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4일에는 돈황의 명소인 막고굴과 명사산의 월아천을 방문하고유원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를 이용해 투루판으로 달려갔다.
아래 지도를 보면, 돈황의 남쪽에 위치한 기련산맥 쪽으로 동쪽에는 선상지 지형이 형성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엄청난 양의 모래가 퇴적된 명사산이 분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황이 예로부터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아시스였기 때문이다. 메마를 때도 있지만 당하강을 통해 물이 공급되고 그보다 많은 수자원이 기련산맥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돈황과 기련 산맥 사이에는 여러개의 선상지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저 높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에 의해 운반되는 토사가 골짜기 아래에 퇴적되어 형성된 지형이 부채 모양이라 해서 선상지로 불린다.
돈황 바로 남쪽의 거대한 선상지의 제일 꼭데기 부분에 막고굴이 위치한다. 그 선상지를 만들어놓은 하천이 '대천하'이다. 거의 메마른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름은 거대한다. 大泉河.
9시 25분. 돈황을 출발하여 대천하 하곡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남쪽의 기련산맥에서 흘러내리기 때문에 대천하는 남쪽이 상류, 북쪽에 위치한 돈황 방향이 하류가 된다. 넓은 물길 모양은 있지만, 물은 안보인다. 건너편 절벽에 있는 구멍들이 막고굴이다.
또... 왔노라...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아예 짐을 모두 맡기고 가야 한다. 귀중품과 돈을 빼고...
방문자들이 기념 사진을 남기는 뽀인트. 가장 규모가 큰 96호굴이다.
대천하변 절벽을 따라 1천여 개의 석굴이 뚫려 있어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한다. 492개의 석굴이 발굴되었다고 하며 소수의 석굴들만 번갈아가면서 공개한다.
1900년 17호 굴에서 5만 점 이상의 경전, 문서, 자수 등이 발견되어 이를 연구하는 '둔황학'이 탄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연히 이 자료들을 발굴했던 왕원록이 외국 조사대에게 헐값에 팔아넘겨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6천여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때 팔려간 자료 중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었고, 그래서 프랑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게 된 것이라고...
그런 문화재 탈취의 현장이었다.
2시 20분. 명사산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맡기도 아주 아주 아주 멀리 걸어와야만 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놓았다.
입장권이 깔끔하다.
모래 세상 명사산이다.
기다리다가 번호표를 뽑았다. 낙타 표이다. 22번을 뽑았다.
22번 표를 뽑았는데, 123호 낙타를 배정받았다.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보통은 낙타를 이용한다. 돈황에서 며칠씩 보내는 경우라면, 그냥 물통 하나 짊어지고 걸어서 다녀보는 것도 괜찮겠다....
걸을테면 걸어보라고 계단도 설치해주었다. 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우리는 낙타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하...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길래 따라쟁이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간다.
결국 사구 꼭대기로 올라왔다.
높은 곳엘 올라오니 아래가 다 보인다.
2006년에 있었던 재밌는 모래 썰매가 사라졌다. 공산당 어느 한 사람의 어느 한마디에 그냥 사라졌단다.
대신 활쏘기가 생겼다.
별로 익사이팅한 것이 없다. 하산한다.
월아천도 6년 만이네...
월아천의 물은 늘 그대로라 하더니, 그것은 옛말이다. 수량이 점점 줄고 있는 추세란다. 없어질지도... 관광산업을 위해 수돗물을 채울지도 모르겠다.
명사산이 돈황에서의 마지막 일정지였다.
G215번 도로를 달려 돈황에서 유원으로 이동하였다.
역에서 탑승 수속을 하고 T197 침대열차에 탑승하였다. 표를 찍어둔 사진이 남아 있네.
밤 10시 20분 차로 예정되었던 것이 10시 42분으로 연발했던 모양이다. 늦은 시간이라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잤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이 하나도 없다.
숙소에서 출발하여 만리장성과 관문의 모습을 알기 쉽게 만들어놓은 관광지인 장성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만리장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현벽을 직접 걸어보고 만리장성의 끝단이라고 알려진 제1돈을 답사하였다. 그리고 G30 고속도로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 돈황으로 이동하였다.
"천하 제일의 웅장한 관문 - 가욕관"이란 판떼기가 있는 곳을 가장 먼저 방문하였다. 장성박물관이라 보심 되시겠다.
과거에는 캬라반이 낙타를 끌었지만, 오늘날은 행글라이더를 탄다.
줄서서 입장하여 언덕을 올라가면 보이는 복원된 관문 모양에 "천하웅관"이란 글자가 그려진 낡아보이는 판떼기가 달려 있다.
안내지도.
공사중...
중국 문명의 보호, 계승 및 혁신적 발전을 위한 시범 지역을 조성하기 위해 가욕관 문화유산 보호 프로젝트를 구현한다고 적혀있다.
남아 있는 것에 "새" 옛날 것들을 더 웅장하게 열심히 덧붙이고 있다.
우리 연구자들의 답사 모습.
멀리 보이는 기련산맥, 중간에 보이는 열심히 달리는 기차, 가까이 보이는 도로.
재현해 놓은 병영 모습.
이곳의 장성은 토성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했을까 하는 궁금한 점도 있지만 열심히 복원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빠진 병사!!
공연 중인 병사!!!
헤어 스타일에 신경을 좀 쓰는 병사!!!!
짱박히... 아니 창박힌 병사!!!!!
도대체 가면이 몇 겹이었는지... 세다가 포기하게 한.... 누구??
'야외' 박물관을 보았으니 이제 '실내' 박물관을 본다.
이 정도 남아 있는 것들을 열심히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인가보다.
유명한 출토물인 것 같다. "마답비연". 날아가는 제비를 딛고 뛰는 말의 모습을 표현했단다.
1969년 감숙성 무위의 뇌태한릉에서 출토된 청동조각상인데, 후위의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적인 명마라 일컬어지는 한혈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현지 여행사 설립을 꿈꾸고 있던 현지 가이드 아저씨가 가이드 자격증에 마답비연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보여주었었다.
위진벽화묘에 있는 그림 벽돌도 전시되어 있더라.
가욕관을 묘사한 디오라마.
장성 제1돈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기련산맥에서 눈녹은 물이 흘러내려 형성된 하천인 북대하 주변에 형성된 하안단구 지형을 이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시. 현벽장성경구에 도착하였다.
저거다. 저렇게 높게 있어 '매달린 벽'이란 의미의 "현벽"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힘들어 보여도 한발한발 걸어가면 된다. 힘들다....
먼저 걸어가는 팀이 있더라. 장성을 넘어 서역으로 가고 있는 캬라반을 묘사한 조각상.
현벽장성의 상태를 보면... 복원해놓은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진짜 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있구나!! 누구였을까??
나는 가는 척만 하고 말았는데...
나는 옆으로 빠졌다.
이건 머지??? 접대실???????
보은당은 뭐꼬?
높은 곳마다 무엇인가가 만들어져 있다. 역시 높은 곳은 아래에서 보아야 높아보인다.
사막의 생명줄인 관개수로,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 주변에 위치한 대초탄 저수지로부터 공급되는 물이다.
물길을 조절하는 수문. 옆에 적혀있는 게 뭔가 했더니, 티켓없이 입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말이더라.
열려있는 수문.
여기가 현벽장성이었다.
2시. 가욕관 시내의 초원영웅식당을 나온다. 가욕관빈관 주변에 위치한다.
메뉴판이다.
배가 많이 고팠던가... 식당 사진들을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야 만들어두었더라.
장성의 끄트머리, 하천변에 돈대를 설치했던 흔적이란다.
안내지도.
멀리 보이는 기련산맥에서 발원하는 북대하가 좁은 골짜기를 이룬다. 주변에 병영을 근사하게 복원해놓았다.
출렁다리가 만들어져 있어 출렁출렁을 즐기며 건너가 볼 수 있다.
퇴적층의 두께가 상당하다. 그 아래로 많은 흐르는 흙탕물.
퇴적물이 마구 뒤섞여 있다. 이런 상태를 보여주는 곳은 퇴적물질들이 서서히 퇴적된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걸쳐 급작스럽게 많은 운반물질이 쓸려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돌들은 상당히 둥글다. 이것은 하천을 따라 꽤 오래 멀리 운반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고 마찰되면서 깎여나갔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메마르고 뜨거운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석 상태이다. 햇볕에 가열되어 바짝 마르면서 암석 내부에 있던 온갖 미네랄들이 표면으로 끌려나오는 것이다.(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ㅠ.ㅠ)
비가 내리곤 하나... 바닥에 메마른 소금기...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수분을 뽑아내어 생존하고 있는 사막 식생.
하천 반대편의 저 시설은 벙커....가 아니라 짚라인을 타는 곳이다.
이쪽으로 날아와 저기에 팍 부딪히고 살아남으면 된다...... 살아야 한다. 직원의 뒷편의 그늘에 숨어 삐대고 있다.
사막의 로망은 역시나! 먼지닷!!!!
3시 10분. 가욕관을 떠나자.
6시. 길가에 잠시 쉬어간 곳이다. 돈황까지 절반 왔다.
길가의 "아단지모" 표지판. 야단지모라고도 하는데 처음 실크로드를 지나며보았을 때 그것이 해당 지역의 지명인 줄 알았었다. 나중에 보니 아무데나 야단지모가 널려 있었더라. 야단 떨만한 땅 모양, 지형이 있는 곳이면 그냥 야단지모! 감숙성 안서 지방의 극도로 건조한 사막 지형을 야단지모라고 하였는데, 전혀 야단 떨만한 곳은 아니었다.
오후 8시 반. 돈황국제호텔에 도착했다.
해가 훤한 것은 베이징 중심의 단일 시간대를 사용하는 넓은 중국의 사정 때문이다. 서쪽 멀리 떨어진 곳인데 동쪽 먼 지방을 기준으로 정해진 표준시를 사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시간대를 사용하도록 해야할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어느 지방에 대해 중앙과 다른 무엇을 인정해주면 발생하게 될 정치적 문제를 극도로 조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9시 20분. 돈황 막고굴이다. 大泉河라는 하천이 흘러야 하는데, 물이 말라 하천이었던 흔적만 보여준다. 이 메마른 건천의 건너편에 구멍이 뽕뽕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구릉 위에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이었던 돈황에는 구법승, 대상, 병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융성 뿐만 아니라 돈황 예술도 꽃피울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흔적이 세계적인 불교 유적지로 유명한 막고굴이다.
돈황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며, 시냇가의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이 막고굴은 366년 승려 樂樽이 석굴을 파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이후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 들이 드나들면서 하나 둘씩 굴을 판 것이 천개에 가깝게 된 것이다.
천 여 개의 굴이 있다 하여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에는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한결같이 어떤 종교적 고행의 흔적이 느껴지며, 종교와 예술의 피땀어린 결정체이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굴 속의 유물들은 일찍이 약탈을 당해 수만 점이 해외로 유출되어 현재에는 10여 개 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9시 30분. 막고굴 입구에 도착하였다.
다큐 제작중.
막고굴 서점.
입구에 만들어 놓은 불탑들.
여기 저기 여러 곳에 불탑이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줄 알았는데, 세계문화자연유산이란다.
막고굴, 천불동 앞쪽을 흐르는.... 아니 물이 흐르지 않고 있는 건천. 하천의 이름은 찾질 못했다.
막고굴 입구의 패루.
입장에 필요한 입장권. 100원에다가 외국어 통역해준다고 20원이 덪붙여져 있다.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보호를 위한 조치라고 하는데, 이해된다.
비천상이 여럿 보인다.
드디어 왔구나 막고굴에. 그런데 입구에서 들어가면서 카메라와 헤어져야 했다. 실내 촬영 엄금. 천불동 내부의 사진은 없다.
외국 관광객이 오면 해당 외국어가 가능한 안내원이 나와 안내를 해준다. 보통 10여 개 정도의 동굴을 개방하여 안내한다. 한국어가 가능한 안내원 중에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었던 것 같은데, 돈황연구원에 근무한다 했었다. 열쇠를 들고 다니며 일반인들의 경우보다 조금 더 많은 동굴을 개방해주었다.
가장 규모가 큰 96호굴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앞에서 기념 사진을 다들 남기고 간다.
나도 남들처럼 남겨 보았다.
사진을 직접 찍지 못하였고, 15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정리를 하려니 막막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 숨겨져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할 수 없어 조만간 다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2012년에 한번 더 갔었지만 부족하다. 또 다시 가자~
돈황연구원
1900년 경 돈황에서 도교사원을 지을 곳을 찾던 왕위앤루(王圓籙)가 이곳 석굴까지 찾아들었고, 그의 조수가 16호 굴에서 다른 벽과 소리가 다른 벽을 찾아내어 그 벽을 헐면서 17호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막고굴이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나 황실에서는 이 유물에 관심을 갖질 않자 왕원록은 다시 석굴을 막아버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왕원록에게 푼돈을 주고 설득하여 1907년 25 상자 분량의 고서들을 추려 영국으로 반출하였다. 왕원록은 양 한마리 값을 받고 위치 정보를 누출하였단다. 으이구~
같은 해 프랑스의 고고학자 펠리오는 일일이 문서를 확인하여 알짜들만 골라 29 상자나 반출하였다. 그 속에는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었다. 얼마 후 펠리오의 둔황 고서 발견은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불관에서도 천불동에 있던 문화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 오오타니 고즈이가 약탈한 문화재가 강점기 박물관에 보존된 채로 해방을 맞으면서 우리나라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오오타니는 원래 승려였는데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중앙 아시아 탐험에 나섰고, 돈황과 쿠차 등지에서 많은 문화재를 털어왔다고 한다. 영국에 유학가서 좋은 것 배워 온 놈이었던 것이다. 으이구~
그런 문화재 도둑놈들 이야기를 절절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 이곳 돈황연구원의 전시실이다. 전시실에서 안내를 하면서 이 문화재는 누가 훔쳐갔고, 이건 누가 훔쳐갔고 하는 식으로 이야길 해준다.
2시반.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 돈황 골목 구경에 나선다.
돈황 재래시장.
돈황 시내의 비천상.
3시 10분. 돈황 박물관을 찾았다.
좀 많이 썰렁했다.
3시 30분. 명사산으로 들어간다. 사구들이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이동하는 소리가 많은 날이면 멀리까지 들린다고 하여 명사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명사산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상가 때문에 꽤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서 이동해와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에서 보장하는 명사산월아천풍경명승구 되시겠다.
입구이다. 여길 지나가려면?
이게 필요하다. 80원이었다.
입구를 통과하여 들어왔다. 명사산이닷!
안내도.
사구의 곡선은 언제 보아도 유려하다.
번호표를 뽑고 있다.
낙타표. 내가 1번이었다.
이렇게 줄지어 낙타를 타고 사구를 오른다. 거리도 꽤 되고 높이도 높다. 그냥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젊었을 때는 가능했을지도..ㅎㅎ
낙타의 발걸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카메라를 품에 안고 사진을 만들었다. 내가 찍힌 사진은 없다.^^
일행의 뒷 쪽으로도 차알칵~! 33명 일행이다보니 낙타 행렬이 기이일다~
걸어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두었다. 땀 좀 날듯...
4륜 바이크도 준비되어 있다. 물론 옵션이다.
모래썰매는 1회 이용했다고 되어 있다.
월아천
명사산 안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가 월아천이다. 남북 길이가 100m, 폭이 25m 정도이다.
월아천을 향해 걷는다.
소만호. 인공호라고 한다.
명사산을 걸어서 오르는 젊은이들. 젊은이들~
월아천.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원천인 지하수가 용출하며, 광풍이 불어도 월아천은 모래에 덮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막 오아시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뭔가 알 수 없는 유적일 것 같기도 하다.
명사산의 그림같은 사구들과 인사를 한다. 다시 또 보자꾸나~~
곤륜산맥 언저리에서 이제 천산 산맥 언저리를 향한다. 유원역에서 침대 열차를 이용하여 투루판으로 이동한다. 내일 아침은 투루판에서 먹게 될 것이다. 쭉 뻗은 빈 도로를 질주한다.
잠시 쉬어가기~ 목화밭이 보였다.
목화가 열심히 자라고 있다.
유원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목화밭' 노래를 같이 불렀다. 내가 기억하는 가사 부분은 "목화밭~ 목화밭~" 전부인데..
유원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역에서 8시20분 쯤에 탑승 수속을 하였다. 역에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열차에 탑승하여 4인 1실 배정 받아 웃고 떠들다가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7월29일 늦게 돈황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신세진 돈황국제대주점, 돈황국제호텔의 근사한 자태.
8시. 호텔 앞 길가에 나와서 동네 산책.
간판의 超市라는 단어가 궁금했다. 뭔가 했는데, supermarket이었다...기가 막히다.ㅎㅎ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공사중 판떼기 앞에서 쉬고 있는 아저씨. 아침 시간인데..... 만만디??
공사 중인 앞쪽에서 안내판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루 종일 맡은 것 같다. 훌륭한 분업이다.
9시 30분. 돈황 교외를 달린다. 사막이다. 멀리 거대한 명사산의 사구가 보인다. 돈황시의 남쪽 전체가 명사산이다.
돈황은 감숙성에 있는 도시이다. 타림 분지 동쪽 변두리를 북류하는 唐河강 하류의 사막 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중국와 중앙 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고대의 동서 교역, 문화 교륙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기원전 1세기 한 무제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 기지로 삼아 둔황군을 두고 부근에 옥문관과 양관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과 한인의 식민을 투입하였는데, 이후 둔황은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오아시스 도시가 변경 도시가 됨으로써 한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9시 33분. 사고 현장을 만났다. 아직 현장 수습이 안된 상황이다. 운전자가 크게 다쳤을 것 같다.
9시 33분. 뭐지?
9시 53분. 옥문관 매표소. 버스 기사 아저씨가 계산한다.
옥문관을 향하는 도로.
10시 43분. 옥문관에 도착하였다.
옥문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국에서 서역으로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한다. 호탄에서 생산된 玉이 이 문을 통해 들어온다고 하여 옥문관이라 이름 붙였다는 설이 있고, 양관과 대비하여 여자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붙였다는 설도 있다. 돈황 북서쪽 방향 70km 지점에 위치한다. 차량으로 이동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옥문관 안내판.
옥문관이 이런 상태로 남아 있다. 진짜 관문 맞나??
옥문관문물진열전이 열리는 작은 전시장이 입구에 있다.
전시장의 내부 모습. 좀 썰렁하다. 주로 글자들을 전시하고 있다.
밖에 나오니 건조 기후 환경의 상징인 낙타들이 보인다.
눈썹 위를 털이 덮고 있어 조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앞쪽에 얼씬거리면 침을 뱉는다니 조심해야 한다.
얘네들 똥이다. 아직 싱싱한....
사막 식생.
옛날에 만든 옥문관 안내 표지석
기단 아랫쪽이 깊게 파여 있다. 건조 기후 환경에서 지형을 변화시키는 주요 요소인 바람에 의해 침식된 것으로 보인다.
천정이 없이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사각형의 흙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옥문관이다. 2천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원래의 구조물이나 시설을 모두 파손, 유실되고 남아 있다는 것이 이 정도이니 원래의 모습을 유추하기는 지난한 상황이다.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 크기인 구멍.
문 모양이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할 틈새 구멍도 있다.
그리고 옥문관 북쪽으로 녹색 지대가 보인다.
그 녹색 지대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촬영 기사님들.
녹색 지대는 옥문관이 있는 지대보다 고도가 낮다.
물이다. 물이 있다. 물가에는 하얀 색이다. 소금이다. 즉, 염호인 것으로 보인다.
돈황은 기련 산맥쪽에서 흘러내려오는 당허(唐河)강의 북쪽 하류 부분에 위치한 도시이다. 당허강의 물이 모두 중간에 메말라버리지 않으면 그 북쪽을 흐르는 疏勒河(Shule River)와 만나며, 疏勒河는 서쪽으로 옥문관 북쪽 부분을 지나며, 계속 흘러 타림 분지로 흘러든다. 疏勒河가 물이 부족하여 흐르지 못할 때는 군데 군데 염호를 이루며 플라야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염분이 많은 물이라 사람은 이용할 수 없다. 하지만 주변에 남아 있는 발자국의 주인들은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때마침 그들, 발자국의 주인들이 나타났다.
부근에 보이는 유목민의 거주지.
염소 떼다.
疏勒河변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유목으로 키워지는 염소는 어느 정도의 염분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며 疏勒河를 떠나는 답사객.
한 때 지오트립 홈페이지 표지 모델이기도 했었다.^^
옥문관을 떠났다. 중간에 신기루가 보여 차를 멈추었다. 빛이 밀도가 서로 다른 공기층에서 굴절함으로써 멀리 있는 물체가 거짓으로 보이는 현상을 신기루라고 한다. 사진에서 멀리 섬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뜨거운 햇볕에 의해 달구어진 지표면의 상태를 관찰, 촬영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답사대원들.
도로 주변으로부터 모래 등이 바람에 도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로를 따라 둔덕을 조성하여 놓았다.
길......
11시 40분. 한대 장성을 향한다. 옥문관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져 있다고 한다.
11시 50분. 왔다. 한대장성유지에 왔다.
전국시대에 각 제후국들이 방어를 위해 변경 지역에 성을 축조한 것이 장성의 기원이다.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각 제후국들의 장성을 하나로 잇고 보수하여 완성한 것이 만리장성이다. 전한 시대에는 진나라 때의 장성을 보수하고 확장하였다. 한장성의 대부분은 주변에서 자라는 갈대를 흙과 모래를 섞어 쌓았는데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 기후 환경이라 오랜 세상이 지났음에도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한장성은 주로 흉노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농업 지역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천 년 가까이 원형이 보전될 수 있는 지리 환경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는 답사대원들.
사막의 열기를 견디는 버스.
한장성 관련 시설일 것이다. 내부 공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즉, 문을 닫은 상태.
파괴된 한장성의 일부.
1시 25분. 양관 부근의 포도 농장을 찾았다. 점심 식사를 위하여.
대막정원의 풍광 속에서 양관농가의 맛을 즐기시라~
포도가 머리 위에 널려 있다.
맛있겠다~
남쪽에서 고산 지대에서 스며나오는 물을 모아 오아시스 농업을 대규모로 하고 있다.
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포도.....
식당이 천정이 포도이다.
맥주 한잔 하실라우???
해바라기도 있다. 중국인의 간식꺼리.
인구 밀집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건조 기후 지역이기에 싱싱한 포도를 그대로 소비지로 출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건포도를 만든다.
포도를 수확하여 건조장에 널어두기만 하면 그냥 건포도가 된다. 워낙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햇볕으로 나오면 숨이 막힌다. 조금이라도 그늘 속에서 버티고 싶은 기후 환경.
아직 수확철은 아닌 것 같다. 건조장 밖에 건조 설비를 내어 놓고 있다.
물길을 따라 방풍림 및 그늘 조성 역할을 하는 백양나무가 워낙 잘 자란다. 적절히 자라면 솎아내어 건조장 설비로 이용한다.
물만 있으면 사막이 사막이 아니게 된다. 녹색 지대.
돈황시정신문명건설위원회로부터 10성 중 여덟 개의 별을 받은 훌륭한 집에서 식사를 한 것이었다.
열심히 자라고 있는 포도밭.
2시 30분. 뜨겁고 메마르고 숨막히는 양관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양관은 옥문관과 마찬가지로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으나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다. 한 무제 때 수비를 위한 시설이었고 봉화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막 위에 우뚝 솟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래서 심심해할 관광객들을 위해 준비했다. 장군님을~
근무 서기 위해 출발하는 위병들. 행군하는 모습은 완전히 당나라 군대이다. 아... 한나라 군대일까?ㅎㅎㅎ
고증이나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냥 뭔가 대충 만들어 놓았다.
진짜 대충 만들었다. 외양은 새 것이었는데.... 부서진다.
양관박물관이다.
위진서역이라는 현판.
양관문물 안내도.
'양관'인 것 처럼 만들어 놓았다.
맞다니까!!!!
있었음 직한 병영도 대충 만들어 놓았다.
양관 병영에 둔전병으로 근무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
양관 봉화대 흔적을 찾아 이동하는 셔틀 차량.
길 옆에 '양관'이라고 써 놓았다. 써 놓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까.
그렇단 '말'이야.
양관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붕괴, 훼손 위험이 커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책을 만들어 놓았다.
말타는 소년. 다가와서 자기 말을 돈내고 타보라고 권하고 다니던 소년이었다. 알아 듣진 못했지만 그런 의사를 표현 것이라고 친다.
말 좀 타소~^^
말 타쉐여~~
주변은 그야말로 온통 말라 비틀어진 땅덩어리이다.
관측 초소가 있었음 직한 곳에 관측소 건설.
그늘을 제공하지만 공기가 워낙 뜨겁다.
양관박물관, 그리고 그 앞으로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오아시스.
양관 유적, 그리고 건조 기후를 즐기는 답사객들.
누군가가 남긴 유기물을 발견했다.마르고 나니 섬유질이 많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것을 모아 연료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오아시스, 양관박물과, 양관 유적.
양관 유적과 그 주변.
양관에서 멀리 남쪽으로 보이는 고산 지대. 기련 산맥의 서쪽 끝, 혹은 곤륜 산맥의 동쪽 끝 쯤 되었을 것이다.
물이 있는 세상과 물이 없는 세상이 너무 극과 극으로 다르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홀로 나아간다. 저쪽으로.
'수봉관양'. 양관 봉수대 표지석이다.
셔틀 차량이 참 재밌게 생겼다.
양관 병영,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4시 반. 당하 저수지를 들렀다. 양관에서 돈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다. 돈황은 당하의 하류에 위치하고 상류 쪽에서 물길을 막아 어마어마한 저수지를 조성했다.
크리스탈 클리어 워터는 아니다. 녹조가 보인다.
댐의 아랫부분까지 계단으로 내려가볼 수 있다.
수위가 한참 낮아진 상태이다. 고지대에서 눈 녹은 물이 유입될 때 최고 수위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산지에서 하천을 통해 저수지와 유로가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하수가 용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수지의 물을 주변에 널리 분포하는 포도 생산 농가에 공급하고 마을의 생활용수로도 공급된다.
저수지는 콘크리트 제방으로 만들어졌다. 댐 위의 답사객들.
댐 건설 이전에 물이 흐르던 유로. 건천 상태로 남아 있다. 저수지의 물은 사진 상에서 더 하류 부분에서 조금씩 일정하게 방류하고 있다. 돈황이 당허강의 물에 의존하여 발생한 오아시스 도시이기에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진 하나 남겨본다.
5시. 돈황시 초입에 위치한 돈황고성에 도착하였다. 입장권에 돈황고성에 대한 간략한 안내가 되어 있다.
돈황 시내에서 보면 남동쪽 교외에 위치한다. 돈황시의 남쪽에 명사산이 위치하니 그 부분에 해당한다.
1987년 일본에서 당나라 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만든 세트장이었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영화의 촬영장으로 이용되었다. 영화 세트장일 뿐이지만 상당히 철저하게 고증을 거쳐 만들었기에 당나라 시기의 생활 문화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곳이다.
멀리 명사산이 보인다.
당나라 거리
마을 입구 패루.
장원 입구
당나라 술집.
술집 내부. 오량액이 눈에 든다. 하지만 눈으로 마시는 술은 아니다.
옛날 옷을 빌려준다. 당나라 옷인가???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
성위에 올라 주변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촬영했던 영화 장면들일거다. 아마. 뉘시더라~~
6시 10분. 피곤한 몸을 살려보고자 발맛사지 집을 찾았다.
영약으로 채워진 물통에 발을 담그고 기다린다.
이들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면.....
이렇게 된다.ㅠ.ㅠ
이후 일정은 야시장 둘러보기였다. 흩어져서 일행과 떨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호텔로 살아돌아오는 방책이라고 알려준 것이 호텔의 명함이었다. 아무데서나 택시 잡아 기사에게 보여주면 호텔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데려다 줄 것이라고... 아마도...
2006년 봄 어느 날 서울중등지리교육연구회에서 실크로드 답사를 교사 직무연수로 추진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조금 고민하다가 바로 신청했다. 방학 때마다 합숙을 하던 일정이 있었는데, 그 일정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했던 부분도 작용했다. 해외 여행으로는 두번 째였을 것이다. 33명이라는 인원이 움직였다.
공항에서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행정실장님도 계셨고, 같은 학교 졸업생도 있었다. 모녀 관계였다니...
행사를 주관했던 지오트립이라는 조직을 처음 만난 때 이기도 했다.
서안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대학 동창을 만나기도 했다. 근무하고 있는 고등학교 학교의 동창회에서 지원받아 같은 학교의 선생님들과 여행을 가는 것이라 했다. 부러웠다.^^
2006년에 중국에서 발간된 최신중국 사주지로 안내도이다. 15년 전의 것이다.
답사 일정 순서는 다음과 같다. 서안으로 날아가 하루 답사를 하고 돈황으로 날아갔다. 유원역에서 침대열차를 이용하여 투루판으로 달렸다. 이틀 후 우루무치로 이동하여 이틀을 답사하고 서안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늦은 시간에 공항에 모였다. 늦지 않을까 가슴 떨면서 공항으로 달려 갔을 것이다.^^
2006년 7월 28일(금) 오후 8시가 약속된 시간이었다. 일찍 가서 기다리다가 팀과 만났다.
줄서서 탑승 수송을 진행하고 있다. 8시38분을 가리키는 시계가 보인다.
그때의 비행기표가 남아 있다.
2006년 7월 28일 서안까지 날아가는 MU5022편,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였다. 10시반 출발.
10시30분 출발하여 다음 날 서안에 도착하였다.
7월 29일 0시 10분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표에 나와 있다. 현지 안내원과 만나 깜깜한 밤거리를 달려 건국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진짜로 깜깜한 밤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전한 어둠 속의 중국이었다. 그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