수위가 한참 낮아진 상태이다. 고지대에서 눈 녹은 물이 유입될 때 최고 수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산지에서 하천을 통해 저수지와 유로가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하수가 용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수지의 물을 주변에 널리 분포하는 포도 생산 농가에 공급하고 마을의 생활용수로도 공급된다.
저수지는 콘크리트 제방으로 만들어졌다. 댐 위의 답사객들.
댐 건설 이전에 물이 흐르던 유로. 건천 상태로 남아 있다. 저수지의 물은 사진 상에서 더 하류 부분에서 조금씩 일정하게 방류하고 있다. 돈황이 당허강의 물에 의존하여 발생한 오아시스 도시이기에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진 하나 남겨본다.
5시. 돈황시 초입에 위치한 돈황고성에 도착하였다. 입장권에 돈황고성에 대한 간략한 안내가 되어 있다.
돈황 시내에서 보면 남동쪽 교외에 위치한다. 돈황시의 남쪽에 명사산이 위치하니 그 부분에 해당한다.
1987년 일본에서 당나라 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만든 세트장이었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영화의 촬영장으로 이용되었다. 영화 세트장일 뿐이지만 상당히 철저하게 고증을 거쳐 만들었기에 당나라 시기의 생활 문화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곳이다.
멀리 명사산이 보인다.
당나라 거리
마을 입구 패루.
장원 입구
당나라 술집.
술집 내부. 오량액이 눈에 든다. 하지만 눈으로 마시는 술은 아니다.
옛날 옷을 빌려준다. 당나라 옷인가???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
성위에 올라 주변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촬영했던 영화 장면들일거다. 아마. 뉘시더라~~
6시 10분. 피곤한 몸을 살려보고자 발맛사지 집을 찾았다.
영약으로 채워진 물통에 발을 담그고 기다린다.
이들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면.....
이렇게 된다.ㅠ.ㅠ
이후 일정은 야시장 둘러보기였다. 흩어져서 일행과 떨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호텔로 살아돌아오는 방책이라고 알려준 것이 호텔의 명함이었다. 아무데서나 택시 잡아 기사에게 보여주면 호텔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데려다 줄 것이라고... 아마도...
서안 국제공항에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깜깜한 밤거리를 달려 호텔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모습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였다. 중국의 모습이 너무나 궁금하였다.
숙소인 건국호텔을 출발하여 서안성벽을 먼저 답사하였다. 다음에 가까이 위치한 서안비림을 들러 대자은사를 방문하여 대안탑을 구경하였다.
흥성국제대주점의 식당을 찾아 다양한 만두요리를 맛보았다.
이후 화청지, 진시황릉, 병마용갱 순으로 답사를 진행하였다.
8시 반에 설레이는 가슴으로 숙소를 나섰다. 중국을 본다! 드디어!
곳곳의 공사장들이 눈에 들었다. 중국도 토목국가로 들어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7월 29일 서안에서의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서 도로로 접어들었다.
어안이 벙벙하였다. 으아니~ 이게 무슨! 혼돈의 카오스!
중국은 자유가 억압된 공산국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엄청난 자유가 보장된 국가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도로 위에서 가고 싶은데서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가더라. 사람들도 자유롭게 도로를 이용하고 차량들도 자유롭게 도로를 이용했다. 아무데서나 유턴을 하던 차량들이 인상적이었고,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를 차선 하나씩 하나씩 건너던 서안 시민들의 모습도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자유로운 모습들이...
그리고 신호등에 숫자판이 달린 것을 처음 보았다. 아... 이걸 우리나라는 왜 안하고 있었을까....
9시. 서안 성벽에 도착하였다. 서안성벽, 서안장벽은 위수가 흐르는 분지의 한복판에 위치한 서안시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실크로드의 관문이자, 서안 역사의 상징에 해당하는 곳이다. 명나라 초기에 당나라 때 축조된 성벽을 토재로 완성한 것이라 한다. 둘레 11.9km, 높이 12m, 성벽의 아랫 부분은 15~18m, 윗 부분은 12~14m에 이른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대형 성벽이다.
성벽 윗면의 너비가 12~14미터에 이른다.
서안 성벽. 장성벽이라고도 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 것인지, 원래 스모그가 심한 것인지 서안의 하늘이 깨끗하지 아니하다.
곳곳에 공성 및 방어용 무기들을 전시해두고 있다.
크다.
성벽 위에서 남긴 사진 하나. 15년 전 모습......
성벽 안의 공간을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성벽 앞의 해자. 해자를 경계로 과거의 중국과 현대의 중국이 구분된다.
서안은 중국 산시성의 성도인데, 주나라 무왕이 세운 鎬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천 년 동안 단속적이기는 하였지만 국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역사도시로서 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가장 번성했던 당대에 인구가 백만 명에 이른 계획 도시로서 서역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명·청대에 서안부를 설치하였다.
큼지막한 커맨드 센터^^ 성벽 위를 달려보라고 자전거를 대여해준다.
지오트립이었다. 지오트립이었던 것이다.
9시50분. 서안 비석들이 숲을 이룬다는 비림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서안성벽의 남문 부근에 위치한다.
안내도.
서안비림. 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비석의 숲일 뿐만 아니라 덥고 습한 날씨에 식생이 무성한 곳이기도 하다.
현지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비림으로 들어선다.
비석들이 숲을 이룰 정도로 많이 모여 있다고 하여 비림이다. 보호 가치가 큰 비석들은 전시실 내부에 보존하고 있다.
탁본을 뜨는 현장을 구경할 수도 있다. 전문가가 탁탁탁 치면서 본을 뜨고 있다. 그래서 탁본인가....
탁본을 뜬 작품들은 현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탁탁탁... 본본본...
덥고 습하고 숲이 우거져 있더라니.... 모기가 강력하다. 모기들의 공격을 받아 부어오른 종아리.
전시실 밖에도 많은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근사한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도 따로 있다.
조각품을 모아 놓은 전시실도 있고.
효경정이다. 효경정에는 석대효경비가 있다. 그곳 간판의 비림의 한자가 틀리게 만들어져 있다.
石臺孝經碑는 당 현종이 745년에 친필로 효경을 적어 비석에 새기게 한 것이다. 당 현종의 예서체는 수준이 좀 높았다고 한다. 효경의 내용은 공자가 그의 제자 증자와 효에 대해 나눈 문답을 정리한 것이다. 이렇게 孝에 관심이 많았던 당 현종은 아들의 며느리가 마음에 든다고 자기 후궁으로 만든다. 그리고 석대효경비를 만든 745년에 현종의 비가 되었고. 손주 며느리를 자시의 비로 맞아들이는 것이 孝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황제니까 가능했었는지도...
그 석대효경비의 비각이 효경정이다. 그 현판을 청조말 영국에서 밀반입된 아편을 불사르면서 아편전쟁의 시발점을 만들었던 임칙서가 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파직된 임칙서가 고향인 신강으로 물러나면서 1841년 이곳에 들러 현판을 적었는데, 다음에 다시 와서 점을 찍겠다고 "碑"자에서 위의 점 하나를 빼먹었다고. 하지만 그는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하였다. 재등용이 되기는 했지만 1850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러 광서성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만다. 그래서 그냥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요로케.
우루무치 시내 중심의 홍산공원에 임칙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비림을 떠나 대안탑을 보러 자은사로 향한다.
오늘도 좋은 인연을 맺은 한쌍이 탄생하였다.
좋은 인연을 태우고 있는 차량의 번호판이 보기 좋다. 永結同心이라........
11시. 대안탑을 살펴본다. 대자은사. 서안성벽에서 남쪽으로 주욱 달려오면 도착한다.
당 고종이 어려서 여윈 어머니 문덕황후를 기리기 위해 648년에 건립한 것이 자은사이다.
대안탑. Giant Wild Goose Pagoda.
향을 피운다. 초에 불을 붙인다.
대안탑. 현장법사가 645년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 경전을 보관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자은사 경내에 세워진 전탑이다. 일본에서는 주로 목탑, 우리나라는 주로 석탑인데 비해 중국에는 전탑이 많다. 벽돌로 만든 탑을 전탑이라 한다.
탑을 오르는데 20원을 내라 하더라. 주변 정찰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여러분 모두 복받으세요~~~~祝君萬事如意!
대안탑 뒷편으로 화려한 아주 화려한 자은사의 절집들이 있다.
더운 날씨에 걸어다느라 힘들어 하는 일행들에게 시원한 복을 나눠주고 있는 인솔자 조성호 선생님.
1시 반. 점심 때를 놓쳤다. 늦었더라도 먹어야 한다.
서안의 동쪽으로 달려 흥성국제호텔을 찾았다. 아...식당을 찾았다..
다양한 만두. 맛있다.
다양한 요리. 시원한 맥주 한 모금 a sip.
다양한 병사들.
배부르다. 만족한다.
먹었으니 오후 일정을 계속 할 수 있다.
2시 10분. 화청지.
華淸池는 서안 동쪽에 위치한 麗山(리산)의 산록에 위치한 온천이다.
당 현종에 의해 만들어진 온천 별궁인 화청궁이 있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던 곳이란다.
貴妃池란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로 들어가본다.
려산온천 이호수원.
동전들. 지폐도 있다.
양귀비가 목욕하다가 잠시 욕조 밖으로 나왔다.
화청지 뒷편의 驪山.케이블카가 설치되어 가동중이다.
빨간 글자.
있었다고 전해지는 화청궁.
리산, 화청지, 화청궁.
3시. 진시황릉엘 왔다. 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돌멩이에 천하제일릉이라 새겨져 있다.
저 봉우리가 진시황릉이라 한다. 계단을 하나 하나 밟고 올라갈 수 있다. 황릉을 밟고 올라간다니....ㅎㅎ
진시황릉은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구릉형 묘이다. 시황제가 즉위하자마자 공사를 시작하여 70여 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완성하였다니 대단한 공사였을 것이다. 내부에 지하 궁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시설이 있다 하지만 아직 발굴되지는 않았다.
날도 덥고 경사지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가려 했는데, 많은 젊은이들이 무언갈 준비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발이 멈추었다.
공연이었다.
과일접시들이 날아간다. 황제 식사?
황릉 아래에서 황제를 위한 공연 행사를 하는 것일까?
축문을 읽는 것을 보니 제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사이다. 오체투지.
그러더니 병사들이 나와서 용맹을 뽑낸다.
무서운 망치와 눈초리. 방방 뜬다.
그리곤 예쁜 땐스가 이어지고.
2006년에는 따로 차량들을 위한 주차장이 없었다. 진시황릉 앞쪽의 도로를 따라 한 켠에 차량들이 줄지어 정차했다가 떠나야 했다. 릉원 조성은 해놓았지만 차량들이 많이 몰릴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것 같았다. 2006년에는...
4시 10분. 병마용갱을 돌아본다. 진시황릉원에서 동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한다.
진시황병마용박물관. 1호갱 전시관 외경이다.
1974년 처음 발굴이 시작되었다. 4개의 갱이 발굴되었으나 4호갱은 완성 전에 폐기되어 빈 갱도로 남아 있다. 1호 갱은 길이 210m, 너비 60m, 깊이 4.5~6.5m로 구성되었으며, 본래 갱 위에 회랑식 건축물이 있었으나 불타 없어졌다고 보고 있다.
매장된 전체 도용은 약 6,000개로 추정되며, 도용의 크기는 1.75~1.85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무장한 무사들은 엄격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서로 상이하다.
2006년 봄 어느 날 서울중등지리교육연구회에서 실크로드 답사를 교사 직무연수로 추진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조금 고민하다가 바로 신청했다. 방학 때마다 합숙을 하던 일정이 있었는데, 그 일정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했던 부분도 작용했다. 해외 여행으로는 두번 째였을 것이다. 33명이라는 인원이 움직였다.
공항에서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행정실장님도 계셨고, 같은 학교 졸업생도 있었다. 모녀 관계였다니...
행사를 주관했던 지오트립이라는 조직을 처음 만난 때 이기도 했다.
서안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대학 동창을 만나기도 했다.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 학교의 동창회에서 지원받아 같은 학교의 선생님들과 여행을 가는 것이라 했다. 부러웠다.^^
2006년에 중국에서 발간된 최신중국 사주지로 안내도이다. 15년 전의 것이다.
답사 일정 순서는 다음과 같다. 서안으로 날아가 하루 답사를 하고 돈황으로 날아갔다. 유원역에서 침대열차를 이용하여 투루판으로 달렸다. 이틀 후 우루무치로 이동하여 이틀을 답사하고 서안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늦은 시간에 공항에 모였다. 늦지 않을까 가슴 떨면서 공항으로 달려 갔을 것이다.^^
2006년 7월 28일(금) 오후 8시가 약속된 시간이었다. 일찍 가서 기다리다가 팀과 만났다.
줄서서 탑승 수송을 진행하고 있다. 8시38분을 가리키는 시계가 보인다.
그때의 비행기표가 남아 있다.
2006년 7월 28일 서안까지 날아가는 MU5022편,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였다. 10시반 출발.
10시30분 출발하여 다음 날 서안에 도착하였다.
7월 29일 0시 10분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표에 나와 있다. 현지 안내원과 만나 깜깜한 밤거리를 달려 건국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진짜로 깜깜한 밤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전한 어둠 속의 중국이었다. 그때는...
이동 경로는 아래 지도에 표시된 것과 같으며 정차하여 뭔가 한 것을 가능한 모두 표시하려 애썼다.
10년 전의 기억을 파내었다.
17시간 반을 이동하였다. 일찍 출발하여 늦은 시간에 쿠차에 도착하였다. 이동거리는 787km였다.
숙소인 Friend Holiday Inn.
friend를 "福兰德"으로 음차한 것 같다. 假日이 holiday, 酒店은 호텔.
호텔 앞 거리의 아침 풍경.
시장으로 나서는 상인들 같다.
和田街. 7시 8분.
7시57분. 풍력 발전구를 조망할 수 있는 주차장에 정차하였다.
风力发电厂停车区. 눈앞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풍력발전기가 깔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올라 조금이라도 더 멀리 더 넓게 보고자 하는 마음들.
WC가 있다.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ㅎㅎㅎ 전통적인 화장실이다.
이용하는 사람들만 있고, 청소나 관리하는 사람은 없던 것으로 보이는 상태.
풍력 발전기 앞에 서 있는 커다란 글자, 风. 강한 바람이 지속적으로 부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바람의 저장고'라고 부를 정도라고 한다. 우루무치에서 투루판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풍력 발전기가 깔려 있다.
풍력발전구 주변에 우루무치 최대의 호수인 차이워바오 호수(柴窝堡湖)가 있다. 멀리 보이는 차이워바오 호수를 뒤로 하고 출발한다. 바로 부근에 있는 염호(盐湖)가 있다.
염호로 접근하는 입구 부근의 길가에 정차했었다. 왜 했을까???
멀리 염호가 보인다. 소금호수. 건조 기후 지역의 분지에 있는 호수이기에 유입되는 물이 증발되면서 형성된 것일 것이다. 건기에 삽질하면 소금이 그냥 나오는 곳이다.
9시5분. 멀리 보거다펑(博格达峰)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5,445미터. 반대편에 만년설이 녹은 물이 고여 형성된 천산 천지 호수(天山天池风景区)가 있다. 근사한 곳이다. 2006년에는 그랬다.
길가에 보이는 공장들.
10시18분. 托克逊县을 지난다. 멀리 보이는 발전소. 조금 큰 것과 작은 것의 두 세트가 마을 외곽에 건설되어 가동중이다.
10시24분. 건조하고 햇볕이 강한 환경이기 때문에 포장도로의 노면 파손이 잦다. 자주 망가지고 언제든지 수리하고..
11시45분. 궁금하면 언제든지 차를 멈춘다. 언제까지 어디에 도착해야 한다는 패키지 여행의 기본 룰 없다.^^
메마른 건천의 모습이 보여서 정차했다. 너무 너무 뜨겁기에 버스도 뜨거운 엉덩이를 열고 달린다.
G314 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작은 하천.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비가 올 때만 일시적으로 물이 흐르는 와디. 계곡의 반대쪽 언덕은 바람에 날려온 모래로 덮여 거대한 사구처럼 보인다.
평소에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는 건조 기후 지역에서 교통로로 흔히 사용된다고 한다. 이 하천의 바닥도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골짜기의 아랫쪽으로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물이 흐르기도 한다는 흔적이다. 그렇기에 초록색이 보이는 것이다. 농사 가능!
12시 49분. 그리운 화장실을 찾았다.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공공 변소.
일행 중 한 분과 함께 연출 사진. 화장실의 상태 확인용.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상점도 있다.
그리고 백성들을 떨게 하는 공안도 있다. 오가는 모든 차량을 기록하고 검사한다. 트렁크 내부까지.
과거의 실크로드이다. 지금은 쇠붙이 차량들이 대신 달린다.
공사 중인 곳이 많아 공사용 중장비의 운송도 많다.
1시44분. 창길 회족 마을에 도착했다. 길가에 보인 근사한 식당으로 찾아든다. 현지 여행사와 일정 조율이 곤란한 지역이라 현지 가이드가 사전 답사하여 미리 메뉴를 골라 예약하는 등의 절차를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찾아 들어가 그냥 원하는 메뉴를 골라 먹었다. 반미옌에 반했다. 拌面이라고 간판에 써 있다.
맛 있었다. 추가 주문하여 곱빼기로 먹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역시 반면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있지 않다.ㅠ.ㅠ
화물차에 짐을 최대한 많이 싣기 위해 뒷쪽으로 꼬리를 만들며 하적한 차량들이 많이 보인다.
4시 40분. 쿠얼러의 철문관에 도착하였다. 사랑으로 반겨준다.
역시 실크로드의 거점이었을 듯 싶다. 물이 흐른다!!!!
멱도 감는다!!!!
철문관 입구의 패방 혹은 패루.
철문관 주변 안내도.
근사한 방문자 센터.
메마른 대지만 보다가 물과 녹색을 보니 딴 세상에 온 것 같다. 물론 딴 세상이 맞다.
孔雀河의 물길이다. 저쪽으로 흘러간다. 멀지 않은 곳에 저수지가 있고, 그곳에 발전 시설이 있다.
철문관은 천산 산맥 남쪽의 타림 분지로 들어서는 중요한 길목이자 군사 요충지였다. 그래서 진나라(265~420) 때부터 이곳에 방어를 위해 관문을 설치했다 한다. 거의 사라지고 성벽 쪼가리 조금 있는 것을 중국 정부에서 돈을 들여 복원해 놓았다.
복원해 놓은 철문관인데, 하하하...
철문관경구경점분포시의도. 철문관 주변의 볼거리들이 여기 저기 있다.
철문관은 Holoshan과 Ku Lu Ke Ta Shan 사이에 위치한다. 실크로드와 신장 지방의 중심지이다. 이곳에는 가게가 많다. Tayr와 Zohra 사이의 슬픈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 내려온다. 아직도 훌륭한 왕 장군에 의해 수력 발전소가 1952년에 만들어졌다. 철문관은 아름답고 경치가 근사한 곳이 많으며,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쿠얼러의 명소이다.
공작하를 따라 걸으며 고대 실크로드 대상의 기분을 내본다.
기념 사진. 주변 경관에 사진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빨간 글자.
쿠얼러에서 관광지로 찾을 곳이 이곳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 아닌가... 한다.
전력 시설 건들지 마시오 하는 경고.
5시20분. 떠난다.
쿠얼러는 바인궈렁 몽골 자치주(巴音郭楞蒙古自治州)에 속한다.
G314 고속도로에서 쿠동공로로 들어선다. G314 도로를 통해 쿠차로 계속 달려도 되었는데, 왜 우회했는지는 모르겠다.
도로의 통제소.
도로를 차단하고 있다가 허용된 차량이 지날 때면 손으로 직접 차단기를 올려준다. 참 친절하다.
차단기에 "油田 뭐라뭐라" 써있다. 유전 지대 보호를 위해 통제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7시10분. 신나게 달리다가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도로변에 차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냥 도로에 세운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다른 차량들의 이동이 거의 없다.
버스에서 내려 주변의 건조 지형 경관에 대해 탐구하다.
학술적인 연구과제가 될 수 있는 독특하고 일반적인 건조 기후 지역의 지형 경관들이 나타난다.
8시7분. 천산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융설수를 이용하는 오아시스 마을인 룬타이현 인근이다. 염도가 높더라도 물이 있기에 식생이 번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