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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8일 토요일에 아라호바의 숙소에서 출발하여 델포이를 향했다. 박물관과 유적지를 방문한 후 동쪽으로 달려 아라호바 전망대를 지나 한적한 교외 식당에서 맛있는 수플레 요리로 점심 식사를 했다.

겨울철 스키장으로 유명한 작은 산골 마을 아라호바를 걸어서 이골목 저골목 다녀보다 모여서 버스 탑승. 델포이를 지나 칼람바카로 항했다. 어제 지나온 것까지 포함하면 델포이를 세번 방문한 것이 된다.ㅎㅎㅎ

 

델포이 쪽 골짜기. 골짜기 아랫쪽에 올리브 나무로 가득한 흐리사 평야가 펼쳐진다.  햇볕을 받는 골짜기의 북쪽 사면에도 올리브 나무가 가득하다.

 

길가에 흔하게 보이는 노란색 꽃이 아네몰리아 호텔 주변의 산지 경사면에 한껏 피어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Sparto라고 부르고, 우리나라에서는 '암골담초'라고 하는 것 같았다.

 

9시 출발 예정이라 했다. 다들 일찍 나와 짐을 싣고는 8시 46분에 출발하였다. 넘 부지런하다. 늦는 사람이 있어 방에 전화하여 뭐하냐 하는 등의 안부를 묻는 감성이 없다.ㅎㅎ

델포이 유적지, 이동 경로.

 

9시 6분에 박물관 도착. 박물관 외부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바로 안으로 들어간다.

그냥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매표하여 표를 확인받으며 들어간다. QR 코드 리더기를 통하면 된다. 그런데 요금이 왜 0으로 되어 있지???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아폴로 신전을 중심으로 한 유적지의 복원도이다. 머리카락 보인다~~

올림피아와 함께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성지였던 델포이는 태양신 아폴론의 신전 유적이 있는 작은 도시이다.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70km 떨어진 포키스의 깊은 산속에 있다.

신화에 의하면 이 지역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딸 테미스가 지배하고  커다란 뱀의 모습을 한 파이톤이 지키는 성스런 땅이었다. 아폴론이 파이톤을 퇴치하고 델포이 땅과 예언의 힘을 차지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르나소스 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믿었고, 델포이가 세계의 중심, 배꼽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폴론 신전에 Omphalos('배꼽'이라는 의미)라는 대리석 덩어리를 놓아두게 된 것이다. 원래는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토해냈던 '성스러운 돌'이 옴팔로스였다. 제우스와 아버지 크로노스와 어머니 레아와의 사이에 돌덩어리가 끼인 사정은 신화 참조...ㅎㅎ

 

아폴론 신전 아랫쪽에 '옴팔로스' 모형이 놓여 있다.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 중의 하나인 여성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도리아식 주두 장식을 한 기둥 위에 서 있다.  낙소스의 스핑크스이다.

BC 560년 키클라데스 제도에 속한 낙소스 섬의 부유한  주민들이 델포이 성역의 아폴로 신전에 봉헌한 것이라 한다. 낙소스 섬은 디오니소스 신앙의 중심지였다.

 

카이아티드. 돌기둥으로 사용된 여인상이다. 시프노스 보고를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고스 형제, 클레오비스와 비톤. '쿠로이'라고도 하는데, 소년들이라는 뜻이다. BC 590년 경 작품으로 근육질 체형을 표현했지만 인체 조각 수준이 낮고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악보라고 한다. 이 악보에 의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현지 가이드와 현지인 가이드. 많은 나라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단체로 입장할 때 '현지인' 가이드 동반을 필수적으로 하는 있는 경우가 많다. 고용 효과 만점이다. "법"이 그렇다고 하니 뭐라 할 방법이 없다.

 

아폴론 신전 북동쪽에서 발견된 옴팔로스. 파손된 부분을 살짝 복원하였다. 원래의 진품은 아니다. 헬레니즘 시기 혹은 로마 시기의 복제품으로 추정된다. 표면의 장식은 성스러운 물건을 묶은 밧줄을 표현한 것이다.

 

BC 3세기 경에 세작된 미소 소녀상. '웃는 소녀상'. Marble statue of a smiling girl. 몸체와 머리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접합한 것이다.

 

기간토마키아를 묘사한 부조. 왼쪽이 올림푸스 팀, 오른쪽은 자이언트 팀.

 

안티노오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청년. 

나일강에 익사한 후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영웅이 되고 제국 동부 지역에서 반신으로 숭배되었다. BC 5~4세기의 전통을 따른 조각이지만 원형의 내적 활력은 부족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폴론 신전을 중심으로 한 유적지의 복원 모형이다. 박물관 전시물 중 하나.

 

상상도로 그리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독점 상점들이 입점한 스토아를 지나 성소에 입장하면 보물창고가 있다.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추첨으로 순서를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순서를 무시할 수 있는 위력이 있었으니 바로 金力이라... 많은 봉헌물을 바친 도시국가의 시민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그러하니 보물창고는 항상 가득찰 수 밖에...

델포이 유적을 감싸고 있는 절벽을 '파이드리아데스'라고 하는데, "빛나는 절벽"이라는 뜻이다. 절벽 사이에 자리잡은 아폴론 신전은 남쪽의 햇볕을 가장 잘 받는 곳이다. 유적지의 가장 높은 곳에는 경기장이 있는데, 4년마다 이곳에서 피티안 제전이 열렸고 운동경기 외에도 음악, 시, 연극 등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축제였다고 한다. 올림픽 경기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알려진 월계관은 이 피티안 경기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던 것이었다.

 

유적지 동쪽의 '플레부코스'(불타는 바위) 아래 위치한 김나지움이 보인다. 김나지움의 오른쪽으로 '아테나 프로나이아 신전'이 살짝쿵 보이고 있다. 이번엔 현지 가이드가 이곳은 소개해주지 않았다. 

도로변에 작은 주차장도 있어서 멈출 수 있었는데... 쏠로스가 세 개가 있고 그 세곳의 쏠로스를 모두 보게 된다며 일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곳 아테나 프로나이아 신전에도 쏠로스가 있다. 사진에서도 쏠로스의 남아 있는 세 개의 기둥이 보인다. 이곳을 왜 뺐을까 궁금하다. 다음엔 소개해줄까나?

 

로만 아고라.

 

아르기아 인의 봉헌물.

 

타란티니안 봉헌물.

 

시프노스 인의 보물창고 유적.

 

이렇게 생겼었을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카이아티드로 입구가 장식되었었다.

 

아테네의 보물창고. 복원한 건물이기에 멀쩡해 보인다.

기단에 새겨진 글을 살펴보았더니 BC 478년 페르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 인들이 전리품을 보관하기 위해 세웠다고 되어 있다.

 

아테네 스토아.

 

 

아폴론 신전의 유적. 

아폴론 신전은 BC 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BC 6세기에 지어졌던 원래의 신전 유적 바로 위에 세워졌다. 화재를 겪으며 붕괴된 신전을 재건했는데 지진으로 다시 붕괴되었다.

신전은 도리아 양식으로 건축되어 전실, 후실, 신실 3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신전 안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높이 19.5m, 총 120개의 원기둥이 두 줄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현재는 6개의 기둥만이 남아있는 정도이다. 이곳에서 유명한 델포이 신탁이 이루어졌다.

델포이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이 신탁의 ‘영험함’ 때문이다. 이곳 아폴론 신전의 신탁이 다른 어떤 신탁보다 영험했기 때문에 그리스는 물론 주변국가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탁을 받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먼저 성역에 들어가기 전, 카스텔리아 샘에서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했다. 그다음 일종의 세금인 패리노스를 지불하고 양 같은 희생 제물을 바친 뒤 신탁을 통한 예언을 받고 싶은 사항을 석판 따위에 적어서 신관에게 건넸다. 아폴론 신의 여사제인 피티아는 신실 안에서 신탁의 결과를 말하고 신실 밖의 신관이 이를 받아 적은 후 의뢰자에게 건넸다. 전성기의 델포이 신탁은 군대의 파견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델포이 성역에는 세계 각국에서 헌납한 건축물과 각종 기념비들이 즐비했다. 

 

키오스의 제단.

BC 5세기에 Chiots 사람들이 만든 제단으로 아폴론 신전의 동쪽 전면에 위치한다. 제단의 기저에 그리스의 다른 국가들보다 우선적으로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 promanteia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제단 옆에 부러진 청동 기둥이 서있다. 세마리의 뱀 머리 위에 '삼발이 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파손되어 반토막난 기둥 아랫 부분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것도  가짜라고 한다.

진짜는 투르크 제국에서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2008년 1월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 본 기억이 난다. 성소피아 박물관 앞의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신전의 윗쪽에는 고대 원형 극장이 남아 있다. 재밌는 곳이다. 

원형 극장 앞쪽에서 팔을 벌리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관리자가 금지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찍어달라고 하여 해주었다가 잠시 곤혹을 겪었다. 쫓아와서는 그런 사진은 지우라고 요구하는 재밌는 곳이다. 왜?

 

델포이 신전은 약 300년의 전성기를 누리다가 지진으로 일부 성역이 파괴되어 BC 362년 마지막 신탁을 끝으로 전성기가 막을 내렸다. BC 191년에 로마에 정복당한 이후 수많은 유물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델포이 신전은 종교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는데,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쇄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며 매몰되어 잊혀졌다. 1892년 프랑스 고고학 팀이 델포이 유적지임을 밝혀내고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1시 59분. 도로 변을 따라 달리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울트라 마라톤이 진행 중이었다고 하더라.

 

12시 9분.  아라호바 마을이 잘 보이는 곳이다. 잠시 멈추어 인증을 해야 한다.

 

인증을 해본다. 드론아~

 

#아라호바 글자를 가운데 두고 인증을...... 

 

마라톤이라고 하는 것이 꼭 계속 힘들게 뛰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담소를 나누는 시간도 필요하다.

 

12시 19분. 식당 Aggelos taverna.

 

1시 10분. 점심 식사후 아라호바에서 자유시간을 즐긴다.

 

먼 옛날에 방영되었던 "태양의 후예"라는 작품에서 두 주인공이 키스를 나눈 곳이라는 아라호바의 작은 시계탑을 배경으로 남겨본다.

 

해당 드라마 배경이 되었던 시계탑이 하나 더 있다.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 교회이다. 

 

교회 내부를 방문해보았다.

 

하늘이 심상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경험하는 황사와 유사하다. 

 

황사는 서쪽에서 오는데, 그리스는 남쪽에서 온다. 아프리카에서 온다. 사하라의 선물이다.^^

 

남쪽으로부터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황사' 비슷한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오메~~~

 

2시에 아라호바를 출발하여 칼람바카를 향한다.

 

흐리사 평야를 다시 만났다. 올리브 나무의 세상.

 

칼리드로모 산지를 넘으니 평야가 나타난다. '테르모필레'라는 작은 도시가 나타났다. 영화 '300'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곳이다. 페르시아 군과 스파르타의 결사대가 맞붙은 곳이었다. 페르시아 군을 완전히 격퇴하지는 못했지만 스파르타 군의 희생이 그리스 다른 도시국가들의 항전 의지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에는 해안에 인접하였었는데 빠른 속도로 퇴적 작용이 이루어져 해안선이 점차 후퇴하였다. 현재는 완전히 육지화되어 있으며, 온천으로 유명하다.

 

3시 40분.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간다. 음료수 자판기를 시험 작동해본 곳이다.

 

테살리아 평야 지대에 진입하였다.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5시 27분. 핀두스 산맥을 따라 깔린 구름대가 근사하다.

 

5시 38분. 숙소에 도착했다. 세상에나. 기가 막힌 위치이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던지자 마자 뛰쳐 나왔다.

 

드론이 날았다.

 

바위 위에 어떤 시설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메테오라의 수도원들 중 하나인 성 니콜라스 수도원이다.

메테오라 일대는 6천만 년 전 해저에서 형성된 퇴적층이 사암, 역암으로 구성된 퇴적암이 되었는데, 육지화 된 이후에 비바람에 깎이면서 독특한 바위산을 형성하였다. 테살리아 평야의 북서쪽에서 핀두소 산맥 부근의 계곡 한가운데 바위산들이 솟아있어 독특한 경관으로 눈에 띤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위에 자리잡은 수도원은 거의 접근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이다.

 

14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메테오라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점차 숫자가 증가하였다. 200여 년이 지나자 마치 새둥지 같은 수도원이 20여 곳에 달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서도 원시적인 밧줄이나 밧줄을 엮은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힘겹게 수도원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러한 지형은 온나라를 휩쓸고 다니며 방화와 약탈을 일삼던 도적이나 군인들의 침입을 막아주었을 뿐 아니라 종교와 정신적 수양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16세기 이후 많은 수도원들이 버려지고 방치되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수도원이 관광명소가 되면서 이전과 같은 고적함과 명상적 평온함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수도원의 규율은 지금도 엄격하게 준수되고 있다. 관광객이 방문할 때 민소매 티셔츠나 짧은 바지, 치마를 입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바위산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역암이 풍화되면서 형성된 '타포니' 지형이다. 이 구멍들이 수도사들의 은둔 기도처로 많이 이용되었다.

 

Meteora Hotel At Kastraki. 멋진 곳에 위치한 깔끔한 호텔이었다.

 

6시 40분. 저녁 식사를 하자. 메테오론 파노라마 식당. 50유로 짜리 와인을 맛보았다.

 

8시 13분. 버스에 탑승

8시 21분. 호텔 도착...

내일은 6시 기상, 7시 식사, 9시 출발.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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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다던 올림피아에서 5월 17일 아침을 맞이 한다. 완전한 초록 세상이다.^^ 시골이다.ㅎㅎ

 

근사한 호텔인데 한쪽에 텃밭도 있다. 농사짓는 호텔이다.^O^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당 주변을 산책하는 투숙객.

 

2024년 5월 17일의 여정이다. 올림피아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파트라스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벗어났다. 나프파크토스를 거쳐 델포이 유적지 인근의 아라호바에서 하룻밤을 신세졌다.

 

8시 55분에 숙소에서 출발했는데, 9시에 유적지 도착 완료.

고대 올림픽의 시초가 된 올림피아는 BC 2000년 경부터 성역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여 BC 1000년 경부터는 제우스신을 모신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올림피아 경기는 BC 776년에 시작되어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349년에 이교도의 잔재라며 중단시키고 시설을 파괴하였다. 6세기에는 지진과 홍수로 인한 파괴도 이루어져 '유적'이 되었다.

1829년 프랑스 팀이 발굴을 시작하여 제우스 신전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1874~1881년 동안에는 독일 팀이 발굴하면서 더욱 성과를 보였으며, 1928~43년 사이의 발굴 및 최근의 발굴 결과 현재의 모습으로 복구하였다. 198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입장권 하나로 세곳을 방문할 수 있다.

 

올림피아 유적은 경기장 유적지와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기장 유적지. '유다 나무'라는 것이 있다더라.

 

유적지 안내판이다. 대충 살펴보니 자료 정리를 성의껏 잘해 놓은 것 같다. Dear visitors,

 

올림피아 성소 안내 게시판의 지도.

유적에 이름을 찾아 붙여 보았다. 지도의 윗쪽이 남쪽이다.

 

요로케 유적지 내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설명을 듣고 내용을 기억하려 애썼다. 김나지움 쪽에 매표소 및 입구가 있다.

 

유적지 서쪽으로 클라데오스 강이 흐르는데 레오니다온 남쪽으로 흐르는 큰 강인 알페이오스 강과 합류한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안할 정도이기는 하다.^^

 

크로니온 온천. 헬레니즘 시대에 법정이 있던 것을 밀어버리고 로마인들이 근사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온천장으로 개조했다. 3세기 말에 닥친 지진으로 박살났다.

 

뜀박질 연습을 하던 김나지움의 흔적이다.

 

프리타네이온. 공회당 같은 공공 건물이 있던 곳이다.

 

필리페이온. '필리포스 신전'이란 뜻이다. 필리포스, 즉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를 위한 신전인 것이다. 그리스의 유일한 인간을 위한 신전이다. 로마로 넘어가면서 아무 황제나 신격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원형이 아니었을지...

당시 필리포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이러한 신격화까지 이루어졌을 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나 보다. 알렉산더 더 그레이트.

 

헤라 신전, 그리고 그 동쪽에 위치한 올림픽 성화 채화장이다.

올해 파리 올림픽을 위한 성화도 이곳에서 채화되었다. 4월 16일이었다고 하니 한달 쯤 전의 일이었다.

 

도리아식 기둥으로 장식된 멋진 신전이었을 터인데, 지금은 40개의 기둥 중 4개만 보인다. 나머지는 부러져 누워있다.

BC 7~6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그리스 신전 중 가장 오래된 신전 중 하나이다. 여러 차례 파괴되어 수복되어 지금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34개 기둥의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신전 내부는 전실, 신실, 후실로 나뉘어 있고, 신실에서는 "어린 디오니소스를 달래는 헤르메스의 상"이 발굴되었다. 이 상은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올림픽에 출전을 하지는 않았지만 올리브 월계관을 써볼 수 있었다.

 

헤라 신전 앞의 관광객들 뒷편의 사면도 유적지이다.

 

사진 오른쪽의 사면에는 님파이언이라는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흔적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부인 및 여럿의 동상, 그리고 황소 한마리로 장식된 근사한 분수대였다.

 

분수대였던 곳 바로 앞쪽에는 1908년에 발굴된 선사시대 주거 유적지도 있다.

 

메트로온 유적지. 사진들이 어디에 있을까?

 

여행자가 동상의 기단을 살펴보고 있다. 제우스의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던 흔적이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하게 겨루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적으로 과연 그러한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아니 하기도 하다. 그게 현실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부정 행위가 있었단다. 그걸 들키게 되면 해당 선수가 소속된 도시 국가가 망할 정도의 처벌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우스 동상을 이곳에 추가로 세움으로써 반성의 의미를 표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다고 하더라. 왜? 이기기만 하면 엄청난 혜택이 있었기에 욕심을 부리는 선수들이 가끔, 아주 가끔 나타났었다고 하네.

 

게이트를 지나면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경기장이다.

 

올림픽 경기장에 섰다.

 

경기장에 왔으면 경기를 해야 한다.

 

애들만? 아니다. 노익장은 과시하라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니들이 잘도 뛴다. 빠샤~

 

고대의 원조 올림픽 경기장에 왔었............

 

에코 스토아. 건물 안에서 소리를 지르면 7번 반복해서 울렸었다고 한다. 내부가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어 '포르티코'라고도 불리었다.

스토아 앞쪽에 높은 기둥 두개가 서 있고, 프톨레미 2세와 아르시노 동상이 올라가 있었다.

 

헤라 신전이 모두 '파괴'된 상태라면, 제우스 신전의 상태는 '처참'하다.

 

제우스 신전은 건축 당시 64m 길이에 폭이 약 27m로 파르테논 신전에 버금가는 웅장한 신전이었다.

게다가 내부 신실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던 13.5m 높이의 제우스 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 최고 조각가인 페이디아스가 황금과 상아를 재료로 만든, 벼락창을 들고 있는 제우스 신은 어디로?

 

지금은 모두 파괴되었고 제우스 신상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신전의 건축에 사용된 암석이 조개들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아직 석회암이 아닌 것인가, 이미 석회암인 것인가?

 

불레우테리온의 흔적이다. 그리스 건축에서 불레우테리온은 의사당으로 번역된다.

불레우테리온은 올림픽 평의회의 회의실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보인다. 이곳의 '맹약의 제우스상' 앞에 경기  전에 선수들과 심판들이 모여 성스러운 의식을 집행하기도 했다. 규칙대로 경기를 집행하겠다는 선서를 한 곳이다.

 

레오니다이온. 낙소스의 레오니다스가 비용을 대서 만든 거대한 숙소였다.

 

레오니다스는 엄청난 부자였었다. 이런 거대한 숙소를 BC 331년에 지어 그냥 기부할 정도로...

 

페이디아스의 작업장, 공방이다.

이곳에서 아테네의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제우스 신전의 신실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5세기에 이곳은 초기 기독교 교회로 변용되었다.

 

클라데우스 온천이 있었던 곳.

 

선수들이 모여 경기 시작 전에 연습하고 훈련하던 팔라이스트라의 유적이다.

 

쓸쓸하고 황폐한 3000년 전에 잘 나갔던 인류의 흔적 속을 걷는 여행자.

 

10시 55분. 올림피아 고고학박물관. 제우스 신전 박공을 장식하던 조각들 세트.

 

니케 NIKE 여신상. '승리'의 여신상이다. 아테네 동맹국가들이 스파르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동상이다.

일반적으로 승리의 여신인 니케는 날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여신상은 날개가 없다. '승리'의 상징이 영원히 이곳 올림피아에 머물게 하기 위해 날개를 떼어냈다는 썰이 있다.

 

어린 디오니소스를 달래는 헤르메스. 헤라 신전의 신실에서 발굴된 것이다.

티스토리에서는 미술교과서에 나오는 조각품이라도 성기가 드러나면 게시물 자체를 막아버리더라. 그래서 자체 검열 완료!

 


 

12시 7분. 주차장에서 버스가 출발한다. 고대 올림픽의 성소인 올림피아를 떠난다. 뒤돌아 본다.

 

1시 40분. 이오니아 해의 거점 항구 중 하나인 파트라스에 도착하였다. 역시나 도로가 좁아 일방 통행해야 하는 구간이 많아 이리저리 돌아서 시내 구경을 하면서 식당에 도착했다. 흑돔 구이로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재밌는 번호판의 차량을 발견했다. 정교회 주교 차량이라고 한다.

 

천천히 식사하고 가볍게 산책을 하고 출발했다. 지협의 양쪽에 항구가 있다. '리오'와 '안티티로'. 그 두 항구를 잇는 다리니까 다리 이름은 '리오-안티리오 다리'이다.

 

총길이가 2.8km에 이르는 리오-안티리오 다리의 모습. 공식 명칭은 하릴라오스 트리피쿠스 다리. 19세기에 이 다리의 건설을 주장하였던 당시 총리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04년에 완공되었다. 통행 차량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발칸 반도와 육로를 통해 연결되는 통로로는 서부에서 유일한데도 다리 통행량이 적다? 통행 요금도 거기에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현지 가이드가 74.5 유로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1만 원??????!!!!!!!!!! 차량 종류에 따라 다를 것이긴 한데, 완성 당시 자동차 통행료가 10.5 유로였었다고 하는데 거의 매년 큰 폭으로 인상되고 있다고 한다. 이게 맞나 싶다...

 

3시 48분. 과거 한 때 이탈리아식 이름인 '레판토'라고 불리기도 했던 나프팍크토스의 베네치안 항구. 안내 게시판에 있는 사진을 촬영했다.

 

이것은 내가 촬영해본 것이고...

 

항구의 방파제 역할을 겸하는 요새의 끝부분에 횟불을 들고 있는 동상이 있다.

횟불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르지오스 아넴요아니스(Γεώργιος Αναγνωστάκης Ανεμογιαννάκης)의 동상으로 보인다. 조르지오스 아넴요아니스는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유명한 화선(火船, fire ship) 공격대원 중 한 명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민병대 해군 영웅이다. 그는 1821년 6월, 파트라 항구에 정박 중인 오스만 군함을 불태우려다 체포되었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으로 보인다.

 

부둣가에 인접한 카페들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붐비더라. 커피 한 잔 마시며 쉬다가 일정을 계속하였다. 

부둣가 가장 바깥쪽 건물의 옆에 비쩍 마른 동상이 작게 보이는 것이 있다.  부둣가에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였다가 한 팔을 잃은 세르반테스 동상이다. 동상은 부러진 칼을 들고 있다.

 

마을 뒷쪽의 동산 위에는 베네치안 요새가 남아 있다. 이탈리아에 가까워 베네치아의 영향을 오래 받은 지역으로 보인다. 레판토 해전의 현장이었으니......

'레판토 해전'은 1571년 레판토 앞바다에서 벌어진 신성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으로의 진출을 중단하게 된 것이 이 해전에서의 패전 때문이었다고 분석된다. 노를 젓는 갤리선을 이용한 마지막 대규모 해전이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후에는 범선에 화포를 장착한 해전으로 넘어간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정표라고나?

 

4시 43분. 버스는 나팍토스를 출발하였다. E65번 도로를 이용하여 코린토스 만 연안의 해안 경관을 구경하며 동쪽으로 이동하던 중 재밌는 것이 보였다. 씨뻘건 흙을 퍼서 주워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Itea 조금 못 미친 곳이었다.

확인해보았다. 역시나 보크사이트 광산이었다. Eleusis 보크사이트 광산이었다. 세계 매장량의 3% 정도를 그리스가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알루미늄의 원료가 되는 보크사이트 광산은 열대 혹은 아열대 지방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후 5시 57분. 델포이를 향해 달리면서 고도가 높아진다. 흐리사 평야 지대가 올리브 나무로 채워져 있다. 올리브의 나라이다. 산불로 인해 주변에 피해가 많았다고 가이드가 가이드하더라. 멀리 보이는 바다의 해안에는 Itea, Kirra 항구 도시가 있다.

 

6시 20분. 아라호바의 서쪽 교외에 위치한 아네몰리아 호텔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웰컴 드링크를 주더라. 알콜, 논알콜 선택.

 

맑은 물이었는데 얼음을 넣어 차게 한 후 잔을 흔들어주면 탁한 색을 띤다. 신기하다.

 

저녁 식사 전에 잠시 호텔 마당 산책을 즐긴다. 델포이 방향의 골짜기 하늘이 매우 탁하게 보인다.

 

등대고 누으니 그냥 시체 모드로 변하더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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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니코스 만을 향한 '오션 뷰' 객실로 새날의 햇살이 날아들었다. 2024년 5월 16일이 되었다.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출이다. 이 아침의 구름이 한낮에도 이어져 타오르는 지중해의 햇볕을 약화시켜주길 헬리오스, 아폴론에게 기원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사르니코스 만의 해변을 산책하는 배가 전혀 안나온 할배.

 

그런데 햇살이 만만치 아니하다.

 

여행을 하다보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다. 물론 처음에는 당황한다.^^ 호텔 킹 사론의 엘리베이터는 두툼한 바깥쪽 문을 당겨서 열어야 한다. 물론 내릴 때는 밀어서 열면 된다. 탈 때 바깥쪽 문을 열면 내부의 문짝은 자동으로 열린다. 옆으로... 

여닫이 문과 미닫이 문이 결합된 재밌는 엘리베이터로 기억에 남을 터이다.^^

 

숙소를 8시 27분에 출발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남하 하다가 내륙으로 들어가 에피다브로스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미케네 유적지를 방문하고 먼 길을 달려 올림피아까지 이동한 하루였다. 298km를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중간에 차량에 문제가 생겼는데, 휴게소까지 이동하여 버스 기사 스타브로스가 직접 수리를 마치고 운행을 계속했다는 소소한 에피소드가 남았다. 1시간 가까이 지체...ㅠ.ㅠ

 

그리스 연안에서 수산 양식장 시설이 종종 보이더라. 해초가 없고 물이 너무 깨끗하여 양식이 힘들다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흑돔, 농어 등을 주로 양식한다고...

 

에피다브로스와 미케네 일대를 확대한 지도.

 

9시 24분. 에피다브로스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유적지 안내지도이다.

전설과 신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독립 도시국가였던 에피다브로스는 아폴로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가 태어난 장소이다. 그래서 유적지 안내판에 "The Asklepieon of Epidauros"라고 안내되어 있다.

 

에피다브로스 유적지의 핵심은 아스클레피오스이다. 그래서 입장권에도 "아스클레피오스 성소"라고 되어 있다. 거길 입장하는 것이다.

 

유적지에서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보았다. 음악당, 스타디움, 톨로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숙소 등지를 지나 박물관을 방문하고 극장을 구경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아폴로 말레아타스"(아폴로와 영웅인 말레아타스가 짬뽕된 신격)가 숭배되고 있었는데, 이곳에 자리한 신전은 아폴로 말레아타스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아폴로 말레아타스에 대한 신앙이 약해지면서 BC 6세기 경부터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성소로 삼게 되었다.

 

헤스티아토리온 유적지의 모습이다. 남아 있는 기둥은 헤스티아토리온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축제 음식을 함께 나누는 장소였으며, 가운데에는 '오디움'이라 불리 음악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에피다브로스의 아스클레피온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축복받은 의료의 중심지였다. 에피다브로스를 찾은 환자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꿈속에 신이 나타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스타디움에서 운동을 하고, 음악당에서 음악을 감상하면서 마음을 달랜다. 헤스티아토리온에서 최고의 음식을 먹으며 정양하다보면 대충 병이 나아 귀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을 때까지 계속 더 기다리고 더 기다리면서 더 기다리고...

 

헤스티아토리온의 입구 위치에 남아 있는 프로필론. 멋진 기둥으로 입구 장식된 건물이었을 것이다.

 

발굴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다. 계속 작업 중이다. 2024년에도 계속...

 

그리스 여행중 세 곳에서 톨로스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내하더라. 그 첫번째 톨로스인 에피다브로스 유적지의 톨로스. 뭔가를 위해 뭔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는 이런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더라. 기둥들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으며 지붕이 있는.. 그러나 지금은 부러진 기둥 몇개만 흔적으로 남아 있다.

(현지 유적지 안내판에서 캡처)

 

바깥쪽을 둘러싼 기둥들이 지붕을 지탱하고 내부에 다시 원형으로 기둥들이 배치되었었다고 한다. 건물의 용도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겠지만 환자들이 질병에서 회복하기 위하여 쉬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이곳을 환자들의 회복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이가 아스클레피오스이다. 그를 기리기 위한 신전은 온데 간데 없다. 로마 장군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BC 87년에 약탈했다. BC 67년에는 해적들이 예까지 와서 털었다. 395년에는 고트 인들이 또 약탈을 하면서 파괴되었다. 게다가 기독교가 퍼지면서 그리스 신들은 기억 저 아래로 사라지게 되거나 믿음이 금지되어 신탁에 기반한 에피다브로스의 기능은 정지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 중반까지는 기독교도들에게도 에피다브로스는 치유의 성역으로 추앙받았었다. 몸이 아프면 종교는 좀 유보해도 되는 것이다.^^;

 

외과 수술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바로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었으므로 치료 기간은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숙소가 필요했고, 160여 개의 방을 갖춘 숙소가 만들어졌다. 운동하고 온천에서 목욕하고 음악을 들으며 정양하고 톨로스에서 쉬다보면 심한 질병이 아니라면 다 나을 수 있었을 것 같다.^^

 

고고학 박물관의 아스클레피오스. 그를 상징하는 것은 뱀 지팡이이다.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죽은 글라우코스를 치료하던 중 뱀 한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놀란 아스클레피우스가 지팡이로 뱀을 죽였는데 다른 뱀이 약초를 물고 들어와 죽은 뱀의 입에 놓았더니 죽었던 뱀이 되살아 났더라.ㅎㅎ 하여 아스클레피우스가 그 뱀이 했던 대로 했더니 죽었던 글라우코스 살아났더라. 오메~ 그리하야 아스클레피우스는 이후 그 뱀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를 상징으로 삼았다더라 하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에피다브로스를 찾는 이들은 아스클레피오스의 기운을 받아 질병을 치유하기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극장들 중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우수하다는 극장을 찾는다. 우리도 남들을 따라서 그리 했다.

 

반원형의 극장 모습이 3천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듯 하다. 좌우 대칭을 정확하게 이루고 있다는 것을 대충 보기만 해도 알겠더라.

BC 4세기에 설계되어 34단으로 만들어졌는데, 로마 시대에 21단이 추가되어 최대 15,000명까지도 입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극장의 미스테리. 음향기기에 의한 증폭 없이도 무대 정면에서 낭독하는 소리가 전체 관객에게 전달된다니... 여름철에는 연극이나 오페라 등 각종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마음에 드는 공연이 열리면 머... 한번 쯤 가보... 에?!!!

 

마 댓다.....

 

제주도, 강진군, 보성군 등의 차 재배지에서는 냉해를 방지하기 위해 한공기를 밀어내기 위한 바람개비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동네에서는 올리브 농장에서 같은 용도의 바람개비들이 보였다. 의외이다.

 

11시 반에 식당에 도착해서 1시간 반이나 식사를 했다. 주변이 온통 올리브 농장인 근사한 식당이다. 최고의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다.

 


 

오후 1시. 미케네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환상의 나라로 알려졌었던 미케네는 19세기 후반 독일의 슐리만에 의해 발굴됨으로써 전설의 나라에서 역사 속의 나라로 등장하게 되었다.

 

미케네 유적지에서 이렇게 걸어다녔다. 왕궁의 유적지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삶이 그렇게 녹녹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에서 미케네 유적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드론을 날려 촬영할 수도 있었는데 여러모로 조건이 맞지 않아 그냥 현지 안내판에 있는 사진을 스맛폰으로 찍어왔다. 기대보다는 규모가 크지 아니 아니하다. 방어용 요새 정도로 보이는데 왕궁까지 있었다고 주장한다.

 

미케네의 성채로 들어가는 두개의 입구 중에서 주 출입구인 사자의 문이다. 제단 앞으로 발을 올린 두마리 사자의 모습이 돋을 새김되어 있다. 

 

이 동네는 사자의 서식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징을 사용하게 된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에서도 흔히 권력과 방어를 상징하는 것으로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을 거쳐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 지... 사자상은 삼각형의 박공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재밌다. 보물창고에서 다시 보자..ㅎ

 

성채의 재료로는 역암을 사용하였다. 자갈들을 뭉쳐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 듯한 모양이다. 퇴적암의 한 종류.

 

미케네 문명의 중심지인 미케네는 BC 14~12세기에 번영을 누렸는데, 방어에 유리한 작은 언덕에 동서 약 300m, 남북 약 150m의 범위에 견고한 성벽을 갖추었다. 원형 묘역이 여럿 발굴된 것이 재밌다.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 문명의 연관성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대원들.

 

왕궁의 유적과 유적지 주변 일대.

 

왕궁의 유적은 이렇게 생겼다. 왕궁이 맞나?

 

북문 쪽에는 많은 건물들의 유적이 나타난다.

미케네는 메가론 양식으로 불리는 궁전 양식이 확립되어 그리스 고전 시대의 신전 건축에 영향을 주게 된다.

 

작은 동산 윗쪽이지만 우물도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고...

 

물이 부족하면 몰래 비밀 통로를 통해 조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남쪽에는 멋지게 장식된 사자의 문이 있지만 북문은 간단하게 축조되었다.

미케네는 트로이 원정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트로이 원정군의 지휘관인 아가멤논과 그의 부친인 아트레우스가 지배하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했던 미케네 문명은 BC 12~11세기 경에 발칸 반도를 따라 남하해온 도리스 인들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유적지 부근에 위치한 박물관에서는 모조 황금 가면만 기억에 남는다. 아니... 사실은 모르겠다고 실토한다.

 

오후 1시 40분. 아트레우스의 보고에 도착하였다.

보물은 털려 없지만 그래도 '보물창고'이므로 입장권이 필요하다.

 

 

입구 윗쪽에 보이는 삼각형의 박공이 인상적이다. 이 당시의 건축물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입구에 쏠리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방식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 것인가에 대해 머리가 허연 할배는 의심하면서 고민하고 있다.

 

보고의 내부. 물론 이미 옛날에 다 털려서 어떤 보물이 이 보고에 저장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물은 없고, 보고만 남았다.

 

옆쪽으로 작은 방이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도 비었다. 바닥에 돌멩이 하나 떨어져 있다.

 

아트레우스의 보고에서 뭔가 건질 것이 있나 싶었던 방랑객들의 허탈한 표정.

 


 

오후 3시. 미케네 유적지를 떠난다.

3시 반. 버스에 뭔가 이상이 발생했다. 커다란 소음이 발생. 다음 휴게소에서 점검하기로...

Pelopidas 휴게소에서 멈추었다. 운전기사 스타브로스 아저씨가 점검하고 수리를 시작했다. 뭐가 문제라고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휴게소에서 휴게하고 있으라고 하는데, 좋은 기회라서 드론을 날려볼까 계속 망설였다. 바람이 너무 세다. 멀리 능선 위로 풍력발전기들이 보인다. 이곳은 그런 동네인가 싶다. 바람이 쎈 동네. 

 

휴게소 내부에 있던 뽑기 기계. 인형들 모습이 눈에 익은데...

 

4시 반에 출발하였다. 1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박수를 치면서 출발했다.

 

끊임없이 올리브 농장이 나타난다. 올리브 나무의 세상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세계적인 올리브 생산지라 하더라. 펠로폰네소스의 '니소스'가 "섬"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한다.

 

5시 50분. 산지의 골짜기를 달려내려오다가 Kalo Nero에서 해안도로를 만났다. 식당 건물에 잠시 쉬어 화장실을 이용했다. 화장실이 하나 밖에 없어 남녀 공용이다. 그래서 남녀 공용으로 줄을 길게 섰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6시 50분. 예정된 올림피아의 숙소에 도착하였다. 

주변은 완전 풀냄새 나는 촌동네이다. 저녁 하늘의 모습이 서양 풍경화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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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나라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여행기나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직접 가서 내눈으로 보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접 모든 것을 입맛대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추진하는 자유여행은 아직도 무섭기만 하다.^^ 언어 능력이 딸린다는 핑계가 아주 잘 먹힌다. 나 스스로에게도...ㅠ.ㅠ

그래서 여행사 몇 곳의 상품들을 비교하고 너무 헐한 곳들은 제거하면서 골라나갔다. 발칸반도의 5개국은 이미 다녀온 지라 중복되는 상품도 제거. 그렇게 세 나라를 담은 상품으로 정하고 눈치를 보다는 일단 예약을 하였다. 바로 예약금을 달라길래 원하는 대로 하였다.

두어 달 넘게 해당 국가들의 자료를 담은 사이트들을 검색하면서 정보를 모아갔다. 그런데 변덕이라는 것이 갑자기 찾아왔다. 구글지도 위를 마우스를 사용하여 여행하다가 동유럽에서 지중해로 내려와버렸다. 여러 해 전에 '지오트립'에서 마련했던 상품이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 사정으로 인해 참여하질 못했던 것이 기억나버렸다. 재정 권한을 쥐고 있는 옆지기와 상의를 간단히 마치고 마음에 드는 상품으로 갈아탔다. 이미 예약했던 여행사의 상품은 취소했다. 취소 사유를 묻길래 "지인들이 다른 곳을 함께 가자."고 한다고 해버렸다.

그리고는 책장에서 잠자고 있던 『서양문명의 역사』를 꺼내 그리스 편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양 문명이 시작된 원류, 신화와 역사가 뒤섞여 있는 나라인 그리스를 찾아갔다. 신들의 대장 제우스와 그 일족들의 나라를 방문하었다.

그리스는 오고가는 비행기에서 1박씩을 소모해야 할 정도로 먼 곳에 있는 나라이다. 하여 '11박14일' 상품이 되시겠다. "그리스 전국일주"인 예정 코스를 직접 구글 지도에 만들어보았다. 아테네와 크레타에서 2박씩을 하며, 그리스 국내선 비행 3회, 페리 이동 1회를 하는 코스였다.

 

그런데 지도를 만들고 보았더니 여행사에서 만들어 제공하고 있는 지도에서 '산토리니'의 위치가 상당히 어긋난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섬이 많은 그리스의 안내자료를 만들면서 에게 해의 아무 곳이나 찍어서 산토리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되길래 여러 여행사에서 디자인한 그리스 여행상품의 지도들을 찾아 비교해보았다. 상당수 여행사 자료에서 산토리니 위치가 틀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ㅎㅎㅎ

재밌는 것은 이번에 예약한 여행사의 안내자료로 과거에 사용했던 지도 이미지가 구글에 떠다니고 있는데, 그 지도에서는 위치가 제대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별로 나아보이지도 않는데 왜 바꾸었을까? 굳이 여행사 사이트의 '고객문의'를 통해 오류 수정을 부탁했는데, 돌아온 답지에서는 수정 의지를 찾을 수 없었다. 핫핫핫!

 


 

해외 여행을 별로 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출발 날짜가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별로 설렌다는 느낌이 들질 않았다. 분명히 필요한 것이 있을 것인데도 짐을 꾸리는 것도 설렁설렁이었고, 출발 전날에야 가방을 꺼내놓고 채우기 시작했다. 아! '트래블 월렛'이라는 카드를 미리 신청하기는 했다. 그리고 "컨택리스" 사용법도 숙지했다.^^

2024년 5월 14일 출발날짜는 다가왔고, 오후 4시경에 집을 나섰다. 카카오택시 라는 앱을 통해 호출하여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달려갔다. 집에서 묵고 있는 아드님이 운전면허가 있는데, 소심하여 차에 손을 못대고 있다. '남들은 이럴 때 공항까지 태워다주고 그런다'는데, 우리집 귀하신 분은 도움이 안된다. 여행사에서 요구한 시간보다 한참이나 일찍 공항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도 마친 다음에 여행사 부쓰를 찾아갔다. 안내를 받고 자료를 챙겨 체크인을 하러 갔다.

일찍 와도 너무 일찍 와버렸다. 항공사 직원들이 일을 안하고 있다. 가방만 밀어놓았는데, 가방도 쫓겨났다.ㅠ.ㅠ

체크인을 하는데 드론이 있으면 직원에게 신고하라는 표시가 있어 이실직고 했더니 드론에서 배터리를 분리하여 따라 수화물로 보내야 한다고 하더라. 의아했지만 시키는대로...

 

그리고는 두바이 공항까지 6,735km를 9시간 반에 걸쳐 날아갔다. 최고 고도는 11km가 넘었었다. 비행기 외부 기온이 -50 아래였었는데, 영상 30도로 솟구쳤다. 밖에 나가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다가 환승하였다.

 

두바이에서 페르시아 만을 지나 아테네 공항으로 3,274km를 4시간 반만에 날아갔다.

 

아테네에 5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마치고 4시 20분에 버스 탑승, 코린트로 달렸다.

 

그리스의 고속도로 톨게이트. 하이패스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오후 5시 40분. 코린트 운하에 도착했다. 다리를 통해 코린트 운하를 걸어서 건넜다. 아주 좁은 운하, 지협이다. 코린토스 운하라고도 불린다. 기반암이 석회암으로 쉽게 붕괴되어 매년 보수를 위해 많은 비용을 소모하고 있다는 소식.

코린토 지협을 건너는 '아주 옛날 다리'.

BC605년 즈음에 이미 코린토스의 독재자인 페리 안드로스 참주에 의해 운하 건설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 당시 기술로 가능한 방법을 통해 해결했다.^^ 인력을 통해 배를 통째로 옮기는 '디올코스'라는 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우회했을 때보다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 사이의 거리가 700km나 단축되니 시도해볼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했던 인력에 의해 다이너마이트의 은덕에 힘입어 1893년에 이 운하가 완공되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펠로폰네소스 섬"이 되어 버렸다.^^

 

코린토 지협을 건너는 '舊다리'와 멀리 새로 건설된 '新다리'가 보인다. 구다리 아랫쪽은 번지 점프대로 이용되는 시설이다.

 

좁은 지협을 연결하는 舊다리가 번지 점프의 명소로 탈바꿈한 것은 교량의 기능에 대한 덤이다. 차량이 이동하는 다리의 아래에 번지점프대가 설치되어 있다. 윗쪽의 다리로 그냥 건너가다 보면 나처럼 못보고 지나칠 수 있다. 나중에서야 이런 사진으로 확인하면서 앗차차! 한다. 미리 공부하고 갔어야 하는데... (아! 난 패키지 여행이었구나..............ㅠ.ㅠ)

 

'新다리'로 가까이 날아가보았다. 고속도로용 다리와 철도용 다리가 나란하게 달린다. 나로니코스 만 방향으로 바라본 전망이다.

 

위에서, 아래에서, 지나가면서......

1893년에 완공된 이 운하는 길이가 6.3km에 이르나 폭이 25m에 불과해 화물선보다는 관광객용 여객선의 통항 위주로 바뀌었다.

 

코린트 운하를 지나 바로 숙소로 향하는 것으로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테네에서 코린트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다시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피곤하지만 코린트 방문 일정을 그냥 오늘 다해 버리자고 하더라. 그리 하라 했다. 그래서 코린트 아크로폴리스 아래 위치한 고대 코린트 유적지를 찾았다.

 

코린트 운하의 좁은 지협을 연결하는 구다리를 건너 고대 코린트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그리고는 숙소로 이동.

 

오후 6시 10분. 코린트 아크로폴리스 아래 위치한 자그마한 박물관을 먼저 방문하였다.

 

박물관 및 유적지 통합 입장료가 8유로이다.

 

卍자 문양이 코린트에서 시작되었다는..... 특이하다.

 

멋진 그림으로 장식된 근사한 도자기들.

 

전형적인 코린트 양식의 주두를 샘플로 전시하고 있다.

 

목과 손이 없는 수많은 동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동상에 대한 수요가 워낙 많아 공장제 수공업으로 생산되었다고 한다. 대량으로 생산된 몸체의 동상에 머리와 손 부분만 따로 제작하여 부착했다고 한다. 물론 전쟁이나 지진 등에 의해 파괴되어 머리 부분이 없어진 동상들이 있기도 하다.

 

박물관 바로 앞에는 기둥 몇 개만 남은 아폴론 신전의 모습이 허전함을 느끼게 한다.

BC 6세기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위한 신전으로 건설되었다. 당시에는 기둥이 38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7개만 남아 있다. BC146년 로마군이 침입하여 박살낸 때문이다. 코린트 유적지의 아폴론 신전은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들 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그런데 이 정도를 '남아 있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들 상태가 다 이러하다.)

 

신전 앞쪽에 위치한 '상가'인 아고라의 흔적.

 

뒤로 돌아 아크로폴리스 꼭대기를 바라본다. 성채의 흔적이 보인다. 3중의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는 방어형 요새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고 한다. 이번 여정에서는 그냥 이렇게 바라보고만 갈 수 밖에 없었다. 아효~ 패키지 여행이란~~~

 

아크로코린토스를 바라 보기만 하고 직접 방문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는 '로만 포럼' 앞에서 모두 실망을 금하지 못하고 있는 일행들.

 

유대인들의 고소로 인해 이곳으로 사도 바울이 잡혀와 당시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경을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지면서 코린트 혹은 코린토스로 불리는 이곳이 '고린도'라는 이름도 함께 얻게 되었다.

 


강의 신인 아소포스가 아크로코린트를 만든 시지푸스의 부탁을 받아 만들었다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피레네 샘의 흔적이다. 지금도 물이 새어나오는 곳이 있다고 현지 가이드가 설명을 해주었다.

 

레카이온 항구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던 도로의 흔적. 도로 옆으로 배수구의 흔적까지 남아 있다. BC146년 로마군의 침입으로 파괴된 것을 BC46년에 로마인들이 재건한 도시의 흔적이다. 

 

레카이온 도로 주변의 복원도를 보면 대단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21년 지진으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1858년의 지진으로 또다시 파괴되었다.  그래서 도시를 버리고 북동쪽으로 약 5km 떨어진 현재의 코린토스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어 고대 도시의 유적지로 남게 되었다. 코린토스 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이다.

 

호텔 킹 사론. 첫날 숙소였다. '바다 뷰' 객실을 배정받았다.^^  "킹 사론"의 이름을 딴 바다인 '사로니코스 만'의 모습이 아주 잘 보이는 객실이었다.

 

왕의 이름을 걸고 영업을 하고 있는 호텔이라 기대를 했다. 이 동네에서는 가장 나은 호텔이지 싶은데, 객실에 물도 안준다. 실망이다.^^ 객실에 슬리퍼도 없더라. 실망이었다.^^

인터넷 중독의 폐해일까? 여행을 다닐 때면 WIFI 연결 지점을 찾고는 했다. 그래서 이제 e-SIM을 통한 데이터 로밍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연결이 안되는 것이었다. 호텔 WIFI로 접속해 업체에 연락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결론은 나의 실수 때문에 안되는 것이었다. e-SIM 사용을 위한 절차대로 수행하여 "무사히" 데이터 로밍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을 하느라 심심하지 않은 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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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론을 갖고 노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런데 이 재미난 것을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권할 수가 없다. 비용 문제도 있고, 의외로 규제가 심하기 때문이다. 일단 서울에서는 거의 드론을 띄우면 안된다고 보면 될 정도이다. 물론 승인 신청을 한 것이 받아들여지면 가능하기는 하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드론에 대한 규제가 너무 심하다고 마음 한편으로 불만의 기운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며, 한편으로 그렇게 규제가 강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아예 해당 국가에 여행을 하면서 개인 레저용 드론을 소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인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주인도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홈페이지에 탑재된 자료이다. "2024 슬기로운 인도생활"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여러 국가의 대사관 홈페이지를 그동안 살펴보았지만 해당 국가에 대한 안내자료로 가장 만들어진 것으로 칭찬하고 싶다.

 

드론과 관련된 내용은 46페이지에 실려있다. 인도에 입국하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한 부분이다. '전자담배'가 반입금지 물품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 드론반입제한물품에 해당한다. 

별도의 허가, 승인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는데 드론의 경우에는 거의 안된다고 한다. 또한 인도에서의 드론 관련 정책이 모든 드론이 하늘로 뜨려면 위치를 추적하는 GPS 정보를 필요로 한다. NPNT (No Permission, No Take-off) 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드론 정보를 추적하는 펌웨어의 탑재를 요궇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이 자신의 드론을 소지하고 입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소지한 드론을 들키지 않고 세관을 통과한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제대로 조종이 되질 않는다고 한다. 세관에서 검색되면 공항에서 압수하며, 출국시 찾아야 한다고 한다. 입국과 출국시 공항이 다르면???

 

인도는 갈등관계에 있는 주변 국가가 여럿이라 통제의 고삐가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군부대 등의 시설 주변, 휴전선 인접 지역은 드론으로 접근하면 안되듯이... 그런데 인도는 땅덩어리가 무지무지 큰 데도 그냥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다.

 

하여 크게 불편한 것도 아니니까 정해진 우리나라의 드론 관련 법령을 즐겁게 따르면서 드론 생활을 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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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군에서 시행하고 있는 "강진 반값가족여행"의 혜택을 보았다. 조금 더 배우며 여행을 하기 위해 강진군 홈페이지에서 강진군에 대한 여행 자료를 부탁했었고, 그렇게 받은 자료 중에 『있는그대로 강진여행』이라는 책자는 지금까지 내가 받아본 지자체의 여행안내자료 중에서 최고라고 평하고 있다.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지만, 특히 주제별로 나눈 후 안내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강진군 지도에 표시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온 후 "어디를" 다녀왔냐는 다른이들의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최고다!

 

그렇게 해서 병영성과 하멜 기념관은 강진군 여행 첫날에, 강진만생태공원, 가우도, 석문공원은 둘쨋날에 방문하였다.

 

1. 전라병영성과 하멜 기념관

전라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하여 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그래서 1872년 지방지도에서 강진현을 찾아보면 강진읍과 병영의 규모가 거의 비슷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雪城 혹은 細柳城이라고도 했던 병영성은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광산현에 있던 병영을 당시 도강현이었던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2,820척, 높이가 10척 8촌이었고, 연희당, 응수당, 객사 등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전라병영성에 1656년부터 1663년까지 네덜란드 인 하멜(Hendrik Hamel) 일행이 억류되어 생활하기도 하였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가 이듬해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 전체 길이는 1,060미터, 면적은 93,139제곱미터로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평지성이다. 배후에는 해발 561미터 높이의 수인산에 산성이 있다. 동서남북에 옹성을 갖춘 문터, 4개의 모서리와 동벽, 서벽에 2개씩의 치성의 흔적, 남서쪽 배수구 시설, 조선시대 읍성 진영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방법으로 축조된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성곽, 남문, 동문 등이 복원되었고 성곽 내의 소실된 건물들과 유적들은 현재 복원중이다.

 

병영성의 동쪽에는 이곳에서 6년간 억류 생활을 했었던 '하멜 기념관'이 멋지게 만들어져 있다.

 

병영성의 동문을 보호하는 옹성에서...

 

성벽의 길이가 1km를 살짝 넘는 정도이니 천천히 걸어서 한바퀴를 돌아보면 좋다.

 

남문 부근의 일부 구간은 지난 해의 집중호우로 인한 재난에 휩싸였다.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복구를 기다리고 있다.

 

병영성 서문 밖에 위치한 하고저수지 옆을 지나는 배율천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교'가 놓여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다. 18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의 지방 건축술이 크게 발전된 양상으로 보여주는 우수한 유적이다. 아름다운 조형미를 갖춘 다리로 조선후기 다리들 중 수작으로 꼽힌다는데 이곳을 놓치고 이번 여행에 직접 보질 못했다. 넥스트 타임~

(사진 출처: 조진섭, 2018, "그옛날 당당했던 모습으로 돌아온 호국의 성지," 국방저널, 통권 530호, 81쪽.)


병영성의 동문 밖에는 하멜 기념관이 위치한다. 월요일에는 휴관하여 내부를 구경하지는 못했다.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렸다고 평가되는 『하멜보고서』의 저자이자 병영에서 오랫동안 억류생활을 했던 헨드릭 하멜을 기념하고, 강진과 네덜라드 호르큼 시와의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되었다.

 

네덜란드 사람이라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가 광장 한쪽에 모셔져 있다. 네덜란드 풍차가 이런 모습이었던가? 30여년 전쯤에 한번 본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 기념관 앞에서 병영성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하멜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동인도회사의 선원이었던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배가 난파되어 1653년 제주에 표착하였다. 이들은 탈출하기 전까지 13년 동안 조선에 살아야 했고, 그 중 7년을 강진 병영에서 지냈다.

하멜 일행이 이곳에서 보낸 기간이 길었던 만큼 병영 일대에는 네덜란드 문화와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병영면 성동리의 마을 안쪽을 지나는 '한골목길'의 담장의 축조 방식이 독특하다. 돌을 세워 아랫층과 윗층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엇갈리게 쌓아 마치 빗살무늬 처럼 만든 것이다. 이 담장의 방식과 부근의 수로 등이 그들을 통한 네덜란드 문화 흔적으로 보고 있다.

탈출에 성공한 이후 1668년 네덜란드에 귀국한 하멜은 조선 표착 기간 동안의 임금을 받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문서 바로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책의 원서이다.

 

월요일에는 휴관하여 들어가보지 못하는 하멜기념관 전시실에는 전라병영성 출토 유물, 하멜보고서, 호르큼 시에서 기증한 네덜란드 전통의상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멜의 조선 표착의 역사적 의미와 17세기 조선의 병영 문화, 네덜란드의 역사 및 국제교류사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강진만 생태공원

탐진강의 열린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강진만은 자연적으로 넓게 형성된 汽水域(brackish water zone)으로 하구 습지에 인접한 농경지, 소하천, 산지 등의 자연환경이 양호하여 다양한 생물들이 풍부하게 서식하는 생태다양성의 보고이다.

 

2015년 국립환경과학원의 정밀조사에 따르면 멸종위기야생동물 10종을 포함하여 1,131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어 평균 548종의 생물이 출현하는 남해안 11개 하구역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생태다양성을 자랑한다.

 

예로부터 남해안과 제주도를 오가는 뱃길의 대표항구였던 남당포구가 있던 강진만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의 한시 '탐진어가'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천천히 데크길을 걸으며 강진만의 생태를 감상할 수 있다.

 

천연기념물 제201-2호인 '큰고니'를 형상화시킨 조형물이 탐진강 제방에 만들어져 있다.

 

다리 이름도 '고니 다리'.

 

갯벌위의 갈대밭 사이로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밀물 때와 썰물 때의 모습을 모두 보고 싶었는데, 그냥 지나가는 여정이라 그렇게 하질 못했다. '1주일 살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분들은 얼마나 좋을까~~~^^

 

3. 가우도

강진만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가우도는 후박나무 군락지 등 자연이 살아숨쉬는 숲이 청자 빛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섬이다. 강진을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인데, 섬의 생김새가 소(牛)의 멍에(駕)에 해당된다고 하여 '가우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강진만의 서쪽인 도암면에서 가우도로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다산다리'의 모습.

 

강진만의 동쪽인 대구면과는 '청자다리'로 연결된다. 청자다리를 통해 이어진 가우도의 정상 부근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가우산 위에 거대한 '청자'가 올라와 있다. 청자타워이다. 짚라인을 타고 청자다리 옆을 날아가 대구면에 도착할 수 있다.

 

청자 타워까지 모노레일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왕복 3,000원.

 

가우도에서 바라본 '다산 다리'의 모습, 다산 초당이 있는 방면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가우도에서 바라본 '청자다리'의 모습. 고려청자 요지가 많이 분포하는 칠량면 쪽과 연결되어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다산다리와 청자다리의 골격과 구조는 같다. 2륜차 통행금지!

 

가우도 둘레길의 북쪽에 위치한 '출렁다리'. 흔들면 출렁거려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다산다리를 걸어서 건너 가우도로 넘어간다. 

촬영은 이 친구가 해주었다.

 

가우도에 도착하자마자 '황가오리빵'을 사먹어볼 수 있다. 5개에 5,000원.

 

그리고 가우도를 이렇게 즐길 수 있다.

둘레길 이름이 '함께海길'이다. 가우나루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모노레일을 타고 청자타워까지 올라갔다가 돌계단길을 내려와 출렁다리를 건너서는 나머지 '함께해길'을 걸어 다산다리를 통해 선착장의 주차장으로 나왔다.

 

영랑나루쉼터에서 영랑과 함께 기념사진을 하나 남겼다.^^

 

가우도 출렁다리. 짐을 싸면서 '빗'을 빼먹었고, 가져갔던 모자는 바람에게 빼았겼고.... 내내 머리 모양이 새집이다.

 

가오리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다시 또 자꾸만 가고싶은 섬, 가우도

 

4. 석문 공원

기가 막히게 멋진 장면이다.^_^  석문공원은 긴 세월 비바람에 깎아놓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남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곳으로, 석문산과 만덕산을 잇는 산악형 현수교가 유명하다. 멋지다!!!

 

'사랑+구름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길이 111m, 폭 1.5m의 출렁다리(탄탄하여 잘 출렁거리지는 않는다.)에 올라서면 아찔함과 동시에 주변의 풍광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다리 양쪽 끝에는 하트 모양의  게이트 겸 포토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추억을 사진으로 담기에 좋다.

 

절벽에 매달린 '석문정'.

 

절벽 위에 올라앉은 전망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살금살금 건너가 보았다.

 

멋진 곳이라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석문교 옆에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두고 55번 도로 옆으로 조금 걸어서 물놀이장이 있는 도암석문계곡 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도암천을 가로지르는 '석문2교' 아래를 지나면 바로 진입로이다.

 

드론 갖고 노는 것이 즐겁기만 한 새집 머리 할아버지.

 

주변 산책로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연의 조각품들을 즐길 수도 있다. '새종대왕 바위'와 '큰바위 얼굴'.

 

5. 고바우 전망대

대구면에서 마량면으로 향하는 강진만을 따라 연결된 해안도로는 시원하게 즐기는 드라이브가 가능하다. 고려청자박물관 조금 못미쳐 강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인 '고바우상록공원'을 찾았다.

'고바우 전망대'라는 표지판이 시인성이 떨어지게 만들어져 있다. 잘 안보인다. 그리고 넓은 주차장 입구는 막혀 있다. 공사중이다.

 

무엇인가 거대한 것을 만들다가 멈추었다. 공사중이라 하자.

 

낙조가 가장 멋진 장소인데 대낮에 찾아갔다. 확뚫린 전망이 시원하다. 다음엔 낙조를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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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에서 시행하는 "반값가족여행"의 혜택을 입었다. 2024년 4월 초에 신청하고 22일~24일 간 2박3일의 여행을 즐기고 바로 비용 정산 신청을 했고, "강진사랑상품권"으로 받았다. 다시 강진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문화의 두께를 더해 온 강진의 명소 몇 곳을 찾았기에 간단히 정리해 두려 한다. 아래 지도에서 파란 선은 22일의 이동경로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강진군의 북쪽의 명소들을 방문하였다. 강진읍의 숙소에서 쉬고 23일에 강진만의 서쪽 지역(붉은색)을 여행하였다. 24일에는 강진만의 동쪽 지역(노란색)을 여행하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1. 백운동 원림

2023년 가을에 중국 강남의 정원 몇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가각의 과식원, 동리의 퇴사원과 진주탑원, 소주의 졸정원의 네 곳을 방문하였는데 정원 속에 각종 자연을 가져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것저것을 모아 놓다보니 이것저것이 다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어 번잡하게만 보였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라 중국과 차별화된다 하였다. 그러한 전통 정원을 강진에서 찾았다. 白雲洞 園林은 강진군 성전명 월하리의 월출산 옥판봉 자락에 위치하며, 17세기 말 조영된 전통 別墅이다. 원림의 조영자는 이담로이며, 만년에 둘째 손자 이언길과 함께 백운동에 은거한 이래 11대에 걸쳐 이어져온 유서깊은 원림이다. 2004년 11월1일 향토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으며, 2009년 착공된 복원사업으로 원림의 골격이 회복된 상태이다. 2019년에는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드론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월출산 강진다원의 넓게 펼쳐진 차밭 사이에 짙은 숲 속에 백운동 별서 정원이 숨어 있는 듯 하게 보인다.

 

백운로 변에 새롭게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쉬게 하고 차밭의 경관에 감탄한다. 

 

헌 잎위로 새 잎이 열심히 돋아나고 있다. 찻잎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더 아래로 내려가야 원림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는데, 중간을 뚫었다. 화장실도 새로 만들고 있었다.

 

몇 걸음 안걸어도 쉽게 별서 정원으로 접어들 수 있다.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을 끼고 원림이 조영되어 있다.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는 자연 속의 정원이다.

 

여기가 내집이다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들어간다. 보는 사람도 없다.^^

 

현재 복원된 백운동 원림 구성도이다.

(출처: 박율진 외, 2011, "강진 안운마을 백운동원림의 승경과 수공간의 조영 특성," 한국전통조경학회지, 제29권 2호, 105)

 

백운동 원림의 안채에 해당하는 自怡堂.

 

사랑채 건물이다. 산허리에 작게 만든 방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다 하여 백운동 12승경 중 제9경인 翠微禪房으로 선정!

백운동 12승경은 다산이 꼽은 것이다. 백운동 원림은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등에 의해 차 문화의 산실이 된 곳이었다. 백운동의 경치에 반한 정약용은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2곳의 아름다운 경승을 칭송하는 시를 남겼으며, 이는 '백운첩'에 담겨 있다.

초의선사가 그린 '백운동도'가 백운첩에 담겨 남아 있다.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을 수로를 통해 원내로 끌어들여 마당의 작은 연못을 돌아 다시 방향을 꺾어 흘러 나가게 만든 독특한 조경을 하였다. 백운동 12승경 중 제5경인 '유상곡수'.

 

제11경인 '정선대'에 올라 제1경인 월출산의 '옥판봉'을 바라볼 수 있다. 좋다! 怡悅!!!

 

제12경에 해당하는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2. 다산 초당

백련사에서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 다산초당까지 약 900미터라고 한다. 걸어야 한다. 그런데 차를 어찌 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다산초당 초입의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배고팠다.ㅠ.ㅠ

'다산손맛집'이라는 식당이 보여 들어가서 주문하고 나서 정신 차리니 다산초당을 찾아 걷고 있었다. 식당 사진이 없다. 아침을 굶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 정신이 없어진 때문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온 것 같다. 오르는 길이 너무 좋아졌다.

 

그런데 이건 무엇일지 의아했다. 흙탕물인데 물바가지가 있다? 왜?

 

'서암' 그리고 뒷쪽으로 '다산초당' 건물이 살짝 보인다.

 

다산초당과 주변 건물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은 經世致用, 利用厚生, 實事求是를 모두 겸비하여 실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나 정조 서거 후 천주교 박해사건에 휘말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茶山艸堂은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 10여 년 동안 기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학문을 연마한 곳이다. 『經世遺表』, 『牧民心書』, 『欽欽新書』의 경세론 등 500여 권에 이르는 대저술이 바로 이곳, 다산초당에서 이루어졌다.

 

이름처럼 원래는 초가였던 다산초당은 1936년에 노후화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기와집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茶山艸堂"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남긴 것......이 아니라 그의 글자를 집자하여 모각한 것이다.

 

능선에 위치한 '천일각'에서는 강진만의 바다 경치까지 아주 잘 보인다. 옆의 오솔길은 백련사까지 이어진다.

 

 

3. 사의재

1801년 겨울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도착했다. 18년간 이어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당시엔 숙박업소가 없었다. 다산을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갈데 없는 다산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숙소를 제공해준 것이 주막의 주모였다. '동문매반가'라는 강진읍의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이었다. 

다산은 이곳을 거처로 삼으면서 '생각, 용모, 말, 행동의 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아 四宜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주막의 골방을 4년간이나 내주어 지낼 수 있도록 해준 마음이 한없이 넓었던 주모.

다산은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사의재에서 주모와 그 외동딸의 보삼핌을 받으며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나갔다. 이곳에서 『兒學編訓義』를 집필하였고, 황상 등 모두 6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이 주막에서 지낼 때 다산은 바지락전과 아욱된장국을 즐겨 드셨다고 한다.

 

강진군은 2007년 오랜 고증을 거쳐 동문 안쪽 우물가 주막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현재 사의재 내에 함께 복원된 동문매반가는 다산이 즐겨 먹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주막으로 운영 중이다.

메뉴판.

 

주변에는 사의재 저잣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다산이 머물던 시대의 옛거리 모습으로 사의재 주변에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4. 강진다원

강진 월출산은 큰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산세가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특히 큰 일교차와 강한 햇빛을 막아주는  맑은 안개 등 차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지리적 특성을 갖추어 일찍부터 떫은 맛이 적고 향이 좋은 재래종 차나무가 자라던 지역이다. 일교차가 크고 안개가 많은 자연환경이 차 생산에 적절한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다. 월출산에는 지금도 야생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정도이다. 월남사 등 월출산 주변의 고려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많이 재배되기도 했다.

이러한 천혜의 조건과 조선시대 학자들의 차 애호 정신이 더해지면서 강진의 차 문화가 확산되게 된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긴 유배 시절 동안 차를 마시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고 당대 유명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번째로 좋은 차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유서깊은 차문화 역사를 배경으로 1982년에 10여만 평 규모로 설록다원, 월출산 다원, 강진 다원(이름이 여럿이다.)이 조성되었다.

 

전체 차밭 중 8만 평은 일본 품종인 야부키타 종이 심어져 있으며, 1만 9천 평에는 재래종이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공기로 인한 냉해를 방지하기 위해 차밭 중간 중간에 많은 바람개비를 설치해놓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람개비들이 모두 산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냉기를 불어내리기 위해서 이다.

 

5. 영랑 생가와 세계모란공원

2024년 4월 23일 아침을 굶고 강진읍내의 영랑생가를 찾았다.

 

넓직한 대지를 보니 영랑은 부잣집 자손이었을 것만 같다.ㅎㅎ

영랑 김윤식은 1903년 강진의 5백석 지주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와 휘문의숙을 거쳐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청산학원 영문과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휘문의숙에 재학 중이었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고, 1920년 동경으로 유학하였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강진에서 김현구, 차부진, 김길수 등과 '청구'라는 문학동인지를 발간하였고, 1930년 동경 유학 때 사귄 박용철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다.

영랑은 1930년 3월에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함께 우리 현대시의 새 지평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그의 생가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던 것을 1985년 강진군이 전남 도비 지원으로 매입하여 연차적으로 복원사업을 벌여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형 그대로의 복원은 아니었으며, 공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복원공사가 부실했는지..................ㅠ.ㅠ

 

생가 옆으로 '시문학파기념관'이 위치한다. 오전 8시 반에는 운영을 안한다.

 

그리고 생가 뒷편 언덕 위에 '세계모란공원' 조성되어 있으며 생가에서 바로 연결통로가 있는데, 연결하고 있지는 않다. 폐쇄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돌아서 돌아서 돌아서 세계모란공원을 가보았다.

 

"감성 강진의 하룻길"은 강진의 대표 시인 김현구의 시들로 읽으며 지날 수 있다.

 

세계모란공원에는 모란꽃이 많다.

 

아주 커다란 꽃도 있다.

 

잘 생긴 영랑과 함께 사진을 남길 수도 있다. 빨간 쓰레받기가 눈에 확 띤다.^^

 

전망대에 오르면 강진읍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강진만 바다까지 보인다. 생태공원이 보인다.^^

 

온실에서 세계 여러나라의 모란을 감상할 수 있다. 참 모란은 향기가 있나, 없나???

 

영랑은 남도의 사투리를 음악성 있는 시어로 표현한 서정시인이었다. 또한 단 한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은 민족시인이기도 했다.

 

 

6. 고려청자박물관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 고려청자박물관과 고려청자디지털박물관이 위치한다.

고려청자박물관이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은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 약 200여 개에 이르는 청자 요지가 분포하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9세기에서 14세기까지 고려 청자를 제작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청자의 시작부터 발전, 쇠퇴까지 그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청자의 산실이자 보고이다.

2007년 태안 죽도 해저발굴에서 耽津('강진'의 고려시대 지명)이 쓰여있는 木簡이 발견되면서 2만 3천여 점의 고려청자의 생산지가 강진임을 증명해준 바 있다.

고려청자박물관은 1970년대에 고려청자 재현을 위한 고려청자사업소로 시작한 이후 지금은 국내 유일의 청자 전문 박물관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강진군에서 '1주일 살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입장료가 무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7. 사인정

강진현 고지도에서 '병영'의 뒷산인 수인산 자락을 따라 남쪽으로 쭈욱 내려가보자.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금의 탐진강과 산줄기의 끄트머리가 만나는 부분에 '사인암치'라고 적혀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서 같은 위치에 '사인암', '사인점' 표시가 있다. 이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지도를 확대하면서 찾아보았다.

 

현재는 행정구역이 장흥군으로 바뀌어 있으며, '사인정'이 남아 있다. 그래서 "장흥 사인정"이라 한다.

 

단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雪岩 김필이 계유정난 뒤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은거하다가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웠다. 김필이 이곳 강가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는 뜻으로 겨울이면 암벽에 단종의 진영을 그렸다고 한다. 그가 죽자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며 사인이란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정이라 하였다.

산기슭의 기암을 배경으로 하고 탐진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웠다. 단층 목조 팔작지붕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m 정도 높이의 석축 기단 위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고 각 주두마다 장식을 하였다.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사방을 마루로 둘렀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55호이다. 

 

자연 속의 설암각 건물.

 

오래된 영정각의 기둥들에서 싱싱한 자연산 구멍들이 보였다. 딱따구리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자연산 다람쥐들도 놀이터로 삼고 있다.

 

사인정 동쪽, 이끼로 덮여 있는 바위에 "제일 강산"이라고 각자가 되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로 보고 있다고 한다.

 

 

사의정에서 탐진강 방면의 조망. 이제는 나무가 무성하여 시야를 좀 가리는 듯하다.

 

사인정을 만든 김필의 신도비가 도로변에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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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말에 강진 여행을 다녀왔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밴드에서 남미륵사의 철쭉과 서부해당화 군락을 소개한 자료를 보고 강진을 찾게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4월 22일 서울을 출발, 열심히 운전을 해서 강진군에 도착하였다. 남도의 "한정식"에 많은 기대를 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도 간략하게 해결하고 "오직 저녁 한정식"을 마음 속으로 외치며 강진으로 달려갔다. 강진군의 성전면에 위치한 무위사를 가장 먼저 방문하였다. 이후 인근에 위치한 월남사지를 방문하였다. 백련사는 23일에 방문하였고, 나를 강진으로 이끌었던 남미륵사는 23일 오전에 방문했다.

아래 지도에서 파란색 경로가 22일의 이동 경로를 나타낸 것이고, 붉은색은 23일, 노란색은 24일의 이동 경로이다.

 

1. 무위사

강진읍의 북서쪽에 위치한 무위사는 월출산의 천황봉과 구정봉 사이의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고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한다.

입구에 주차장이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극락보전이 중심 건물인데, 그 뒷쪽에 새롭게 대웅전을  만들고 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절집을 즐기기에 적절하다.

 

4월 22일 오후 2시 35분에 방문하였다고 한다.

 

무위사 경내로 들어섰다. 조용~

 

고려 초에는 선종 사찰로, 조선시대에는 水陸寺로서 유명하였다.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水陸齋를 행하였던 사찰이었던 만큼,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極樂寶殿이다. 무위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조선 불교의 초기 형태로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의 소박한 건축미로 유명하다. 극락보전 앞에는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극락보전(국보 제13호) 내부의 후벽에는 31점의 벽화가 있었는데, 1955년에 보존을 위해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와 백의관음도를 제외한 29점을 해체하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극락보전 서쪽에는 삼층석탑이 위치한다.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성 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2층 기단의 3층 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석탑이다.

 

극락보전 뒷편의 대웅전 일대는 공사중이다.

 

무위사에서 출발하여 월출산 골짜기의 생태탐방을 가볍게 할 수 있도록 코스가 정비되어 있기도 하다.

 

2. 월남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진각국사 혜심이 중건했다고 하나 백제의 유물이 출토되고 삼층석탑의 규모와 양식을 근거로 월남사 창건 시기가 그 이전일 수도 있을 것이라 보고 있기도 하단다. 

월남리 마을 서북쪽의 죽림으로 둘러싸인 곳이 고려 불교문화의 성지인 월남사지 옛터이다. 3층석탑과 석비 부근의 발굴 작업 현장의 규모, 부근의 가옥이나 담장에 그 당시 사찰 건립에 사용되었던 많은 양의 석재들이 사용된 것들이 보여 월남사가 얼마나 융성했었던 것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월남사는 조선 중기에 폐찰되어 현재 복원중이며, 월남마을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월남사지에는 진각국사비와 3층석탑이 남아 있다. 

보물 제298호로 지정된 월남사지삼층석탑은 월출산을 배경으로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양으로 우뚝 서 있다. 백제 양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3층석탑의 서북쪽에는 중동이 부러진 거대한 석비가 있다. 윗부분은 광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제 313호이다. 비문은 진단학보 제36집에 실려있다.

 

3. 백련사

강진읍 남쪽의 만덕산에 위치한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만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쇠락의 시기를 지나 원묘국사에 의해 1211년 옛터에 중창되었고, 백련결사를 맺어 수행하면서 백련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후기 무신정권과 몽고의 침략으로 민중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된 시대에 원묘국사 了世는 결사운동을 벌였다. 1232년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1236년에 백련결사문을 발표하면서 고려 백련결사운동의 중심지로서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백련결사는 민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으로 정토세계를 염원하는 민간 결사운동으로 백성들이 주역이 되어 120여 년간 크게 번창하였다.

 

대동여지도에는 '백련사', 1872년 지방지도에는 '만덕사'라고 표시되어 있어 두가지 이름이 혼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백림 사건'이라 명하기로 했다. 백련사로 오르는 숲길은 동백나무가 가득하다. 이곳에 동백꽃이 만발하였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을 지... 꽃이 모두 지고 없었다. 백련사로 오르는 길의 동백꽃이 모두 진 사건, 동백림 사건이다. 다음에 동백꽃이 개화하였을 때 이곳을 다시 찾기로 했다.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길목에 약 5.2ha 면적에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 백련사의 동백은 2월부터 머금어 초봄인 3월 초부터 개화하기 시작하여 3월 말에 낙화한다.

다산초당까지 가볍게 걸어서 다녀올 수도 있다.

 

차밭에서 찻잎을 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의 동네인 것이다.

 

백련사의 대웅보전 편액은 조선 3대 명필 원교 이광사가 쓴 것이다.

 

오랜 세월을 품은 배롱나무 아래에 기와불사의 멋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재밌는 장면이다.^^

 

만덕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강진만의 바다에 바로 눈앞에 펼쳐져 보인다.

 

4. 남미륵사

강진읍 동쪽의 화방산 자락에 위치한 남미륵사는 법흥 스님이 1980년에 장건하고 40여 년 동안 불사를 중창한 세계불교미륵대종의 총본산이다.

 

남미륵사 조감도.

 

동양 최대의 거대한 황동 아미타불 불상이 있는 웅장한 경관이 유명하며, 봄이 되면 약 천만 그루의 철쭉과 서부해당화가 만개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해 불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사찰이다.

 

남미륵사 입구의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이르는 꽃길이다. 초봄에는 서부해당화와 철쭉, 여름에는 연못의 연꽃, 가을에는 꽃무릇, 겨울에는 동백이 멋진 곳이다. 4계절 내내 꽃들로 아름다운 자연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4월초에 철쭉 축제가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기도 하다.

 

남미륵사의 입구에서는 '부부 코끼리상'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런데 4월 24에 방문했을 때는 철쭉의 꽃이 안보였다.

 

이게.... 철쭉 천만 그루의 꽃세상???

 

아주 조금 남아 있기는 하다.

 

요만큼......

 

뭐 이렇다. 2024년 4월 24일에는 이랬다.

 

남미륵사의 대웅전

 

꽃길은 꽃길이다.

 

작업하시던 분이 서부해당화가 어떤 꽃인지 가르쳐주고 계시다. 멀리 아미타불 불상의 거대한 모습이 보인다.

 

남미륵사는 거대하다. 동양 최대의 황동 아미타불 불상 옆에 위치한 33관음전 또한 거대하다. 33관음전 앞 뜰에는 팔각13층석탑과 사각33층석탑이 서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극락으로 이끄는 부처님이라 한다.

 

관음전의 기와와 주변의 녹음이 아주 잘 어울린다. 기와의 색이 아주 예쁘다.

 

아미타불 불상이 있는 단의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마니차를 하나씩 돌려본다.

 

남미륵사를 찾았다가 마을로 들어가 민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는 것 같다.

 

남미륵사를 창건한 법흥스님은 시인이기도 하다. 경내의 여러 곳에서 작품을 즐길 수 있다.

 

천만 그루 철쭉이 꽃을 아름답게 피웠었던.....

 

주차장에서 미련이 남아...

 

2박3일간 강진 여행을 하면서 방문하였던 사찰 여정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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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구석구석"이라는 플랫폼이 있다. 홈페이지, 블로그, 밴드, 페이스북 등등 여러 플랫폼을 통해 대한민국의 가볼만 한 예쁘고 멋진 곳들을 소개해준다.

강진의 남미륵사 일대의 철쭉과 서부해당화 군락이 소개된 자료를 보고 준비했다. 강진군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여행자료를 부탁했다. 바로 처리가 된 것 같았는데, 실제 도착은 꽤 시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여러 자료들 중에 '반값 강진여행' 홍보 자료가 눈에 띄어 바로 강진군 홈페이지에 신청을 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1주일 살기 등의 지원 행사 기회를 보았었는데 지나치게 상세한 계획서를 요구하는 등 자료 준비가 까다로워 신청을 포기한 경우가 많았는데, 강진군의 경우에는 상대히 '지원자 친화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담당자들이 잘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

 

숙소들을 비교 검토하여 선정한 후 예약도 미리 해두었다. 그리고 강진군청에서 보내준 책자와 인터넷에서 검색한 자료들을 통해 강진에 대해 공부해나갔다. 강진군청의 홍보 자료 중에 "있는 그대로 강진여행"이라는 책자는 몇 년간 수집해 온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의 관광 홍보 자료들 중에 수위에 있다고 보인다. 참 잘 만든 책자이다. 필요한 내용들의 선정과 배치, 안내 등에 참 잘되어 있더라. 여행할 지역을 선정하고 일정을 정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블로그 내용을 정리하는데도 많은 참고가 되었다. 감사~

 

하지만 동봉된 관광지도 '강진愛흔들리'는 실망이다. 이렇게 훌륭한 지도가 있었는데 왜 그렇게 헐렁한 것으로 바꾸었는지 모르겠다. 실망이다....ㅠ.ㅠ

 

강진군의 헐렁한 관광안내 지도에 숙소가 딱 한 곳이 표시되어 있다. '케이스테이 관광호텔'이다. 제일 좋은 곳이니까 군에서 군의 관광안내지도에까지 표시를 한 것이겠지라고 기대를 하면서 정보를 검색하였다. 당연히 예약도 하려했다. 그러다가 위치한 곳의 지도를 보고 포기했다. 호텔의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4월 24일, 남미륵사를 들러 가우도, 청자박물관 방면으로 이동하다가 방문하여 보았다. 바람이 좀 강했지만 쪼꼬만 드론을 올렸다. 케이스테이 관광호텔과 주변의 모습이다. 사진이 녹색으로 가득하다. 그런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식당하나 없다. 하여 1층에 부페식으로 운영하는 식당이 입점하여 운영하고 있더라. 아침을 굶었기에 늦은 아침 혹은 이른 점심 삼아 먹어보았다. 괜찮더라. 주변의 주민들도 작업을 하다가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하는 분들이 많은 눈치였다. 어쨓든 케이스테이 관광호텔은 생태공간에 위치한다.^^

 

강진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옛날 지도들이 언급되어 고지도를 찾아보았다. 강진현의 1872년 지방지도의 강진읍과 전라병영성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있었던 곳이라 상당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이란 곳이 대단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자료이다.

 

대동여지도의 강진 일대도 찾아보았다. '병영'이라고 큼지막하게 표시되어 있다. 강진만(강진만은 '도암만'이라고도 한다. 남해도에도 '강진만'이 있어 '도암만'으로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다.) 가운데 있는 '가우도'가 만의 바깥에 표시되어 있는...

 

옆지기와 둘이 여행을 하기로 하였기에 일정을 조율하다보니 좀 늦어졌다. 4월 22일에 출발하여 24일까지 강진을 즐길 수 있었다. 길을 모르는 고로 네비게이션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강진을 향할 때와 귀가할 때의 추천 경로가 달랐다. 먼 길이더라....ㅎㅎㅎ

 

22일 월요일 아침에 서울을 출발하여 매우 달렸다. 잠을 설쳐 몹시도 피곤하였지만 옆지기가 운전을 도와주지 않아 외롭게 달렸다. 남해안에 위치한 강진군까지 다섯 시간을 달렸다. 차에는 加油하여 주었지만, 나는 그냥... 독박 운전이었다.^^

아산휴게소에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거대한 저녁을 기대하면서.... 한정식을 기대하면서......

 

 

영암을 지나 월출산을 끼고 돌면서 강진군으로 진입했다. "반값가족여행강진" 팻말이 반겨준다. 강진이닷!

무위사, 백운동 원림, 강진다원, 월남사지를 들러 전라병영성하멜 기념관을 찾았다. 굶주린 배를 위로하며 강진읍에 예약해두었던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기대했던 '한정식집' 사냥에 나섰다. 처참하게 실패했다.

 

23일. 강진읍내의 영랑생가, 세계모란공원을 천천히 즐기고 강진만생태공원을 찾았다. 드론의 '자동 추적기능'을 익힐 수 있었다. 피사체를 지정하고 활성화시키니 드론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따라오는 것이 신기했다.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다산초당을 방문하고 가우도를 찾았다. 석문공원의 구름다리의 장관을 감상한 후 아지트로 귀환하였다.

 

24일. 이번 강진 여행을 이끈 남미륵사의 꽃세상을 찾았다. 인근에 위치한 사인정의 정취에 빠지다가 케이스테이호텔, 가우도, 고바우 전망대, 고려청자박물관을 방문하고 귀갓길을 달렸다. 

고창군의 청보리밭 축제장을 귀경길에 방문하려 고려했었다. 드론으로 청보리밭의 모습을 잡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근에 주요 시설이 있어 드론을 함부로 운용할 수 없는 지역이기에 승인을 신청했었다. 비행 승인을 받았는데, 항공촬영신청을 받질 못해 포기하고 귀가하였다. 4일 전에 신청해야 하는데, 하루 차이로 인해 신청을 하질 못한 것이다. 아쉬웠다.

사흘 동안 아래 지도의 경로로 이동하면서 강진을 눈과 가슴에 담았다. 

귀가하여 안과를 다녀와 쉬다가 자료들을 정리하여 "강진 반값여행"의 정산을 신청했다. 강진에서 소비한 비용이 32만원 조금 넘었다. 영수증들을 모아 홈페이지의 양식대로 제출했다. 상당히 신속하게 처리를 해주더라. 만원 단위로 처리되기에 16만원의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입금되었다. 강진군의 여러 담당 공무원분들께 감사드린다.

"강진 1주일 살기" 프로그램도 탐이 나고 있다. 하지만 반값가족여행을 이용한 사람은 1주일 살기에 안끼워준다 하네.^^

'강진 사랑상품권'이 생겼는데......언제 다시 강진으로 달려갈까나~^^

 


 

일단 정리를 해두기로 했다.^^

강진군으로부터 "강진반값여행" 혜택으로 받은 16만원 상당의 지역상품권을 정리하기로 했다. 마침 강진군에서 직거래 쇼핑몰(https://www.gangjin.center/)(https://www.greengj.com/)을 운영중이어서 서울에 앉아 '강진사랑상품권'을 이용해 구매할 수 있다. 반값여행 '사전신청'했던 정보와 같게, 지역상품권 앱인 CHAK 앱의 신청 정보와 같게 '초록믿음강진'이라는 강진군의 직거래 쇼핑몰에 회원 가입을 하면 CHAK 앱을 통한 결재가 가능하게 된다.

강진군 병영면의 특색있는 음식인 '연탄돼지불고기'의 밀키트, '미니밤호박바로죽', 그리고 다산청정미 '맑은눈의쌀' 등의 상품을 구입했다. 무료배송이면서 할인폭도 상당하다. 16만원에 딱 맞추려 했는데, 158,000원을 결재했다. 2024년의 강진군 반값가족여행 이벤트는 이렇게 마무리를 하게 되었다. 강진군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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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한번쯤 만나 걸으며 수다떨기를 하는 모임이 있는 날이다. 이번 4월 모임에서는 경의선숲길을 걷기로 했었다.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일찍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하여 홍대입구역까지 달려갔다.

 

홍대입구역에서 경의선숲길을 찾아 걷다가 인근에 있는 효창공원을 찾아 참배하고 삼각지역까지 걸었다. 황사는 심했지만 걷기에는 좋은 길이었다.

이동거리 8.2km, 약 2시간에 걸쳐 12,009보를 걸었다.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이 넘쳐나는 홍대입구역 8번 출구를 나와 약속장소에 오니 15분이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친구가 있다.

부근의 편의점을 찾아 생수 한통 챙긴다. 비싸구나...

 

인원이 모두 모였다. 3명이다.^^ 바로 출발하였다. 서울디자인창업센터의 멋진 건물을 지난다.

 

경의선 책거리를 지나 숲길로 찾아든다.

 

재밌는 조형물이다. 먼 옛날 어렸을 때 철길에서 한번쯤 해보았을 장난이 아니었을까. 철로 위에 못 같은 쇠붙이를 올려놓고는 지나가는 기차바퀴에 눌린 장난감을 만드는 놀이도 해보았음직 하고...

 

경춘선 숲길의 경우에는 철로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데, 경의선 숲길은 철로가 거의 사라졌다.

 

경의선숲길 안내도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현재 위치와 주변을 확인할 수 있다.

 

공중화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쉼터에서 쉬어간다. 연녹색이 너무나 싱그럽다. 신록예찬!!!

 

공덕역을 지나는데 인근에 고기집들이 참 많다. 대체로 "원조" 집들이다.

 

오후 3시 11분, 효창공원으로 접어들었다. 백범김구기념관을 만났다.

 

기념관 바로 앞으로 효창운동장과 조명탑들이 보인다.

 

백범 전시관 입구.

 

1층과 2층 기념관 내부의 전시실. 백범의 생애를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전시실 내부의 추모공간에서 창 밖으로 묘역을 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

 

임시정부 요인들. 신년 기념 사진이라고 한다.

 

백범김구기념관 옆에 독립운동가 8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위치한다. 

 

의열사 옆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 묘역이 위치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함께 하고 있다. 일행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돌아선다...

 

효창공원 아랫쪽의 작은 카페를 찾아 커피 한잔을 하며 발을 쉰다. 발가락 사이에 낀 티눈이 몹시도 불편하다.

 

다시 경의선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사랑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차량이 보인다.

 

삼각지 고가차도를 이용해 경부선 철로를 넘어간다.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고 바로 옆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 약자들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삼각지 교차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며 서울타워를 사진에 담았다. 황사가 매우 심하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타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마스크가 필요한 날이었다.

 

전쟁기념관이나 중앙박물관에 학생들과 함께 올 때면 들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 삼각지역 인근에는 수많은 원조 대구탕집들이 있다. 그때 그시절에 비해서 양은 줄고 가격은 오르고 맛은...

 

식사 후에 셋이 공굴리기 놀이를 잠시 하고 헤어졌다. 삼각지역이 지하철 4호선이라 상계역까지 바로 올 수 있었다. 공사중인 경전철 구간을 구경하면서 걸어서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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