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0일 오후 5시, 주가각을 출발하여 5시50분 西塘古镇에 도착하였다. 85km를 달려갔다.
숙소가 古镇 안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밀면서 이동해야 했다.
满觉珑精品酒店, ManJueLong Hotel에 도착하였다. 건물이 ㅁ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내부의 1층에는 여름에 물을 채워두는 공간으로 보였다. 시원하겠다.
西塘古镇의 안내 지도이다.
강남수향의 볼거리 중의 하나가 화려한 야경과 고요한 아침 풍경이라고 한다. 서당에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 나오자마자 만나는 세상이 그러한 세상이었다. 환상적인 판타지의 세상이다. 좁은 수로는 물결이 크게 일지 않기 때문에 조명의 반영이 그대로 잘 나타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강남수향에서 숙박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황홀한 야경에 빠지고 다음날 새벽의 물안개 속의 풍경 때문일 것이다.
서당 마을의 야경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전에 먼저 일단 저녁 식사부터 하여야...... 푸짐한 한상. 밥을 피하고 나머지만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배부르다. 많이 부르다.
식후 산책을 시작해본다. 어둠 속에 빛나는 빛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어둠이 어둠으로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고 빛이 그 가치를 보이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한 것이니......
여러가지 낙서로 가득 장식된 송자래봉교를 건너 연우장랑 속으로 들어간다.
붉은 빛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색상의 조명이 어둠속에서 水鄕의 멋을 한껏 뽐낸다.
나룻배를 타고 가다가 물길가의 상점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을 홀리는 불빛을 따라서...
'서당'이 다른 강남수향들과 다른 점은 가장 더디게 관광지로 개발된 덕에 수향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길을 중심으로 한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이 펼쳐지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06년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미션 임파서블 3'의 무대로 등장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나룻배가 지나는 물길의 왼쪽은 상가등으로 이용되는 건물이 바로 물길과 연결되어 있다. 물길의 오른쪽은 물길을 따라 좁은 길이 이어진다. 이 좁은 길의 위로 처마가 계속 이어져 있다. 이 공간이 서당의 명소인 '烟雨長廊'이다. 비가 내릴 때면 이 처마를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며 걷는 세상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묘미를 제공할 것이다.
영녕교 위로 수많은 인파가 지나고 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3'에서 톰 크루즈가 뛰어건넜던 다리이다.
이곳이 서당고진의 가장 번화가인 것만 같았다. "古镇"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고장? 디스코텍? 빠? 하여간 땐스와 어울리는 음악이 상당히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두개의 물길이 만나는 결절점이라 교통의 요지일까? 노란 조명으로 칠해진 안경정 건너편에 위치한 곳이 그곳이었다.
다른 수향들에 비해 늦게, 더디게 개발되어 본래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 서당이라 한다. 그런 매력을 오염시키는 옥의 티가 아닐까 싶다. 소음이라도 좀 줄여주지......
건물의 2층은 明淸食代라는 식당이지만, 1층에서는 泊客 BAR가 영업중이었다.
안경정 옆의 안경교 위에서 영녕교 방면의 야경. 멋진 세상이다. 어둠은 많은 것을 가려주고 많은 것을 보여준다. 멋지고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이다. 밤새 쳐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귀에 압력을 마구 가하고 있는 박객BAR의 음악마져도 감미롭다.^^
안쪽의 골목길이 당동가이다. 수많은 홍등으로 물든 골목이 수많은 BAR로 가득하다. 골목에 사람들이 많지 않아 대부분은 입구에 호객꾼들도 심심해하는 상황이었다. 泊客 BAR만 홀로 요란하였고......
안경정 앞에 전시된 조형물은 민물가마우지를 이용한 낚시꾼을 묘사한 것 같다.
강남수향 서당의 황홀한 야경 속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정신이 몽롱해보이는 여행객 1. 泊客 BAR를 함께 들어가보자 했더니 뺀찌놓았던 여행객 1.
2023년 10월 20일의 서당을 그렇게 잠재웠다. 그리고............
와이파이의 세상으로 빠져들다가 잠들고 싶었다. 그런데 웬만한 사이트는 중국 당국에서 접속을 차단하고 있다. 그 웬만한 사이트를 접속하고 싶었는데... 중국의 업소에서 제공하는 WIFI를 통해서는 한국에서 접속하던 세상을 즐길 수 없다. 그냥 돈 몇푼 생각하지 말고 데이터 로밍도 그냥 빡 저질러야 한다. 그러면 한국에서 접속하는 인터넷 세상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3박4일 동안 인터넷 없는 세상을 살다 온 것만 같았다.
2023년 10월 21일에 눈을 떠보았더니 여전히 서당이었다. 그래서.......
우선 식당으로 달려갔다. 호텔에서 먹은 식사이니 '호텔식' 맞다. 지난 밤의 식사 흔적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호텔 식당이라니...... 준비된 조식의 상태라니...... 우와~~
수향의 맛은 야경과 더불어 새벽의 물안개가 깔린 풍경이라 했다. 오늘은 아니다. 쨍한 아침 햇살이 내려오신다.
'西塘花港'. 서당고진이 시작되는 뽀인트의 조형물.
만각롱 정품주점의 모습. 서당고진 안쪽에 입지한 가장 큰 호텔이다. 아침 식사 문제만 해결되면 참 좋은 호텔일 것 같다.
종종 보이는 신문물. 스맛폰이 일상화되면서 등장한 상품이다. 외장형 배터리를 임대해준다. 알리페이나 위쳇을 통한다.
서당의 아침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룻배마다 번호판이 있다.
흥겨운 아줌마들. 아침 일찍부터 이곳저곳에서 스맛폰 카메라에 춤추는 모습을 담고 있더라. 끼어들고 싶었다.^^
아주 좁디 좁은 골목길을 '弄'이라고 한다. 유명하지 않은 엽가롱, 그리고 서당을 대표하는 '롱'으로 유명한 석피롱. 서당에는 이런 '롱'이 100여 개나 있다고 하니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듯 하다.
한글로 "석피골목"이라고 안내되어 있다.
석피롱은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밖에 되질 않는다. 입구의 안쪽의 입구에 석피롱이라는 석판이 아랫쪽이 붙어 있다.
서당을 대표하는 교량인 환수교.
연우장랑이나 공원 등에 벤치처럼 생긴 시설이 있다. 널판으로 된 셔터를 빼서 보관하는 용도였다. 뚜껑을 덮어 놓으면 여행자들의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어 공간을 이용하는 지혜에 감탄하였다.
아침 식사후의 자유시간을 즐기고 호텔로 돌아왔다. 짐을 챙겨 로비에 맡겨두고 다시 한번 서당의 연우장랑과 서가의 골목을 탐방하였다.
"당원경영가게"는 어떠한 혜택이 있을까? 중국에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할 경우의 혜택은 '승진'이 대표적이란다. 그쪽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굳이 가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지난 밤 주변 일대를 떠들석하게 했던 박객BAR는 해가 뜨니 조용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길게 이어진 연우장랑.
서당에서의 이동경로를 표시해보았다. 파란선이 야경, 빨간선은 아침의 여정이었다.
연우장랑에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아침 일찍 물안개가 흐르는 서당의 모습을 보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을 남기며 서당을 떠났다. 야경이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욕심이 욕심을 부르는 듯 하다.^^
오진을 향했다. 서당에서 오진으로 가는 길은 가흥시 인근의 고속도로를 향한다. 현지 가이드인 "Hyejin" 女士가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실감나게 이야기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자꾸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오히려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 그들을 추모하는 움직임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듯 하여 부끄럽고 아쉬웠다. 그렇게乌镇风景区로 달려갔다.
2023년 10월 20일, 오후 2시 반. 강남수향고진 주가각(朱家角, Zhujiajiao)에 도착하였다. 上海朱家角古镇旅游区의 접수 데스크 모습은 여유롭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 종이 쪼가리 표는 없다. 스맛폰으로 업무를 모두 처리한다. 현지 가이드가 좌아악 알아서 처리하기에 정확한 요금 등은 체크하지도 않았다.
입장객이 많이 몰릴 때는 여러 줄을 서도록 설비가 되어 있지만 다행히(?) 사람들이 많지 않아 널널하게 입장할 수 있었다.
江南水鄕古鎭.
중국 사람들에게 "江"이라고 하면 그들은 長江을 떠올릴 것이다. 장강의 하류 부분 이름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이름인 "양쯔강(揚子江, Yangtze River)"이다. 이 양쯔강의 남쪽이 강남, 북쪽은 강북인 것이다.(중국에서 남방과 북방을 구분하는 경계는 진령에서 회하를 잇는 선을 기준으로 한다.) 예로부터 강남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넓은 평야에 수자원도 풍부하여 물산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강수량이 적어 농업에 불리하나 정치적인 중심지인 북경과 경제 중심지인 강남의 항주를 연결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를 한 끝에 7세기 수나라 양제가 무려 1,794km에 이르는 운하를 건설하였고, 이것이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였다.
경항대운하의 건설 이후 강남 일대는 운하와 물길을 중심으로 상업이 성하고 마을이 커지면서 수많은 "江南水鄕"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은 저평한 평야 지형을 이루고 있어 풍부한 강수량은 많은 호수를 형성시켰다. 크고 작은 호수와 호수들을 잇는 하천, 운하는 강남 경제의 젖줄 역할을 하여 다양한 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강남수향의 숫자는 상당했었다고 한다. 11세기 이후 기록을 보면, 주장, 동리는 마을이 형성된 이래 지명이 바뀐 적도 없고, 구획도 변경되지 않았으며 물길도 그대로이다. 건축물들은 명대와 청조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대다수의 고진들은 입지 조건의 변화와 육상 교통이 발달하여 수상 교통의 중요성이 낮아지면서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일부 수향은 개발 조건이 맞지 않아, 즉 육상 교통로를 새롭게 건설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개발되지 않고 있다가 "수향보존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고진'으로서 수향의 풍모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강남의 수향고진으로 "10대 고진"을 꼽기도 하지만 대체로 "6대 고진"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아래 지도에 표시된 지역들 중에서 주장(저우좡), 동리(퉁리), 록직(루즈), 남심(난쉰), 서당(시탕), 오진(우전)의 여섯 곳이 강남수향 6대고진으로 꼽힌다.
이들 지역은 양쯔강 남쪽에 위치하여 '강남', 물가마을이라 '수향', 옛날 마을이라 '고진'이라 한다. 명, 청 시대의 낡은 집들 사이로 운하가 흐르고, 물길 위로는 나룻배가 한가로이 지나며 자그마한 앙증맞은 수많은 돌다리들이 놓여있다. 살림집 하나하나가 물에 기대어 있고, 조금 큰 집은 담장 안쪽까지 물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한쪽은 물길이고, 한쪽은 뭍길이 나란하게 이어진다. 물길은 저수지나 호수, 운하, 강으로 통하면서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진다. 작은 물길에 의존하여 형성된 마을이기에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도시도 농촌도 아닌 독특한 생활단위가 형성된 것이다.
"강남수향"은 현대의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갖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분위기에 취하고자 찾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중국 중원의 주인공은 늘 한족이 아니었기에 이민족이 지배할 때마다 쫓긴 인재들이 소주 등으로 낙향하여 藝鄕을 만들었고, 그 대표적인 유산의 결정체가 여러 정원들이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정원들을 '園林'이라 한다. 수많은 '원림'이 남아 있어 중국 문화와 건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찾기도 한다.
상해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주가각은 '6대 수향'에 속하지는 않지만 상해의 행정구역에 속하고 교통편이 잘 연결되어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 노선버스, 지하철 17호을 통해 상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주가각을 대표하는 경관인 "방생교"를 담은 우표가 중국에서 발매되기도 하였다.
GEOTRIP을 통한 이번 강남수향 여정은 그래서 상해에 위치한, '상하이의 베니스'라고 상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주가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朱家角이란 지명에서 ' 角'은 변두리의 작은 마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원래 朱씨 집안 사람들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였기에 이런 지명으로 남은 것이다.
입구의 데스크에서 구할 수 있는 리플릿은 중국어판과 한글판(일어 포함)이 있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해로 여행을 왔다가 쉽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리플릿에 포함된 지도이다. 다른 수향고진들에 비해 규모는 크지 않다. 주요 경승지로는 과식원, 성황묘, 원진선원, 방생교, 대청우체국 등이 꼽힌다.
주가각은 곧 과식원 课植园이다. 과식원은 주가각의 물길에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과식원에서 강남수향 여정의 첫 일정을 시작하였다. 입장!!!
과식원의 지도이다. 물길 쪽의 입구를 보면 다른 집들과 차이를 찾기 어렵다. 좁은 문을 가진 소소한 집일 뿐이다. 그런데 내부로 들어가면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이 집의 경제 규모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주가각 고진 북서쪽에 위치하는 課植園은 면적이 17,997 평방미터에 이른다. 馬文卿(마원칭)이 191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0여 만 냥의 은을 투자해 15년 만에 완공하였다. 중국의 전통 건축예술과 당시에 도입된 서양 건축문화를 결합한 정원식 개인 화원으로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드문 방식으로 조성된 곳이다. 또한 전통 조경 유형 가운데 宅第園林의 '園居' 형식에 따라 주인의 저택도 원림 안에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과식원은 입구 구역, 주인의 주거 구역, 감상 및 휴식 구역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화원은 '과원'과 '식원'으로 구분되는데, 공부를 하면서도 농경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 농경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산화 이후 1956년에 과식원은 주가각 중학교 부지로 이용되었는데, 고대 도시 관광사업의 발전에 따라 과식원을 복원시킨 것이다.
과식원의 입구로 들어서면 회객청会客厅으로 이어진다. 손님이 방문하면 가마를 내려놓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후화청 后花厅에는 근사한 목조 조각품이 반겨준다. 위에는 撫琴聽風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그 분위기를 내기 위해 탁자에 칠현금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바둑판도 있었고... 사진은?
후화청을 지나면 본격적인 '과식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앞쪽의 영귀청으로 이어지는 진입로.
한쪽에 구멍이 뽕뚫린 석조물이 보전되어 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우물의 흔적이다. 쌍안정 双眼井.
영귀청 迎贵厅. 영귀청 앞쪽에는 '귀빈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아 계화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다. 바닥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무늬벽돌을 깔아 장식하였다.
영귀청 내부의 모습.
왼쪽으로 음양랑 阴阳廊, 그리고 망월루가 보인다.
망월루 望月楼가 높게 솟아 있다. 정사각형의 마름모꼴로 지어진 5층으로 이루어진 망월루는 과식원의 랜드마크이다. 건축 당시 맞은편에 먼저 지은 천주교 성당의 종루보다 높게 지으려 5층 높이까지 올린 것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원주가 사망하기 전까지 과식원이 완공되지 못하였다는 것이 씁쓸할 뿐.
망월루 앞 공터에는 말머리 형상의 돌덩어리가 있고, "馬到成功"이라 각자되어 있다.
음양랑과 망월루 사이로 보이는 건물은 수화간 绣花间.
太湖에서 가져온 기암괴석, 太湖石을 이용해 조성한 '가산', 그리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우향각.
연꽃 향기를 즐기는 우향각 藕香閣과 비랑 碑廊.
가산 구역 안쪽에 위치한 고즈넉한 정자 도사정倒挂狮子亭, 五角亭이라고도 불린다. 사자 모양을 거꾸로 장식하여 도괘사자정, 도사정이고 오각형이라 오각정이라 부른다.
타창루 打唱楼. 경극단 등을 초빙하여 공연을 즐기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단다.
타창루 맞은편의 수월사 水月榭. 문짝이 없이 그냥 뻥뚫린 월동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다.
집안의 원림에 집밖의 물길과 다리를 조성해놓았다. 과식교 课植桥. 과식교는 주가각의 36개 다리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다. 5m정도 크기의 석조 다리인데 난간의 장식 등이 정교하다고 한다. 새로 만든 자그마한 정자의 뒷편 건물은 경청당.
경청당 鏡淸堂의 내부 모습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경청당 뒷편으로 두 개의 건물이 있는 것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데, 발길이 바빠 가보질 못했다. 이런...
관람객들의 이동 편의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데크를 만들어놓으니 많은 부분이 개축되어 원래 모습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분위기와 맞지 않아 보인다. 사진 오른쪽은 경청당, 맞은편은 수월사.
타곡장 打谷场이다. 과식원의 '식원' 의도에 맞게 농작물을 심던 공간이었다.
재밌는 공간이다. 구곡교 九曲桥. 과식원의 입구에서 가장 먼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구곡교 안쪽으로 보이는 숲 속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소주 졸정원에 있는 입정 笠亭과 모양이 비슷하다. 뭐지? 신기하다.
가산 위에 조성되어 있는 백복정 百蝠亭. 가산을 장식하고 있는 묘한 돌들은 모두 태호에서 가져온 太湖石이다.
백복정 아랫쪽에 위치한 수정궁.
물에 비친 반영이 멋진 아치교로 이어지는 수정궁 水晶宮의 근사한 자태. 낚시를 하며 노는 곳이기도 하여 관어대 观鱼台가 있다.
영귀청과 우향각을 배경으로 남긴 사진 하나...
문이 아닌 듯한 문인 월동문, 월량문이라고 한다. 적절히 가리면서도 열린 공간을 연출한다.
장서루 臧書樓의 모습. 과식원의 '과원'에 해당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합시다~"하는 공간.
장서루의 입구에는 서성 书城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원주가 "한 권의 책은 천군에 필적한다"는 신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일자루 옆을 일자로 지나가는 일행들.
과식원을 나서면 입구 바로 앞에는 선착장이 있고, 매표소가 있다.
유람선에 승선하여 수향의 물길을 즐기는 시간이다.
물길 주변의 경관과 삶의 현장을 눈에 담으며 지나간다.
자그마한 다리 永安桥도 지나간다.
물길은 다른 물길과 만난다.
우표로 먼저 만났던 방생교 放生桥를 유람선 위에서 만난다. 주가각의 가장 큰 물길인 淀浦河를 가로지르는 다섯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다리이다.
明나라 때(1571년) 건축된 석조 아치형 교각이다. 다리 건축을 주도한 성조 스님이 이 다리 아래에서 방생만 하고 절대 물고기를 잡지 말라 하여 방생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현재의 다리는 淸나라 때(1812년) 중건된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주가각의 수많은 다리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옆구리에 석류나무를 달고 있다.
'불망초심' 선착장에서 하선하여 주가각의 번화가로 들어섰다.
북대가는 지나는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다양한 먹을거리와 상품들을 판매하는 상점, 식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생교를 지나 흐르는 淀浦河는 淀浦湖로 이어진다. 유람선이 지나는 곳까지 古鎭이고, 더 지나면 현대화된 지역이다.
북대가의 문화를 즐기는 인파.
人氣美食. CCTV 등 여러 방송에 나온 곳이라네요.
방생교를 올라가 보는 여행객 1.
방생교 위에 주저앉은 여행객 1.
방생교 옆구리에서 잘 살고 있는 석류나무. 열매도 보인다.
星巴克 커피 가게.
자문가 구경. 자유시간~
취두부 냄새에 익숙해지더라.
북대가의 '백년다루' 문앞에는 초록색 우체통이 놓여 있다. 그냥 우체통이다. 이곳을 "청대 우체국"으로 오해하면 안되는 곳이다.
이곳은 '정신문명건설실천기지', '주가각진신시대문명실천기지' 등등 무엇인가 대단한 곳을 하는 곳이라는 여러가지 현판들이 잔뜩 달려 있는 곳이었다.
2023년 10월 20일. 강남수향고진 중 상하이에 위치한 주가각에서의 이동 경로를 뽑아보았다.
주차장에서 하차하여 과식원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입구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방생교 쪽으로 접근하다가 선착장에서 하선. 북대가를 구경한 후 자유시간에 자문가, 북대가와 방생교를 자유롭게 구경하였다. '청대 우체국'도 원래 일정에 있었지만 흘려졌다.
주가각에서의 일정에서 '청대우체국'을 흘리고 5시에 출발하여 서당, Xitang을 향해 달렸다. 5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하였다.
GEOTRIP을 통해 여러 차례 여러 곳의 여행을 즐긴 바 있다. 지난 7월에 중국의 강남수향을 돌아보는 여행 상품이 공지되었고, 2인분 참가를 신청했었다.
최종 출국 매뉴얼 받은 것을 확인해보니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추느라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의 3번 출국 앞에서 10월 20일(금) 06시 30분에 미팅 시간이 잡혀 있었다. 공항 리무진 버스의 운행시간표를 확인해보니 04시 30분의 첫차를 이용하면 미팅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까지 그 새벽에 택시를 예약하고 나갈 것을 생각하다보니 그냥 택시로 공항까지 달리는 것은 어떨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쳤다. 검색을 해보았더니 인천공항으로 미리 예약을 하였다가 이용할 수 있는 업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블로그에서 좋게 평개해놓은 업체와 연락하여 예약을 하였고, 배정된 기사님과의 확인 연락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출발일인 10월 20일 새벽에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하고 택시를 기다렸다. 제 시간에 택시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 예약된 시간 새벽 05시에 맞추어 정확하게 도착한 택시를 타고 인천 공항을 향해 어둠 속을 달렸다. 전기차의 부드러운 주행감을 즐길 수 있었다.
예약하면서 문의했을 때 요금이 6만원대 나올 것이라고 안내들 받았었다. 택시 미터기 요금에 톨게이트 요금을 더하여 지불하였다. 공항버스 요금이 1인당 18,000원이므로 두사람이 이용했을 때 이용할만 하다 생각이 들었다. 비용에 이동시간을 더하면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편을 이용할 경우에는 공항택시 쪽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오랫동안 여러 차례 GEOTRIP의 여행상품을 이용하다보니 안면을 익히게 된 분들이 참 많다. 이번 여정에도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새로 뵙게된 분들도 많았고... 가이드 포함 23명이 단체로 출발하게 되었다.
중국은 자국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에게 만국 공통이 아닌 자국의 방식을 요구한다. 비행기 표는 여행사에서 단체로 뽑았다. 그런데 '중국행 비자 확인' 코너에 모든 여행객이 직접 대면하여 확인받아야 했다.
비자 확인을 받고 '짐 부치는 곳'에 또 줄을 서서 "보내는 짐"을 처리해야 했다. 줄서서 표 끊고, 줄서서 비자 확인하고, 줄서서 짐을 발송하고...... 하여간. 절차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또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줄을 서게 만든...
다행히 짐을 부치는 곳이 너무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다고 비자 확인하는 코너에서 비자 확인 후 바로 수화물 발송 처리를 해주어 빠르게 출국 수속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사람 많더라. 출국 수속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것은 줄을 잘못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40번 게이트로 천천히 걸어갔다. 도착 시간이 8시 반. 이미 보딩이 시작된 후였다. 탑승.
보잉 B747-400(PAX) 기종이었다. 빈좌석이 꽤 많았다. 창가자리였다.
창가 자리인데 아주 안정적인 자리 자리이기도 했다. 창밖 전망은 바로 포기했다.
하지만 기내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깔끔하게 잘 나오더라. 역시 대한민국 국적기 수준은 다르다.
출발 전에 확인한 비행기의 비행 정보 서비스 자료에 의하면 목적지까지 820km 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인천공항에서 상해의 푸동공항까지 똑바로 직선코스를 그리며 날아간 것이 아니었다. 이동 궤적을 보니 선회하고 우회하여 비행거리가 1,092km라고 나오더라.
중국 입국시에 입국자 카드보다 더 챙기는 것이 건강신고서인 것만 같다. 미리 작성하지 않은 입국자는 입국 수속을 하기 전에 스맛폰을 들고 작성을 해야 한다.
개별적으로 중국에 입국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모두 작성해야 하지만 여행사를 통해 단체비자로 입국하는 경우에는 여행사에서 일괄적으로 자료를 입력하여 편리하다. 나누어준 자료를 입국하면서 제출하면 된다. 중국의 건강신고서는 입국, 출국시에 각각 따로 작성하여야 한다. 입력된 자료는 24시간만 유효하니 미리 작성을 할 필요가 없다. 아니 소용없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1시간 늦은 표준시를 사용한다. 11시에 도착하였는데 10시가 되어 있더라. 중국 입국 수속을 모두 마치는데 1시간 정도가 소요된 것 같다.
현지에서의 여정을 도와줄 가이드와 만나 확인을 하고 자기부상열차 탑승장으로 이동하였다. "Maglev" 표지판을 따라 가면 된다.
푸동공항의 자기부상열차 탑승역. 가이드가 일괄적으로 단체 표를 구매하는데, 스맛폰으로 확인받는다. 종이 쪼가리 주고 받는 것 없다.
공항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열차 탑승구 바로 앞에 커다란 가방들을 쌓아두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최고 속도가 시속 430km를 넘는다고 하던데, 우리 일행이 탑승했을 때는 시속 301km가 최고 속도였다.
푸동국제공항에서 용양로역까지 직전코스가 아니라 속도를 높이는데 한계가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버스로 1시간 정도를 이동해야 하는 거리를 자기부상열차는 7~8분 만에 데려다준다.
12시. 용양로(龙阳路, 룽양루)역을 나와 일정을 함께 할 버스와 랑데뷰하였다. 그리고 홍교공항 인근에 위치한 식당을 찾아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하였다. 상해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강인 黃浦江(황푸강)을 南浦大桥(난푸대교)를 통해 건너 서쪽으로 달렸다.
Lexiang Yueji Hotel 2층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호텔이면서 상당히 규모가 큰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여객기들이 하강하는 모습을 계속 볼 수 있었다. 예약된 자리에 앉으면 커다른 그릇에 담긴 요리가 하나씩 도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리들이 모두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20여 분만에 식사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오랜 만에 중국 식당을 방문하다보니 실수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나면 다른 '요리'를 먹을 뱃속의 용량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이후 식사에서는 유의하면서 '밥'은 먹질 않았다. 여러 해 만에 중국을 방문했더니 달라진 점의 하나가 '차'를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의아했다. 그냥 맹물을 주더라. 기름기 잔뜩 들어있는 음식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차를 마시며 목구멍 청소를 해주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아했다!!! 중국 사람들도 이제는 식당에서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일까??
중국에서 관우는 여러모로 특별 대접을 받는다. 그중의 하나가 '재신'으로 모셔진다는 것이다. 호텔 로비 한쪽에 제단이 만들어져 있더라. 재신이 강림하여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십사 하는 주인의 소망이 담긴...
길에 보이는 많은 차들의 번호판이 특이하다는 것이 눈에 들었다. 전기차라고 한다. 10여년 전에 중국 입국했을 때 전기 오토바이가 무진장 많아졌다는 것을 보고 놀랐었는데, 이제는 전기차 세상이 되어가고 있더라.
1시 44분. 버스에 탑승하여 주가각을 향해 출발하였다. G50 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주욱 달려갔다.
'오남저수지'라고 들어보았다. 같이 살아주시는 옆지기께서 나와 함께 갔었던 곳이라고 몇번을 이야기 하더라. 나는 기억에 없다!
꾸준히 걸어야 하나 지난 여름이후 걷기를 거부하고 있는 옆지기를 걷게 할 핑계로 삼았다. 저수지 주변 산책과 점심 식사의 콜라보.
오남저수지는 덕릉터널, 별내터널, 진접터널이 뚫리면서 어렵지 않게 접근 가능한 곳이 된 곳이다. 네이게이션을 통해 검색해보니 30분 대에 주파 가능한 근거리에 위치하는 곳이었다. 역시 나는 가본 곳이 아니었다.
드론 원스탑 서비스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니 안전하게 비행하면 되는 지역이라 드론도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신난다~
저수지 뚝방 안쪽의 근사한 곳에 자리잡은 식당이다. 찾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주차장도 두 곳에 마련되어 있다.
전망이 아주 그냥 좋다. 조용한 평일 오전의 모습.
식당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한바퀴 돌고 오기로 한다.
오남저수지 주위로 산책로가 아주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거리는 3.1km 정도이니 천천히 걸으면 5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중간에 드론도 좀 날려주고 했더니 1시간 10분 가까이 걸렸다. 경로 기록은 '램블러' 앱을 이용했다. 이후 PC를 이용해 웹 사이트에서 경로 확인을 하면 된다.
뚝방 안쪽에서는 분수가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람이 없어 저수지 수면이 잔잔하니 반영사진이 멋지게 만들어진다.
데크길이 깔끔하다.
보도 조성이 가능한 곳에서는 땅을 밟으며 간다.
저수지 상류 쪽 경관.
인도교를 통해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
중간 중간 이동 거리를 확인해볼 수 있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고가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오남리 사람들은 좋겠다. 이렇게 잘 조성된 깔끔한 산책길을 매일 즐길 수 있다니...
저수지 안쪽으로 공포의 스카이워크도 설치되어 있다. 지리는 공간이다.
그곳을 '달의 정원'이라 하더라.
달을 깔고 앉아 쉬다 갈 수도 있다.
달의 정원에서 드론을 띄웠다.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날아오르게 할 수 있다. 드론 조종에 필요한 '무인동력비행장치 4종' 교육수료증도 받은 경력자이다.^^
그런데 날아가던 드론의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면서 사진을 만들어볼까 했는데 레버를 몇번이나 이리저리 움직여도 카메라 각도 조절이 안되는 것이었다. 아뿔싸!!! 경력자는 무슨, 개뿔!!! 드론의 카메라 짐벌 보호를 위한 캡을 떼지 않고 드론만 날린 것이었다.ㅠ.ㅠ
날아갔던 드론을 불러와 착륙시키고 캡을 제거하고 다시 날렸다. 얼레! 그래도 카메라 각도 조절이 안된다. 아무래도 목디스크에 걸린 모양이다.
드론이 움직이면서 각도가 변할 때를 노려 사진 몇장을 살릴 수 있었다. (새 드론을 사달라고 조를 수 있는 찬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으로는 웃음이...)
오늘의 점심 식사 장소로 점찍은 장소를 찍어보았다. 장사가 잘될 수 밖에 없는 입지이다.
건물은 허름하다.
식당 내부. 근사하다.
연세가 꽤 되어 보이는 메뉴판. 솔잎밥상에 도토리묵을 추가했다. 이제는 '취할거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건물 내부 뿐만 아니라 바깥 쪽에서 여러 좌석이 준비되어 있다.
식탁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메뉴가 다 나온 다음에 사진을 찍고 식사를 시작하는 것이 '인증계의 법도'이나 인간계의 범인은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 후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집으로 가면...
빵을 또 먹을 수있다. 우와~ 식당에서 식사했다는 영수증을 보여주면 10% 할인해준다. 우와~~~
임시 베이스 캠프였던 고창으로 달려왔다. 어느 틈에 저녁을 먹어도 되는 시간이 되어 식사할 곳을 찾아들었다. 고창 분의 추천 맛집.
1인당 한마리씩!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장어는 처음 보았다. 게다가 맛도 너무 좋았다!!!
3일 연휴였던 터라 고속도로를 통한 귀경길이 매우 심각하게 막힐 것을 예상하였다. 그러한 도로를 운전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터라 아예 그냥 중간에 하룻밤 쉬고 귀가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하면서 네비게이션으로 확인하니 정체구간이 거의 없는 것이었다. 정체였다면 장어 요리를 먹을 때 반드시 곁들여야 하는 아름다운 음료와 함께 했을 텐데...
일행과 이후 일정을 논의하고 헤어졌다. 고창을 출발하여 휴게소에 들러 소나타에게 먹이를 잔뜩 채워주고는 달렸다.
우이도에서부터 서울까지 512km를 이동하였다. 고창읍성 앞에서 3시간 반 정도만에 귀가하였으니 좀 날았던 것 같다. 피곤하였기에 집에서 푹 쉬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서 그러했던 것 같다.
이후 드론을 활용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다. 안건이 발의되면 엄청난 추진력으로 바로 밀어붙이는 멤버가 있어 가능한 일이겠다. 그래서 11월 언젠가 2차 모임이 추진된다. 새로운 멤버를 꼬시기 위한 전략도 논의되었다. 11월을 기다린다. 10월이 지나면 오겠지??
도초 여객선터미널에서 우이도를 향하는 배편이 6시 20분에 출발한다 하였다. 그래서 일찍 서둘렀다.
숙소였던 수국민박에는 새벽비가 내린다. 시원허다.
도초여객선터미널에는 불이 환하다.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없다.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우이도에서 사용할 짐을 챙겨들고 승선한다.
선권을 제출하고 '섬사랑 6호'에 승선하였다. 스맛폰 카메라 성능 좋다. 비가 내리는 어움 속에서 출입구의 불빛만 보고 찾아갔었는데, 이런 사진을 만들어주다니...^^
승선 후 여객선 선실의 모습.
도초도를 지나면 외해라 할만 하지만 파도는 없었다. 잔잔한 바다를 주욱 미끄러지면서 이동하였다.
도초항에서 돈목항까지 20.4km를 65분 만에 이동하였다.
6시 52분. 멀리 있던 우이도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구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성촌해변 쪽의 모습이다.
우이도의 돈목항으로 접근하면서 그 이름도 유명한 "우이도 풍성사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2박3일의 여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나서 반갑구나.^^
그런데 사구의 아랫 부분이 움푹 꺼져 있다. 붕괴된 것이다. 어쩌쓰까...
돈목항에서 모두 하선하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우이도 상륙 기념 사진.
민박집 사장님께서 화물차를 동원하여 우리 짐을 옮겨주셨다.
우이도의 일반 현황에 대한 현지 가이드의 상세한 안내.
과거 우이도의 돈목마을에서 사용하던 우물이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만들고 물이 귀한 섬에서 물이 마구마구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우물의 이름을 湧溢泉이라 하였다.
'슈퍼'는 없지만 '우이슈퍼 민박'이다. 숙소가 가장 깨끗한 민박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다른 민박집보다 비싸다. 예약했던 팀이 날이 안좋다고 하루 일찍 떠나면서 생긴 빈 자리를 우리 팀 가이드가 찾아내서 예약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의 짬을 이용하여 동네 한바퀴를 돌아보기로 했다. 큰 마음을 먹고 커다란 숙소를 지어 돈목의 숙박업을 독점하려 시도했다가 여러 이유로 포기한 흔적이란다. 꽤 공사가 진행된 상태였던 것 같은데...
돈목 해변을 지나 건너편으로 '풍성사구'가 예쁘게 보인다. 기다려랏!
돈목해변의 사빈에서 내륙 쪽으로 모래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목해변에는 드론 이착륙장이 큼지막하게 건설되어 있다.
돈목마을에서 예리마을로 이어지는 이정표. 길에서 만난 여행객이 예리마을까지의 트래킹 코스를 '강추'하더라.
어느 탐방객의 뒷모습.
우이도에서 만난 아침상. 우~~~~~~~~~~~와~~~~~~~~~~~~~~~
아침식사 후 쉬다가 9시에 우이도에서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오전에 돈목마을을 출발하여 대초리고개를 넘어 진리까지 다녀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풍성사구'는 아끼고 아껴 오후에 답사를 진행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돈목에서 대초리고개, 몰랑 고개까지 거의 직선상으로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거기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예상보다 진리까지의 이동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른 트래킹 꾼들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호기심을 해결하려 하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드론도 만지작거리다 보니 많이 늦었다.
그래서 중간에 돌아가는 안과 진리에서 선편을 이용해 돈목으로 이동하는 안을 비교하다가 만장일치로 "배"를 선택했다. 민박집에 예약되어 있던 점심을 취소하고 진리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진리에서 출발하여 돈목으로 향하는 선편은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를 거쳐서 운항하였다.
우이도의 걷는 길의 이름은 "달뜬몰랑길"이다.
"달뜬몰랑길" 지도.
10월 8일의 탐사 일정을 "계획대로" 힘차게 시작하였다.
해변에 모래가 깔리면 '사빈', 혹은 '해빈'이라 부른다. 넓게 모래가 퇴적된 지형이다. 내륙 쪽으로 바람에 날린 모래가 퇴적된 지형은 '사구'이다. 돈목해변의 사빈과 사구.
해수욕장 운영을 위해 설치했던 가로등이 모래에 매몰되었다. 장신의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사구가 형성된 것이다. 사구 위에 식생이 정착하면 사구 지형은 안정되게 된다.
사빈에서 사구 위로 올라서면 달뜬몰랑길로 접어들게 된다.
가로등 꼭데기까지 손이 닿을 정도로 키가 큰 거인!!!
골짜기 바로 옆으로 상산봉을 향하는 탐방로가 이어진다. 겨우 2.8km 밖에 안된다. 가즈아~~
홍게의 환송을 받으며 국립공원으로 접어든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런 길이 아니다. 일관된 길이다. 그냥 쭈욱 올라간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위치를 사진으로....ㅠ.ㅠ
가파른 1km 길을 계속 오른 것이다. 장하다. 대초리고개에 도착하였다.
산 아래에서 상산봉까지 2.8km라는 표지판을 보고 올라왔다. 1km를 왔다 그런데 상산봉이 2.2km가 남았단다. 산수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혼란하다. 무리하게 산을 올라 머리 속이 혼란한데....
습하여 식생이 아주 무성하다. 길 찾기가 어렵다. "탐방로" 표지판이 익숙치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초리"는 우이도의 내륙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지금은 완전히 버려진 공간이다. 대초리가 '대초리'였던 시절 사용했던 우물이다. 찾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황폐한 모습을 보인다.
이정표.
마을의 담장 흔적. 과거의 대초리에 대나무가 너무나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또 오르막길이다. 나만 저질 체력~
진리에서 돈목, 우이 1구에서 우이 2구 사이의 도로 건설을 위해 개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공사가 중단된 상태. 상산봉을 오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진리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저 아래 쪽이 진리이다. 가즈아~
거의 다 내려왔다. 인류 문명의 흔적과 만난다. 우이도의 상수원으로 이용되는 저수지이다.
도로 건설을 위해 개착했던 흔적이 노두로 남아 있다.
길가에 정약전 서당터라는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만 있다.
진리로 내려가는 길 옆으로 띠밭넘어해변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빠졌다.
돈목에서 넘어온 탐방로에 비하면 너무도 아름다운 길이다.
능선에 오르면....
반대편 사면 아래로 멋진 해변이 나타난다. "띠밭넘어해변"이다.
멀리부터 걸어온 피곤한 탐방객을 위하여 예쁜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입었던 잠바와 바지에 의도치 않은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어 깜짝 놀랐다. 무서운 벌레~
아무도 없는 깔끔한 해변이 펼쳐져 있다.
가위, 바위~ 보! 이겼다~~~
짐을 챙겨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30여 명 정도의 단체 트래킹 멤버들을 지나쳐 내려와 진리로 들어서니 도처에 돌담이 보인다. 제주도의 돌담과 신안군의 돌담을 비교 분석한 연구가 있었는데...
우이도는 손암 정약전 유배 적거지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냥 이곳이 그랬을 것이라는...
진리항에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정약전, 그는 무엇을 기대하였던 것일까...
정약전 유배지를 답사하는 탐방객들.
옛마을 예리 마을은 돈목 마을에서도 진리 마을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온동네가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백서향이다.
우이도 하면 홍어장수 문순득으로 유명하다.
흑산도에서 표류하여 필리핀까지 갔다 생환한 사람이라 한다. 그 기록을 '표해시말'에 남긴 바 있다.
진리항 선착장에서 문순득 아저씨를 만나볼 수 있다.
우이도의 시스템은 민박집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하한 사정으로 인하여 다른 민박집에 식사를 부탁한다? 안된다! 진리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해결하려 했을 때 부딪힌 문제가 그것이었다. 심지어...
수퍼에서 컵라면을 판매하지만 뜨거운 물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 이장님 댁에 부탁하여 뜨거운 물을 얻고 수퍼에서 컵라면을 구입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뜨거운 물 뿐만 아니라 김치, 국물, 밥까지 제공해주셔서 너무도 고마웠다. 우이1구 이장님&사모님 만세~
그리고는 진리항 선착장에 나가서 놀았다.
진리항 선착장 안쪽에 특이한 시설이 있다. 이 접안 시설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우와~~~
열녀비가 아담하다. 열녀비각 안쪽에 한마리 고양이가 세월을 즐기고 있다.
선창가의 드론맨들~~~ 드론을 날리지 않고 들고서 놀다니~~~
드론과 함께 놀기~~~
연식이 좀 된 드론이다 보니 종종 조종자를 난감하게 한다. 잠시 드론이 조종기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바람에 난감했다. 배터리를 바꾸어주니 정상 작동.
놀다보니 '섬사랑 6호'가 접안하였다. 서둘러 표를 제출하고 탑승한다.
진리항을 떠나는 여행객.
돈목항에 도착하였다. 금방이다.ㅎ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 4시 경에 "풍성사구"로 향했다.
우이도의 풍성사구를 바로 밟고 오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정해진 탐방로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탐방로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풍성사구'를 향하는 탐방로 전체가 모래 퇴적으로 이루어진 사구 지형이다.
모래 세상 속으로, 가즈아~~~
돈목해변 방향을 배경으로 셀피를 남겨보았다.
우이도의 풍성사구는 외관으로 보이는 약 50m 높이의 등반형 사구 그대로 그만큼의 모래가 쌓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능선의 낮은 부분에 모래가 덮여 있는 것이다. 북쪽 사면은 기반암이 드러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산지 능선 위에 이동된 모래가 두껍게 퇴적되어 만들어진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돈목해변 방향으로 쌓인 모래는 경사가 급하여 불안정한 상태이다. 따라서 사구 보호를 위해 이쪽 방향에서의 등반은 금지되어 있다. 지난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서 상당 부분의 침식이 붕괴된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대사구의 붕괴 구간의 모습.
성촌해변 방면을 바라본 사진이다. 해변으로부터 북풍 계열의 바람이 불 때 모래가 날려올라온 흔적이 사구 표면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보인다. 성촌해변에 쌓인 모래가 바람에 의해 돈목해변으로 날리면서 형성된 '풍성사구'인 것이다.
우이도 사구지대는 우이도의 북서 방향으로 열려있는 성촌해변에서 배후사면으로 이어지는 사구와 서쪽방향으로 여려있는 돈목해변에서 배후사면 방향으로 퇴적된 '대사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당 부분이 식생으로 덮여 있으며 일부 구간만 모래 지형이 드러난 상태이다.
(출처: 2016 전국해안사구 정밀조사_우이도 사구, 40)
우이도 사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5,000년 전까지 빠르게 확장하였고 현재는 퇴적 현상이 느려져 사구의 침식 또는 해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성촌 대사구 남측에서 채취된 퇴적물의 연대 측정 결과 최근 200년 이내에 퇴적된 것으로 나타나 상당히 최근까지도 사구 지형이 활발하게 발달한 것으로 보이며, 사구를 구성하는 모래입자들은 대부분 성촌 해안에서 북서풍에 의해 운반, 퇴적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래를 공급하던 성촌 해변 쪽 사구에 식생이 정착하면서 추가적인 모래공급이 제한되면서 사구가 안정된 상태를 보이고 있으나 식생으로 보호되고 있지 않은 사면의 모래만 바람에 날리면서 지표가 제거되어 기반암이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1945년 이후 항공 사진을 통해 사구 변화를 추적한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성촌해변 쪽 배후산지의 모래 사면이 관찰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식생에 의해 완전히 피복되면서 모래 퇴적 지형이 관찰되지 않고 있다. 바람은 그대로인데 모래가 드러난 부분이 한정되어 있으니 집중적으로 풍식 현상을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풍 계열의 바람이 부는 여름철에는 돈목해변 쪽의 모래가 성촌해변 쪽으로 일부 날려 이동하기는 하지만 겨울철의 북풍 계열 바람의 영향과 비할 바는 되지 못할 것이다.
1972년과 1994년의 항공사진을 비교하면 사구 정상 부위의 침식이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는 사의 높이가 70~80m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현재는 약 50m이니 많은 침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구 일대(현지 주민들은 '산태'라고 부른다.)의 나무들을 땔감으로 이용하던 시절에는 자연스럽게 사구 표면의 식생이 제거되어 바람에 의해 지형 형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화목의 채취를 금지한 이후 식생이 빠르게 늘어나 오히려 사구 지형을 파괴하게 된 것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증언한다.
(참고: 광주타임즈, 신안 우이도 동양 최대 "풍성사구" 훼손 원인은, 2020.11.3.)
우이도 풍성사구의 형태와 형성 원인 및 변화 양상을 파악한 의미있는 답사였다고 자부한다. 그 성과를 나누며 즐거워 하는 답사대원들.
성촌해변의 사빈의 넓이는 상당히 넓다. 만조시에는 20m 정도이지만, 간조시에는 100m 이상의 폭이 사빈으로 노출된다. 배후 산지에 모래를 마구마구 공급할 수 있는 원천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성촌해변의 쓰레기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성촌마을에서는 성촌해변에서 이동해온 모래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마을 자체가 성촌사구 위에 입지하고 있다.
돈목해변을 맨발로 걸으며 발바닥의 피로 회복을 시도해보았다.
노는 것은 역시나 즐겁다. 노는 사람들...
노느라고 수고한 사람들에게 과분한 저녁 밥상이 주어졌다. 야으~~호!!^^
저녁 식사 후에 돈목마을의 유일한 가게인 고향슈퍼의 물가 상황을 체크해보았다.
그리고 숙소로 귀환하여 빨랫줄에 매달린 물고기처럼 늘어져서 휴식을 취하였다. 긴 잠에 빠졌다.
힘든 하루였다. 즐거운 하루였다. 유익한 하루이기도 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 또 있을까...
지인들 몇 명이 함께 10월초 연휴에 신안군 우이도의 풍성사구 답사를 떠나자는 제안을 받았다. 드론과 함께 하는 그런 답사였다. 무료 나눔받은 드론이 하나 있어 그 모임에 달라붙어 우이도를 다녀왔다.
우이도의 "풍성사구"에 대해 검색을 하다보니 '가을로'라고 하는 영화의 배경을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블루레이 매체로 출시가 되었는가 알아보니 블루레이는 없고 DVD로만 오래 전에 출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독판으로 확보하여 감상해보았다.
우이도의 풍성사구는 영화의 초입에 잠깐 등장한다. '風成' 사구다. 바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사구라는 의미의 용어이다. 그런데 사구는 기본적으로 바람의 퇴적작용으로 만들어진 지형인데, 거기에 '바람으로 만들어진' 이라는 수식어가 왜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풍성사구"라는 독특한 단어는 우이도의 사구에만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검색어가 그리하다 보니 관광객의 관심을 끄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참여 멤버들의 서식지가 서울, 안산, 전주, 광주로 흩어져 있다보니 중간 랑데뷰 장소로 고창이 선택되었다. 고창읍성 앞에 넓직한 주차장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모임의 주모자가 고창군에서 '여백의 길' 걷기 모임의 핵심 맴버이라는 것도 위치 선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0월 7일 토요일 아침 10시에 고창읍성 주차장에 모이기로 하였다. 집에서 길찾기 프로그램에게 물어보니 4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나온다. 5시쯤에 출발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4시 반에 알람을 걸어두었다가 일어나 확인하니 3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나와 여유를 부렸다.
5시 10분 쯤 집에서 나와 도로에 가득한 차량들의 흐름을 보며 놀랐다. 정체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차량으로 가득 차서 도로가 움직이는 듯 보였다. 제2중부 고속도로의 마장 휴게소 즈음 오니 도로에 여유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창휴게소에 6시 40분 쯤 도착하여 정비하고 몸을 풀고,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하늘을 보며 휴식을 취하였다.
열심히 달렸다. 호남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8시 20분 경 이서휴게소에서 두번째로 휴식을 취하였다. 날이 맑지 아니하면 드론을 어찌 날리나 하는 걱정을 하게 하는 하늘님이시다.
일찍 도착하였다. 9시 20분 쯤 고창읍성 주차장에 주차하고 드론을 올려보았다.
고창읍성인 모양성은 언제 보아도 참 예쁘다.
먼저 도착한 멤버들끼리 모양성을 들어가보았다. "고창방문의 해"라서 입장료가 없을 줄 알았는데, 받고 있었다. 대신 같은 액수의 고창군 지역상품권을 준다. 공짜나 마찬가지다.
모양성 안쪽에 세워져 있는 척화비와 오랜 만에 재회하였다. "奉敎 이동석 현감 立"
고창읍성의 안쪽 경관. 아늑한 느낌 풀풀...
10시 반쯤 모든 멤버가 집합하였다. 원래 계획에서는 '상담부두'에서 아점을 먹는 것이었는데 공사 중이더라. 부근의 다른 식당에서 맛있는 순두부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차량 두대에 나누어 타고 신안군으로 달렸다. 일단 자은도의 면전해변을 답사하고 남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비금도의 가산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비금도에서 타포니 지형을 잘 보여주는 덕산을 드론으로 살피고 도초도로 이동하였다. '자산어보 촬영장'을 방문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일찍 푹 쉬었다.
천사대교를 건너 암태도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은암대교를 건너 자은도로 들어가 면전 해변에 깔린 모래포집기 경관을 드론으로 포착해보았다.
드론으로 하늘에서 내려다 본 면전해변의 모습. 재봉틀로 해안선을 따라 오바로크를 친 것 처럼 보인다. 그것이 모래포집기 시설이다.
해변의 모래가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만들어진 모래포집기가 안보일 정도로 모래가 채워져야 할 것인데 잘 안되는 모양이다.
2021년 5월 18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안보인다. '모래포집'이 과연 되는 것일까?
왔다 갔다는 인증 셀피 하나 남겨보자.
다른 곳을 더 답사할 시간은 있었지만 뱃시간을 놓치면 많이 일정이 어그러지는 고로 일단 남강 선착장으로 향했다. 배와 버스를 환승하는 '버스환승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한장의 표를 이용해 두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하기에 '환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지 궁금하다.
승선권을 구입하고 찻집에서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연출해본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선박인 것으로 보인다.
남강에서 가산까지 섬들 사이를 요로케 지나서 갔다. 13.2km를 45분 정도에 날았다. 파도가 약하고 바다가 잔잔한 편이었는데, 내해라는 위치와 함께 조차가 한달 중 가장 작은 '조금'날이라 조류의 흐름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카더라.
비금도의 가산 선착장으로 접근하고 있는 섬드리비금고속페리호.
선착장의 주차장을 장식하는 조형물들.
비금도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동염전 부근에 위치한 덕산, "떡메산 혹은 떡뫼산"으로 향했다.
덕산이 떡메산이라 불리게 된 사연을 기록한 석물이 떡메산 바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일단 나의 인증 사진부터 만들고 시작하자.
떡메산 바로 아랫녁에는 경지가 개간되어 있고 스프링클러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떡메산의 전경. 정상의 해발고도가 81m인 야트막한 산이지만 주변이 모두 저평하여 우뚝 솟아 있는 느낌을 준다.
비금도는 유천층군에 속하는 백악기 산성 응회암 및 제4기 충적층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응회암 산지의 이곳 저곳에 구멍이 뻥뚫려 삿갓처럼 보인다 하여 삿갓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위 표면이 움푹움푹 파여 있어 전형적인 타포니 지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타포니는 풍화작용에 의해 수직절벽이나 경사면의 암석층에 패여 들어간 소규모 공동(空洞)을 지칭하는 것으로, 염풍화(salt weathering)와 함께 바람, 온도, 습도 등의 기후조건, 광물 및 암석학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형성 원인과 관계없이 형태적인 의미에서 타포니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타포니는 원래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암석의 측면부에 발달하는 구멍형태의 풍화혈을 지칭하는 것으로, 코르시카어로 ‘구멍투성이’이라는 뜻을 가진 타포네라(tafonera)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떡메산 너머에는 대동염전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대동염전은 증도의 태평염전과 함께 2007년 11월 등록문화재(제362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염전은 거의 보이지 않고 태양광 패널로 채워져 있는 신기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제는 소금이 아니라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비금도에서 서남문대교를 건너면 도초도로 넘어간다.
팽나무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는 환상의 정원을 지나 달린다.
그 길로 계속 진행하면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에 도착한다.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섬이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우이도이다.
흑산도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데 흑산도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 도초도에서 촬영했다니....ㅎㅎ
영화 속의 한 장면.
유명한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라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그런 유명한 곳에 왔으니 또 인증을 해 두어야 한다.
도초 여객터미널 앞에 자리잡은 유명한 식당을 찾았다. 간재미회무침과 장어탕으로 속을 가득 채웠다.
어둠이 내린 도초도. 해가 떨어지면 어둠만 내려야 하는데 비도 내리더라. 그래서 숙소를 찾아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는 도초항 인근의 수국민박.
17세기 후반부터 계몽사상이 확산되어 사람의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18세기 들어 절대 왕정의 쇠락과 동시에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신과 왕의 권위를 두려워하던 사람들이 점차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어 새로운 시대, 새로운 그림은 종교와 사상을 담는 매체를 넘어 개인적 목적을 위해서도 활발히 제작되었으며, 개인의 경험을 기념하고 추억하는 그림이 많이 그려지면서 화가의 시선은 개인의 삶으로 향하게 되었다.
18세기는 그랜드 투어의 시대였는데, 부유한 집안의 젊은이들이 엘리트 교육의 마지막 단계로 유럽, 특히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문화적 현상이었다. 그랜드 투어에 이어 여행이 유행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것을 중시하는 낭만주의가 전해지면서 풍경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29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 ─ 안토니 반 다이크
두 사람의 자세와 옷은 모두 이들의 부유함, 세련됨 그리고 높은 신분이 돋보이도록 계산된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구도를 택하여 두 사람이 내려다보게 된다. 레녹스 공작가의 두 아들은 1639년에 하인 6명과 함께 100파운드의 돈을 들고 3년간 해외 여행을 허락받았다. 이 초상화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안토니 반 다이크는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루벤스와 더불어 17세기의 중요한 플랑드르 화가 중 하나이다. 그는 특히 초상화에서 부유한 고객들이 입고 있는 고급 직물의 반짝임을 숨 막히도록 아름답게 마감하는 능력으로 인기가 높았다.
30 베네치아 카나레조 입구 ─ 카날레토
카날레토는 베네치아의 모습을 세심하게 그린 감상적인 풍경화로 유명했는데, 자세하고 정확한 카날레토의 그림을 좋아하던 영국인들이 당시 유행한 그랜드 투어 기념품으로 사서 영국으로 많이 가져갔다. 여행지에 가서 기념엽서를 구입하는 것처럼. 작품 수요가 많아지자 카날레토는 잘 조직된 공방을 운영하며 인기 많은 작품 중 몇 점을 골라 여러편 제작하도록 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카날레토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하여 작품을 그리기 위한 드로잉을 꼼꼼하게 준비하였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작은 구멍을 통해 대상을 비추어 화폭에 반사시키는 장치로 풍경을 보고 그자리에서 그대로 옮겨 그릴 수 있었다. 이렇게 그린 드로잉을 토대로 작업실에서 그림을 구성하였는데, 약간씩 변형하여 여러 점의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31 베네치아 카스텔로의 산 피에트로 ─ 카날레토(조반니 안토니오 카날)
산 피에트로는 베네치아 동부의 작은 섬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고 상인이나 노동자들이 바쁘게 일하는 조용한 지역이었다. 카날레토 이전에 베네치아 풍경을 담은 화가들은 대개 큰 행사 장면을 많이 그렸으나 카날레토는 일반인들의 일상을 아름답고 품위있게 그려내어 여행 기념품으로 매우 매력적이었다.
32 어부들이 있는 강 ─ 클로드 조제프 베르네
베르네는 아비뇽 출신으로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풍경화가였다. 클로드 로랭과 푸생의 전통을 잇는 평화로운 이탈리아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했으며, 폭풍과 달밤 풍경을 잘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이 그림은 여러 개의 대각선으로 구도가 구성되어 있다. 강 양쪽의 높은 절벽은 연극무대의 양끝과 같은 역할을 하여 구불구불한 강과 함께 그림 속 풍경이 멀리까지 이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베르네의 뛰어난 공기 원근법으로 거리감이 더 강조되었으며, 먼 곳을 볼 때 색채와 형태를 보는 시선이 대기의 영향을 받게 됨을 잘 표현하였다.
33 존 스콘(추정) ─ 폼페오 지롤라모 바토니
폼페오 지롤라니 바토니는 18세기 로마에서 초상화가로 유명했다. 그는 특히 그랜드 투어 중 로마에 들른 영국 귀족들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다. 바토니는 그림의 단순한 배경에 그림자를 넣어 대각선 구도가 두드러지게 하여 스콧이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로 시선을 이끌었다. 이러한 구도를 만드는 것은 역시 고급스러운 옷감을 표현하는데 뛰어났던 16세기 초상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가 즐겨 활용했던 장치이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의상의 정교한 묘사와 인물의 얼굴 표현 모두가 시선을 끈다. 그리하여 그랜드 투어 중인 영국인 사이에서 바토니의 초상화는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34 기사를 맞이하는 여인 ─ 피에트로 롱기
피에트로 롱기는 이 작품처럼 18세기 베네치아 실내에서 보내는 일상에 약간 풍자를 담은 작은 크기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안주인인 우아한 여인이 한 멋진 신사를 맞이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멋지게 성장을 한 두 사람 위에 그림 속에는 비너스옆의 큐피드가 화을 내려놓고 있다. 화살을 이미 쏜 것이다. 그림 속 그림에는 성욕을 상징하는 신인 판의 모습도 보인다. 자기 일감은 던져 놓은 게으른 귀부인과 그녀를 유혹하는 신사의 모습은 당시 상류층의 비도적인 행동을 풍자하는 것으로 이런 그림은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하던 것이었다.
35 여인(마담 드 글레옹 추정) ─ 장 바티스트 그뢰즈
푸른 비단 망토를 입은 여성이 석조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다. 1750년대 프랑스에서 유행한 머리 스타일인 '테트 드 무통(염소의 머리)'을 하였는데, 줄지어 땋은 곱슬머리가 특징이다. 그림 밖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편안한 표정과 자세는 격식을 덜 차린 것을 선호했던 이 시기 프랑스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컷워크 레이스로 만든 섬세하고 화려한 소매가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그뢰즈는 당시 유력한 귀족들의 초상과 어린아이들의 감정적·지적 발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그림들로 잘 알려져 있다.
36 이사벨 데 포르셀 부인 ─ 프란시스코 데 고야
고야는 18세기 후반 스페인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이자 판화가로 궁정화가로 일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고야의 뛰어난 초상화 중 하나로 여겨졌다.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녀가 입은 옷은 전통적으로는 낮은 계급 여성들인 마하(maja)의 복식이엇으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는 스페인의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검은색 물감을 이리저리 발라 표현된 레이스 숄의 투명함에서 고야의 뛰어난 재능을 볼 수 있다.
1980년에 촬영된 X선 영상을 보면 이 그림은 웨이스트코트와 줄무늬 재킷을 입은 한 남성의 초상화 위에 덧그려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캔버스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주문자의 상황도 갑자기 변할 수 있어 캔버스를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37 의사 랄프 숌버그 ─ 토머스 게인즈버러
게인즈버러는 원래 풍경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가족이 생기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부유한 상류층 고객들의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고자 반 다이크가 그린 초상화의 유려한 붓질, 우아한 포즈와 고급 옷감 등의 감각적인 표현을 연구하여 숙명의 라이벌인 조슈아 레이놀즈와 함께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가 되었다. 게인즈버러는 바스에 있는 동안 자신의 건강 문제를 상담해주고 자꾸만 재발하는 큰딸의 정신질환을 진료해준 의사 4명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은 진료비 대신 그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숌버그의 진단은 오진이었으며 후일 교회 모금함에서 돈을 훔치다가 발각되어 바스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38 찰스 윌리엄 램튼 ─ 토머스 로렌스
로렌스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화의 하나로 낭만주의의 대표 작품을 여러 점 그려냈다. 조지 3세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으며 기사로 서임받기도 했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한데, 이 그림은 특히 로렌스의 걸작으로 꼽히며 1967년 영국우표에 실린 최초의 그림이 될 정도가 인기가 높았다. Red Boy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존 조지 램튼 백작의 주문으로 1825년 그의 아들 찰스 위리엄 램튼의 6~7세 무렵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안타깝게도 찰스 램튼은 13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The Red Boy 우표는 이렇게 나왔다. 구글에서 검색한 이미지이다.
39 로버트 퍼거슨과 로널드 퍼거슨(활쏘는 사람들) ─ 헨리 레이번
헨리 레이번은 거의 초상화만 그렸던 화가이다. 더 크게 성공하려고 런던으로 가는 대신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에서만 활동한 최초의 화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레이번이 활동한 초기에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높여준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계몽주의의 전파로 고전주의와 고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사상과 미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림 속의 형제들도 당시 재유행하며 품위있는 취미로 여겨진 궁술을 즐기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다. 이후 두 형제는 후에 왕실 궁수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40 기도대 앞에 무릎 꿇은 소녀 ─ 데이비드 윌키
스코틀랜드의 화가 데이비드 윌키가 그린 이 작은 초상화는 풍부한 색감과 화가의 뛰어난 기술로 깊은 인상을 준다. 그림 속 소녀는 멀그레이브 백작의 4남5녀 중 오거스타 핍스의 12세 때 모습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화가 그려진 1813년 오거스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림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죽은 딸을 추모하려고 주문한 그림일 것은 아닐지...
41 성 우스술라의 출항 ─ 클로드 로랭
클로드 로랭은 프랑스 북동부 로렌 공국 출신으로 1628년경 로마에 완전히 정착하였다. 이 그림은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비서실장 파우스토 폴리의 주문으로 그려진 것으로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던 브리튼의 공주 우르슬라의 순교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클로드 로랭은 18~19세기 풍경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주들이 저택의 정원을 클로드 로랭의 그림 속 풍경과 유사하게 작업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42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의 한 명인 터너는 낭만주의 시기 회화, 판화, 수채화 등을 그렸다. 그는 그림의 중심 구성 요소로 색채와 대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큰 붓으로 물감을 칠해 '빛의 화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의 헤로와 레안드로스 이야기를 표현한 것인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이 시로 쓴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터너는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균형을 갖춘 구도, 표현적 색채의 사용 그리고 대기의 효과에서 영감을 얻었다.
43 머큐리와 거짓말쟁이 나무꾼이 있는 풍경 ─ 살바토르 로사
정직함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나뭇꾼의 은도끼, 금도끼 이야기이다. 그림에서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구름이 가득한 하늘아래 부서진 나무와 우거진 풀숲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장엄한 풍경이다. 로사는 이 시기 격정적인 풍경화에 관심을 가졌고 1661년 베네치아 여행에서 영향을 받아 빛과 색채를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빠른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로사의 작품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44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 ─ 존 컨스터블
컨스터블은 주로 자신이 태어나고 활동했던 서포크의 모습을 많이 그렸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처럼 고향의 일상 풍경 속에서 아름다움과 위엄을 찾았다. 영국의 미술 수집가들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풍경을 선호하였지만 컨스터블은 사랑하는 고향 서포크가 점점 산업화되어 완전히 변하기 전에 그 풍경을 기록하고 싶어 자신이 잘 아는 장소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그림의 공장은 스트랫퍼드 세인트 메리 마을의 외곽 스투어 강에 있는 섬 위에 지어진 수력을 이용하는 종이공장이었다. 아쉽게도 컨스터블이 생존했던 당시에는 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Ⅳ 인상주의, 빛나는 순간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등장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관심은 산업 혁명으로 근대화된 도시의 변화된 모습과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으로 옮겨졌다. 사진의 등장으로 화가는 대상의 사실적 묘사에 집중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튜브 물감의 발명으로 야외에서도 자유로운 작업이 가능해졌다. 인상주의자들은 이러한 자유를 만끽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화폭에 담고자 하였다. 이제 르네상스 이후 이어졌던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서 벗어서 화가의 눈에 보이는 독창적인 색채나 구성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화가들이 미술의 새로운 주제와 표현 방식을 선택하게 된 원인은 당시 미술시장의 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부와 권력을 갖게 된 신흥 중산층이 새로운 미술품 구입층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유통되었고, 미술 시장에서 작품이 팔리려면 화가 개인의 독창성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더욱이 사진이 등장하면서 화가는 그림에 사실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를 더해야 했다. 인상주의의 등장이었다.
45 작업실의 난로 ─ 폴 세잔
그림은 파리라는 도시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궁핍한 삶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실제 세잔은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림은 세잔의 초기작으로 화실에 있는 물건들을 보이는대로 그린 정물화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세심하게 배치하고 그린 작품이다. 세잔은 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정확하게 기록하고자 하였으며 푸생 그림의 특징인 영속성 있는 고전적 구성과 자신이 실제로 관찰한 자연의 모습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사물의 형태와 색을 단순화해 질서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었는데, 19세기말의 인상주의와 20세기초의 큐비즘 사이에서 가교 노릇을 화가로 평가된다. 큐비즘은 피카소가 대표적.
46 와인잔 ─ 존 싱어 사전트
존 싱어 사전트가 이 그늘진 정자를 그린 것은 겨우 열아홉 살 때였다. 그림은 가볍게 그린 느낌이지만 구성에 매우 공을 들였다. 대각선 여러 개와 서로 대조적인 표면이 그림을 나눈다. 사전트는 특히 빛이 비치는 모습과 다양한 재질과 질감 위에 떨어지는 빛의 효과에 관심을 가졌다. 빛의 효과에 대한 깊은 관심과 물감을 잔뜩 바른 캔버스에 바로 칠하는 유려한 붓 사용법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47 기울어진 나무 ─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1860년대 초반 카미유 코로는 평화로운 호수와 그 옆에 자작나무가 있는 이 풍경과 유사한 그림을 여러 번 그렸다. 이 작품에서는 나무들의 형태만 남겨 도식화하였고 전체적인 구성에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화면은 아주 작은 붓 터치들로 채워져 반짝이는 듯한 효과를 주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형태가 흐릿하게 사라진다. 이러한 표현법과 회색과 초록색으로 제한된 색채의 사용은 이 시기 코로 화풍이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48 목욕하는 사람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후 고전적 전통을 따르는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짧은 붓 터치와 보색으로 대상의 빛과 움직임을 표현했다. 르누아르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섬세하고 우아한 양식에도 강하게 끌렸다. 이 시기 그의 화풍은 선을 강조하는 고전적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나 이 그림에서는 번진 듯한 느낌을 붓으로 표현하여 모델과 그녀 주변 풍경이 더 감각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49 카페 콩세르의 한구석 ─ 에두아르 마네
마네는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리기를 선호하고 근대 삶의 모습에서 주제를 택하는 등 일반적이지 않은 작업을 하였다. 카페 콩세르는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담배와 술을 즐기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가벼운 노래와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던 곳으로, 특히 인상주의와 관련있는 예술가들과 문필가들이 만나던 장소이기도 했다. 마네는 술잔 여러 개를 들고도 술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던 종업원에게 감탄하여 자기 작업실에 와서 모델이 되어 달라고 제안했고, 그녀는 보호자가 동행하며 돈을 받는 조건으로 수락하였다고 한다. 계획했던 큰 그림을 둘로 나누어 완성한 작품이다. 이 그림의 왼쪽 부분에 해당하는 작품 <카페에서>는 스위스 빈터투어에 소장중.
50 창문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 ─ 폴 고갱
1880년경 고갱은 <과일 접시, 유리잔, 사과가 있는 정물>을 비롯한 세잔의 그림 6점을 구입하였다. 이 작품은 고갱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최고의 보석'이라고까지 말한 세잔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 있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타히티로 이주하였는데 그의 작품들 모두 타히티에서 그려졌다. 고갱은 원시적이라고 여겼던 타히티 미술의 강렬함과 단순함에 영감을 받았다. 현재의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대중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 1906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 이후였다.
51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 빈센트 반 고흐
오늘날 반 고흐는 가장 인기있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살아 있을 때는 그림을 거의 한장도 팔지 못해 빈곤하게 생활하였고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작업 방식에 확신을 갖고 그림 작업을 짓속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감정을 담은 표현적인 밝은 색채와 유화 물감을 겹쳐 두껍게 칠하는 에너지 넘치는 임파스토 기법을 특징으로 한다. 이 그림은 1980년경 입원했던 정신병원의 '버려진 정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52 붓꽃 ─ 클로드 모네
모네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대표 풍경화가이다. 붓꽃은 모네가 가장 좋아했던 꽃으로 그의 정원에서 그린 그림이다. 20여 점을 그린 붓꽃 연작에 속한 작품들을 그리며 모네는 두껍고 대담한 붓으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 물감을 칠했고 캔버스의 밝은 흰 바탕이 드러난 채로 내버려둔 작품도 있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모네가 백내장으로 양쪽 눈 모두 시력이 온전하지 못했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52점의 작품들이 전시(도록에 나와있는 2 점은 전시에서 제외된 것 같다. 아니면 못 찾았나??)되었다고 하였다. 시간대별로 나누어 입장하도록 조절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관람객들이 많았다.
출구 쪽에서는 명화들이 전시된 그때 그시절 그곳의 전시장 공간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을 느껴볼 수 있다.
출구의 기념품점에서 도록을 구입하였다. 36,000원. 비닐 포장을 벗기질 않길 잘했다. 아주 잘했다. 귀가길에 내리는 비를 그냥 맞을 수 밖에 없었는데....
(위의 작품들에 대한 설명은 모두 이 도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집을 나올 때는 괜찮았는데 전시장에서 나오니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라. 귀가길의 쌀쌀한 날씨에 비를 맞아 얼어가던 몸을 따스한 얼그레이 한잔으로 녹이고 귀가하였다.
옆지기가 세계의 명화들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 소식을 알아내곤 같이 가주시겠다 하여 따라갔다.^^
한국과 영국 수교(1883년) 140주년을 기념하여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명화를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카라바조, 푸생,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 렘브란트, 고야, 터너, 컨스터블, 토머스 로렌스,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갱, 반 고흐 등 서양 미술 거장들의 명화 52점을 전시하고 있다. 3개월 동안의 전시회였지만 10월 9일까지라 며칠 남지 않았었다.
그동안 국내에서 만나보기 힘들었던 르네상스시대 회화부터 관람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인상주의 회화까지, 15~20세기 초 유럽 회화의 흐름을 살피는 이번 전시에서는 서양미술 명작을 통해 미술의 주제가 신으로부터 사람과 우리 일상으로 향하는 모습을 '작품'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일정의 조율하고 입장권을 예약구매하였다. 2023년 10월 4일 오후 1시 30분 표였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전시회이므로 입장객이 몰리지 않도록 2주 간격으로 입장권을 판매하였고, 30분 간격으로 한정수량 판매했다고 한다. 성인 1인의 정상 가격은 18,000원이다. 비싸다.ㅎㅎ
오후 1시 반으로 예매한지라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하고 집에서 11시쯤 출발하였다.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 하차하여 연결 통로를 통해 갈 수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간다. 좋은 시설이다. 무빙워크.
역시 평일이 좋다. 여유있게 박물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대나무가 시원하게 뻗어올라가고 있다.
입구의 매표소에서 예매했던 표를 출력받아야 한다.
입장권이다.
특별전시는 본관의 상설전시관 서쪽에 위치한 기획전시실에서 이루어진다.
커다란 화면 속에서 호랑이가 왔다갔다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을 촬영한 영상을 겹쳐서 보여준다. 자기들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예약한 1시 반에 딱 맞추어 입장해야 한다. 그래서 거울못 구경도 하고...
식당이 모두 만원이라 편의점에서 구입한 간이식으로 점심을 대신해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충 시간에 맞추어 기획전시실로 향하였다.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도 제공한다. 유료 3,000원.
각 회차별로 대기번호표를 나누어준다. 25번 단위로 끊어서 입장하게 한다. 관람객이 워낙 많다.
전시된 작품들을 창조한 거장들의 출생지 혹은 활동했던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도 전시되어 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등.
전시된 명화를 눈으로 만나고 가슴으로 만나고, 스맛폰 사진으로 남긴다.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동영상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사진 촬영도 많은 관람객들 사이의 틈새를 노려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전시된 명화들은 르네상스, 분열된 교회, 새로운 시대, 인상주의라는 네가지의 주제로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15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작품들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Ⅰ 르네상스, 사람 곁으로 온 신
이탈리아는 서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일찍 중세 봉건제가 무너지고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였다. 14세기 말 이후 부유한 시민 계층이 출현하면서 고대 학문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종교화에서의 변화도 나타났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에 대한 관심은 고대 신화 속 신들이 사람을 닮은 모습으로 묘사하게 하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산과 강, 하늘을 배경으로 사랑, 좌절과 절망, 두려움 등 다양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왕과 귀족이 아닌 일반인들도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게 하였다.
1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 안토넬로 다 메시나
45.7 X 36.2cm 크기의 유화이다. 원근법이 정교하게 적용된 작고 섬세한 개인 감상용 그림으로서, 이러한 그림을 '캐비닛 그림'이라고 한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유화에 능숙하여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고 윤곽선을 그리는 대신 색채의 명암을 활용하여 형태를 표현하였다.
2 성 제노비오의 세가지 기적 ─ 산드로 보티첼리
훗날 피렌체의 수호성인이 된 주교 제노비오의 삶을 그린 연작 4점 중 두번째 작품이다. 벽에 걸어 방을 장식하는 '스팔리에 패널'이라는 유형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마, 소생, 치유의 세 가지 기적이 묘사된 그림이다.
3 성모자 ─ 조반니 벨리니
베네치아의 화가 벨리니와 그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작은 성모자상은 개인적 종교활동을 위한 그림으로 인기가 아주 높았다. 이 작품은 주문자의 저택에 있는 개인 예배당의 작은 제단에 놓으려고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그림은 대부분 조수들이 작업했으나 이 작품은 밑그림이 자세하고 여러번 수정되었으며 아주 비싼 안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벨리니가 직접 작업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 聖母子와 세례 요한 ─ 라파엘로
라파엘로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아테네 학당> 등의 프레스코화들을 바티칸 교황궁에 그리던 시기에 작은 성모상을 여러 점 그렸는데, 이 그림도 그중 하나로 바티칸의 누군가 개인 묵상을 위해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파엘로는 기하학 지식을 활용하여 그림의 조화를 구현하였는데, 이 그림도 밑변이 넓어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 속 인물들은 배경과 조화되어 깊은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5 아폴로와 다프네 ─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피렌체 도시의 전경과 아르노 강의 계곡을 배경으로 고대 신화 속 아폴로와 다프네의 이야기를 담은 29.5 X 20cm 크기의 유화이다. 강에 비친 나무 그림자의 섬세한 묘사, 언덕에 흩어져 핀 꽃들, 안개가 자욱한 먼 산의 절묘한 표현은 이 그림이 가까에서 그려진 것임을 알려준다.
6 나르키소스 ─ 작자 미상
물그릇에 비친 자기 얼굴에 빠져 있는 '나르시스'를 그린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훈련을 받은 조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의 작품 속 인물들과 얼굴이 비슷하여 그의 추정자 중 누군가의 작품일 것으로 보고 있다.
7 머큐리,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 ─ 코레조 Correggio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인물들의 팔다리가 만드는 대각선들을 세심하게 배치하였다. 비너스와 머큐리의 팔이 이루는 선은 세 사람을 감싸는 부드러운 하트 모양이다. 이 그림은 원래 꿈에 빠져 유혹적으로 늘어진 비너스와 큐피드를 훔쳐보는 사티로스를 그린 <사티로스와 함께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와 한 쌍으로 그려진 것이다. 코레조의 본명은 안토니오 알레그리인데, '코레조'라는 이름은 그의 고향에서 따온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뛰어난 화가인 그의 화풍은 그의 고향이 예술이 발달한 세 도시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의 중간 지점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8 겁탈당한 가니메데 ─ 다미아노 마차
그리스·로마 신화에 따르면 목동인 가니메데는 아름다운 외모가 눈에 띄어 독수리로 변신한 쥬피터에게 납치되어 올림푸스 산에서 신들의 식사 시중을 들게 되었다고. 팔각 천장화 형태였던 그림을 18세기 초반 벽에 걸 수 있도록 캔버스를 더해 직사각형으로 만든 것이다. 그림에 팔각형의 흔적이 남아 있다.
9 소녀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공방
15세기 중반 이전 이탈리아 여성 초상화는 대부분 옆모습으로 얼굴의 반만 드러낸 모습이었다.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이 소녀는 1490년대 유행했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달걀 노른자와 안료를 섞어서 만드는 템페라로 그려졌는데, 이는 빨리 마르기 때문에 수정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으나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밝고 고른 빛의 묘사에 강점에 갖는다. 기를란다요는 큰 공방을 운영했는데 젊은 시절의 미켈란젤로도 그의 조수로 있었을 정도였다. 이 작품도 공방에 속해 있던 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보고 있다.
10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 티치아노
베네치아에서 여성의 개인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드물던 시기의 작품으로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몸을 약간 틀어 정면을 바라보는 초상화 속 주인공의 존재감이 뚜렷하다. 머리에 두른 베일을 비롯한 투명한 천의 표현에서 화가로서 티치아노의 솜씨와 기술이 완숙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11 여인(루치아 알바니 아보가드로 백작부인 추정, 붉은 옷을 입은 여인) ─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
모로니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귀족들의 우아함을 표현한 전신 초상화로 유명했다. 새틴 드레스의 화려한 다홍색은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색이고 치마의 체크무늬, 드레스의 꼬임 장식과 세로 트임은 1550년대 후반에 유행했으므로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모로니의 전신 초상화 속 귀족들의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은 17세기 플랑드르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부유한 인물들의 정교한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다.
12 빈첸초 모로시니 ─ 야코포 틴토레토
베네치아의 유지인 빈첸초 모로시니의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을 매우 세심하면서도 위엄 있게 표현한 틴토레토의 초상화이다.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공공기관이나 종교시설에 그린 서사가 있는 대형 연작들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극적인 빛과 연극적 구성을 활용하여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북유럽 르네상스, 세밀함의 극치
플랑드르(현재 벨기에의 북부 지역), 네덜란드, 독일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지역은 르네상스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두 지역 예술가들은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았다. 15세기 초반 반 에이크로 대표되는 플랑드르의 화가들은 얇고 투명하며 반짝이는 유화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물감은 주변 세상을 놀랍도록 세밀하고 정확하며 풍부한 색채로 묘사하도록 해주었고,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유럽 회화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13 보좌에 앉은 聖母子와 네 천사 ─ 퀸텐 마시스
(안보였는데...)
14 어린 공주(덴마크의 도로테아 추정) ─ 얀 호사르트
(안보였는데...)
Ⅱ 분열된 교회, 서로 다른 길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신의 뜻을 해석하는 교회가 나뉘면서 화가의 시선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가톨릭 교회는 바로크 미술로 사람들의 신앙심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북유럽에서 교회는 더는 신과 성인들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화가들은 자연스럽게 사람과 그 주변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가톨릭 개혁기 교회는 고해성사, 명상이나 묵상 등 개인적인 종교 활동을 권장하였기에 기도하는 성모나 참회하는 성인이 많이 그려졌다. 북유럽에 교회가 더이상 중요한 후원자가 되지 못하자 해상무역을 주도하며 급성장한 중산층이 집을 꾸미는데 좋은 초상화, 풍경화,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들을 주문하면서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5 도마뱀에 물린 소년 ─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강렬한 사실성과 극적인 빛의 사용이 돋보이는 독창적인 그의 작품들은 유럽 회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 작품에서도 카라바조가 얼굴을 찡그린 소년을 묘사하는 만큼이나 정물에 세심하게 정성을 쏟았다는 것은 물이 든 유리병에 반사되는 빛의 사실적 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순간의 즉흥적 움직임에도 서사를 담는 독창성을 보였는데,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여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두면서도 시각적 강렬함을 추구한 것이다.
16 페르난도 데 발데스 대주교 ─ 디에고 벨라스케스
세비야 출신인 벨라스케스는 1623년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근사하게 그린 것을 계기로 스페인 궁정화가 임명된다. 이 반신 초상화는 토레노의 전신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전신 초상화에서 잘라낸 일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 63세의 자화상 ─ 렘브란트 판 레인
렘브란트는 40여 년을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 동시대 다른 어떤 화가보다 자화상을 많이 그렸으며, 현재는 약 80여 점이 남아 있다. 초기의 자화상은 표정이나 자세, 빛의 효과를 실험하려고 그려진 것들이 많다. 렘브란트는 이탈리아를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질감을 표현하는 물감의 가능성을 잘 활용한 티치아노와 극적인 빛의 사용을 발전시킨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다.
18 성 마리아 막달레나 ─ 귀도 레니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 중 한명으로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서유럽 회화에서 대부분 덧없는 쾌락을 거부하고 참회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심한 매춘부로 그려진다. 귀도 레니와 그의 제자들은 이 주제의 그림을 다수 제작하여 매우 큰 인기를 얻었다. 가톨릭 개혁시기 교회에서 스스로의 죄에 대한 참회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상습 도박으로 늘어나는 빛에 시달리자 그림을 빠르고 쉽게 제작하여 팔고자 자신의 그림 중 가장 인기 있는 주제들을 택해 작은 크기로 여러 점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좋은 예가 되는 이 그림은 유연한 붓질과 은빛으로 빛나는 살결 표현이 이 시기 귀도 레니의 화풍과 일치한다.
19 기도하는 성모 ─ 사소페라토(조반니 바티스타 살비)
성모가 강한 빛을 받으며 조용히 기도하는 이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단순한 구도와 색채 구성이 눈길을 끈다. 불필요한 세부 묘사를 자제하고 제한된 색채를 사용하여 순수하면서도 강렬하다. 사소페라토는 깊은 감동을 주는 기도하는 성모를 주제로 그린 종교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특히 18-19세기 유럽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여행에서 조각과 회화를 구입하여 귀국했던 부유한 영국 귀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랜드 투어'를 마쳤다는 인증 기념품이었던 것이다.^^
20 바커스 양육 ─ 니콜라 푸생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이끈 화가 푸생의 초기작이다. 노르망디 출신이나 일생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낸 푸생은 고대의 모습을 재현한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림 속 고대의 모습을 바로 이해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로마의 후원자들이 좋아할만한 지적인 내용을 담고자 정성을 기울인 결과이다.
21 4원소: 불 ─ 요아힘 베케라르
22 4원소: 물 ─ 요아힘 베케라르
이 두 작품은 불, 물, 공기, 땅의 4원소를 주제로 한 4점의 연작 중 일부이다. 4점 중 <불>은 16세기 부엌을, <물>, <공기>, <땅>은 안트베르펜의 시장을 그렸다. 각 그림에는 주제가 되는 원소와 관련된 각종 생산물을 그렸다. <불>의 부엌에서는 여성들이 구이를 하려고 고기를 다듬고 있다. <물>에는 물고기, <공기>에는 집에서 기르는 새와 알이 가득 담긴 바구니, <땅>에서는 과일과 채소가 판매되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네 작품 모두 앞쪽의 16세기 풍경은 뒷쪽 배경의 성경 장면이 돋보이게 배치되어 있다.
23 여관(깨진 달걀) ─ 얀 스테인
얀 스테인은 고향 레이던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여관을 운영하였는데 떠들썩한 술자리 모습에 재치있는 풍자를 담아 표현하여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주는 그의 작품을 찾는 이가 많았다. 불량한 어른들의 행동과 대비되는 등을 돌린 소년의 모습이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어린이들이 배운다는 교훈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란다. 여관 여주인의 치마를 잡고 희롱하는 인간이 얀 스테인 자신을 그린 것이란다.
24 안뜰에서 음악 모임 ─ 피터르 더 호흐
피터르 더 호흐는 중산층 여성과 아이들의 가정생활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후기에는 이 그림과 같은 암스테르담의 상류층 모습을 많이 그렸다. 테이블의 오렌지는 이국적인 과일로 주인공들이 이런 정도 사치를 누릴 수준이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남자가 악기 연주자를 손짓하고 있는데, 이 시기 미술에서 음악 연주는 성적 관계의 은유로 자주 쓰였다네. 의자에 외투를 걸친 인물은 밖에 나가 건너편 건물의 창문에 보이는 여인을 바라보는... 전경은 그늘에 숨어 있는데 배경은 밝은 빛을 받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재밌는 구도의 그림이다.
25 인도교가 있는 풍경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사람은 묘사하지 않고 풍경 자체만을 목적으로 그린 독특한 작품이다. 16세기 초반부터 이와 같이 풍경을 다른 주제의 배경이 아닌 그 자체로 완성된 회화의 주제가 되는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작품 속 풍경은 아마도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다뉴브 강 계곡의 일반적인 모습일 것으로 보인다. 알트도르퍼는 자연의 모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세하고 풍요롭게 묘사하고자 하였고 <어머니를 떠나는 그리스토>와 같은 종교화에도 역시 자연 속 식물의 모습과 풍경을 표현적 요소로 포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26 들판에서 말을 타는 남성과 목동, 두 소년, 그리고 일곱 마리 소 ─ 알베르트 코이프
네덜란드 지역의 특징을 담은 그림 속 풍경은 네덜란드 동부 네이메헌과 클레베 사이의 평아지대 모습으로 추정된다. 코이프가 1650년대 초반 이 지역을 여행한 기록이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의 등 뒤에서 시작한 시선이 소몰이꾼의 눈을 따라 풍경을 바라보게 되는 구도의 그림이다. 늦은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네덜란드 시골 일상의 한 장면을 비추고 있다. 이 그림과 같은 금빛 햇살이 코이프 작품의 특징으로 17세기 네덜란드 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27 강풍 속 네덜라드 배와 작은 배들 ─ 빌럼 판 더 펠더
빌럼 판 더 펠더는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에서 바다 풍경화로 인기가 높았으며 그의 가족 중에도 화가가 많았다. 판더 더 펠더 부자의 역동적인 바다 풍경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이용하여 부를 얻고 국방을 강화했던 영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빌럼 더 판 펠더의 후기 작품들은 18세기 영국에서 바다 풍경화가 발달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28 작은 집이 있는 숲 풍경 ─ 메인더르트 호베마
이 작품은 호베마의 고향인 암스테르담 근처 할렘 주변의 숲을 배경으로 그린 것으로 실제 풍경이 아니라 호베마가 즐겨 사용했던 다양한 소재를 조합하여 이상적인 전원 모습을 떠올리게 한 상상의 풍경화이다. 호베마는 이 작품과 같은 작은 인물들이 있는 섬세한 숲속 풍경을 많이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