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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에 금강산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과 금강산 체험학습을 진행한 것이다. 교사 15명, 학생 166명, 학부모 1명이 참가하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대학 입시에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온 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실기 시험 준비 등이 필요한 학생들은 참가하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 체험학습으로 진행하였다.

2005년 12월 10일 토요일, 08시 50분에 학교에 집합하여 출발하였다.

12:00  내설악휴게소에 도착하여 개별 지참한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17:30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숙소를 배정하고 저녁 식사 후에 방북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였다.


2005년 12월 11일 일요일. 금강산콘도에서 맞이 한 여명.

아침 식사 후 차량 탑승하여 관광증을 교부하였다. 받았다.

 

08:50   남측 CIQ. 통행 검사.

 

금강산 관광 안내 전도.

 

온정리의 문화회관에 도착하였다.

 

11:00  금강산온천장 부페에서 점심 식사.

12:00~16:00  구룡연 코스 탐방

빈터만 남아 있던 곳에 신계사를 복원하고 있더라.

 

'새로 만든' 신계사 대웅보전. 사진 속에 '스님'도 담겼다.

 

두번째로 방문하는 목란관.

 

북에서는 겨울의 금강산을 눈이 쌓인 봉우리를 뜻하는 '설봉산'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암봉들이 그대로 드러나 뼈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골산'이 더 적합해 보인다. 앙상하다. 그러하지 아니한가!!

 

지난 여름의 씁쓸하고 쫄리는 기억이 남은 곳. 이 돌덩어리 주변의 경계석을 발로 건들었다고 한참 지도원 동무에게 혼났었다. 아씨~

 

다시 만난 금강문.

 

다시 만난 옥류동의 무대바위.

 

옥류담으로 흘러내리던 옥류천의 물이 얼어붙었다. 미끄럼 타면 재밌겠다.^^ 

 

미끄럼 방지 설비를 갖추어놓았다. 온통 얼음이라 이런 정도의 설비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도 다들 조심조심.

 

비봉폭포가 얼었다.

 

계곡이 깊어 한낮이지만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다. 쌀쌀한 겨울의 개골산을  오르며 구룡폭포를 찾아간다.

 

관폭정과 구룡폭포. 구룡폭포는 얼음벽이 되어버렸다.

 

얼음 덩어리로 변한 구룡폭포와 구룡연.

 

화장실은 유료이다. 1달라. 

 

날이 추워 상팔담 쪽으로는 올라가지 않고 하산하였다. 지난 여름에 와서 칼질하여 갈라놓고 갔던 바위가 그대로 남아 있다.

 

햇볕을 받고 있는 저 윗쪽의 봉우리들이 부러웠다. 저 위는 햇볕을 받아 따뜻하니까 온도가 높아서 상승기류가 발생하고, 그러면 골짜기 아랫쪽에서 위로 공기의 이동이 이루어지니까 곡풍이 발생하게 되고......

 

개골산의 흔들다리도 뼈로 보인다...

 

하산길에 만나는 금강문이다.

 

개골산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화강암 덩어리.

 

계곡의 얼음 사이로 물이 흐르면서 녹은 부분 속에 금강산이 담겨 있다.

 

쓸쓸한 목란관. 기념품 판매점의 직원들이 학생들에게 담배구입을 권하더라는 이야길 들었다. 북에서는 끽연에 대해 제한이 없는 것 같았다. 남녀노소가 함께 맛담배라도 피우는 풍속을 가진 것인가???

 

16:30~18:00  문화회관에서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교예를 단체로 관람하였다.

 

18:00~19:00  금강산온천장 부페에서 저녁 식사후 자유시간(온천 및 쇼핑)

지난 여름에 이용하지 못했던 온천에 입장해보았다.

야외 온천도 있었는데, 눈발이 살짝 날리는 모습이 신기했다. 좋은 기억.

 

숙소인 구룡 빌리지, 구룡마을은..... 좀 거시기하다. 난방은 다 된다.

 


 

숙소는 컨테이너 비슷하게 만들어진 곳이었다. 구룡마을이라 하더라. 

12월 12일 월요일의 여명.

 

07:00  온정각에서 아침 식사.

08:30  삼일포 관광 출발.

 

온정각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화강암 돌덩어리, 닭알바위산. 

 

09:00  곰돌이 아저씨가 낚시하고 있는 삼일포에 도착했다.

 

단풍관과 삼일포.

 

소나무에 솔방울이 엄청 크게 많이 달렸더라.

 

집으로 돌아갈 시간에 맞추어야 해서 서둘러 일정을 마감하였다.

 

10:35  북측 CIQ 도착하여 통행검사.

11:30  남측 CIQ 도착하여 통행검사.

13:00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

18:00  학교에 도착하여 해산.

 

2박3일의 일정이었지만 금강산에서는 1박2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던 금강산 체험학습에 참여하여 개골산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금강산과 봉래산의 모습을 찾아야 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 이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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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금강산을 다녀왔었다. 2005년의 일이었다. 8월에 봉래산을 즐기고, 12월에 개골산을 보았었다.

(북한에서는 겨울철의 금강산을 '개골산'이 아니라 '설봉산'으로 부르더라. 2005.12.11. 촬영)

 

두번을 다녀왔더니 아래 안내자료에 있는 표현대로 "가슴에 남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머리에는 남은게 하나도 없더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2005년 8월 17~19일의 2박3일, 12월 11~12일의 1박2일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계절별로 네 장을 모았어야 했는데, 두 장에 그쳤다.

 

8월에는 패밀리비치호텔에서 숙박을 하였고, 12월에는 구룡마을의 컨테이너 숙소에서 숙박을 하였다.

 

8월의 금강산 탐방은 서울시교육청에서 진행했던 "금강산 통일체험 연수"에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2005년 8월 17일 압구정동의 현대백화점 공용주차장에 집결하여 단체로 버스를 타고 금강산콘도까지 이동하였다.

13:00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금강산관광증을 수령하였다.

14:30  금강산콘도 집결지를 출발.

15:00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남측 CIQ(세관, 입국심사, 검역절차) 도착, 통행검사.

(2005.12.10. 촬영)

16:35  남측 CIQ 출발하면서 안내교육. 버스 창밖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 하지 말라고 재삼재사 당부. 북측 CIQ 도착하여 통행검사.

16:50  숙소 체크인. 바로 인근에 위치한 호텔해금강에서 저녁을 먹었다고 일정표에 나와 있다. 

 

고성항 해변의 영락정의 모습이 외로워보인다. 구름 속으로 숨어들고 있는 금강산 자락.

호텔해금강의 사진이 하나도 없다. 왜? 모르겠다.

지인들을 만나 온정리에 위치한 온정각으로 이동하였다. 셔틀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온정각 앞의 매점에서 대동강 맥주를 한모금했다. 안주로 먹은 땅콩은 기억난다. 땅콩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수확하면서 깨끗하게 닦에서 출하하는 것이 아니라 캐낸 그대로 내놓은 것이다. 자연산이었다. 껍질을 까먹기 위해 손이 흙투성이가 되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자연산이니까...

 

고성항 바닷가에 위치한 금강산비치호텔의 야경. 숙소로 귀환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보인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투숙하기까지가 하루 일정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8월 18일 2일차 일정이 진행되었다.

07:00  호텔해금강에서 아침식사가 제공되었다고 일정표에 적혀있다.

 

2005년 당시에는 시설을 확장하고 새로운 숙소를 건설하는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2005년에는...

 

08:10  관광버스로 이동하여 구룡연 코스를 탐방하였다. 여기까지는 기본 코스이다.

 

온정각에서 구룡연코스 아래의 주차장까지 버스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에 가이드가 여러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해주었다. 위반시 벌금이 상당하며 잘못하면 귀국을 못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하였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목란다리를 건너면 목란관이 위치한다. 이곳에서부터 구룡연으로 오르는 계곡 탐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온정리의 시설들은 현대아산에서 운영하지만 이곳부터는 북한에서 전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이다.

 

화강암 산지가 좁고 깊게 침식된 골짜기를 오르기 때문에 사면의 양쪽을 이동하면서 코스를 개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하는 다리들이 많다. 아래 지도를 보면, 목란다리, 양지다리, 금수다리, 만경다리, 흔들다리 등이 보이는데, 이외에도 많은 다리들이 있다.

 

주의사항의 공포 속에 금강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돌덩어리 옆으로 지나면서 바닥에 있는 경계석을 살짝 밟았나보다. 시커먼 옷을 입은 시커먼 얼굴인데 눈빛은 레이저를 쏘는 듯한 아저씨가 오라고 부르더라. 뭔가 했더니 '교육 제대로 안받았냐', ' 왜 하라는 대로 안하느냐',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등등의 무서운 말을 하더라. 돌덩어리만 건들지 않으면 되지 않나 싶었는데, 그 주변의 경계석도 건들면 안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쫄았다. 조심하고 기분좋게 놀다 가라하더라. 쫄았다. 이쒸~ㅠ.ㅠ

 

금수다리를 건너가자.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화강암이 기반암이 전형적인 돌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곳곳에 멈추어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다.

 

계곡 바닥의 거대한 암괴들. 서서히 풍화 및 침식 작용을 받아 원마도가 높아지고 있다. 

 

만경다리를 건너 다시 반대편 사면으로 옮겨간다.

 

거대한 암괴들 사이의 틈으로 지나가야 한다. '금강문'이라 하더라. 흐릿하게 보이는 다른 이름은 '금룡관'.

 

흔들다리는 흔들린다.

 

계곡에 물이 고인 소. 물은 진짜 너무나도 깨끗하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간다고 玉流洞 계곡이라 한다.

 

옥류동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418호란다.

 

09:35  잠시 쉬어가보자. 계속 오르막이라 숨이 많이 차더라.

 

수직 절벽 아래로 통로가 개척되어 있다. 종종 탐방로를 보수하는 저쪽 전문가들의 작업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넓은 너럭바위가 계곡에 걸쳐져 있다.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무대 바위이다.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춘 곳이라는 스토리를 붙여 놓았다.

 

계곡에는 옥류다리, 하늘에는 '구름' 다리.

 

옥류가 흐르고 옥류가 고여 소를 이루는 옥류동 계곡.

 

두 개의 연못이 위 아래로 연결되어 마치 이어진 구슬과 같다는 연주담. 옛날에 선녀가 하늘에서 놀러 내려왔다가 구슬 두 알을 흘리고 간 흔적이라는 스토리도 있다고 한다.

 

금강산 4대 폭포 중의 하나인 비봉폭포이다. 높이 139m. 봉황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봉황이 춤추는 것 같다는 무봉폭포.

 

여름의 금강산인 봉래산은 짙은 녹색으로 채색된 틈새로 암봉의 향연이 펼쳐진다.

 

금강산에 혼을 빼았겼다. 넋이 나간 탐방객.

 

멋진 경치의 암벽의 공간마다 낙서를 해놓았다. 정치 선동 구호이지만 경관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흉물이다. 다행인 것은 글자에 빨간색을 칠해놓지 않은 정도... 

 

구룡폭포 윗쪽의 구룡대에서의 경관. 건너 능선의 세존봉 산봉우리들이 뾰족뾰족하다.

 

세존봉 능선. 금강산을 일만이천봉이라 표현할 만 하다. 봉우리의 숫자를 세다 잊을 정도.

 

그곳에 2005년 8월 18일에 있었다. 주차장에서 3,960m 떨어진 곳이었다.

 

구룡폭포의 윗쪽이다. 여덟개의 연못이 구슬처럼 꾀어 있어 이를 '상팔담'이라 하더라. 상팔담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구룡대 전망대에서 100m 쯤 더 윗쪽에 위치한 '비룡대'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2023년에 알게 되었네. 어쩌지...

 

구룡폭포의 절벽. 절벽 아래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구룡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관폭정'이다.

 

11:30  관폭정에 왔다.

 

구룡폭포의 멋진 모습과 그 아래의 구룡연. 폭포의 수량이 좀 적어 보이는 것이 아주 작은 흠이다.

 

간 김에 칼질해서 금강산의 바위 좀 갈라놓고 왔다.

 

화강암이 기반암인 곳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양파껍질처럼 풍화되어 침식되는 '박리 돔'. 계곡을 흘러내리는 깨끗한 물에 손이라도 담가보고 싶지만 '금지 행위'에 속한다. 천천히 금강산의 자연 경관을 즐기며 하산하였다.

 

다시 만난 금강문.

 

금강산의 멋진 소나무.

 

13:30  금강산호텔에서 점심.

 

오후에는 평양모란봉교예단의 종합교예공연을 관람하였다. 흔히 말하는 써커스 공연이다. 일반석 요금 25달러.

공연 과정에 사진 촬영금지. 오로지 눈으로 최고의 써커스 공연을 관람하였다.

눈꽃조형, 봉재주, 원통북치기, 장대재주, 비행가들, 공중 2인 회전조형, 널뛰기, 공중비행 등의 '교예' 종목들이 공연되었다. 대단했었다. 

공연을 마치고......

 

온정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문화회관에서 통일교육 특강 및 발표가 있었다고 일정표에 남아 있다.

기억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2005년 8월 19일. 3일차의 일정은 선택 관광으로 진행되었다. 만물상 코스 또는 삼일포/해금강 코스 중에 택일하면 되었다.

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뱃속과 머리 속이 심하게 불편하여 만물상 코스가 힘들 것 같아 바닷가로 나섰다.

 

09:30  해금강에는 비가 내리고 파도가 날린다.

 

전망대.

 

해금강은 거센 파도에 저항하며 부서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시스택' 지형들이다.

 

파도 소리도 대단하였다.

 

파도에 흔들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난 밤의 무엇인가 때문에 불편했던 속이 더 울렁거린다.

 

10:50  곰돌이들이 낚시하고 있는 삼일포에 도착하였다. 계속 내리는 빗살이 어여쁘다.ㅠ.ㅠ

 

단풍관 그리고 삼일포 호수 가운데 위치한 와우도. 삼일포는 둘레가 4.5km 정도인 호수이다. 북한에서 3대 호수의 하나로 꼽고 있다.

 

호수 안쪽으로 돌출한 바위산인 봉래대는 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봉래대에서의 조망.

 

12:00  온정각에서 점심식사

14:05  구선봉의 북측 CIQ 도착 / 통행검사.

15:00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남측 CIQ 도착 / 통행검사.

17:00  내설악광장휴게소에서 저녁 식사

21:00  서울 도착하여 해산...

 

사진 몇 장과 일정표, 입장권 등만 일부 남아 있는 첫번째 금강산 여정을 정리해보았다.

봄의 금강산과 가을의 풍악산을 즐길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우연히 발생한 사고와 양측의 자존심 싸움이 길어진 끝에 금강산 관광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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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고궁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경복궁일 것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창덕궁을 묶어 '동궐'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궐의 전체적인 모습을 주변부를 포함하여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이 남아 있다. 동궐도이다. 두 궁궐과 주변의 산세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대단한 작품이다.

동궐도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1820년대 후반에 비해 현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어 찾아보았다. 동궐도는 고려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 각각 소장본이 존재하는데 모두 국보 제 249호로 등재되어 있다. 

보다 고화질로 구할 수 있는 동아대학교 소장본 파일의 누런 바탕색을 조금 제거해보았다.

 

그리고 창덕궁 후원 부분을 크롭하고 건물들의 이름을 넣어보았다.

부용지와 주합루 일대, 옥류천 일원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은 많이 달려졌다.

위의 지도와 아래의 지도를 보면 변화된 부분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창덕궁관리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창덕궁" 가이드북에 게재된 창덕궁의 건물 배치도이다.

  쉽게 관람할 수 있는 '전각' 부분과 쉽지 않았으나 점점 쉬워지고 있는 '후원' 부분으로 나뉜다. 후원 관람을 위해서는 전각 관람 요금까지 지불해야 한다. 그냥 후원 관람 예약을 받으면서 관람료를 전각을 포함해도 될텐데 따로 관리되고 있다. 불편하게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서 두번 결재를 해야 한다. 전각관람료 3,000원, 후원관람료 5,000원.
  창덕궁(후원 포함),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및 종묘 관람권까지 포함된 통합관람권이 10,000이다. 고궁 관람을 모두 하고 싶은 사람은 이 통합관람권이 나을 것이다. 3개월 동안 사용 가능하나 한번씩만 입장 가능하다.

 

 

2023년 9월 20일 12시 창덕궁 후원 관람을 예약하였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관람이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예약을 취소하지 않았다.

빗속의 고궁 산책... 생각만해도 운치가 넘치지 않는가.ㅎㅎㅎ

 

지난 번 관람 때는 후원관람 예약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여 전각을 돌아보질 못했다.

똑같이 12시 입장권을 예매했지만 이번에는 일찍 가서 전각도 관람하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늦게 출발하여 30분 정도 밖에 시간을 갖질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음 기회를 또 가져야 한다.^^

 

 

 

창덕궁의 입구인 돈화문이다. 멋지다.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역대 왕들의 업무 및 생활공간으로 가장 오래 이용된 궁궐이었기 때문일까?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당시 창덕궁 앞에 종묘가 위치하여 궁의 진입로를 남서쪽으로 치우치게 하였다고 한다.

궁궐의 대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만 출입문으로 기능을 했고, 신하들은 서쪽에 위치한 작은 금호문을 통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한 것이다.

 

돈화문으로 들어와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진선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작은 돌다리가 있다. 금천교이다.

 

궁궐을 조성할 때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는데, 이 물길이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였기에 금천이라고 하였다. 금천은 창덕궁 북쪽에서 흘러들어와 돈화문 동쪽을 지나 궐 밖으로 빠진다. 금천교는 궁궐에 남아 있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보물이다.

 

창덕궁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진선문이다.

'신문고'라고 하는 것을 이 진선문 앞에 설치했었다고 한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은 일반 백성이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나 이곳까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을까.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문고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반 백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러한 제도는 그냥 백성들을 어여삐 여긴다는 왕도정치 시대 통치자들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 뿐? 그래서 백성들은 하소연 할 곳이 없어 왕의 행차가 있다고 하면 그 앞으로 뛰어들었던 것일 것이다.

 

왼쪽으로 인정문이 보인다.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다. 경복궁과 비교하면 많이 아담하고 소박한 편이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진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루던 곳이다. 중층 지붕을 갖고 있어 2층 건물인 듯 보이지만 내부는 그냥 통층 건물이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소실과 재건이 반복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03년(순조 3)에 복원된 것이다.

 

행사가 있을 때면 신하들은 '조정'의 품계석 위치에 자신의 계급에 맞게 도열하였을 것이다.

 

매우 불편해보이는 의자. 그 위로 일월오봉도가 선명하다.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선정전으로 연결되는 숙장문이다.

숙장문 양쪽의 담 길이는 먼저 들어온 진선문 쪽에 비해 한참 좁다. 인정문 앞쪽 공간이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이다. 앞에 있는 산 때문에 지형을 고려하여 이렇게 만든 것이다.

 

선정전의 입구인 선정문.

 

행사용으로 사용된 인정전에 비해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인 선정전의 규모는 아주 소박하다. 소실된 이후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한 것이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건물이 작고 주변이 비좁다. 그래서 나중에 공간이 좀 더 넓은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가게 된다.

 

선정전 내부 모습. 이곳에서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의 각종 회의가 매일 열렸다.

 

빗속의 단체 관람객, 자유 관람객 그리고 소나무 숲.

 

성정각 일원이다. 세자의 일상이 숨쉬던 동궁이었다.

임금은 태양이고, 왕비는 달이기에 일월오봉도에 그렇게 등장한다. 세자는? 이제 떠오르는 태양이다. 그래서 궐 안에 동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東宮이라 불렀다.

 

후원 매표소이다. 창경궁 입장권을 구매하여 입장할 수도 있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경우 이곳에서 입장권과 교환하여야 한다.

 

입장권은 이렇게 생겼다. 2명 요금이 10,000원.

 

입장권을 검표하고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가이드 투어를 시작한다.

 

시작했다. 원래 인터넷 예매 50명, 현장 구매 50명으로 구성된다. 비 때문인지 많이 조촐하다.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원치 않으면 자유롭게 개별적으로 이동을 하면서 창덕궁 후원을 즐길 수 있다. 다음에는 자유 관람이닷!!! 그렇게 할꺼닷!!!

 

녹색으로 짙게 물든 예쁜 언덕을 넘어가면서 보이는 영화당. 부용지 바로 앞에 위치한다.

 

비내리는 부용지 일대. 이곳에서부터 창덕궁의 진짜 후원이라 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배치하였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해낸 절묘한 솜씨와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부용지와 부용정. 참 예쁘다. 부용정은 부용지에 피어난 한송이 꽃처럼 보인다. 보물이다.

 

후원의 첫번째 중심 정원인 이곳은 휴식과 학문, 교육을 하던 상당히 공개된 장소였다. 2층짜리 누각인 주합루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이었고, 그 옆의 서향각은 각종 도서를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이었다. 2층은 책을 보며 학문을 논하던 공간인 열람실이었다.

부용지에서 주합루로 오르려면 어수문을 지나야 한다. 어수문 옆으로 생나무 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놓았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왕이 친견하는 군사훈련,  과거 시험,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와 같은 각종 행사가 이곳 영화당과 춘당대에서 치루어졌다고 한다. 

 

애련지 쪽으로 들어가는 불로문이다. 

 

冂자 모양으로 다듬은 통짜 돌로 만든 문이다. 不老門이라...

 

불로문을 들어서면 애련지와 애련정이 비맞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주 애련하다~

 

애련지 남쪽에 위치한 두 건물.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가 만든 소박한 건물이다. 서재로 즐겨 이용하였었다 한다. 지금은 '기옥헌'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바로 옆의 한칸 반 짜리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다. '운경거'로 추정된다.

 

연경당은 사대부의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의 접견실이었다. 1828년(순조 28)에 효명세자가 의례를 행하기 위해 창건했는데,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궐도와 완전히 달라졌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잔치를 베푸는 등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서재인 선향재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선향재 뒷쪽 높은 곳에 위치한 농수정.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라고 표현된다.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폄우사가 나타난다. 멀리 존덕정이 보인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 지붕이 2층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정자이다.

 

존덕정 안쪽에는 정조대왕의 글이 새겨진 나무판이 게시되어 있다.

 

확대해보았다.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고 시작하고 있다. 왕권의 지엄함을 밝히는 표현이란다.

 

존덕정 아래에 관람지와 관람정이 비를 맞고 있다.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에 이어 옥류천 계곡 일대가 후원의 주요 관람 명소이다. 그런데......

올해 연말까지 출입금지라고 한다. 일부 정자에 문제가 발생하여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90분이었던 관람시간이 70분으로 줄었던 것이었다. 나머지는 자유 관람을 하라고 풀어준다.^^

자유롭게 퇴장한다. 동행자의 배고프다는 하소연이 내 배도 비었음을 깨닫게 한다.

효명세자의 공간이었다고 하는 의두합을 다시 만난다. 금마문을 통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한복을 입으면 고궁 관람 무료. 참 좋다고 생각한다. 고궁과 잘 어울리고 너무 예쁘다.

 

그렇게 창덕궁의 일부만 살짝 구경하였다. 빗속의 아름다운 고궁 산책이었다.

 

램블러한테 물어보니 이렇게 걸어다녔다고 나온다. 3.3km를 두시간에 걸쳐 즐긴 경험이었다.

 

그리고는... 쌈밥집에서 반찬을 리필시켜가며 과식했다. 그리고는... 저녁과 야식을 모두 생략해야 했다....ㅠ.ㅠ

이제서야 사진 속에서 찾았다. '처음처럼'. 제길... 그냥 물병이었다.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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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풍성사구"로 유명하도 한다. 전라남도 신안군 우이도.

작은 섬에 커다란 사구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몇몇 지인들이 구경을 가기로 했다.

궁금하여 이것 저것 검색을 하다가 우이도의 풍성사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고 하더라.

그 영화이다. "가을로"

영화가 궁금하여 찾다가 블루레이로는 출시가 안되고 DVD로만 제작, 판매되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이 영화의 DVD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지 오래된 영화인데 아직도 판매가 되고 있었다.

'감독판'과 '일반판'의 두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가격 차이가 얼마 나지는 않지만 '상태최상' 임을 주장하는 감독판 중고제품을 주문하여보았다.

DVD 가격 3,000원, 배송비 2,500원 들었다. 주말에 주문했는데 화요일에 도착하였다. 

매장에서 중고제품을 판매하면서 비닐 포장을 새로 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비닐 포장이 제거되지 않은 것인지 새 것 같았다.

'감독판'은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다이어리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고무줄 띠지까지 있다.

"감독.배우 싸인판 랜덤증정!"이란 스티커도 붙어 있었다.(물론 원래 이런 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싸인판? 기대를 갖고 개봉해보았다. 역시 '랜덤' 중 좋은 것은 다른 이들에게 내가 다 나눔했다. 내꺼 아니다~

감독판은 Movie, Special Features 용으로 각각 제작된 2장의 DVD로 구성되었다.

영화를 소개하는 얇은 리플릿 한 권도 있으며,

심지어......

'단풍잎'도 한 장 들어 있다.ㅎㅎㅎㅎ

이게 뭐야...^^

 

그리고 함께 포함된 '현주와 민우의 신혼여행'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리플핏.

영화 소품인 다이어리와 내용이 같다.

결혼 직전 상황이었던 둘의 그날은 백화점에 신혼가구를 보려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런데 현우는 상사에게 까이며 초과 근무를 해야 하게 되어

함께 있고 싶어했고 기다리고 싶어했던 민주를 혼자 먼저 백화점에 가 있도록 한다.

그 백화점이 '삼풍'이었다.

 

그렇게 둘은 강제로 헤어졌다.

나중에 현우에게 전달된 다이어리에 기록된 여행 일정을 보고 따라 나서게 된다.

첫번째 여행지가 신안의 우이도였다. 

1994년 10월 10일에는 목포에서 우이도까지 6,800원이었나보다.

영화가 시작되는 뽀인트, 우이도의 '풍성사구' 꼭데기.

세 사람이 이곳을 여행하는 모습이 나온다. 왜 셋?

(그것은 영화 속에 확인 가능하다.^^)

 

우이도의 풍성사구가 얼마나 근사하게 영화에서 묘사되었는가가 궁금하여 구입한 DVD였다.

DVD의 화질 한계도 있겠지만, 실망했다. 

전반적으로 그렇더라. 

우리나라의 멋진 경치를 가진 곳들을 촬영 대상지로 잡아 만든 영화라고....

하지만, 화면 속에 보이는 그곳들의 모습은 그렇게 멋져 보이지가 않았다.

영화에 나온 우이도의 모습을 보고나서 '영화의 촬영지'라고 하는 스토리가 아니라면

굳이 찾아가볼 의지가 생기기 어렵지 않았나...

극장의 커다란 화면으로 보았다면 느낌이 크게 달랐을 것 같기는 하다.

다른 여행지도 비슷하였다.

 

또 하나 영화 '가을로'를 보고 나서 느낀 아쉬운 점은 대사이다.

그냥 일상의 대화 말고,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부분,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 같은 개념을 설명해주는 대화가 몇 번 등장하는데..... 

마치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아픈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여행을 각자하면서 그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멜로 드라마, 로드 무비 '가을로'.

로드 무비를 만들면서 멋진 경치를 가진 "지역"들을 방문하는 영화인데,

해당 '지역'의 특성이 사진 한 컷의 순간만은 아닐진데...

 

갑자기 바뀐 화면 속에 커다란 정자가 나타난다.

2층에 한 남자가 서 있고, 아랫쪽에 한 여자가 도착하여 둘러보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화면으로 간다.

그곳이 어떤 '지역 특성'을 가진 곳인지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 몇 초 주욱 돌리며 보여주면서 지나갔으면 안되는 것이었을까?

경치를 영화로 묘사하지 않고 사진으로만 묘사하려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으면 드론으로 한바퀴 간단하게 돌리면 되는데....)

 

영화의 진행이 너무 잔잔한 것도... 좀....ㅎㅎ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아픔을 여행을 통해 치유해가는 영화이기는 한데 ......

 

"지리"로 밥 벌어먹다가 퇴직해서 그런지 

'지역', '그 곳', '동네', '골목' 등등의 수식어와 관계된 뭔가가 나오면 관심이 더 간다.

영화 "가을로"는 우이도를 여행하기로 계획한 이후에 접하여 목적을 갖고 시청했기에

본래의 영화 감상 방식과 달라 다른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로드 무비로서의 '가을로'에서는 아쉬움이 많다.

앞으로 등장할 멋진 '국산' 로드 무비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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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한 백수들이 만나 한양도성길의 일부 구간을 걸어보자고 합의가 되었었다.

하체가 부실하여 오래 멀리 걷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 다른 백수들은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하더라.

장충동에서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장충체육관 부근에서부터 남산 봉수대를 올랐다가 숭례문까지의 구간을 걷기로 했었다.

그래서 한양도성길 중 일부 구간 지도를 단톡방에서 미리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약속의 날, 2023년 9월 13일에 서울 전역에서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나오더라. 망설이다가 강수량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그냥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부실한 조그만 우산들을 들고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걷는 것이 곤란하여 남산공원길을 따라 걷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가을단풍길, 남산북측순환로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길이다. 산책로의 이명 그대로 가을에 단풍들면 아주 멋진 풍광을 보일 분위기가 넘치더라.

 

오후 1시에 장충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공원역에서 빗속을 천천히 즐기며 걸었다.

 

'먹자골목'으로 지정된 곳들이 참으로 많다.

 

정확한 약속 시간에 도착하였다.

 

어젯저녁에도 족발을 먹었는데, 오늘 점심도 족발이었다.^^ 좋은 족발이다.

 

식사 후에는 공굴리기 놀이를 좀 하였다.

 

오후 3시. 장충단 공원. 수표교를 오랜 만에 만나고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청계천에 있던 수표교를 임시로 이전한 상태에서 계속 자리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의 문제로 인해 원상복구는 곤란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이준 열사 동상이 장충단 공원에 모셔져 있다.

 

장충단공원에서 길을 건너 장충리틀야구장 옆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한적한 남산공원길을 만나 서쪽 방향으로 빗속의 산책을 즐긴다.

 

중간 중간에 벤치들이 놓여 있으나 앉아 쉬는 것을 사양한다. 비 때문이다. 젖었다.

 

시내 구경도 하면서 여유를 즐긴다. 빗속에...

 

빗속의 공원길도 멋지지만 나중에 단풍 들면... 오메~

 

오늘의 산책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일까... 조지훈 시비에 '파초우'가 새겨져 있더라.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파초우.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다방이 있더라. 아메리카노의 따스함으로 한기를 녹여보았다.

 

남산에서 서울을 바라보고 계신 호랑이 어르신.

 

드디어 한양도성을 만났다.

 

도성을 따라 '수크렁'을 잔뜩 심어 놓았다. 왜 하필 이걸...

 

남산공원에 왔었더라~~~ 아, 남산공원이 뒤집혔다.

 

한양도성 복원 구간.

 

고가도로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가본 적은 없다.

 

그래서 가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더라. 있으니 이용한다.

 

좀 묘한 공원이다. "서울로 7017"

 

고가를 통행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양쪽으로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구 서울역사를 구경하고 사진을 촬영하라는 배려인 것 같다. 구멍이 뚫린 부분이 있다.

그 배려를 받아들여 옛날 서울역과 새 서울역 청사 사진을 남겼다. 비가 내린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고가 공원 '서울로 7017'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이색적인 공원이다.

 

숭례문에 왔다.

 

우산을 던지고 숭례문과 함께 셀피~~ 비 쯤이야...

 

5.7km 정도를 걸었다. 2시간 18분 걸렸다. 천천히 비를 즐기며 걸으니 전혀 힘들지 않더라.

 

숭례문 부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퇴직 동기와 랑데뷰하여 맛있는 중국요리를 즐겼다.

먹으며 수다 떨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어 헤어졌다. 네 방향으로......

 

회현역으로 걸어가 4호선을 탈 것이냐, 시청역으로 걸어가 1호선을 탈 것이냐

고민을 좀 하다가 1호선을 이용해 귀가하였다.

2023년 9월 13일 하루가 그렇게 빗속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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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를 좋아한다. 아주 많이.

하지만 먹을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아니하다. 회식이라는 기회가 없어졌기에.

집안 식구들에게 여러차례 사정하여 기회를 만들었고,

몇 차례 연기하다가 드디어 동네 유명 삽겹살집으로 향했다.

화단에 핀 장미꽃이 더욱 예쁘게 보였다.

 

평일에 오고 싶었는데, 바쁘다 하는 식구의 일정 때문에 일요일에 왔더니 역시나...

대기번호표를 받고 15분 넘게 기다리다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솥뚜껑 위에 콩나물과 김치가 올라간다.

 

맛있어 보이는 고기도 올라갔다.

 

맛있게 잘 먹었다. 밥도 볶아 먹어 배가 든든하였다. 그리고....

 

인근의 공원에서 동전을 줏어가면서 배 꺼트리기 운동을 하였다.

열심히 뺑뺑이 돌았다.

 

1만보 채우고 귀가하였다.

 

그리고는 자다가 새벽에 일어났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장을 비웠다. 비워졌다.ㅠ.ㅠ

돼지고기를 먹고나면 늘 이러한 것 같기는 하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냥 과민성대장증상일까 아니면 돼지고기 알레르기 증상일까....

 

당분간 돼지고기 특히 삼겹살을 피해야 할 것 같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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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1일 토요일이다. 탐방 연수를 마감하는 날이다. 

 

연수 제 6일날도 아침식사는 6시 30분부터 진행되었다. 8시 20분에 숙소(?)를 출발하였다.

 

8시 50분. 오사카를 방문했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가 아닐까 싶다. 오사카 성 천수각을 올랐다. 기념 스탬프도 찍어왔다.

1496년 淨土眞宗의 蓮如上人이 지금의 오사카 성 부근에 지은 坊舍가 혼간지 本願寺라는 큰 절로 커지면서 성대한 세력으로 성장하니 당시 천하일통을 노리던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걸렸다. 결국 1580년 오다 노부다가 織田信長은 혼간지 세력을 박살내고 절은 불태워버렸다. 이후 오다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풍신수길이 1583년부터 불탄 절터에 쌓은 성이 오사카 성이다.  풍신수길이 세력 다툼에서 밀려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떼로 입장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과 입장하는 통로가 다르다. 서, 북동, 남동 방향의 세 진입로 중에서 남동 방향의 '관광버스 진입로'를 통해 진입하였다.

 

오사카 성은 결혼식장이다??

 

오사카 성은 해자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안쪽의 해자 중에서 물이 없는 부분. 大阪城 사쿠라몬 桜門이 있는 부분이다.

 

천수각이 보이기 시작한다. 막부의 멸망 이후 내전중에 소실되었던 것을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에 의해  다시 만든 것이다. 1997년 일본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쯤에서 기념 사진을 남겼어야 하는데, 부끄럼을 너무 타서 주변 분들께 사진 좀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지 못했다.

 

그냥 묵묵히 입장했었다.

 

8층에 위치한 오사카 성 전망대는 약 50m 정도 높이에 위치하여 오사카 성과 주변 오사카 시내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8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대도시의 하늘은 대체로 이렇다. 오사카 하늘의 대기 질도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니콘 18-70mm f/3.5-4.5 렌즈의 40mm 화각의 모습인데 이러하다.

 

지붕의 끄트머리인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 샤치호코(鯱, しゃちほこ). 몸은 물고기이고, 머리는 호랑이, 꼬리는 항상 하늘을 향하고 있고, 배와 등에는 날카로운 돌기가 나와 있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보통 기와나 나무, 돌 등으로 만들어 성의 지붕에 금박을 입힌 긴샤치(金鯱: 긴코, 긴노샤치호코)로 장식한다. 나고야 성(名古屋城)의 것이 가장 유명해서 긴샤치는 나고야의 대명사 중 하나이다. 원래는 치미와 같이 지붕 양단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귀면 기와와 유사하게 건물의 수호신이란 의미를 띠고 있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물을 뿜어 불을 끈다는 의미가 있다.

 

50m 높이의 전망대에서 오사카의 모습을 전망하고 있는 탐방객들. 천수각을 한바퀴 돌아가면서 전망할 수 있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그물이 튼튼하게 쳐있다.

 

西丸庭園 니시노마루 정원이 천수각의 서쪽 아래 보인다. 정원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보이는 건물이 大阪迎賓館이다.

 

7층 내부의 전시실. 풍신수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디오라마가 상영된다.

 

5층 전시실. 오사카 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토요토미는 망하고 도쿠가와 가문은 흥했다. 그때의 여름 전투를 미니어처로 재현한 전시물이다.

 

3층 전시실의 오사카 성 모형. 엄청난 규모이다. 석성이다. 이 돌은 어디서 다 구했는고?

 

권력이 미치는 전국에서 돌을 쓸어담아 오사카 성을 축조했다.

 

2층 전시실에는 각종 무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투구쓰고 사진 찍기를 해볼 수 있다.

 

1층에서는 기념품을 살 수 있다. 와우~

 

10시. 우리가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버스들. 해자 바로 옆에 주차장이 위치한다.

 

10시 30분. 왔다. 쇼핑 센터에!!! 

 

입구에서 약파는 아지매들. 어디서 약을 팔아~~

 

다 쓸어담겠어~ 라는 자세를 갖고 쇼핑센터로 들어갔다.

 

엄청나게 쇼핑을 해댔다. 뭔지 모르겠지만 무려 1천 엔어치 상품을 구매했다.

 

나와서 동네 구경한다. 바로 앞에 위치한 지하철 역 입구에 자전거들이 장사진이다. 환승한 사람들이 두고 간 것 같다. 자전거들마다 모두 등록 스티커가 붙어 있다. 청수곡 고교 학생의 097번 자전거.

 

12시 50분. 덴포잔 부두에 도착하였다. 대관람차는 언제 한번 타보려나...

대관람차를 타는 대신에 출국수속을 하였다. 여권에 도장 하나 추가...

 

2시 20분. 환송식이 있었다. 밴드도 나와서 음악을 뿌려준다.

 

색종이 띠도....

 

대한민국에서 방문했던 우리들을 환송해주기 위해 나온 오사카 시민들. 환송을 마치고 기왕 나온 김에 덴포잔 마켓 플레이스에서 주말을 즐긴다.

 

색종이 띠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남겨진다.^^

 

바이바이~ 나라사요~~~~

 

오후 2시 40분. 그렇게 이별을 아쉬워 하는 오사카 시민들을 뒤로 하고 출항하였다.

 

뒤따라오던 소방선이 또 이별이 아쉽다고 한다.

 

헤어질 결심을 했다....

 

3시. 그렇게 그렇게 없어질 흔적을 남기면서 오사카 항을 떠나 부산항을 향했다.

 

오후 4시. 아카시 해협의 아카시 대교 밑을 지나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한다.

 

4시 15분. 벌써 석양을 준비하는 하늘.

 

오후 5시. 선내 식당에서 저녁 식사.

오후 7시 30분. 선상 대학.

 


 

2004년 12월 12일 일요일의 해가 떠올랐다.

 

오후 1시. 부산항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코앞이다.

 

이별할 때가 되어서야 뒤를 돌아본다. 후지마루를 본다. 미츠비시에서 1989년에 출생한 배였다.

 

우리의 귀국을 환영해주던 '날아다니는 배'.

 

환영인파의 열렬한 환영. 감사~ 감사~

 

환영 축포를 쏴주려다가 모두 실탄 밖에 없어서 아쉽게 축포는 생략....

 

1시 50분. 밧줄을 걸었다. 접안하였다.

 

요렇게 항해하였다. 도착할 즈음에 항적을 그린 지도를 가져가라고 방송해주더라.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하고 바로 해단하였다.

KTX로 서울로. 지하철 타고 집으로.

 

20년 전인 2004년 12월의 일본 여행을 20년 후에 정리해보았다.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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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0일 금요일. 탐방 연수의 닷새째가 되었다. 교토의 금각사, 광륭사를 탐방하고, 아스카로 이동하여 아스카 문화를 '연구'했다.^^

 

12월 10일에도 아침 식사는 6시 30분에 시작되었다.

8시 30분. 덴포잔의 부두를 출발하여 14대의 버스들은 교토로 달렸다.

 

10시. 교토 시내에 진입하였다. 일본의 재난 대비용 아파트라고 설명하더라. 재난 발생시 필요하면 '붉은 삼각형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은 박살내고 진입해도 된다는 것이라고.

 

10시 10분. 길가의 '엔 샵'. 처음 보았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천원 샵' 같은 것이 생기더니 '다이소'로 진화했다.

 

교토는 平安 시대부터 明治 유신까지 거의 천년 동안 왕성이 있던 곳으로 역사의 도시 奈良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관광도시이다. 교토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12세기 말까지이며 6세기 한반도를 통해 전래된 불교 문화의 영향이 크다.

 

10시 20분. 킨카구지 金閣寺에 도착하였다. 원래 이름은 로쿠온지 鹿苑寺인데, 사리전인 '金閣'이 워낙 유명하여 금각사라고 흔히 불린다.

원래는 가마쿠라 鎌倉 시대의 사이온지 긴쓰네 西園寺公経의 별장이었는데, 무로마치 室町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満가 물려받아(쇼군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자꾸 밝히니까 눈물을 머금고 자발적으로 헌납당함?) 산장인 기타야마도노 北山殿를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금각을 중심으로 한 정원건축은 극락정토를 구현했다고 일컬어지며, 유명한 잇큐 一休 선사의 부친인 고코마쓰 後小松 천황을 초대하거나 중국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무대로서, 이 시대의 문화를 기타야마 北山 문화라고 부른다. 요시미쓰 義満 쇼군이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절이 되었으며 무소 소세키 夢窓 국사가 개산하여, 요시미쓰 義満의 법호 로쿠온인도노 鹿苑院殿에서 두 글자를 따 로쿠온지 鹿苑寺라고 명명한 것이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금각사 경내도. 한글판 금각사 리플릿에서 스캔하였다.

 

금각 앞에 위치한 鏡湖池를 중심으로 아시하라시마 葦原島 등 크고 작은 섬과 당시의 지방 영주들이 헌납한 名石들이 배치되어 있다. 서쪽의 衣笠山을 배경을 한 이 정원은 무로마치 室町 시대의 대표적인 池川回遊式 정원이다.

 

주지가 머무는 方丈 북쪽에 위치한 교토 3대 소나무 중 하나라는 리쿠슈노마쓰 陸舟之松 소나무. 배의 모양으로 보이도록 손 본 소나무다. 교토를 대표하는 3대장 중의 하나라면 조금 더 그럴싸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아랫쪽에 받침대를 대서 억지로 만들어놓고는... 거긴 눈을 주지 않나보다.

 

녹원사라는 원래의 이름보다 금각사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

1950년에 견습승려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며 불을 질러 전소되었었다고 한다. 1955년에 복원되었는데, 대충 작업했는지 금박이 박리되는 문제가 생겨 1980년대에 2차, 1990년에 3차 복원을 실시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화재가 발생하기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을 참고해보자. 이것이 더 멋스럽다. 복원이 아니라 흉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사진 출처: https://ganshoji.com/publics/index/45/detail=1/b_id=1304/r_id=5984/)

 

榊雲.

 

불당인 不動堂. 본존으로 석부동명왕이 모셔져 있다. 

 

11시 20분. "전차를 주의"하면서 우리 버스는 교토 시내를 달린다.

 

11시 30분. 코류지 廣隆寺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講堂을 탐방하기 시작한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강당, 왼쪽의 나무들 속에 숨어 있는 건물이 쇼타쿠 태자를 모신 태자전이다. 중간의 작은 구조물은 태진전이다. 왜는 6세기 중반에야 불교를 받아들였다. 삼국에서 경쟁력으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쇼타쿠 태자는 불법을 받아들이면서 신라인 하타(秦)씨 집안사람 秦河勝에게 절을 경영하도록 하였고, 蜂岡寺가 창건되었다.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다가 廣隆寺가 되었다. 태진전은 광륭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는 秦河勝의 공덕을 기리는 곳이다.

 

영보전을 새로 지어 신영보전이라 하더라.  영보전에는 여러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삼매에 몰입하여 느끼는 환희가 넘치면서 얼굴 전체에 웃음이 피어난 것이다. 신라에서 조성한 불상인데,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같은 시기에 모셔졌을 것으로 보이는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대한민국 국보 제83호)을 보자. 똑같다. 다른 부분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왜 그럴까요?

 

11시 50분. 광륭사 주차장. 대나무가 거하게 자라고 있었다.

 

12시 30분. 광화소학교에서 신입생을 모집하는가보다. 원서배포중~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면서 아스카로 달려갔다. 바쁜 하루였다.

 

오후 2시 50분. 아스카 석무대에 도착하였다.

飛鳥 아스카는 일본의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6~7세기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를 꽃피웠던 곳으로 고문화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아스카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석무대, 고송총 고분, 飛鳥寺 등이 있다. 아스카의 역사적 풍토와 문화재의 보존 활용을 위해 1975년 개관한 아스카 자료관은 불교가 전해진 6세기부터 나라로 수도가 옮겨진 8세기 초까지의 飛鳥와 萬葉集, 飛鳥의 宮, 돌, 고분, 사찰, 다카마쓰 고분 출토품을 비롯하여 飛鳥寺 탑과 궁터, 절터의 출토품을 전시하고 있어 아스카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곳이다. 

시기적으로는 6세기 말에서 약 100년 간을 가리키지만,  '아스카 시대'라고 하면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대혁명이 이루어져 귀족의 연합체였던 국가가 천황제 율령국가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일본의 국가성립의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스카 지역 일대의 문화 유적지 분포 안내도. 넓은 지역에 많은 유적지가 분포하고 있다. 석무대 ⇒ 다카마쓰 고분 ⇒ 아스카 자료관 순으로 관람을 진행하였다.

 

石舞台古墳의 모습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커다란 네모난 모양의 고분이다. 봉토가 완전히 없어지고 거대한 석실이 노출된 상태이다. 천정돌이 넓고 평평하여 옛날에는 춤추고 노는 곳인 줄 알고 石舞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아무나 들어가 볼 수 있다. 3차에 걸친 발굴 조사결과 집형태의 석관판이 발견되었고, 돌로 축조된 웅덩이에 둘러싸여 있으며 작은 고분군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석무대 주변에 모여 강의를 열심히 수강중인 탐방객들. 고분의 축조는 7세기 초 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6세기 후반에 정치 권력을 장악했던 소나노 우마코 蘇我馬子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경 씨족 집안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에 가장 강대한 세력을 일군 것이 蘇我 씨족이었다고 한다. 蘇我 씨 집안은 불교의 수입을 매개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고대국가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의 수용 여부를 놓고 다른 강대한 파벌 세력과 격렬한 권력다툼을 30년이나 이어갔는데, 소나노 우마코 蘇我馬子 시대에 이르러 정적을 타도하고 승리하여 불교를 공인받게 되었다. 왕실에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까지 세력이 컸기에 왕릉을 능가하는 석무대 고분의 주인공이 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스카는 과거에 왕도였지만 지금은 1,500호 정도에 인구가 7,000여 명인 한적한 농촌이면서 '유적의 마을'이다.

 

3시 40분. 다카마쓰 고분의 모습이다. 공사중이었다.

천황의 묘라는 오랜 기록도 있기는 했다지만 1972년의 정식 발굴조사에 의해 아름답고 뛰어난 채색 벽화가 있음이 드러났다. 현재는 벽화 보존을 위해 내부 관람은 금지되어 있다. 고분 자체는 도굴당해 매장품이 대부분 손실됨으로써 피장자나 축조 연대를 판명하기 어렵지만 7세기말~8세기초로 추정되며, 당연히 상당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벽화 양식에 일본에 없던 것이라 역사상 대발견으로 여겨진다.

 

고분의 네 면에 모두 벽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작이 위치하는 남쪽벽이 도굴 통로로 이용되면서 파손되어 버렸다. 안타까운 결과이다. 청룡, 현무, 백호 방향의 벽에 아름다운 채색 벽화가 남아 있으며, 모사된 작품을 '고분벽화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동쪽 벽면의 벽화이다.

 

서쪽 벽면의 벽화이다.

 

고분이 남북 방향으로 길고 동서 방향으로는 짧아 북벽에는 현무 그림만 남아 있다. 그래서 남벽에는 주작의 그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백호 머리 위에 그려진 달 속에 동물을 그린 것,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 것, 인물상의 얼굴 모양과 모자 등의 복식 등을 보면 덕흥리, 수산리 고분, 쌍영총 벽화 고분 등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너무나 유사하다. 때문에 백제계의 정착지로 알려진 아스카 지역에 고구려계 세력이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었을 것을 반영하는 유적이라 일본의 고대사 해석에 혼란을 주고 있단다.

 

오후 3시 50분. 날이 흐려 12월이 더욱 쓸쓸한 겨울(?)로 느껴지는 역사의 도시 아스카.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스카. 비닐 하우스들이 보이고, 과수원에서는 귤의 수확도 이루어지고 있더라.

 

오후 5시. 奈良文化財研究所飛鳥資料館 아스카 자료관에 도착하였다.

여기에는 飛鳥宮, 飛鳥石, 飛鳥 고분, 다카마쓰 高松塚 고분, 飛鳥寺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똑같은 모양의 백제 기와와 飛鳥 기와가 나란히 전시되어 飛鳥 문화가 곧 백제 문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6시. 오사카 항구로 돌아가던 중 고속도로 요금소. 

요금소에 근무자가 모두 노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자리 나누기의 일환이라 하더라. 우리나라 처럼 장시간의 혹독한 근무 조건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짧은 시간으로 나누어 여러 사람들이 근무하는 형태라고 하더라.

 

밤 9시 30분. 오사카 남항에 정박중인 집(?)으로 찾아간다. 원래 6시에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는데, 열심히 탐방 연수에 몰두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2004년 12월 10일의 하루가 저물었다. 탐방 연수 5일째가 저물었다.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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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2004년 12월 9일에 오사카 항구를 출발하여 나라의 동대사, 법륭사를 관람하고 후지마루가 정박중인 오사카 항구의 덴포잔 부두 天保山岸壁로 돌아와 유명한 오사카 수족관(海遊館)을 관람하였다.

 

크루즈 후지마루에서의 아침식사는 매일 6시 30분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일정하다.

8시. 오사카 항을 출발하면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한다. 부두 앞쪽으로 보이는 Tempozan Bridge 天保山大橋.

부두 한쪽 끝에 작은 둔덕이 있다. 높이가 무려 4.53m인데 天保山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부두 이름, 부근을 지나는 교량 이름,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등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정상에는 '천보산 정상'이라는 표지도 있으며, 천보산 산악회도 있다. 산 이름이 붙은 곳들 중 일본에서 가장 낮은 산이었다. 센다이의 히요리 산이 도호쿠 대지진에 따른 지진해일로 6m였던 봉우리가 3m로 깎여나가면서 텐보산이 두번째로 낮은 산으로 순서가 밀렸다고 한다. TMI....^^

 

"역사가도". 일본에서 밀고 있는 곳이다. 일본의 역사가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세~아스카 사이의 '古代史 존', 나라 일대는 '奈良時代 존', 교토로 이어지는 지역은 '平安~室町時代 존', 오사카까지 '戰國~江戶時代 존', 오사카~고베 사이는 '近代 존'으로 유형을 나누었다. 권력의 핵심 지역의 이동에 따라 해당 시기의 역사문화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시기별로 ZONE을 구별하였다.

이번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연수에서는 12월 10일에 나라 시대 유적인 동대사를 방문하고, 아스카 시대를 상징하는 법륭사와 아스카 자료관을 관람하였다. 12월 11일에 방문한 오사카 성은 전국~강호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지라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이런 '레키시 카이도 歷史街道'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일본 문화에 대한 정보 전파의 기초를 확립하고, 새로운 레저 공간을 활성하는 한편, 지역의 문화 유산을 최대한 활성화 함으로써 지역 커뮤니티의 질을 높이는데 목적을 두고 추진되고 있다.

 

9시 10분. 톨게이트. 阪神高速 天保山料金所. 16번, 13번, E92 고속도로를 순서대로 이용하여 달려갔다. 

 

9시 20분. 13번 고속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는 버스의 창 밖으로 멀리 오사카 성이 보인다.

 

9시 50분. 奈良 나라시에 들어왔다. 平城宮跡歴史公園 부근에 위치한 본조사가 길가에 보였다.

 

東大寺二月堂 2층에 올라 바라본 奈良 나라 시내의 모습.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奈良 나라는 구릉지로 둘러싸인 야마토 大和 분지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794년 京都 교토로 천도할 때까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 최초의 국가를 세웠던 곳이다. 그래서 국가를 뜻하는 우리말 '나라'가 이곳의 지명이 된 것이다. 나라는 일본고대사의 시작과 건국신화의 무대가 되었으며, 최초의 국가형태인 大和 정권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나라에는 석기시대의 유적과 함께 고대 분묘와 찬란한 불교문화와 귀중한 예술품이 많이 산재되어 있어 도시 자체가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특히 나라 시내 동쪽에 위치한 나라 공원에는 흥복사, 동대사, 춘일대사, 약초산 등 나라의 대부분의 명소를 품고 있다.

대불로 알려진 동대사는 거대한 대불전을 비롯한 국보급 건축물과 불상을 많은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사원이다. 또한 법륭사에 있던 고구려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벽화는 소실되었지만, 중문, 탑, 종루 등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2004년 12월 9일 목요일 아침 나라시의 거리 풍경.

 

10시. 세계유산 도다이지 東大寺도착하여 하차하였다.

 

사슴 상들이 격렬하게 환영해주고 있다. 물리지 말라, 뺏기지 말라 같은 주의사항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뭐라 뭐라고 "주의"사항들이 써 있다.  나라공원의 사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야생동물이다! 나라의 사슴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만 애완동물은 아니다. 가까이 가거나 몸을 만지면 위험해요~

5~7월은 출산기다. 새끼 사슴 가까이 가면 엄마 사슴한테 많이 혼난다. "우리 애가 어떤 애인데!!!! 왕의 DNA..."

9~11월 하순 사이는 사슴들의 발정기다.................어...

사슴이 갑자기 뛰면 위험하니 알아서 잘 피하도록!

 

사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사슴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도다이지, 동대사에 입장한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대문으로 들어와 중문을 지나면 동대사 대불전을 만날 수 있다.

 

평일 10시 반에 도다이지 경내에 있을 수 있는 학생들은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체험학습? 졸업앨범 촬영?

 

"신경 끄고, 저쪽 가서 설명이나 들어..."

뿔 떨어진 사슴이 주변으로 어슬렁 거린다. 나라 시는 녹각 제품이 특산품이다. 

 

동대사의 배치도를 숙지하자.

남대문으로 입장하여 대불전을 탐방하고 동락문으로 빠져 행기당, 이월당, 법화당경고 순으로 탐방을 이어갔다.

 

우중한 날씨라 사진이 잘 안나왔다고 치자. 동대사의 중심인 대불전으로 찾아간다.

 

동대사의 대불전은 건물 높이 47.5m, 동서 길이가 37m, 남북은 50.5m인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745년에 동대사의 착공이 이루어져 748년에 法華堂三月堂)이 먼저 준성되었다. 708년 신라사람 金上元이 찾아낸 구리광맥에서 생산된 구리를 이용해 747년부터 대불의 주조가 백제사람 군나가노기미마로 國中公麻呂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백제 멸망 이후 왜로 이주한 백제왕 敬服이 749년에 황금 900냥을 헌납하여 높이가 15m에 이르는 盧舍那坐佛이 완성되었다. 대불을 모시는 대불전은 신라사람 이나베노모모요 猪名部百也였다. 752년에 대불의 개안법요식이 거행되었다.

 

동대사의 대불. 대불 뒷편의 光背는 771년에야 설치되었다고 한다.

 

본존상 동편 高柱 밑동에 구멍이 뚫려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보기도 하는... 빠져나가고 있다. 기둥의 이 구멍이 본존의 콧구멍 크기와 같다고 하니 대불의 규모가 짐작된다. 

 

동대사 대불전이 백제인들의 불심과 기술로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분위기는 일본풍인 것인가....

855년에 대불의 머리가 떨어져 861년에 수리가 되었다고 한다. 1180년에 불이나서 대불이 상하였고 1185년에 재현되었지만 불상의 모습이 달라졌다. 백제 조각의 원형은 사라지고 일본사람을 닮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대불전은 1180년에야 중건되었는데, 1709년에 다시 지으면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백제의 것을 만들어 놓았더니 세월이 지나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변형되어 버렸다.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지만 옛모습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1980년에 크게 수리하면서 완전 깔끔해져 더욱 세월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불전 귀퉁이에 창건 당시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현재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불전 입구에서 향을 올릴 수 있다. 앗.. 12호차 깃발이...

 

대불전 밖에 모셔진 목조 불상 핀돌라 Pindola Bharadvaja. 신비한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는데....

 

동문으로 나서면 보이는 七重塔相輪 Asoka Pillas.

 

11시. 행기당 앞에서의 강연. 행기당은 에도 시대의 건축물이다. 내부에 行基菩薩坐像을 모시고 있다.

민중에게 불교를 널리 포교한 대단한 신망을 가진 行基 스님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신도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이 동대사 건설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원래 行基菩薩坐像은 이코마 시의 죽림사에 모셔져 있는데, 그 좌불의 모각상이라고 한다. 행기당 내부의 좌불 모습이 언듯 보인다.

 

종루 뒤에 사슴들이 숨어서 몰래 청강하고 있다.

 

동대사에서 대불전의 대불 말고도 우리 선조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장소들이 많으며, 그것들을 놓치면 탐방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으니 대불전 밖에 있는 선조들의 유산의 잔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강사님 말씀 하나 하나를 선생님들은 집중하여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11시 20분. 이월당을 만난다. 음력 2월에 법회가 이루어지는 장소라서 二月堂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동대사를 창건한 良弁 스님의 高弟 実忠じっちゅう)이 창건하였다고는 하지만 이후 여러차례의 중건을 통해 규모가 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향효과가 좋아 법회를 진행하는데 적합하다고 한다.

 

2층에 오르면 나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월당을 탐방하여 조사활동에 열중하는 선생님들.

 

11시 50분. 東大寺法華堂経庫. 헤이안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창고 건물이다.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에 경전 등을 보관하던 창고였지만, 중세 이후 쌀창고로 이용되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위치도 여러번 이전되었다. 나라 시대에 흔하게 사용되었다고 하는 校倉 방식으로 건축된 건물이다.

 

校倉 방식을 삼각형, 사각형의 목재를 사용하여 바깥쪽으로 능선 모양이 드러나도록 만든 것이다. 귀틀집과 같은 형상이지만 각진 목재를 사용하여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아 내부로 습기가 잘 들어오지 않고 건조는 잘 되는 특징이 있어 창고 건물 양식으로 적합했다. 법화당 앞에 위치하며, 옆에 어발탑이 세워져 있다.

네 방향으로 경사진 기와 지붕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러한 기와 지붕은 아스카 시대에 사찰 건축 기술과 함께 전래된 것이다.

 

무서운 사슴  사마가 자꾸 주변을 얼쩡거린다. 껌 좀 씹어본 사슴 같다.

 

1시에 만난 사슴들. 이 동네 사슴들은 여름털과 겨울털이 사뭇 다른 모양이다. 나라 시내의 어떤 식당에서 어떤 메뉴의 어떤 식사를 했을 것 같다. 이제는 우리가 사슴들과 헤어질 시간~~ 떠난다 법륭사로~~

 

오후 2시 20분. 호류지 法隆寺에 도착하였다. 입구에서 다들 下馬하였다.

 

중문 앞에 모여 법륭사에 대한 맛을 보고 입장하였다.

호류지 法隆寺는 아스카 飛鳥 시대(6세기 중엽~8세기 초)의 건축 양식을 오늘날에 전해주는 사찰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다.

607년에 스이코 推古 천황과 쇼토쿠 聖德 태자가 요메이 用明 천황의 유지를 이어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670년 법륭사가 화재로 전소되고, 북동쪽으로 자리를 옮겨 708년에 중건되었다. 그런데 金堂에 고구려 스님 曇徵이 그린 벽화가 있다. 1949년에 불에 타 손상을 입기까지 뛰어난 작품으로 숭상되었다. 담징 스님이 고구려에서 건너가 활동하던 시기가 610년부터였는데, 708년에 중건된 건물에 벽화를 남겼다고 하는 부분에서 중건 시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담징의 벽화를 일본에서는 그냥 작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금당은 1949년의 화재 이후 복구 공사를 하여 1954년에 세운 건물이다. 

 

금당 벽화.

 

2004년 12월 9일 현지에서 받아온 리플릿을 스캔한 법륭사 경내 지도를 통해 가람의 배치를 확인해보자.

법륭사는 크게 금당과 5층 목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이인 西院 가람과 유메도노 夢殿 불당을 중심으로 한 도인 東院 가람으로 나누어진다. 약 187 제곱킬로미터 면적의 경내에 아스카 시대를 비롯한 각 시대의 진수를 결집시킨 건조물들이 모여있으며,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1993년 12월에 일본 문화재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금당은 대웅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그래서 금당 내부에 아스카 시대의 금동석가삼존상, 금동약사여래좌상,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등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이외에 헤이안 시대의 목조길상천입상, 비사문천입상도 안치되어 있다. 소실된 벽화는 모조 벽화로 대체되어 있다.

금당은 건축 과정에서 정황이나 기록상 백제의 목조 건축 양식을 상당부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난간의 자형 대공, 하앙의 사용과 배치, 자형 난간 등의 특징적인 부분들은 백제 등 삼국시대 유물과도 일치하는 점이다. 또한 배흘림 양식 기둥, 독특한 柱頭의 형태 등은 역시 한국 건축의 특징과 유사하다. 배흘림기둥은 금당, 오중탑, 중문과 회랑의 기둥들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배흘림기둥은 서역에서 전래된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12세기 이후까지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백제인이나 신라, 고구려인들이 경영한 건물들에서만 나타난다.

 

기둥의 윗부분을 보와 연결시켜주는 부분의 형태가 고구려식 柱頭라고 한다.

 

금당과 나란히 五重塔이 배치되어 있다.

5층 목탑은 길게 빠진 처마의 우아함이 돋보이며, 이후 일본 목탑의 전형이 된다. 이 역시 인()자형 대공와 하앙이 사용되었다. 이 목탑의 구조 중심에는 거대한 심주가 있는데, 이는 탑 꼭대기에 있는 금속 장식인 철반을 지지하기 위함이고, 탑은 다른 작은 기둥들과 공포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 이 목탑은 사람이 올라갈 수는 없다. 높이는 31.5m이며, 위로 갈수록 조금씩 작아진다. 체감률이 크기 때문에 층은 1층의 면적의 절반이다. 1층 처마 밑에 한층 낮게 덧댄 차양 부분은 그 양식을 봤을 때 금당에 있는 것보다 더 뒤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법륭사가 위치하여 역사가도의 중요 뽀인트인 이카루가 斑鳩 마을의 가옥. 일본식 가옥이다.^^

 

법륭사 관광안내소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 4시 20분. 오사카 만의 하늘.

 

4시 30분. 오사카 항의 덴포잔 부두 天保山岸壁 한쪽에 위치한 오사카 수족관(海遊館)을 관람하였다.

 

안내 리플릿의 일부.

 

수족관 내부의 이모저모...

 

부두에는 대관람차도 돌아간다. 재밌겠다.^^

 

오후 5시 10분. 오사카 만의 황혼.

 

5시 30분. 후지마루의 선내 식당에서 저녁식사....

 

오후 8시. 선상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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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인 2004년 12월 8일에 온천의 도시 벳푸에 있었다.

벳푸의 지옥 순례를 했다. 동산 위의 조그만 학교를 방문하고 자연동물원에서 원숭이들을 만났다. 오이타 항에서 후지마루를 만나 승선...

(구글지도에서 '경로찾기'를 하고 '목적지'를 하나씩 추가하면 도로를 따라 대충 경로를 쭈우욱 그려준다. 신기하다. 다만 중간에 교통수단변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공항 사이의 하늘도 날아가지만, 항구 사이의 이동은 표시해주지 못하는 한계도 아직 있다.)

 


8시. 스기노이 호텔에서 아침 식사.

호텔에서 바다쪽으로 바라보니 바다가 보인다.

 

바닷가 호텔에서 내륙 쪽으로 바라보니 여기저기에서 김이 새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 온천의 도시 다웠다.

別府 벳푸는 도쿄 인근의 熱海 아타미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온천 및 관광도시이다. 동쪽으로 잔잔한 벳푸 만을 끼고 있으며, 시내 곳곳에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온천지가 펼쳐져 있다. 벳푸 역 주변이 가장 번화한 온천가로 큰길을 끼고 크고 작은 여관과 기념품상가, 캬바레, 오락실, 극장 등이 밀집해 있다. 別府八湯을 비롯한 온천의 수가 3천 8백여 개에 이르며 온천열을 이용한 채소, 화훼 재배가 성하다.

 

일정이 많지 않은 날이라 여유 있게 하루를 시작하였다. 10시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지옥'을 제발로 찾아갔다. 733년의 豊後風土記 분고풍토기에도 기록이 등장할만큼 오래된 온천의 역사를 갖고 있다. 왈, "증기, 열탕, 진흙이 분출하여 접근할 수 없는 불쾌한 토지"라고 하여 "지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온천 지대의 분출하는 물에 기포가 포함되어 있어 마치 끓는 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온도가 낮은 경우가 많은데, 벳푸의 온천은 100도에 가깝다고 한다. 

 

 

벳푸 지옥 순례 べっぷ地獄めぐり가 벳푸 관광의 하일라이트로 알려져 있다. 지옥의 위치나 알고 가자.

혈지 지옥, 명반 온천, 바다 지옥 순서로 탐방하였다.

 

10시 15분. 길가에 지옥에 살 사람을 모집한다는 광고판이 보이더라. 지옥의 '파미리호므'.

 

10시 20분. 피의 연못 지옥에 도착하였다.

 

온천수의 온도가 100도에 가깝다고 하더니 확실히 김이 많이 난다.

 

수증기가 눈앞을 가리운다.

 

"피의 연못 지옥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천연 지옥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붉은 열 진흙 연못"입니다. 지하의 고온, 고압 하에서 자연스럽게 화학 반응을 일으켜 생긴 산화철, 산화 마그네슘 등을 포함한 붉은 열 진흙이 지층에서 분출, 퇴적하기 때문에 연못 일면이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라고 소개되어 있는 血池地獄의 모습이다. 온천수에 진흙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진흙속에 산화철, 산화마그네슘 함량이 높아 붉게 보이는 것이다. 과연 피처럼 붉어 보이는가??

 

2004년 12월 8일 현지에서 받아온 쪼꼬만 안내장을 스캔해보았다. 이건 빨갛다.

이렇게 붉은 온천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연못의 면적은 430평, 용출구 면적은 230평이며, 하루에 1,800kl의 용출량을 보인다는 정보도 적혀있다. 수온은 78도이며, 실측해본 깊이는 30m인데 180m 정도는 될 것으로 추정된단다. 점토로 채워져 있어 정확한 깊이를 측정하기 어렵다. 1875년 이후 아홉차례의 폭발 기록이 있는 곳이다.

 

족욕을 즐길 수도 있다.

 

벳푸에서 족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지옥들이 네 곳 있다. 足湯이라 표현한다.

 

10시 55분. 다른 지옥 구경을 구경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묘반 온천 明礬温泉이 있는 곳이다.

 

일본의 독특한 목욕 문화를 반영한 곳이다. 가족이 모두 발가벗고 목욕하는... 가족탕이다.

입구에 '여기는 견학하는 곳이 아닙니다. 가족용 온천입니다.'라고 빨간 글씨로 적혀 있다. 남의 가족이 온천하는 모습이 궁금하여 들여다 보는 한국사람들이 좀 있었나보다. 물론 일본어로도 적혀 있다.

 

묘반 온천에서 판매하는 의약부외품이 있다. '유노하나 '는 온천 성분을 결정화한 입욕제이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데, 알아서 잘 해결하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국내 수입 많이 하더라. 생산량이 그렇게 많나???

 

11시 30분. 바다 지옥 입구에 도착했다. 원래 벳푸 지옥 순례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쪽에 지옥들이 많이 모여 있다.

 

벳푸 명소 바다 지옥.

 

바다 색깔처럼 보여서 바다 지옥이다. 온천수에 황산철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이러한 코발트 블루 색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온천의 열을 이용하여 열대성 수련을 재배한다. 200m 아래에서 98도의 온천수가 솟는다.

 

안내판.

 

바다 지옥의 시설 배치도. 한쪽에 바다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 있다. 赤池.

 

혈지 지옥, 피의 연못 지옥과 유사한 붉은 진흙탕이다. "なんと池地獄もあるんです!"라고 홈페이지에 설명하고 있다. '무려, 붉은 연못 지옥도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족탕, Hot Spring of a leg, 발의 온천도 있다. 족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벳푸 시내의 어떤 식당을 찾아 어떤 점심 식사를 했다.

1시 20분. 벳푸 시내의 산속의 자그마한 학교를 찾았다. 동쪽으로 바다를 면하고 있는 벳푸시의 서쪽 산 위에 있는데 학교 이름은 '동쪽 산'이다. 동산소학교.

 

산 위에 있는 학교니까 올라가야 한다.

 

산위에 위치한 동산 소학교. 경치 죽인다~~~

 

학생들. 어, 음~~~

 

거대한 죽창의 쓰임새가 궁금했다.

 

가볍게 둘러보고 떠난다. 일본 자동차 회사는 작은 차를 참 귀엽게 잘 만든다. 사까!?

 


오후 2시 30분. 오이타 만에 면해 위치한 다카사키야마 자연동물원을 찾았다. 원숭이가 대표적이라 원숭이 공화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4년에 받아온 리플릿을 스캔한 것이다.

에도 시대부터 원숭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1952년 오이타 시장이 흩어져 있던 원숭이들을 高崎山에 모아 자연동물원으로 개원했다. 1,200여 마리의 원숭이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다네.

 

원숭이들과 미팅할 때의 주의사항들이다. 지키기 참 쉬운 것들이다.

 

사육장의 철책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끼리 산다.

 

원숭이들과의 미팅을 즐긴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과의 접촉이 일상인 친구들이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도 지나가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만지거나 눈을 쳐다보지 말라는 것인 것 같다. 

 

이제 고만 가~~!

 

가라 하니... 간다.

 

오후 3시 10분. 오이타 만.

 

위험한 커플이 보였다. 다치면 우짤라꼬!!!

 

지진과 화재에 대비한 구조를 가진 아파트라 하더라. 지진이 발생했을 때 고층에서 깨진 유리가 아래로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베란다 밖을 유리로 막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재난 발생시 옆집으로 쉽게 대피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오이타 항의 부두에 정박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후지마루.

 

승선하였다.

 

이런 것 잘 하더라. 서비스. 이틀을 함께 했던 버스 기사와 직원들이 부두에 모두 나와 손을 흔들며 환송해준다.  나라사요~

 

3일차이다. 오늘의 선상대학. 시를 공부하고 섹소폰 연주에 흠뻑 빠졌다.

 

와~ 멋지다~

(다음 포털에 개설되었던 이분의 카페에도 가입했었다. 기가 막힌 연주 파일들을 즐길 수 있었는데, 음원 저작권 문제가 강화되면서 연주 파일들이 모두 삭제되어 아쉬웠었다.)


12월 9일 6시 20분. 싸이렌이 울리고 방송이 뭐라뭐라 나왔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아카시 대교의 모습이다.

 

아카시 대교는 아카시 해협에 건설된 다리이다.

일본의 큰 섬들 넷 중 가장 작은 시코쿠와 가장 큰 섬 혼슈 사이에 위치한 아와지 섬과 혼슈를 잇는 明石海峡大橋이다. 지진이 잦은 지역에서 견뎌내기 위해 튼튼한 현수교로 만들어졌다. 교량의 총길이는 3,911m이고 두 교각 사이의 거리는 1,991m이다. 해수면에서 중앙부의 높이는 300m라서 큰 배들도 다리 밑으로 그냥 슝슝 지나다닐 수 있다.

 

그렇게 여명 속에서 아카시 해협을 지나서 오사카 만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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