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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1일 토요일이다. 탐방 연수를 마감하는 날이다. 

 

연수 제 6일날도 아침식사는 6시 30분부터 진행되었다. 8시 20분에 숙소(?)를 출발하였다.

 

8시 50분. 오사카를 방문했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가 아닐까 싶다. 오사카 성 천수각을 올랐다. 기념 스탬프도 찍어왔다.

1496년 淨土眞宗의 蓮如上人이 지금의 오사카 성 부근에 지은 坊舍가 혼간지 本願寺라는 큰 절로 커지면서 성대한 세력으로 성장하니 당시 천하일통을 노리던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걸렸다. 결국 1580년 오다 노부다가 織田信長은 혼간지 세력을 박살내고 절은 불태워버렸다. 이후 오다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풍신수길이 1583년부터 불탄 절터에 쌓은 성이 오사카 성이다.  풍신수길이 세력 다툼에서 밀려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떼로 입장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과 입장하는 통로가 다르다. 서, 북동, 남동 방향의 세 진입로 중에서 남동 방향의 '관광버스 진입로'를 통해 진입하였다.

 

오사카 성은 결혼식장이다??

 

오사카 성은 해자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안쪽의 해자 중에서 물이 없는 부분. 大阪城 사쿠라몬 桜門이 있는 부분이다.

 

천수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막부의 멸망 이후 내전중에 소실되었던 것을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에 의해  다시 만든 것이다. 1997년 일본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쯤에서 기념 사진을 남겼어야 하는데, 부끄럼을 너무 타서 주변 분들께 사진 좀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지 못했다.

 

그냥 묵묵히 입장했었다.

 

8층에 위치한 오사카 성 전망대는 약 50m 정도 높이에 위치하여 오사카 성과 주변 오사카 시내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8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대도시의 하늘은 대체로 이렇다. 오사카 하늘의 대기 질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니콘 18-70mm f/3.5-4.5 렌즈의 40mm 화각의 모습인데 이러하다.

 

지붕의 끄트머리인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 샤치호코(鯱, しゃちほこ). 몸은 물고기이고, 머리는 호랑이, 꼬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고, 배와 등에는 날카로운 돌기가 나와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보통 기와나 나무, 돌 등으로 만들어 성의 지붕에 금박을 입힌 긴샤치(金鯱: 긴코, 긴노샤치호코)로 장식한다. 나고야 성(名古屋城)의 것이 가장 유명해서 긴샤치는 나고야의 대명사 중 하나이다. 원래는 치미와 같이 지붕 양단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귀면 기와와 유사하게 건물의 수호신이란 의미를 띠고 있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물을 뿜어 불을 끈다는 의미가 있다.

 

50m 높이의 전망대에서 오사카의 모습을 전망하고 있는 탐방객들. 천수각을 한바퀴 돌아가면서 전망할 수 있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그물이 튼튼하게 쳐있다.

 

西丸庭園 니시노마루 정원이 천수각의 서쪽 아래 보인다. 정원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보이는 건물이 大阪迎賓館이다.

 

7층 내부의 전시실. 풍신수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디오라마가 상영된다.

 

5층 전시실. 오사카 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토요토미는 망하고 도쿠가와 가문은 흥했다. 그때의 여름 전투를 미니어처로 재현한 전시물이다.

 

3층 전시실의 오사카 성 모형. 엄청난 규모이다. 석성이다. 이 돌은 어디서 다 구했는고?

 

권력이 미치는 전국에서 돌을 쓸어담아 오사카 성을 축조했다.

 

2층 전시실에는 각종 무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투구쓰고 사진 찍기를 해볼 수 있다.

 

1층에서는 기념품을 살 수 있다. 와우~

 

10시. 우리가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버스들. 해자 바로 옆에 주차장이 위치한다.

 

10시 30분. 왔다. 쇼핑 센터에!!! 

 

입구에서 약파는 아지매들. 어디서 약을 팔아~~

 

다 쓸어담겠어~ 라는 자세를 갖고 쇼핑센터로 들어갔다.

 

엄청나게 쇼핑을 해댔다. 뭔지 모르겠지만 무려 1천 엔어치 상품을 구매했다.

 

나와서 동네 구경한다. 바로 앞에 위치한 지하철 역 입구에 자전거들이 장사진이다. 환승한 사람들이 두고 간 것 같다. 자전거들마다 모두 등록 스티커가 붙어 있다. 청수곡 고교 학생의 097번 자전거.

 

12시 50분. 덴포잔 부두에 도착하였다. 대관람차는 언제 한번 타보려나...

대관람차를 타는 대신에 출국수속을 하였다. 여권에 도장 하나 추가...

 

2시 20분. 환송식이 있었다. 밴드도 나와서 음악을 뿌려준다.

 

색종이 띠도....

 

대한민국에서 방문했던 우리들을 환송해주기 위해 나온 오사카 시민들. 환송을 마치고 기왕 나온 김에 덴포잔 마켓 플레이스에서 주말을 즐긴다.

 

색종이 띠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남겨진다.^^

 

바이바이~ 나라사요~~~~

 

오후 2시 40분. 그렇게 이별을 아쉬워 하는 오사카 시민들을 뒤로 하고 출항하였다.

 

뒤따라오던 소방선이 또 이별이 아쉽다고 한다.

 

헤어질 결심을 했다....

 

3시. 그렇게 그렇게 없어질 흔적을 남기면서 오사카 항을 떠나 부산항을 향했다.

 

오후 4시. 아카시 해협의 아카시 대교 밑을 지나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한다.

 

4시 15분. 벌써 석양을 준비하는 하늘.

 

오후 5시. 선내 식당에서 저녁 식사.

오후 7시 30분. 선상 대학.

 


 

2004년 12월 12일 일요일의 해가 떠올랐다.

 

오후 1시. 부산항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코앞이다.

 

이별할 때가 되어서야 뒤를 돌아본다. 후지마루를 본다. 미츠비시에서 1989년에 출생한 배였다.

 

우리의 귀국을 환영해주던 '날아다니는 배'.

 

환영인파의 열렬한 환영. 감사~ 감사~

 

환영 축포를 쏴주려다가 모두 실탄 밖에 없어서 아쉽게 축포는 생략....

 

1시 50분. 밧줄을 걸었다. 접안하였다.

 

요렇게 항해하였다. 도착할 즈음에 항적을 그린 지도를 가져가라고 방송해주더라.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하고 바로 해단하였다.

KTX로 서울로. 지하철 타고 집으로.

 

20년 전인 2004년 12월의 일본 여행을 20년 후에 정리해보았다.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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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0일 금요일. 탐방 연수의 닷새째가 되었다. 교토의 금각사, 광륭사를 탐방하고, 아스카로 이동하여 아스카 문화를 '연구'했다.^^

 

12월 10일에도 아침 식사는 6시 30분에 시작되었다.

8시 30분. 덴포잔의 부두를 출발하여 14대의 버스들은 교토로 달렸다.

 

10시. 교토 시내에 진입하였다. 일본의 재난 대비용 아파트라고 설명하더라. 재난 발생시 필요하면 '붉은 삼각형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은 박살내고 진입해도 된다는 것이라고.

 

10시 10분. 길가의 '엔 샵'. 처음 보았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천원 샵' 같은 것이 생기더니 '다이소'로 진화했다.

 

교토는 平安 시대부터 明治 유신까지 거의 천년 동안 왕성이 있던 곳으로 역사의 도시 奈良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관광도시이다. 교토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12세기 말까지이며 6세기 한반도를 통해 전래된 불교 문화의 영향이 크다.

 

10시 20분. 킨카구지 金閣寺에 도착하였다. 원래 이름은 로쿠온지 鹿苑寺인데, 사리전인 '金閣'이 워낙 유명하여 금각사라고 흔히 불린다.

원래는 가마쿠라 鎌倉 시대의 사이온지 긴쓰네 西園寺公経의 별장이었는데, 무로마치 室町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満가 물려받아(쇼군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자꾸 밝히니까 눈물을 머금고 자발적으로 헌납당함?) 산장인 기타야마도노 北山殿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금각을 중심으로 한 정원건축은 극락정토를 구현했다고 일컬어지며, 유명한 잇큐 一休 선사의 부친인 고코마쓰 後小松 천황을 초대하거나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무대로서, 이 시대의 문화를 기타야마 北山 문화라고 부른다. 요시미쓰 義満 쇼군이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절이 되었으며 무소 소세키 夢窓 국사가 개산하여, 요시미쓰 義満의 법호 로쿠온인도노 鹿苑院殿에서 두 글자를 따 로쿠온지 鹿苑寺라고 명명한 것이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금각사 경내도. 한글판 금각사 리플릿에서 스캔하였다.

 

금각 앞에 위치한 鏡湖池를 중심으로 아시하라시마 葦原島 등 크고 작은 섬과 당시의 지방 영주들이 헌납한 名石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쪽의 衣笠山을 배경을 한 이 정원은 무로마치 室町 시대의 대표적인 池川回遊式 정원이다.

 

주지가 머무는 方丈 북쪽에 위치한 교토 3대 소나무 중 하나라는 리쿠슈노마쓰 陸舟之松 소나무. 배의 모양으로 보이도록 손 본 소나무다. 교토를 대표하는 3대장 중의 하나라면 조금 더 그럴싸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랫쪽에 받침대를 대서 억지로 만들어놓고는... 거긴 눈을 주지 않나보다.

 

녹원사라는 원래의 이름보다 금각사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

1950년에 견습승려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며 불을 질러 전소되었었다고 한다. 1955년에 복원되었는데, 대충 작업했는지 금박이 박리되는 문제가 생겨 1980년대에 2차, 1990년에 3차 복원을 실시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을 참고해보자. 이것이 더 멋스럽다. 복원이 아니라 흉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진 출처: https://ganshoji.com/publics/index/45/detail=1/b_id=1304/r_id=5984/)

 

榊雲.

 

불당인 不動堂. 본존으로 석부동명왕이 모셔져 있다. 

 

11시 20분. "전차를 주의"하면서 우리 버스는 교토 시내를 달린다.

 

11시 30분. 코류지 廣隆寺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講堂을 탐방하기 시작한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강당, 왼쪽의 나무들 속에 숨어 있는 건물이 쇼타쿠 태자를 모신 태자전이다. 중간의 작은 구조물은 태진전이다. 왜는 6세기 중반에야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에서 경쟁력으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쇼타쿠 태자는 불법을 받아들이면서 신라인 하타(秦)씨 집안사람 秦河勝에게 절을 경영하도록 하였고, 蜂岡寺가 창건되었다.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다가 廣隆寺가 되었다. 태진전은 광륭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는 秦河勝의 공덕을 기리는 곳이다.

 

영보전을 새로 지어 신영보전이라 하더라.  영보전에는 여러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삼매에 몰입하여 느끼는 환희가 넘치면서 얼굴 전체에 웃음이 피어난 것이다. 신라에서 조성한 불상인데,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같은 시기에 모셔졌을 것으로 보이는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대한민국 국보 제83호)을 보자. 똑같다. 다른 부분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왜 그럴까요?

 

11시 50분. 광륭사 주차장. 대나무가 거하게 자라고 있었다.

 

12시 30분. 광화소학교에서 신입생을 모집하는가보다. 원서배포중~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면서 아스카로 달려갔다. 바쁜 하루였다.

 

오후 2시 50분. 아스카 석무대에 도착하였다.

飛鳥 아스카는 일본의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6~7세기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꽃피웠던 곳으로 고문화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아스카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석무대, 고송총 고분, 飛鳥寺 등이 있다. 아스카의 역사적 풍토와 문화재의 보존 활용을 위해 1975년 개관한 아스카 자료관은 불교가 전해진 6세기부터 나라로 수도가 옮겨진 8세기 초까지의 飛鳥와 萬葉集, 飛鳥의 宮, 돌, 고분, 사찰, 다카마쓰 고분 출토품을 비롯하여 飛鳥寺 탑과 궁터, 절터의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어 아스카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곳이다. 

시기적으로는 6세기 말에서 약 100년 간을 가리키지만,  '아스카 시대'라고 하면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대혁명이 이루어져 귀족의 연합체였던 국가가 천황제 율령국가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일본의 국가성립의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스카 지역 일대의 문화 유적지 분포 안내도. 넓은 지역에 많은 유적지가 분포하고 있다. 석무대 ⇒ 다카마쓰 고분 ⇒ 아스카 자료관 순으로 관람을 진행하였다.

 

石舞台古墳의 모습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커다란 네모난 모양의 고분이다. 봉토가 완전히 없어지고 거대한 석실이 노출된 상태이다. 천정돌이 넓고 평평하여 옛날에는 춤추고 노는 곳인 줄 알고 石舞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아무나 들어가 볼 수 있다. 3차에 걸친 발굴 조사결과 집형태의 석관판이 발견되었고, 돌로 축조된 웅덩이에 둘러싸여 있으며 작은 고분군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석무대 주변에 모여 강의를 열심히 수강중인 탐방객들. 고분의 축조는 7세기 초 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6세기 후반에 정치 권력을 장악했던 소나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경 씨족 집안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에 가장 강대한 세력을 일군 것이 蘇我 씨족이었다고 한다. 蘇我 씨 집안은 불교의 수입을 매개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고대국가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의 수용 여부를 놓고 다른 강대한 파벌 세력과 격렬한 권력다툼을 30년이나 이어갔는데, 소나노 우마코 蘇我馬子 시대에 이르러 정적을 타도하고 승리하여 불교를 공인받게 되었다. 왕실에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까지 세력이 컸기에 왕릉을 능가하는 석무대 고분의 주인공이 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스카는 과거에 왕도였지만 지금은 1,500호 정도에 인구가 7,000여 명인 한적한 농촌이면서 '유적의 마을'이다.

 

3시 40분. 다카마쓰 고분의 모습이다. 공사중이었다.

천황의 묘라는 오랜 기록도 있기는 했다지만 1972년의 정식 발굴조사에 의해 아름답고 뛰어난 채색 벽화가 있음이 드러났다. 현재는 벽화 보존을 위해 내부 관람은 금지되어 있다. 고분 자체는 도굴당해 매장품이 대부분 손실됨으로써 피장자나 축조 연대를 판명하기 어렵지만 7세기말~8세기초로 추정되며, 당연히 상당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벽화 양식에 일본에 없던 것이라 역사상 대발견으로 여겨진다.

 

고분의 네 면에 모두 벽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작이 위치하는 남쪽벽이 도굴 통로로 이용되면서 파손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결과이다. 청룡, 현무, 백호 방향의 벽에 아름다운 채색 벽화가 남아 있으며, 모사된 작품을 '고분벽화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동쪽 벽면의 벽화이다.

 

서쪽 벽면의 벽화이다.

 

고분이 남북 방향으로 길고 동서 방향으로는 짧아 북벽에는 현무 그림만 남아 있다. 그래서 남벽에는 주작의 그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백호 머리 위에 그려진 달 속에 동물을 그린 것,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 것, 인물상의 얼굴 모양과 모자 등의 복식 등을 보면 덕흥리, 수산리 고분, 쌍영총 벽화 고분 등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너무나 유사하다. 때문에 백제계의 정착지로 알려진 아스카 지역에 고구려계 세력이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것을 반영하는 유적이라 일본의 고대사 해석에 혼란을 주고 있단다.

 

오후 3시 50분. 날이 흐려 12월이 더욱 쓸쓸한 겨울(?)로 느껴지는 역사의 도시 아스카.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스카. 비닐 하우스들이 보이고, 과수원에서는 귤의 수확도 이루어지고 있더라.

 

오후 5시. 奈良文化財研究所飛鳥資料館 아스카 자료관에 도착하였다.

여기에는 飛鳥宮, 飛鳥石, 飛鳥 고분, 다카마쓰 高松塚 고분, 飛鳥寺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똑같은 모양의 백제 기와와 飛鳥 기와가 나란히 전시되어 飛鳥 문화가 곧 백제 문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6시. 오사카 항구로 돌아가던 중 고속도로 요금소. 

요금소에 근무자가 모두 노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자리 나누기의 일환이라 하더라. 우리나라 처럼 장시간의 혹독한 근무 조건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짧은 시간으로 나누어 여러 사람들이 근무하는 형태라고 하더라.

 

밤 9시 30분. 오사카 남항에 정박중인 집(?)으로 찾아간다. 원래 6시에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는데, 열심히 탐방 연수에 몰두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2004년 12월 10일의 하루가 저물었다. 탐방 연수 5일째가 저물었다.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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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2004년 12월 9일에 오사카 항구를 출발하여 나라의 동대사, 법륭사를 관람하고 후지마루가 정박중인 오사카 항구의 덴포잔 부두 天保山岸壁로 돌아와 유명한 오사카 수족관(海遊館)을 관람하였다.

 

크루즈 후지마루에서의 아침식사는 매일 6시 30분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일정하다.

8시. 오사카 항을 출발하면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다. 부두 앞쪽으로 보이는 Tempozan Bridge 天保山大橋.

부두 한쪽 끝에 작은 둔덕이 있다. 높이가 무려 4.53m인데 天保山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부두 이름, 부근을 지나는 교량 이름,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등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정상에는 '천보산 정상'이라는 표지도 있으며, 천보산 산악회도 있다. 산 이름이 붙은 곳들 중 일본에서 가장 낮은 산이었다. 센다이의 히요리 산이 도호쿠 대지진에 따른 지진해일로 6m였던 봉우리가 3m로 깎여나가면서 텐보산이 두번째로 낮은 산으로 순서가 밀렸다고 한다. TMI....^^

 

"역사가도". 일본에서 밀고 있는 곳이다. 일본의 역사가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세~아스카 사이의 '古代史 존', 나라 일대는 '奈良時代 존', 교토로 이어지는 지역은 '平安~室町時代 존', 오사카까지 '戰國~江戶時代 존', 오사카~고베 사이는 '近代 존'으로 유형을 나누었다. 권력의 핵심 지역의 이동에 따라 해당 시기의 역사문화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시기별로 ZONE을 구별하였다.

이번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연수에서는 12월 10일에 나라 시대 유적인 동대사를 방문하고, 아스카 시대를 상징하는 법륭사와 아스카 자료관을 관람하였다. 12월 11일에 방문한 오사카 성은 전국~강호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이런 '레키시 카이도 歷史街道'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일본 문화에 대한 정보 전파의 기초를 확립하고, 새로운 레저 공간을 활성하는 한편, 지역의 문화 유산을 최대한 활성화 함으로써 지역 커뮤니티의 질을 높이는데 목적을 두고 추진되고 있다.

 

9시 10분. 톨게이트. 阪神高速 天保山料金所. 16번, 13번, E92 고속도로를 순서대로 이용하여 달려갔다. 

 

9시 20분. 13번 고속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는 버스의 창 밖으로 멀리 오사카 성이 보인다.

 

9시 50분. 奈良 나라시에 들어왔다. 平城宮跡歴史公園 부근에 위치한 본조사가 길가에 보였다.

 

東大寺二月堂 2층에 올라 바라본 奈良 나라 시내의 모습.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奈良 나라는 구릉지로 둘러싸인 야마토 大和 분지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794년 京都 교토로 천도할 때까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 최초의 국가를 세웠던 곳이다. 그래서 국가를 뜻하는 우리말 '나라'가 이곳의 지명이 된 것이다. 나라는 일본고대사의 시작과 건국신화의 무대가 되었으며, 최초의 국가형태인 大和 정권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나라에는 석기시대의 유적과 함께 고대 분묘와 찬란한 불교문화와 귀중한 예술품이 많이 산재되어 있어 도시 자체가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특히 나라 시내 동쪽에 위치한 나라 공원에는 흥복사, 동대사, 춘일대사, 약초산 등 나라의 대부분의 명소를 품고 있다.

대불로 알려진 동대사는 거대한 대불전을 비롯한 국보급 건축물과 불상을 많은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사원이다. 또한 법륭사에 있던 고구려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는 소실되었지만, 중문, 탑, 종루 등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2004년 12월 9일 목요일 아침 나라시의 거리 풍경.

 

10시. 세계유산 도다이지 東大寺도착하여 하차하였다.

 

사슴 상들이 격렬하게 환영해주고 있다. 물리지 말라, 뺏기지 말라 같은 주의사항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뭐라 뭐라고 "주의"사항들이 써 있다.  나라공원의 사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야생동물이다! 나라의 사슴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만 애완동물은 아니다. 가까이 가거나 몸을 만지면 위험해요~

5~7월은 출산기다. 새끼 사슴 가까이 가면 엄마 사슴한테 많이 혼난다. "우리 애가 어떤 애인데!!!! 왕의 DNA..."

9~11월 하순 사이는 사슴들의 발정기다.................어...

사슴이 갑자기 뛰면 위험하니 알아서 잘 피하도록!

 

사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사슴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도다이지, 동대사에 입장한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대문으로 들어와 중문을 지나면 동대사 대불전을 만날 수 있다.

 

평일 10시 반에 도다이지 경내에 있을 수 있는 학생들은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체험학습? 졸업앨범 촬영?

 

"신경 끄고, 저쪽 가서 설명이나 들어..."

뿔 떨어진 사슴이 주변으로 어슬렁 거린다. 나라 시는 녹각 제품이 특산품이다. 

 

동대사의 배치도를 숙지하자.

남대문으로 입장하여 대불전을 탐방하고 동락문으로 빠져 행기당, 이월당, 법화당경고 순으로 탐방을 이어갔다.

 

우중한 날씨라 사진이 잘 안나왔다고 치자. 동대사의 중심인 대불전으로 찾아간다.

 

동대사의 대불전은 건물 높이 47.5m, 동서 길이가 37m, 남북은 50.5m인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745년에 동대사의 착공이 이루어져 748년에 法華堂三月堂)이 먼저 준성되었다. 708년 신라사람 金上元이 찾아낸 구리광맥에서 생산된 구리를 이용해 747년부터 대불의 주조가 백제사람 군나가노기미마로 國中公麻呂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백제 멸망 이후 왜로 이주한 백제왕 敬服이 749년에 황금 900냥을 헌납하여 높이가 15m에 이르는 盧舍那坐佛이 완성되었다. 대불을 모시는 대불전은 신라사람 이나베노모모요 猪名部百也였다. 752년에 대불의 개안법요식이 거행되었다.

 

동대사의 대불. 대불 뒷편의 光背는 771년에야 설치되었다고 한다.

 

본존상 동편 高柱 밑동에 구멍이 뚫려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보기도 하는... 빠져나가고 있다. 기둥의 이 구멍이 본존의 콧구멍 크기와 같다고 하니 대불의 규모가 짐작된다. 

 

동대사 대불전이 백제인들의 불심과 기술로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분위기는 일본풍인 것인가....

855년에 대불의 머리가 떨어져 861년에 수리가 되었다고 한다. 1180년에 불이나서 대불이 상하였고 1185년에 재현되었지만 불상의 모습이 달라졌다. 백제 조각의 원형은 사라지고 일본사람을 닮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대불전은 1180년에야 중건되었는데, 1709년에 다시 지으면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백제의 것을 만들어 놓았더니 세월이 지나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변형되어 버렸다.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지만 옛모습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1980년에 크게 수리하면서 완전 깔끔해져 더욱 세월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불전 귀퉁이에 창건 당시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불전 입구에서 향을 올릴 수 있다. 앗.. 12호차 깃발이...

 

대불전 밖에 모셔진 목조 불상 핀돌라 Pindola Bharadvaja. 신비한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는데....

 

동문으로 나서면 보이는 七重塔相輪 Asoka Pillas.

 

11시. 행기당 앞에서의 강연. 행기당은 에도 시대의 건축물이다. 내부에 行基菩薩坐像을 모시고 있다.

민중에게 불교를 널리 포교한 대단한 신망을 가진 行基 스님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신도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이 동대사 건설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원래 行基菩薩坐像은 이코마 시의 죽림사에 모셔져 있는데, 그 좌불의 모각상이라고 한다. 행기당 내부의 좌불 모습이 언듯 보인다.

 

종루 뒤에 사슴들이 숨어서 몰래 청강하고 있다.

 

동대사에서 대불전의 대불 말고도 우리 선조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장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을 놓치면 탐방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으니 대불전 밖에 있는 선조들의 유산의 잔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강사님 말씀 하나 하나를 선생님들은 집중하여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11시 20분. 이월당을 만난다. 음력 2월에 법회가 이루어지는 장소라서 二月堂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동대사를 창건한 良弁 스님의 高弟 実忠じっちゅう)이 창건하였다고는 하지만 이후 여러차례의 중건을 통해 규모가 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향효과가 좋아 법회를 진행하는데 적합하다고 한다.

 

2층에 오르면 나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월당을 탐방하여 조사활동에 열중하는 선생님들.

 

11시 50분. 東大寺法華堂経庫. 헤이안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창고 건물이다.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에 경전 등을 보관하던 창고였지만, 중세 이후 쌀창고로 이용되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위치도 여러번 이전되었다. 나라 시대에 흔하게 사용되었다고 하는 校倉 방식으로 건축된 건물이다.

 

校倉 방식을 삼각형, 사각형의 목재를 사용하여 바깥쪽으로 능선 모양이 드러나도록 만든 것이다. 귀틀집과 같은 형상이지만 각진 목재를 사용하여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아 내부로 습기가 잘 들어오지 않고 건조는 잘 되는 특징이 있어 창고 건물 양식으로 적합했다. 법화당 앞에 위치하며, 옆에 어발탑이 세워져 있다.

네 방향으로 경사진 기와 지붕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러한 기와 지붕은 아스카 시대에 사찰 건축 기술과 함께 전래된 것이다.

 

무서운 사슴  사마가 자꾸 주변을 얼쩡거린다. 껌 좀 씹어본 사슴 같다.

 

1시에 만난 사슴들. 이 동네 사슴들은 여름털과 겨울털이 사뭇 다른 모양이다. 나라 시내의 어떤 식당에서 어떤 메뉴의 어떤 식사를 했을 것 같다. 이제는 우리가 사슴들과 헤어질 시간~~ 떠난다 법륭사로~~

 

오후 2시 20분. 호류지 法隆寺에 도착하였다. 입구에서 다들 下馬하였다.

 

중문 앞에 모여 법륭사에 대한 맛을 보고 입장하였다.

호류지 法隆寺는 아스카 飛鳥 시대(6세기 중엽~8세기 초)의 건축 양식을 오늘날에 전해주는 사찰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다.

607년에 스이코 推古 천황과 쇼토쿠 聖德 태자가 요메이 用明 천황의 유지를 이어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670년 법륭사가 화재로 전소되고, 북동쪽으로 자리를 옮겨 708년에 중건되었다. 그런데 金堂에 고구려 스님 曇徵이 그린 벽화가 있다. 1949년에 불에 타 손상을 입기까지 뛰어난 작품으로 숭상되었다. 담징 스님이 고구려에서 건너가 활동하던 시기가 610년부터였는데, 708년에 중건된 건물에 벽화를 남겼다고 하는 부분에서 중건 시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담징의 벽화를 일본에서는 그냥 작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금당은 1949년의 화재 이후 복구 공사를 하여 1954년에 세운 건물이다. 

 

금당 벽화.

 

2004년 12월 9일 현지에서 받아온 리플릿을 스캔한 법륭사 경내 지도를 통해 가람의 배치를 확인해보자.

법륭사는 크게 금당과 5층 목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이인 西院 가람과 유메도노 夢殿 불당을 중심으로 한 도인 東院 가람으로 나누어진다. 약 187 제곱킬로미터 면적의 경내에 아스카 시대를 비롯한 각 시대의 진수를 결집시킨 건조물들이 모여있으며,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1993년 12월에 일본 문화재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금당은 대웅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그래서 금당 내부에 아스카 시대의 금동석가삼존상, 금동약사여래좌상,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등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외에 헤이안 시대의 목조길상천입상, 비사문천입상도 안치되어 있다. 소실된 벽화는 모조 벽화로 대체되어 있다.

금당은 건축 과정에서 정황이나 기록상 백제의 목조 건축 양식을 상당부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난간의 자형 대공, 하앙의 사용과 배치, 자형 난간 등의 특징적인 부분들은 백제 등 삼국시대 유물과도 일치하는 점이다. 또한 배흘림 양식 기둥, 독특한 柱頭의 형태 등은 역시 한국 건축의 특징과 유사하다. 배흘림기둥은 금당, 오중탑, 중문과 회랑의 기둥들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배흘림기둥은 서역에서 전래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12세기 이후까지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백제인이나 신라, 고구려인들이 경영한 건물들에서만 나타난다.

 

기둥의 윗부분을 보와 연결시켜주는 부분의 형태가 고구려식 柱頭라고 한다.

 

금당과 나란히 五重塔이 배치되어 있다.

5층 목탑은 길게 빠진 처마의 우아함이 돋보이며, 이후 일본 목탑의 전형이 된다. 이 역시 인()자형 대공와 하앙이 사용되었다. 이 목탑의 구조 중심에는 거대한 심주가 있는데, 이는 탑 꼭대기에 있는 금속 장식인 철반을 지지하기 위함이고, 탑은 다른 작은 기둥들과 공포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 이 목탑은 사람이 올라갈 수는 없다. 높이는 31.5m이며, 위로 갈수록 조금씩 작아진다. 체감률이 크기 때문에 층은 1층의 면적의 절반이다. 1층 처마 밑에 한층 낮게 덧댄 차양 부분은 그 양식을 봤을 때 금당에 있는 것보다 더 뒤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법륭사가 위치하여 역사가도의 중요 뽀인트인 이카루가 斑鳩 마을의 가옥. 일본식 가옥이다.^^

 

법륭사 관광안내소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 4시 20분. 오사카 만의 하늘.

 

4시 30분. 오사카 항의 덴포잔 부두 天保山岸壁 한쪽에 위치한 오사카 수족관(海遊館)을 관람하였다.

 

안내 리플릿의 일부.

 

수족관 내부의 이모저모...

 

부두에는 대관람차도 돌아간다. 재밌겠다.^^

 

오후 5시 10분. 오사카 만의 황혼.

 

5시 30분. 후지마루의 선내 식당에서 저녁식사....

 

오후 8시. 선상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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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2004년 12월 8일에 온천의 도시 벳푸에 있었다.

벳푸의 지옥 순례를 했다. 동산 위의 조그만 학교를 방문하고 자연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을 만났다. 오이타 항에서 후지마루를 만나 승선...

(구글지도에서 '경로찾기'를 하고 '목적지'를 하나씩 추가하면 도로를 따라 대충 경로를 쭈우욱 그려준다. 신기하다. 다만 중간에 교통수단변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공항 사이의 하늘도 날아가지만, 항구 사이의 이동은 표시해주지 못하는 한계도 아직 있다.)

 


8시. 스기노이 호텔에서 아침 식사.

호텔에서 바다쪽으로 바라보니 바다가 보인다.

 

바닷가 호텔에서 내륙 쪽으로 바라보니 여기저기에서 김이 새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온천의 도시 다웠다.

別府 벳푸는 도쿄 인근의 熱海 아타미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온천 및 관광도시이다. 동쪽으로 잔잔한 벳푸 만을 끼고 있으며, 시내 곳곳에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온천지가 펼쳐져 있다. 벳푸 역 주변이 가장 번화한 온천가로 큰길을 끼고 크고 작은 여관과 기념품상가, 캬바레, 오락실, 극장 등이 밀집해 있다. 別府八湯을 비롯한 온천의 수가 3천 8백여 개에 이르며 온천열을 이용한 채소, 화훼 재배가 성하다.

 

일정이 많지 않은 날이라 여유 있게 하루를 시작하였다. 10시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지옥'을 제발로 찾아갔다. 733년의 豊後風土記 분고풍토기에도 기록이 등장할만큼 오래된 온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왈, "증기, 열탕, 진흙이 분출하여 접근할 수 없는 불쾌한 토지"라고 하여 "지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온천 지대의 분출하는 물에 기포가 포함되어 있어 마치 끓는 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온도가 낮은 경우가 많은데, 벳푸의 온천은 100도에 가깝다고 한다. 

 

 

벳푸 지옥 순례 べっぷ地獄めぐり가 벳푸 관광의 하일라이트로 알려져 있다. 지옥의 위치나 알고 가자.

혈지 지옥, 명반 온천, 바다 지옥 순서로 탐방하였다.

 

10시 15분. 길가에 지옥에 살 사람을 모집한다는 광고판이 보이더라. 지옥의 '파미리호므'.

 

10시 20분. 피의 연못 지옥에 도착하였다.

 

온천수의 온도가 100도에 가깝다고 하더니 확실히 김이 많이 난다.

 

수증기가 눈앞을 가리운다.

 

"피의 연못 지옥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천연 지옥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붉은 열 진흙 연못"입니다. 지하의 고온, 고압 하에서 자연스럽게 화학 반응을 일으켜 생긴 산화철, 산화 마그네슘 등을 포함한 붉은 열 진흙이 지층에서 분출, 퇴적하기 때문에 연못 일면이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라고 소개되어 있는 血池地獄의 모습이다. 온천수에 진흙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진흙속에 산화철, 산화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붉게 보이는 것이다. 과연 피처럼 붉어 보이는가??

 

2004년 12월 8일 현지에서 받아온 쪼꼬만 안내장을 스캔해보았다. 이건 빨갛다.

이렇게 붉은 온천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연못의 면적은 430평, 용출구 면적은 230평이며, 하루에 1,800kl의 용출량을 보인다는 정보도 적혀있다. 수온은 78도이며, 실측해본 깊이는 30m인데 180m 정도는 될 것으로 추정된단다. 점토로 채워져 있어 정확한 깊이를 측정하기 어렵다. 1875년 이후 아홉차례의 폭발 기록이 있는 곳이다.

 

족욕을 즐길 수도 있다.

 

벳푸에서 족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지옥들이 네 곳 있다. 足湯이라 표현한다.

 

10시 55분. 다른 지옥 구경을 구경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묘반 온천 明礬温泉이 있는 곳이다.

 

일본의 독특한 목욕 문화를 반영한 곳이다. 가족이 모두 발가벗고 목욕하는... 가족탕이다.

입구에 '여기는 견학하는 곳이 아닙니다. 가족용 온천입니다.'라고 빨간 글씨로 적혀 있다. 남의 가족이 온천하는 모습이 궁금하여 들여다 보는 한국사람들이 좀 있었나보다. 물론 일본어로도 적혀 있다.

 

묘반 온천에서 판매하는 의약부외품이 있다. '유노하나 '는 온천 성분을 결정화한 입욕제이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알아서 잘 해결하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국내 수입 많이 하더라. 생산량이 그렇게 많나???

 

11시 30분. 바다 지옥 입구에 도착했다. 원래 벳푸 지옥 순례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쪽에 지옥들이 많이 모여 있다.

 

벳푸 명소 바다 지옥.

 

바다 색깔처럼 보여서 바다 지옥이다. 온천수에 황산철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이러한 코발트 블루 색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온천의 열을 이용하여 열대성 수련을 재배한다. 200m 아래에서 98도의 온천수가 솟는다.

 

안내판.

 

바다 지옥의 시설 배치도. 한쪽에 바다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 있다. 赤池.

 

혈지 지옥, 피의 연못 지옥과 유사한 붉은 진흙탕이다. "なんと池地獄もあるんです!"라고 홈페이지에 설명하고 있다. '무려, 붉은 연못 지옥도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족탕, Hot Spring of a leg, 발의 온천도 있다. 족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벳푸 시내의 어떤 식당을 찾아 어떤 점심 식사를 했다.

1시 20분. 벳푸 시내의 산속의 자그마한 학교를 찾았다. 동쪽으로 바다를 면하고 있는 벳푸시의 서쪽 산 위에 있는데 학교 이름은 '동쪽 산'이다. 동산소학교.

 

산 위에 있는 학교니까 올라가야 한다.

 

산위에 위치한 동산 소학교. 경치 죽인다~~~

 

학생들. 어, 음~~~

 

거대한 죽창의 쓰임새가 궁금했다.

 

가볍게 둘러보고 떠난다. 일본 자동차 회사는 작은 차를 참 귀엽게 잘 만든다. 사까!?

 


오후 2시 30분. 오이타 만에 면해 위치한 다카사키야마 자연동물원을 찾았다. 원숭이가 대표적이라 원숭이 공화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4년에 받아온 리플릿을 스캔한 것이다.

에도 시대부터 원숭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1952년 오이타 시장이 흩어져 있던 원숭이들을 高崎山에 모아 자연동물원으로 개원했다. 1,200여 마리의 원숭이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다네.

 

원숭이들과 미팅할 때의 주의사항들이다. 지키기 참 쉬운 것들이다.

 

사육장의 철책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끼리 산다.

 

원숭이들과의 미팅을 즐긴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과의 접촉이 일상인 친구들이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도 지나가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만지거나 눈을 쳐다보지 말라는 것인 것 같다. 

 

이제 고만 가~~!

 

가라 하니... 간다.

 

오후 3시 10분. 오이타 만.

 

위험한 커플이 보였다. 다치면 우짤라꼬!!!

 

지진과 화재에 대비한 구조를 가진 아파트라 하더라. 지진이 발생했을 때 고층에서 깨진 유리가 아래로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베란다 밖을 유리로 막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재난 발생시 옆집으로 쉽게 대피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오이타 항의 부두에 정박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후지마루.

 

승선하였다.

 

이런 것 잘 하더라. 서비스. 이틀을 함께 했던 버스 기사와 직원들이 부두에 모두 나와 손을 흔들며 환송해준다.  나라사요~

 

3일차이다. 오늘의 선상대학. 시를 공부하고 섹소폰 연주에 흠뻑 빠졌다.

 

와~ 멋지다~

(다음 포털에 개설되었던 이분의 카페에도 가입했었다. 기가 막힌 연주 파일들을 즐길 수 있었는데, 음원 저작권 문제가 강화되면서 연주 파일들이 모두 삭제되어 아쉬웠었다.)


12월 9일 6시 20분. 싸이렌이 울리고 방송이 뭐라뭐라 나왔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아카시 대교의 모습이다.

 

아카시 대교는 아카시 해협에 건설된 다리이다.

일본의 큰 섬들 넷 중 가장 작은 시코쿠와 가장 큰 섬 혼슈 사이에 위치한 아와지 섬과 혼슈를 잇는 明石海峡大橋이다. 지진이 잦은 지역에서 견뎌내기 위해 튼튼한 현수교로 만들어졌다. 교량의 총길이는 3,911m이고 두 교각 사이의 거리는 1,991m이다. 해수면에서 중앙부의 높이는 300m라서 큰 배들도 다리 밑으로 그냥 슝슝 지나다닐 수 있다.

 

그렇게 여명 속에서 아카시 해협을 지나서 오사카 만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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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등과 관련된 일본의 역사 왜곡 공세가 강화되자 이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서 1987년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사업으로 알고 있다. 중간에 힘이 겨웠는지 신한은행과 공조하여 추진하는 '제18회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연수에 2004년에 다녀왔다. 최근에는 GS도 동참하는 듯. 주관여행사는 미토스였다. 홈페이지(tour.chosun.com)도 운영되고 있다는데, 접속이 안되네. 여행일정과 강사 소개, 역대 참가자 명단과 탐방기 등이 탑재되어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 홈페이지가 접속이 안되네...

 

2004년 12월에 다녀온 연수 자료를 2023년에 블로그에 정리하고 있다.ㅎㅎㅎ

 

2004년 12월 6일 오후 3시. 출국장에서 멀리 크루즈 선의 윤곽이 보였다. 앞쪽에 컨테이너들이 쌓여 시야를 막고 있어 아쉬웠다.

 

국제훼리출국터미널에서 인원점검을 하고, 연수 참가자들이 줄지어 출국 수속을 한다. 여권에 도장들이 간단하게 남아 있다. 6일에 DEPARTED, 12일에 입국 ADMITTED.

 

삼삼오오 크루즈 후지마루에 오르고 있다.

 

신기했다. 내가 크루즈 선을 다 타보다니... 배의 옆구리에 달려 있는 구명정의 모습도 신기했다. 설마 영화 '타이타닉'에서 처럼 저 구명정 사용법을 몰라 헤메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상상도 했다.

선박의 이름은 Fujimaru였다. 1989년에 진수된 길이가 167m, 너비는 24m, 평균 속도는 12.7노트(최대 21.2노트) 2만3천 톤 규모의 크루즈 선이었는데, 이런 저런 회사로 팔려다니다가 2022년에 고철로 팔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446호 선실을 배정받았다. 4인실이었다. 짐을 던지고 나와서 부산항 구경을 한다.

 

부산 구경을 크루즈 선박에서 하고 있다. 이런 호사가 있던가.....

 

5시 30분부터 선내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후지마루는 6시에 부산항을 출항하여 일본을 향했다. 그리고 후지마루의 4인실 446호에서 설레는 잠을 맞이 하였다.

크루즈 선박이기 때문에 숙식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상태와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매일 저녁 6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의실에서 강연이나 공연도 있었다. 그 일정표를 남겨 두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기회였는데, 기록과 정리를 해두지 않은 것을 20년 지나서 후회하고 있다.


 

부산항을 출항하여 후쿠오카의 하카타 항에 12월 7일에 하선하였다. 육로로 탐사 연수를 진행하고 벳푸의 호텔에 숙박하였다.  12월 8일 저녁에 오이타 항에서 다시 후지마루에 승선하여 오사카 항으로 달려갔다.

이후 오사카, 나라, 교통 등지의 일정을 소화하고 11일 오사카 항을 출발하여 12일에 부산항에 도착하는 일정이 진행되었다. 길다란 다리 밑을 지나갈 때마다 나와서 구경하라고 방송을 하곤 하더라. 지도에 통과 시각을 모두 표시를 해주었네.

탐방 연수 안내 자료집에 실린 '탐방 코스' 지도이다.

 

후지마루의 전체적인 외관은 12월 8일 오이타 항에서 볼 수 있었다. 크루즈 선처럼 생겼다. 1989년에 진수하여 2004년의 모습이었으니 15년 밖에 안된 청춘이었을 것이다. 배가 반짝반짝 빛난다.



 

2004년 12월 7일 화요일의 일정이다. 하카타에서 출발하여 다자이후, 후나야마, 아소산을 답사하고 벳푸의 숙소에서 온천을 즐겼다.

 

12월 7일 8시에 후쿠오카 항에 도착하였다.

6시 30분부터 아침 식사, 8시에 하선하여 입국 수속을 받았다.

여권 한면에 통짜 VISA 스티커를 붙여준다. 그리고도 LANDING PERMISSION 스티커도 붙이더라. 90일을 체류할 수 있는 허가 스티커이다. 나갈 때는 DEPARTED 도장 하나 달랑. 일본은 들어오는 사람들은 까다롭게 걸르고, 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대충 내보내는 것이었을까.

여권의 이런 스티커, 도장이 재미있어서 이런 출입국 도장을 모아보자 했더니, 요즘에는 자동화되면서 도장을 안찍어준다. 여권의 페이지 숫자는 늘었는데 거의 공백이다. 공항으로 입국하면 비행기, 항구로 입국하면 배, 도로를 통해 입국하면 자동차 그림이 스탬프에 찍혀 있어 다양한 스탬프 모양을 모으는 재미가 있는데... 이제 안 찍어주더라.

 

8시. 후쿠오카, 하카타 항으로 후지마루 호가 접안하고 있다.

규슈의 북부 하카타 만에 접한 후쿠오카는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로 흔히 규슈의 수도라 불린다. 일찍부터 한반도와 교류하던 관문으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다. 후쿠오카를 흔히 하카타라고 부르고 관공서와 상점에서 사용하여 외국인들을 혼동시킨다. 후쿠오카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흐르는 나카 강 동쪽을 하카타(상인의 도시), 서쪽은 후쿠오카(무사의 도시)라고 불렀는데, 1889년 두 도시가 통합되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카타라는 옛이름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부두에서 우리를 현대 컨테이너와 분홍색의 예쁜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다. 12호차가 어느 것이더냐...

 

9시 30분. 입국 수속과 버스 승차를 완료하는데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것 같다.

 

9시 50분. 다자이후 太宰府는 후쿠오카 인근에 위치한다. 금방 왔다.

나당 연합군에 백제가 멸망(660)하자 '일본'이란 이름이 만들어지기 전인 왜의 제명 여제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아스카의 도성을 떠나 九州에 도착했는데 병으로 죽고 그 아들 中大兄이 하카타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170여 척에 배에 군사들을 싣고 백제왕자 부여풍이 달려갔고, 2년 후인 663년에 다시 2만7천여 명의 증원군을 파견했다. 금강 하구의 白村江 전투에서 대패한 백제광복군은 재기의 힘을 잃고 많은 유민들과 함께 규슈로 돌아온다. 백제 문화의 대량 유입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신라가 쳐들어올 것이 걱정되어 하카타 만 연안의 전진기지를 철수하고 방어에 유리한 내륙 쪽에 요새를 만들게 된다. 그것이 다자이후 大宰府 초입의 水城이다.

 

10시. 다자이후의 정청 터에 도착하였다. 주축돌과 몇 개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

발굴 조사 결과, 大宰府의 신축은 白村江 전투 패배를 전후하여 시작되었고 일본이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개축되었다가, 941년 스미토모의 난 때 타버린 것을 이후에 복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大宰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이 大野城과 基肄城이었다.  '조선식 산성'이라고 부르는 이들 성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산성으로 꼽히고 있다.

다자이후 정청 유적지에서 현장 학습 중인 선생님들.

 

다자이후 정청 유적지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전시관 안에 보존되어 있는 遺構.

 

다자이후의 정청 유적지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水城이었을 것 같은데 이번 탐방 연수에서는 방문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시 다자이후에서 받아온 팜플렛 3장 중 하나이다. 지도 3번에 정청 유적지가 표시되어 있다. 6번이 미즈키, 수성 유적이 위치한 곳이다.

 

수성 전시관, 水城館 옆으로 수성의 유적지 보인다.

수성은 하카타 만에서 다자이후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로를 산과 산을 잇는 토성을 쌓아 막은 것이다. 수성의 길이는 약 1.2km, 기저부의 폭이 80m, 높이는 14m에 이른다. 지금은 묻혀 있지만 토성의 바다쪽에 폭이 60m에 이르는 해자를 설치해 물을 저장하였던 유구가 최근 발견되어 水城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입증하기도 했다.

수성의 다른 항공사진을 가져와보았다. 교통로의 개설이 이루어지면서 토막토막났지만 동쪽 부분은 꽤 많이 남아 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지에 大野城, 그 아래에 大宰府가 위치한다.

(출처: http://www.yasumaroh.com/2010/08/14/%E5%93%81%E5%B7%9D%E5%A1%BE%E8%AA%87%E5%A4%A7%E5%8F%B2%EF%BC%9A%E3%80%80%E3%80%8C%E6%97%A5%E5%87%BA%E3%82%8B%E5%87%A6%E3%81%AE%E5%A4%A9%E5%AD%90%E3%80%8D%E3%81%AF%E8%A6%B3%E4%B8%96%E9%9F%B3%E5%AF%BA-3/)


 

11시 40분. 에타후나야마 고분 江田船山古墳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전통 가옥과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 고분군 사이에 肥後民家村을 만들어놓았다. 입구의 후나야마 고분을 살펴보고 민가촌 가운데 위치한 교류 광장에서 강의가 있었다.

 

船山 후나야마 고분은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중간에 江田川이 본류인 菊池川에 합류하는 지점에 여러개의 다른 고분들과 함께 위치한다. 5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분길이가 61m에 이르는 前方後圓식 고분이다.

1873년에 발굴되었는데, 결과 공개는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나 이루어졌다. 고분에서는 집모양의 석관이 나왔는데, 석관 안에서 출토된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이 청동거울(6개), 구슬(7개) 관옥(14개), 유리옥(90여 개), 갑옷(3벌), 칼(7개), 창신(4개), 철촉금동제관모(1개), 금동제관(3개 분), 금동제신발, 말재갈(2조), 금귀고리(2쌍), 금팔찌(1쌍) 도자기잔(1조) 등이다.

발굴하고 결과를 곧바로 발표하지 않은 것은 출토 유물 대부분이 고구려, 백제, 가야의 유물들과 유사하여 한반도에서 개척자들이 가져갔거나 이주한 개척자들이 만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금동관모와 김동신발은 공주 무녕왕릉과 익산 백제고분 등에서 출토된 것과 똑같아 학계에 충격을 준 바 있다.

이들 유물은 일괄적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동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에타후나야마 고분 앞에서 현장 학습 중인 선생님들.

 

肥後民家村 히고 민가무라(민가촌)에 입장하는 선생님들.

 

야외무대로 이용되는 교류광장에서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

 

민가촌의 이모저모.

민가촌의 전통 가옥은 우리나라의 민속촌 가옥 처럼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각 지방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가옥을 선정해 이축복원, 즉 이곳에 옮겨와 복원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20년 전인 2004년에 받아 온 리플릿을 스캔해보았다. 

 

오후 1시 30분. 구마모토 시내의 모 식당에서 어떤 메뉴의 식사로 점심을 해결하였다고 한다.

구마모토 시내에는 일본의 3대 성의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 성이 있다고 하는데, 다음 기회가 가보기로 했다. 


2시 30분. 왔다. 阿蘇山 草千里 쿠사센리...

 

주차장 바로 앞으로 커다란 호수가 들어찬 넓은 분지가 보인다. 12월이었다. 이곳의 지명 草千里는 풀밭이 넓다는 것을 과장하여 천리에 이른다고 표현한 것이다. 푸르지는 않지만 풀밭은 풀밭이다. 아소산에 딸린 기생화산의 분화구였다.

 

아소산은 세계 최대의 분화구를 가진 복식 화산이다. 정상부의 6개의 크레이터가 존재한다. 살아 있다.

아소산 외곽의 동서 길이가 18km, 남북 24km, 둘레가 128km로 면적인 380제곱 킬로미터에 이른다. 화구에서 계속 분연을 뿜어내고 있는 이 화산은 용암 분출이나 대폭발은 없지만 중소 규모의 폭발은 자주 되풀이 되고 있다. 정상 광장에 오르면 둘레 4km, 깊이 100m에 이르는 밑바닥의 끓어오르는 모습을 살필 수도 있었다.

정상광장에도 주차장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질 않고 이 아래 주차장에 정차하고 내려 놓았을까...

언덕 위로 올라가 본다.

 

연기가 뿜뿜... 보고 있으니 좀 무서워지더라...

 

날 좋을 때인 4~11월 사이에는 이곳에 와서 말타고 놀 수 있는 승마클럽이 주차장 바로 옆에 있다. 2023년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보니... 주차장 바로 옆에 화산박물관도 보인다. 그때는.... 머 했니!!!?

 

3시. 12호차.

 

오후 6시. 벳푸의 스기노이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식사하고, 쪽발이로 분장을 하고 온천 체험을 했다. 신발도 요상하게 생기고 짧아 불편해서 걷는 모양도 그들처럼 되더라. 굉장히 큰 호텔이었다. 욕탕과 숙소 사이의 통로가 매우 복잡하여 찾는데 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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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타이페이를 관통해 흐르는 단수이 강의 하구에 형성된 맹글로브 숲인 홍수림 자연보호구역을 탐사, 답사하였고,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화산 지역인 양명상 일대를 답사하였다. 유황이 분출되는 온천 지대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온천을 방문해보고 타이완을 떠났다. 양명산에서 온천 체험을 마치고 타이페이로 돌아가는 짧은 경로를 두고 멀리 돌아서 간 이유가 궁금하다.^^

 

7시 40분. RIVERVIEW 호텔에서 창 밖으로 단수이 RIVER를 view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흐린 하늘.

 

8시 50분. 타이페이의 또다른 하루를 시작한다. 간판들이 모두 '타이완'이다. 이런 것이 부럽다. 서울의 간판은 어느 '나라'인지 헤깔리는데...... 도로 표지판을 보면, '대한민국'에서는 네가지 언어가 사용되는 줄 알겠더라는.......

 

8시 50분. 홍수림 HONGSHILIN 역에 도착하였다.

 

환승 주차장인 것으로 보인다. 오토바이들 전용. 노란 테이프로 묶인 오토바이들은?

 

딱지가 붙어 있다. 타이완에서는 '민국'연호를 사용한다. 1912년을 원년으로 한다. 그러니까 2009년 8월 5일이니, 하루 전에 붙인 싱싱한 딱지였다. 오래 방치된 오토바이들의 폐기 공고이다. 이미 번호판도 없는 상태...

 

홍수림 역의 옥상으로 올라간다.

 

홍수림생태전시관이 홍수림 역 옥상 주차장 한켠에 있다.

 

전망대도 있어 높은 곳에서 더 멀리 조망해볼 수 있다.

 

아들과 있으면 마냥 좋아하는 엄마...

 

紅樹林의 정체는 맹글로브 숲이다.

대부분의 나무는 바닷물이 닿는 곳에서 자랄 수 없는데, 기수역의 조간대에서 잘 자라는 나무와 관목림을 맹글로브라고 한다. 맹글로브는 바닷물 속에서 자라면서 해안의 자연 재해를 예방하는 완충림 역할을 한다. 해안 완충림 역할은 태풍, 해일, 쓰나미 등과 같은 자연 재해로부터 완충하는 작용과 수많은 뿌리가 토양을 고정하여 토양의 침식작용을 억제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맹그로브 숲의 빽빽하게 엉켜 있는 뿌리는 해수면 상승에 의해 발생하는 위협적인 허리케인, 태풍 등의 폭풍해일에 대한 완충지대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조류의 속도를 늦추고 해류, 파도, 조수에 의한 침식을 방지하는 영양분이 풍부한 물질의 퇴적을 도와 해안 생태계의 유지에 아주 큰 역할을 하여 보전 가치가 매우 큰 생태 자원이다. 또한 연안 습지 생태계에서 탄소 저장고로서의 역할이 뛰어나 지구 온난화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도 보존하여야 하나 매년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계의 맹글로브 분포 지도. 열대, 아열대의 해안에 분포한다.

 

홍수림생태전시관에서는 타이페이의 단수이 강 하구에 펼쳐진 홍수림의 현황과 가치에 대해 다양한 자료를 전시해놓고 있다..

 

홍수림 역에서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홍수림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데크를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맹글로브 숲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에서 자라면서 해안 지형과 생태계의 유지에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맹글로브 탐사에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대원들.

 

'홍수림생태낙원'에 다녀오다.

 

홍수림에는 각종 조류와 갯벌 및 해양 생물들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조류의 환송을 받으며 홍수림을 떠난다.

 

10시 20분. 홍수림 인근에 위치한 양명산 일대는 화산 지대이다. 땅에서 김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용봉곡' 지열전망대가 사진 속 가운데 설치되어 있어 가까이 다가가 김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명산 국립공원 초입의 용봉곡과 유황곡을 살펴보고, 주변 경관을 관찰하면서 이동하였다. '마조화예촌'에서 양명산 온천을 체험하고 타이페이 시내로 돌아왔다.

 

유황곡의 모습이다. 김샌다.

 

유황곡을 답사하고 돌아서는 대원들.

 

2009년에 사용하던 스맛폰에는 카메라가 달려 있질 않았다. 마조계곡 아래 위치한 마조화예촌에서 온천 체험을 했는데, 카메라를 버스에 두고 하차하였기에 남겨진 사진이 하나도 없더라.

그래서 구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생긴 입구였던 것이 어슴프레 기억이 날랑말랑 한다.

 

내부는 이렇게 생겼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잘 놀고 나왔을 것이다.

 

타이페이 시내에서 점심을 먹었을 것이고, 이후 중정국제공항(지금은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오후 3시에 탑승 수속을 하는 일정표가 남아 있다.

오후 5시 10분 출발하는 케세이 퍼시픽 항공의 CX420 편을 이용하였다.

5시 40분. 하늘을 날고 있다.

 

쭈우욱 날아서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1,578km를 날아왔다. 12,747m 높이까지 올라갔었다고 GPS data logger에 기록되었다.

 

8시 40분. 인천 국제공항 도착.

 

이렇게 2009년 8월 2일부터 6일이 지나가버렸다.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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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5일은 타이완의 지리중심점에서 시작하였다. 1999년 9월 21일에 '타이완 대지진'이 발생하여 난터우 현과 타이중 시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에 지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교육시설을 세우고 피해가 심했던 지역의 일부 붕괴된 시설과 건물을 교육용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설과 피해 지역을 견학하고 자이 시로 이동하여 북회귀선 기념관을 방문한 후 타이페이로 달렸다. 먼 거리였다. 505km, 와우!!!

 

6시 50분. 부리의 숙소였던 진보대반점의 창 밖 풍경. 흐렸다.

 

2009년 8월 5일 8시. 타이완 지리중심점을 찾아왔다.

동경 120도58분25초9750, 북위 23도58분32초3400의 교차점이 타이완의 지리 중심이라고 한다. 호두산 아래에 기념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으나 재측정 결과, 보다 정확한 위치한 호두산 정상에 새로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2023년에 알게 되었다.

 

대만지리중심비의 위치 표시 지도 게시판.

 

"대만지리중심"이라고 적힌 비석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버스정류장 이름도 '지리중심비역'.

 

1999921일에 타이완 난터우 현 지지 진을 진앙지로 한 규모 7.7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타이완 대지진(臺灣大地震)이나 지지 대지진(集集大地震)이라고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921 대지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망자만 해도 2,415명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앙을 가져온 지진이었다.

9시. 921지진교육원에 도착하였다. 시설 배치도. 오른쪽 아래의 매표소에서 시작하여 1, 2, 3, 4, 5, 6, 7, 9 순으로 돌아보면 된다.

 

주차장에서 매표소로 넘어가는 교량에 지진파 그림을 보여주어 지진에 대한 기본 인식을 갖게 하며 시작한다.

 

1999년 9월 21일의 참상....

 

전시관을 둘러보는 방문객들.

 

학교였던 건물이다. 당시에 부서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지진의 발생 원리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학생들.

 

붕괴된 건물. 이러한 참상을 보면서 지진에 대한 경각심을 유지하려는 것일 것이다.

 

리플릿에 스탬프를 찍으면서 다니다가....

 

이동 중에 보인 길가의 식당이다. "土拘"라는 메뉴를 크게 적어놓아 무엇인지 궁금했다. 흙토에 개구 자를 썼다. 말그대로다. '땅강아지'였다. 농사짓던 어린 시절에만 보았던 땅강아지를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한약재로 사용한다네. 

 

11시 30분. 지진철탑기념지에 도착했다.

 

지진으로 기울어진 고압송전탑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큰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지대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울어져 버린 것이다.

 

12시 10분. 集集武昌宮 지지 무창궁에 도착하였다. 어어~ 이거~~

 

지지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는데, 지각판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재앙은 무심하기만 하다.

 

지진의 참상에 전율하고 있는 방문객들...

 

그래도 일어난다. 인간은.... 튼튼하게 새로운 사찰 건물들을 건축하고 있었더라. 지금은 새 사찰과 지진으로 무너진 무창궁을 함께 볼 수 있다더라...

 

921 지지 무창궁.

 

오후 2시 30분. 자이 嘉義 시에 도착하였다. 자이 시정부 경찰국 제2분국 건물 앞을 지난다.

 

오후 2시 45분. 타이완의 북회귀선 기념관인 북회귀선태양관에 도착하였다.

 

카메라 들고 배회하는 아드님.

 

아드님이 만들어 준 기념사진. 카메라의 시간대를 손보지않아 계속 1시간 차이가 난다.

 

북회귀선 기념 조형물. 탑.

 

심심하면 하나씩 만들었나보다. 기념조형물인 탑이 여럿이다. 제작 시기가 서로 다른다. 제일 큰 것이 새거다.

북회귀선 기념표지 제1대 가 1908년, 제2대가 1917년, 제3대가 1923년, 제4대가 1936년, 제5대가 1942년에 만들었다. 그리고 제6대 기념표지가 2005년에 만들어진 태양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2009년 8월 5일에 받아온 리플릿을 살펴보니, 이자들 이거 일본 연호를 자기네 자료에 굳이 꼼꼼하게 표시해놓은 이유가 뭐지??? 그와중에 리플릿에 스탬프는 다 찍혀 있네. 

 

교육센터의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열심히 태양계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2009년 8월 5일 자이 시의 북회귀선 기념탑에서 당시 사용하던 대만제 스맛폰을 통해 GPS 값을 확인해보았었다. 회귀선의 위도값는 23도 26분 16초이다. 내 기계의 측정값이 조금 다르다.

 

왜 다를까 고민하면서 철수한다.

 

4시. 자이 시를 벗어나 촌동네의 도로변에 이러한 형태의 매대들이 여럿 보였다. 내부를 확대해보니 1회용 라이터들만 보이는데... 감시카메라 녹화중이라는 쪽지가 보이고... 정체를 모르겠다. 묘하다.

 

오후 4시 20분. 엄청난 숫자의 오리들이 자꾸 나타나 버스를 정차했다.

 

鰲鼓濕地森林園區 Aogu Wetlands and Forest Park 오고 습지 공원이었다.

 

오고 습지의 이용.

 

타이완에 오리가 엄청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리나라 타이완!!!

 

타이페이에 늦게 도착하여 첫날 숙박하였던 호경대주점에 체크인했다.

505km라는 엄청난 거리를 달렸다. 물론 버스가 대부분 달린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도 버스도 피곤한 거리였다.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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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4일 화요일.

화련의 숙소에서 출발하여 청수단애를 다시 한번 더 찾았다. 그리고 태로각 협곡으로 들어섰다. 연자구 트레일, 구곡동 트레일을 걷고 협곡의 살떨리는 좁은 도로를 달려 해발고도 3,257m인 무령을 넘었다. 일월담의 절경에 취하다가 푸리진의 숙소를 찾았다. 222km 거리를 이동한 하루였다.

 

7시 30분. 화련시에서 하룻밤을 신세졌던 총사대반점 Marshal Hotel을 떠난다.

2018년 2월 6일 23:50, 진도 6.4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때 무너졌다고 한다. 5층 건물이었는데 1~2층이 사라졌다고...OMG!!! 구글지도에서는 統帥大飯店遺址라고 표시된다.ㅠ.ㅠ

(사진출처: https://news.ltn.com.tw/news/life/breakingnews/2334867)

 

8시. Liwu River를 건너는 태로각대교 Taroko Bridge.

 

청수단애를 끊고 흘러내리는 하천이다. 깎아지른듯한 절벽을 흘러내리는 급경사의 하천이다. 그래서 수량에 비해 운반물질의 양이 많을 수 밖에 없다. 하구의 폭이 매우 넓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상류에서 운반해온 물질들은 훌륭한 건축자재가 된다. 골재를 채취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8시 15분. 숭덕휴게소를 다시 찾았다.

 

청수단애는 여전했다. 여전히 깎아지른듯한 절벽과 태평양이 만난다. 도로는 그 절벽의 옆구리를 파고 만들어졌고, 하늘은 흐렸다.

 

9시. 太魯閣 타이루거 협곡으로 들어왔다. 좁은 협곡이라 도로를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골짜기의 좌우로 왔다갔다 한다. 터널도 많다. 九曲이라는 지명을 쓴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아홉 번 구부러진'이지만, 九는 상징적으로 '많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절양장은 그냥 양의 창자처럼 마구마구 구부러진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절벽을 파내 어렵게 도로를 만들었다. 터널도 많다. 걸어가면서 그 공사의 난해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본다.

 

대리석 절벽에 구멍이 많이 만들어져 있고 그곳이 제비들이 둥지를 트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어 '연자구'라 한다더라~~

 

태로각 협곡의 여러 트레일들 중에서 아래 지도의 7번 연자구 트레일, 8번 구곡동 트레일을 걸었다.

 

깎아지른듯한 절벽, 그 측면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구멍들.

별빛이 흐르는 협곡에 들어,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면, 그곳은 제비들의 아파트. 

 

연자구 터널.

 

도로, 터널, 절벽, 연자구...

 

절벽은 거의 수직이다. 자꾸 보니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긴 했지만. 기반암이 대리석이다. 그곳을 흐르는 하천은 석회질 성분을 많이 포함하기에 깨끗하지는 않다. 매우 뿌옇다.

 

 연자구 트레일을 지나는 아들의 무표정. 장난꾸러기.

 

9시 20분. Jinheng Park 靳珩公園 근형공원이란다. 잘 생긴 아저씨 동상이 하나 보이더라. 무령의 넘는 도로 공사와 관련된 기념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에 장경국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9시 30분. 구곡동 트레일 입구에 도착했다.

 

낙석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구간이다. 상황이 안좋으면 바로 폐쇄되기도 한다.

 

2009년 8월 4일에는 개방되었었다. 개방과 폐쇄의 결정은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목전개방". 그러니 운이 안좋으면 왔다가 돌아서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안전모 기념 사진.

 

아들의 몰카에 잡힌 내가 썼던 안전모.(사진에 박힌 시간은 한국 표준시이다. 현지시간 9시 56분.)

 

머리가 좀 큰 우리 식구들...

 

九曲蟠龍이라.... 멋진 말이다.

 

물고기 모양의 바위가 도약하여 용문을 올라가는 중인 바위 모양 물고기.

 

안전모를 반납하면 구곡동 트레일이 끝난다.

 

10시. 살벌하게 떨어져 있는 낙석들을 보면서 구곡동을 떠났다.

 

태로각 협곡은 곳곳에 사태 구간이 있는 절벽을 파낸 길을 위태롭게 달리는 구간이다. 위험도가 상당히 높기에 승용차를 이용한 통행은 아직도 권장되지 않는다.

 

12. Bilu Giant Tree 碧綠神木 뽀인트에서 쉬어간다. 가장 고생한 버스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해발고도 2,150m라고 한다. 아직 1km를 더 올라가야 한다. 힘내자, 버스!!!

벽록신목은 직경이 3.5m, 높이가 50m인 3천 년 되신 삼나무이시다.

 

오후 1시 30분. 타이완 중앙산맥의 해발고도 2,565m에 위치한 Dayuling 大禹嶺 휴게소에서 쉬어간다.

 

어떤 차량인가 들이 박은 것 같다. 바깥 쪽으로 휘어 기울어진 가드레일을 보니 다시 심장이... 심장이.......

 

3,200m 넘는 무령을 넘어 달리는 라이더들을 보니... 내 심장이..... 내 심장이..........

 

2009년 8월 4일 14:01. 드디어 도착했다. 합환산을 넘는 고개 무령에 있는 화장실에!!! 와우!!!!!!

 

해발고도 3,275m 도달 기념 사진을 남기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산들이 보인다고 한다.

 

1898년부터 18년간 일본군과 전투가 있었던 곳이란다.

 

해발고도가 높아지면 기압이 낮아지고 저지대에서 밀봉된 빵봉지는 빵빵하게 부풀어오른다. 빵빵한 빵봉지를 니콘 D200 카메라로 촬영하느라 카메라로 얼굴을 가린 김석용 선생님.

 

2시 40분. 무령휴게소의 간단한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였다.

 

3시 50분. 무령을 넘어 한참 내려왔다. 창밖으로 산사태의 흔적이 보인다. 저 능선 너머에 Wushe Reservoir 霧社水庫 저수지가 있다.

 

4시. Jinwangxiuxi Station 金旺休息站 금왕휴게소에 도착했다.

승객은 쇼핑하고, 버스는 퍼진다. 급경사의 도로를 흘러내리느라 브레이크의 고생이 심했다. 많이 열을 받았다. 물을 뿌려주니 그대로 수증기로 변하네. 

 

저지대로 내려오니 식생 경관이 확 변한다. 

 

오후 5시. Wenwu Temple 日月潭文武廟에 도착하였다.

 

 

일월담은 타이완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해발고도 748m에 위치하는 일월담의 깊이는 27m 정도이고 면적은 7.93 제곱킬로미터 쯤 된다. 수영은 금지되어 있지만 매년 가을 수영대회가 개최되니 그때 수영하면 되겠다. 10살 이상이고 수영을 할 수 있으면 국적 불문하고 참가가 가능하니 달려보시라. 그외에는 보기, 걷기, 자전거, 유람선, 케이블카 등을 통해 일월담을 즐길 수 있다.

 

흐린 날 저녁 때 방문하였더니 조망은 별로이다.

 

그래서 그냥 문무묘 구경만 한다.

 

우와~ 금. 금. 금. 금. 금. 토. 일. 월.

 

만세사표, 충의천추. 좋은 말들이다.

 

아드님이 찍어준 사진.

 

오후 7시 10분. Puli 埔里鎭에 위치한 숙소를 찾았다. 진보대반점 Cheng Pao Hotel.

 

먼 거리를 높은 곳을 거쳐 달려왔다. 222km. 피곤하여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잠에 빠졌을 것 같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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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일에 체크인을 했던 호경대주점은 영어 이름 그대로의 호텔이었다. Riverview Hotel. 단수이 강 바로 옆에 위치하며 중흥교의 동단에 위치하여 교통이 집중되는 뽀인트였다. 창밖으로 보니 장관이더라.^^

 

2009년 8월 3일 월요일에는 좀 많이 달렸다. 248km. 타이페아를 출발하여 Nanya의 기암을 구경하고, 비두각 일대를 답사하였다. 멀리 해안도로를 달려 청수단애의 절경에 압도되었다. 타이루거 국립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화련시의 숙소를 찾았다.

 

8시 40분. 단수이 강변으로 나섰다. 리버 뷰 호텔을 나와서 리버 뷰~

 

강변을 따라 콘크리트 장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통행을 위해 곳곳에 문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곳은 '3호 수문'.

 

오늘도 타이페이의 랜드마크는 어디서나 잘 보인다. 101층 짜리 빌딩.

 

10시. 타이완 북동부 해안에 위치한 南雅奇岩에 도착하였다. Nanya Rock.

 

도로에서 '토르'를 지나 해안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볼 수 있다. '기암'을...

 

사암이 풍화된 이후 퇴적층 사이에 끼어 있던 철분이 산화되면서 산화철 색깔이 드러나게 된 것이라 한다. 남아 Nanya의 이 풍화 암석은 타이완에서도 아주 독특한 지형 경관이다 라고 위의 게시판에 써 있다. 아래 사진이 좀 부족하다.

 

그래서 멋지게 만들어진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가져와본다. 멋진 사진이다.

(출처: https://thejerker.com/nanya-rock-formationstaiwan-feature-which-forced-you-to-forget-take-a-look-around-the-wonder/)

 

태평양을 구경하고 있는 아지매.

 

10시 20분. '비두각 Bitoujiao, Bitou Cape 풍경구'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서 이동하였다.

 

비두각 일대는 수백만 년 전에 바닷속에서 형성된 사암의 퇴적층이 유라시아 지각판과 필리핀 지각판의 충돌과정에서 융기되면서 형성되었다. '비두'가 한자로 '콧등'을 의미한다. 

 

'비두각'이 '콧등'으로 보이는 자료를 찾아보았다. 드론으로 촬영하여 만든 사진일 것이다.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전함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일단 멋진 '콧등'이라고 하자.^^

(출처: https://www.foreignersintaiwan.com/blog-370963385326684/bitou-cape)

 

'콧등'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계속 걸어간다. 끝까지 간다.

 

비두각 끝 부분에 위치하는 등대는 1897년에 일본인들이 만든 것인데,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리하여 현재까지 사용중이다.

 

저 하늘 위에서는 채운이 힘을 북돋아준다. 

 

비두각 주변의 해안선에는 파식대가 형성되어 있다. 아주 독특한 모양의 파식대이다. 멀리서 볼 때는 마치 편평한 파식대 위에 돌멩이들이 굴러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굴러다니는 돌이라면 파도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을 텐데 그대로 있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그래서.....

 

파식대 위로 내려갔다.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붙어 있다. 퇴적암층의 약한 부분이 먼저 파도에 침식되어 사라지고 단단하게 달라붙은 부분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해식애의 밑부분을 이렇게 파먹은 강력한 파도가 파식대 위의 돌멩이를 그대로 두진 않았을 것이다.

 

암석이 수평 층리가 잘 보여서 내가 퇴적암이요 라고 주장하는듯 하다.

 

절리 부분을 따라 형성되었던 밴드 부분이 먼저 침식되면서 그 사이의 암석 부분이 마치 별개의 돌멩이들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책로를 오르며 보니 해식애의 윗 부분은 '남아기암'에서 본 풍화 양상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날씨 참 좋다~~

 

11시 50분. 비두각 인근에 위치한 용동만 해양공원 주차장에 주차하고 점심식사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기들끼리 따로 앉아 식사를 기다리는 아들들.

 

비두각 일대의 암석 지대를 걸으면서 땀을 많이 흘렸던 것 같다. 식당에서 앉았던 의자가 내가 흘린 땀으로 흥건하다.

 

2시 40분. 우리의 버스는 2번 북부해안고속도로를 계속 달리고 있었다.

 

우리 아들 고개가 저렇게도 휘어지는 것이었구나......

 

5시 15분. 계속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숭덕(崇德) 휴게소에서 멈추었다. 우리 아들이 멋진 진사의 자세를 보여준다.

 

清水斷崖 Qingshui Cliff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청수단애는 평균 800m 높이의 해안절벽이 21km에 걸쳐 이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청수단애는 필리핀 지각판과 유라시아 지각판 사이의 단층선을 따라 융기 작용이 이루어지면서 형성되었다. 해수면 위로 노출된 노두에서는 주로 대리석의 변성암이 흔히 발견된다. 이곳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급격한 해안 절벽인 것으로 유명하며, 태평양의 파랑과 태풍, 지진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침식되고 있다. 해변을 따라  다양한 크기의 대리석 풍화물질들이 퇴적되어 있다.

 

2009년 현장에 있던 안내 게시물.

 

5시 20분. 숭덕휴게소를 출발하였다.

 

5시 40분. 내일 답사 예정인 타이루거 국립공원의 맛보기를 하였다. 관광안내소에서 잠시 쉬어갔다. 이 일대의 기반암으로 흔하디 흔한 대리석 덩어리를 전시하고 있다.

 

개구리, 풍뎅이도 만들어놓았다.

 

하천이 흘러내리는 계곡은 좁고 깊다.

 

Liwu river에 대한 간략한 설명. 길이가 58km나 된다네. 리우 강이 타이완에서 가장 오래된 대리석을 깎아내어 아주 근사한 타이루거 협곡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저녁식사를 했던 식당이나 숙소의 사진은 또 없다.

숙소는 화련시내의 총사대반점, Marshal Hotel이었다. 명함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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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에 타이완을 다녀왔었다. 그 기록을 2023년에야 그때의 사진들을 사용하여 남긴다. 오래도 미루어 두었다.

 

지오트림 모임에서 주관하여 2009년 8월 2일(일) ~ 8월 6일(목) 간에 걸쳐 진행하였으며, 19명이 참여하였다. 일반 패키지 여행에서 보기 어려운 코스를 이번에도 많이 포함하였길래 가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인천국제공항 3층 10번 출구 H카운터 앞에 7시 반까지 집결해야 했기에 새벽같이 출발했다.

2009년 8월 2일 일요일 5시 50분. 공항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버스 요금이 계속 인상되었다. 2009년 여름에는 14,000원이었다.  동행한 꼬맹이는 50% 할인 요금이 적용되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하고 집결 시간에 맞추어 H카운터 앞에 모였다. 수속을 하고 출국심사를 하고...

CX421편을 타고 9시 15분에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였다. GPS data logger를 이용한다고 창가 좌석을 받았다. 국제선이나 국내선 여객기를 타고 이동하면서 창가 자리에서 GPS data logger를 이용해 비행 경로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최근에는 여객기에서 비행 경로 기록이 대부분 불가능하게 바뀌었다. 비행하는 기내에서 GPS 수신이 안되더라.

 

10시 30분. 타이완 땅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11시. 타이완 중정국제공항(지금은 타오위안 국제공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현지 안내원과 만나 바로 일정을 시작한다.

12시 10분. 타이페이의 상징적인 건물인 타이페이 101 빌딩이 멀리 보인다. 타이완의 대표적인 마천루로 101층 짜리 건물이다. 독특한 내진 설계를 적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공항을 출발하여 예류 지오파크, 석문동, 부귀각을 답사하고 타이페이로 이동하여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식사후 스린 야시장을 구경하고 숙소에 체크인하였다. 163km를 이동하였다.

 

오후 2시. 예류 지오파크에 도착하였다.

 

입구의 예류 오션월드 근처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식당 사진이다~^^

 

타이완에서의 첫 식사. 중국 여행에서 먹어보았던 음식과는 또 좀 결이 달랐던 기억이 남아 있다. 즉, 잘 못먹었다는...

 

오후 2시 30분. 지오파크 입구의 전시관.

 

한국인 단체 팀이 들어와서인지 한글 자막의 영상을 상영해주었다.

 

예류 지오파크는 '기암괴석'이 바닷가에 널려 있는 곳이다. 여러가지 유형의 독특한 형태를 가진 암석들이 형성된 과정을 그림과 함께 알기 쉽게 설명해준 게시판. 꼭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가자. 구부정한 허리...ㅠ.ㅠ

 

예류 지오파크는 바다를 향해 길게 돌출된 곶을 이루고 있다.

예류 해안 일대는 경사진 퇴적암층이 분포하고 있다. 주로 1,000~2,500만 년 전의 두터운 사암층이 분포한다. 약한 부분이 먼저 침식되어 사라지면서 육지쪽으로 만을 이루게 되었고, 상대적은 단단한 암석 부분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을 이루게 된 것이다. 곶에 남은 암석은 오랜 기간 조산 운동과 맞물려 풍화, 침식 작용을 받아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다양한 지형 경관을 형성하였다. 주변의 풍부한 해양 생태 환경, 어촌의 문화 환경과 어울리면서 예류 지오파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타이완의 대표적인 관광 자원이 되었다.

 

버섯 바위가 먼저 눈에 띠었다.

1. 바위 층간에 두 개의 파열된 절리가 있어, 대개 해수면과 수직으로 해수가 쉽게 절리를 따라 침식하면서 바위 기둥과 비슷한 모습을 형성한다.
2. 바위기둥의 상층은 칼슘성질의 사암층이며, 아래쪽은 견고한 암층으로 바다 물결, 계절풍 그리고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 등의 요소가 동일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차별 침식이 일어난다. 그래서 위부분 칼슘성질의 사암층은 침식에 버텨내지만, 아래쪽 바위기둥은 쉽게 침식된다. 그렇게 오랜 기간이 지난 후, 위는 굵고 아래는 가는 버섯바위가 형성된다.
3. 버섯바위는 계속해서 판상 표층의 횡압력을 받아, 점차 융기하며 해수면에서 벗어나게 된다. 일단 해수면에서 이탈되면 끊임없이 진행되는 풍식, 우식 등 대자연의 작용으로 점차적으로 지금의 버섯바위가 형성되게 된다. 그리고 대자연의 조각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버섯 바위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이름도 얻었다. "천년여왕".  천년여왕님의 연세는 4,000살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버섯바위는 목 부분이 점차 풍화, 침식으로 제거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천년여왕님과 사진을 찍을 때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목에 손대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있다. 귀하신 분이다. 그분과 함께 사진을 남기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여행팀에 또래가 몇 있다. 아드님은 그들과 따로 놀면서 내게는 가까이오지 않는다. 아주 그냥 신났다~

 

버섯바위 군집의 왼쪽에는 예류 지오파크에서도 가장 기이한 지형으로 꼽히는 촛대바위가 있다.

1. 촛불이 드러난다: 촛불은 사실 암층 중에 구슬 형태의 결핵으로써 그다지 크지 않다. 결핵은 주위의 사암보다 단단하고 해수의 침식에 강하여 사암이 침식되어 떨어져 나간 후에 구슬 형태의 결핵만이 지면으로 돌출된다.
2. 고랑을 파내다: 파도가 결핵을 때리면서 자연스럽게 결핵 주위에 유동이 생기게 되고, 결핵 주위의 사암은 침식되어 아래쪽으로 테두리 형태의 홈이 파지면서, 동그란 구슬 형태의 결핵이 점차 그 모습을 갖춰 간다.
3. 촛대를 깎아 내다: 결핵 외곽의 테두리 부분은 매우 단단하다. 해수는 이 테두리를 따라 아래 방향으로 깎아 내려간다. 그러면서 점차 원추형의 외형을 만들며, 절묘하게 촛대을 만들어낸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촛대는 해수에 의해 점점 길게 조각되어 진짜와 똑같은 촛대바위를 완성하게 된다.

 

임첨정의사동상. 1953년 사진을 찍던 학생이 실수로 바다에 빠졌는데, 곧바로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같이 희생되었다. 그의 살신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우다.

 

버섯바위의 머리 부분에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 벌집바위라고도 한다.

 

멀리 단면산이 보이고 앞쪽에 아드님이 '생강바위'에 앉아 계신다.

암층에 불규칙한 결핵을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결핵 주위의 비교적 부드러운 지질은 침식으로 움푹 들어가게 되고 단단한 결핵은 지표로 드러나게 된다. 이어서 바람과 파도의 침식으로 인해 마치 온갖 시련을 겪은 듯한 거친 외관을 형성하게 된다. 생강 바위 표면상의 가로선과 세로선이 교차하는 줄무늬는 바로 결핵이 지층 깊이 묻혀 있을 때, 지각의 횡압력으로 만들어진 균열면들이다. 늙은 생강 뿌리와 같은 줄무늬를 지질학적으로 절리라 일컫는다. 거친 표면에 회색에 노란색을 띄는 색채가 더해져서 마치 음식을 만들 때 쓰이는 생강과 매우 흡사하여 생강바위라 부른다.
예류 지역에서 생강바위 경관이 있는 암층의 두께는 약 50cm정도이며, 곶의 동북단에서 서남단까지 뻗어나가 마치 연결된 띠의 형태로 분포하고 있다. 지층이 기울어지면서 곶 동북단의 바다 절벽위, 해식평대(abrasion Platform) 위에서 볼 수 있다.
(출처: 이러한 자세한 설명 자료는.... 예류 지오파크 홈페이지에서 빌려온 것임을 이제 밝힌다.)

 

'선녀 신발'이 보인다.

생강바위의 한 종류이며, 형성원인은 암층에 비교적 단단한 칼슘성분의 돌덩이를 함유하였으나, 칼슘 성분의 돌덩이 주변이 부드러운 암층으로 변하면서, 해수가 오랜 시간 동안 이 부분을 씻겨내고 벗겨냈다. 게다가 지층의 횡압력으로 인해 가로와 세로로 교차하는 균열을 만들어 내서 지금의 신발의 형태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선녀 신발 옆에는 '땅콩 바위'가 있다.

 

아치 모양의 바위.

 

'두부 바위'. 가로세로 방향의 절리가 교차되어 형성된 것이다. 단면산 아래에 위치한다.

 

따로 잘도 돌아다니는 아들팀.

 

벌집바위 머리를 가진 버섯바위 아래는 생강 바위가... 멀리 보이는 단면산의 지층 상태를 보면, 이곳이 경사진 퇴적암 분포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좁고 길게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곶이기 때문에 파랑의 침식 작용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다. 사암층이 풍화, 침식 작용에 가아하게 저항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식 작용을 받아 골짜기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관람객을 위해 골짜기를 건너는 다리를 만들어놓았다.

 

예류 지오파크는 해식 골짜기에 의해 토막나 있다.

 

독특한 지형들이 다양하게 형성되어 볼거리를 제공하는 예류 지오파크를 뒤로 하고 떠난다...

 

4시 10분. 예류 지오파크에서 서쪽으로 해안 도로를 달려 석문동에 도착하였다.

 

외아들이라 그런가 또래를 만나니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이 석문이 아니라...

 

이 석문이다.

 

게시판을 설명을 잘 읽어보니, 오랜 기간 파도가 해변의 암석을 때려대니 못견디고 부서져서 만들어진 시아치 sea arch라고 한다. 돌로 된 문이니 石門이라...

 

큼지막한 돌멩이들이 많이 박혀있는 돌이다. 역암이라 하던가 하는 퇴적암되시겠다.

 

길가에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식구들.

 

오후 4시 40분. 부귀각 부근의 라오메이(老梅) 해변에 도착하였다. 해안단구를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라오메이 해안에는 응회암이 해식 작용을 받아 형성된 갯골 모양의 독특한 지형이 나타난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부분은 조류가 서식하면서 녹색을 띠고 있는 것도 독특하다.

 

타이완의 북부 해안 지역은 바다로 돌출되어 있어 파도와 바람이 거세다.

 

그래서 해변의 모래가 날아가지 않도록 모래 포획시설을 설치하였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부귀각 공원 북부 해안에 나타나는 암석 지형은...

 

'풍릉석'이다. 그것은 화산 활동으로 분출된 암석이 오랜 동안 북서 계절풍에 날리는 모래에 의해 표면이 침식되어 부드러운 표면을 가진 상태로 변하게 된 것이라 하더라~

 

부귀각 등대는 근사하더라~

 

7시 20분. 타이페이 시내로 들어왔다. 식당이다. 대과벽. 샤브샤브 전문점이다.

 

8시 40분. 스린 야시장. 공유사림관광시장.

 

현지인과 여행객들로 붐비는 거리.

 

엄마와 아들.

 

얘네들은 머지???

 

오토바이 많더라~ 1시간이 넘게 돌아 다녔더라~

 

숙소는 타이페이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단수이 강을 건너는 중흥교의 동단 부근에 위치한 호경대주점, Hotel Riverview Taipei였다. 멀진 않지만 외국으로 날아와 하루 종일 힘든 일정을 소화했으니 피곤하여 바로 일찍 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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