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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초 여객선터미널에서 우이도를 향하는 배편이 6시 20분에 출발한다 하였다. 그래서 일찍 서둘렀다.

숙소였던 수국민박에는 새벽비가 내린다. 시원허다.

 

도초여객선터미널에는 불이 환하다.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없다.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우이도에서 사용할 짐을 챙겨들고 승선한다.

 

선권을 제출하고 '섬사랑 6호'에 승선하였다. 스맛폰 카메라 성능 좋다. 비가 내리는 어움 속에서 출입구의 불빛만 보고 찾아갔었는데, 이런 사진을 만들어주다니...^^

 

승선 후 여객선 선실의 모습.

 

도초도를 지나면 외해라 할만 하지만 파도는 없었다. 잔잔한 바다를 주욱 미끄러지면서 이동하였다.

 

도초항에서 돈목항까지 20.4km를 65분 만에 이동하였다. 

 

6시 52분. 멀리 있던 우이도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구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성촌해변 쪽의 모습이다.

 

우이도의 돈목항으로 접근하면서 그 이름도 유명한 "우이도 풍성사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2박3일의 여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나서 반갑구나.^^

그런데 사구의 아랫 부분이 움푹 꺼져 있다. 붕괴된 것이다. 어쩌쓰까...

 

돈목항에서 모두 하선하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우이도 상륙 기념 사진.

 

민박집 사장님께서 화물차를 동원하여 우리 짐을 옮겨주셨다.

 

우이도의 일반 현황에 대한 현지 가이드의 상세한 안내.

 

과거 우이도의 돈목마을에서 사용하던 우물이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만들고 물이 귀한 섬에서 물이 마구마구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우물의 이름을 湧溢泉이라 하였다.

 

'슈퍼'는 없지만 '우이슈퍼 민박'이다. 숙소가 가장 깨끗한 민박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다른 민박집보다 비싸다. 예약했던 팀이 날이 안좋다고 하루 일찍 떠나면서 생긴 빈 자리를 우리 팀 가이드가 찾아내서 예약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침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의 짬을 이용하여 동네 한바퀴를 돌아보기로 했다. 큰 마음을 먹고 커다란 숙소를 지어 돈목의 숙박업을 독점하려 시도했다가 여러 이유로 포기한 흔적이란다. 꽤 공사가 진행된 상태였던 것 같은데...

 

돈목 해변을 지나 건너편으로 '풍성사구'가 예쁘게 보인다. 기다려랏!

 

돈목해변의 사빈에서 내륙 쪽으로 모래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목해변에는 드론 이착륙장이 큼지막하게 건설되어 있다.

 

돈목마을에서 예리마을로 이어지는 이정표. 길에서 만난 여행객이 예리마을까지의 트래킹 코스를 '강추'하더라.

 

어느 탐방객의 뒷모습.

 

우이도에서 만난 아침상. 우~~~~~~~~~~~와~~~~~~~~~~~~~~~

 

 

아침식사 후 쉬다가 9시에 우이도에서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오전에 돈목마을을 출발하여 대초리고개를 넘어 진리까지 다녀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풍성사구'는 아끼고 아껴 오후에 답사를 진행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돈목에서 대초리고개, 몰랑 고개까지 거의 직선상으로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거기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예상보다 진리까지의 이동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른 트래킹 꾼들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호기심을 해결하려 하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드론도 만지작거리다 보니 많이 늦었다. 

그래서 중간에 돌아가는 안과 진리에서 선편을 이용해 돈목으로 이동하는 안을 비교하다가 만장일치로 "배"를 선택했다. 민박집에 예약되어 있던 점심을 취소하고 진리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진리에서 출발하여 돈목으로 향하는 선편은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를 거쳐서 운항하였다.

 

 

우이도의 걷는 길의 이름은 "달뜬몰랑길"이다.

"달뜬몰랑길" 지도.

 

10월 8일의 탐사 일정을 "계획대로" 힘차게 시작하였다.

 

해변에 모래가 깔리면 '사빈', 혹은 '해빈'이라 부른다. 넓게 모래가 퇴적된 지형이다. 내륙 쪽으로 바람에 날린 모래가 퇴적된 지형은 '사구'이다. 돈목해변의 사빈과 사구.

 

해수욕장 운영을 위해 설치했던 가로등이 모래에 매몰되었다. 장신의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사구가 형성된 것이다. 사구 위에 식생이 정착하면 사구 지형은 안정되게 된다.

 

사빈에서 사구 위로 올라서면 달뜬몰랑길로 접어들게 된다.

 

가로등 꼭데기까지 손이 닿을 정도로 키가 큰 거인!!!

 

골짜기 바로 옆으로 상산봉을 향하는 탐방로가 이어진다. 겨우 2.8km 밖에 안된다. 가즈아~~

 

홍게의 환송을 받으며 국립공원으로 접어든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이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런 길이 아니다. 일관된 길이다. 그냥 쭈욱 올라간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위치를 사진으로....ㅠ.ㅠ 

 

가파른 1km 길을 계속 오른 것이다. 장하다. 대초리고개에 도착하였다. 

산 아래에서 상산봉까지 2.8km라는 표지판을 보고 올라왔다. 1km를 왔다 그런데 상산봉이 2.2km가 남았단다. 산수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혼란하다. 무리하게 산을 올라 머리 속이 혼란한데....

 

습하여 식생이 아주 무성하다. 길 찾기가 어렵다. "탐방로" 표지판이 익숙치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초리"는 우이도의 내륙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지금은 완전히 버려진 공간이다. 대초리가 '대초리'였던 시절 사용했던 우물이다. 찾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황폐한 모습을 보인다.

 

이정표.

 

마을의 담장 흔적. 과거의 대초리에 대나무가 너무나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또 오르막길이다. 나만 저질 체력~ 

 

진리에서 돈목, 우이 1구에서 우이 2구 사이의 도로 건설을 위해 개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공사가 중단된 상태. 상산봉을 오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진리 마을로 향하기로 했다. 저 아래 쪽이 진리이다. 가즈아~

 

거의 다 내려왔다. 인류 문명의 흔적과 만난다. 우이도의 상수원으로 이용되는 저수지이다.

 

도로 건설을 위해 개착했던 흔적이 노두로 남아 있다.

 

길가에 정약전 서당터라는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만 있다. 

 

진리로 내려가는 길 옆으로 띠밭넘어해변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빠졌다.

 

돈목에서 넘어온 탐방로에 비하면 너무도 아름다운 길이다. 

 

능선에 오르면....

 

반대편 사면 아래로 멋진 해변이 나타난다. "띠밭넘어해변"이다.

 

멀리부터 걸어온 피곤한 탐방객을 위하여 예쁜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입었던 잠바와 바지에 의도치 않은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어 깜짝 놀랐다. 무서운 벌레~

 

아무도 없는 깔끔한 해변이 펼쳐져 있다.

 

가위, 바위~ 보! 이겼다~~~

 

짐을 챙겨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30여 명 정도의 단체 트래킹 멤버들을 지나쳐 내려와 진리로 들어서니 도처에 돌담이 보인다. 제주도의 돌담과 신안군의 돌담을 비교 분석한 연구가 있었는데...

 

우이도는 손암 정약전 유배 적거지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냥 이곳이 그랬을 것이라는...

 

진리항에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정약전, 그는 무엇을 기대하였던 것일까...

 

정약전 유배지를 답사하는 탐방객들.

 

옛마을 예리 마을은 돈목 마을에서도 진리 마을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온동네가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백서향이다.

 

우이도 하면 홍어장수 문순득으로 유명하다. 

 

흑산도에서 표류하여 필리핀까지 갔다 생환한 사람이라 한다. 그 기록을 '표해시말'에 남긴 바 있다.

 

진리항 선착장에서 문순득 아저씨를 만나볼 수 있다.

 

우이도의 시스템은 민박집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하한 사정으로 인하여 다른 민박집에 식사를 부탁한다? 안된다! 진리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해결하려 했을 때 부딪힌 문제가 그것이었다. 심지어...

수퍼에서 컵라면을 판매하지만 뜨거운 물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 이장님 댁에 부탁하여 뜨거운 물을 얻고 수퍼에서 컵라면을 구입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뜨거운 물 뿐만 아니라 김치, 국물, 밥까지 제공해주셔서 너무도 고마웠다. 우이1구 이장님&사모님 만세~

 

그리고는 진리항 선착장에 나가서 놀았다.

 

진리항 선착장 안쪽에 특이한 시설이 있다. 이 접안 시설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우와~~~

 

열녀비가 아담하다. 열녀비각 안쪽에 한마리 고양이가 세월을 즐기고 있다.

 

선창가의 드론맨들~~~ 드론을 날리지 않고 들고서 놀다니~~~

 

드론과 함께 놀기~~~ 

 

연식이 좀 된 드론이다 보니 종종 조종자를 난감하게 한다. 잠시 드론이 조종기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바람에 난감했다. 배터리를 바꾸어주니 정상 작동.

 

놀다보니 '섬사랑 6호'가 접안하였다. 서둘러 표를 제출하고 탑승한다.

 

진리항을 떠나는 여행객.

 

돈목항에 도착하였다. 금방이다.ㅎ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 4시 경에  "풍성사구"로 향했다.

 

우이도의 풍성사구를 바로 밟고 오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정해진 탐방로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탐방로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풍성사구'를 향하는 탐방로 전체가 모래 퇴적으로 이루어진 사구 지형이다.

 

모래 세상 속으로, 가즈아~~~

 

돈목해변 방향을 배경으로 셀피를 남겨보았다.

 

우이도의 풍성사구는 외관으로 보이는 약 50m 높이의 등반형 사구 그대로 그만큼의 모래가 쌓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능선의 낮은 부분에 모래가 덮여 있는 것이다. 북쪽 사면은 기반암이 드러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산지 능선 위에 이동된 모래가 두껍게 퇴적되어 만들어진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돈목해변 방향으로 쌓인 모래는 경사가 급하여 불안정한 상태이다. 따라서 사구 보호를 위해 이쪽 방향에서의 등반은 금지되어 있다. 지난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서 상당 부분의 침식이 붕괴된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대사구의 붕괴 구간의 모습.

 

성촌해변 방면을 바라본 사진이다. 해변으로부터 북풍 계열의 바람이 불 때 모래가 날려올라온 흔적이 사구 표면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보인다. 성촌해변에 쌓인 모래가 바람에 의해 돈목해변으로 날리면서 형성된 '풍성사구'인 것이다.

 

우이도 사구지대는 우이도의 북서 방향으로 열려있는 성촌해변에서 배후사면으로 이어지는 사구와 서쪽방향으로 여려있는 돈목해변에서 배후사면 방향으로 퇴적된 '대사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당 부분이 식생으로 덮여 있으며 일부 구간만 모래 지형이 드러난 상태이다.

(출처: 2016 전국해안사구 정밀조사_우이도 사구, 40)

 

우이도 사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5,000년 전까지 빠르게 확장하였고 현재는 퇴적 현상이 느려져 사구의 침식 또는 해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성촌 대사구 남측에서 채취된 퇴적물의 연대 측정 결과 최근 200년 이내에 퇴적된 것으로 나타나 상당히 최근까지도 사구 지형이 활발하게 발달한 것으로 보이며, 사구를 구성하는 모래입자들은 대부분 성촌 해안에서 북서풍에 의해 운반, 퇴적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래를 공급하던 성촌 해변 쪽 사구에 식생이 정착하면서 추가적인 모래공급이 제한되면서 사구가 안정된 상태를 보이고 있으나 식생으로 보호되고 있지 않은 사면의 모래만 바람에 날리면서 지표가 제거되어 기반암이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1945년 이후 항공 사진을 통해 사구 변화를 추적한 자료에 의하면 1970년대 초반까지는 성촌해변 쪽 배후산지의 모래 사면이 관찰되지만 1990년대 이후에는 식생에 의해 완전히 피복되면서 모래 퇴적 지형이 관찰되지 않고 있다. 바람은 그대로인데 모래가 드러난 부분이 한정되어 있으니 집중적으로 풍식 현상을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풍 계열의 바람이 부는 여름철에는 돈목해변 쪽의 모래가 성촌해변 쪽으로 일부 날려 이동하기는 하지만 겨울철의 북풍 계열 바람의 영향과 비할 바는 되지 못할 것이다.

(출처: 신원정 외, 2017, 우이도 해안사구의 지형특성과 형성과정, 한국지형학회지, 24(2), 11.)

 

1972년과 1994년의 항공사진을 비교하면 사구 정상 부위의 침식이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는 사의 높이가 70~80m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현재는 약 50m이니 많은 침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구 일대(현지 주민들은 '산태'라고 부른다.)의 나무들을 땔감으로 이용하던 시절에는 자연스럽게 사구 표면의 식생이 제거되어 바람에 의해 지형 형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화목의 채취를 금지한 이후 식생이 빠르게 늘어나 오히려 사구 지형을 파괴하게 된 것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증언한다.

(참고: 광주타임즈, 신안 우이도 동양 최대 "풍성사구" 훼손 원인은, 2020.11.3.) 

 

우이도 풍성사구의 형태와 형성 원인 및 변화 양상을 파악한 의미있는 답사였다고 자부한다. 그 성과를 나누며 즐거워 하는 답사대원들.

 

성촌해변의 사빈의 넓이는 상당히 넓다. 만조시에는 20m 정도이지만, 간조시에는 100m 이상의 폭이 사빈으로 노출된다. 배후 산지에 모래를 마구마구 공급할 수 있는 원천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성촌해변의 쓰레기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성촌마을에서는 성촌해변에서 이동해온 모래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마을 자체가 성촌사구 위에 입지하고 있다.

 

돈목해변을 맨발로 걸으며 발바닥의 피로 회복을 시도해보았다.

 

노는 것은 역시나 즐겁다. 노는 사람들...

 

노느라고 수고한 사람들에게 과분한 저녁 밥상이 주어졌다. 야으~~호!!^^

 

저녁 식사 후에 돈목마을의 유일한 가게인 고향슈퍼의 물가 상황을 체크해보았다.

 

그리고 숙소로 귀환하여 빨랫줄에 매달린 물고기처럼 늘어져서 휴식을 취하였다. 긴 잠에 빠졌다.

 

힘든 하루였다. 즐거운 하루였다. 유익한 하루이기도 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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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 몇 명이 함께 10월초 연휴에 신안군 우이도의 풍성사구 답사를 떠나자는 제안을 받았다. 드론과 함께 하는 그런 답사였다. 무료 나눔받은 드론이 하나 있어 그 모임에 달라붙어 우이도를 다녀왔다.

 

우이도의 "풍성사구"에 대해 검색을 하다보니 '가을로'라고 하는 영화의 배경을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블루레이 매체로 출시가 되었는가 알아보니 블루레이는 없고 DVD로만 오래 전에 출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독판으로 확보하여 감상해보았다.

 

우이도의 풍성사구는 영화의 초입에 잠깐 등장한다. '風成' 사구다. 바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사구라는 의미의 용어이다. 그런데 사구는 기본적으로 바람의 퇴적작용으로 만들어진 지형인데, 거기에 '바람으로 만들어진' 이라는 수식어가 왜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풍성사구"라는 독특한 단어는 우이도의 사구에만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검색어가 그리하다 보니 관광객의 관심을 끄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 아닌가 싶다.

 

참여 멤버들의 서식지가 서울, 안산, 전주, 광주로 흩어져 있다보니 중간 랑데뷰 장소로 고창이 선택되었다. 고창읍성 앞에 넓직한 주차장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모임의 주모자가 고창군에서 '여백의 길' 걷기 모임의 핵심 맴버이라는 것도 위치 선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0월 7일 토요일 아침 10시에 고창읍성 주차장에 모이기로 하였다. 집에서 길찾기 프로그램에게 물어보니 4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나온다. 5시쯤에 출발하면 충분할 것 같았다. 4시 반에 알람을 걸어두었다가 일어나 확인하니 3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나와 여유를 부렸다.

5시 10분 쯤 집에서 나와 도로에 가득한 차량들의 흐름을 보며 놀랐다. 정체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차량으로 가득 차서 도로가 움직이는 듯 보였다. 제2중부 고속도로의 마장 휴게소 즈음 오니 도로에 여유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창휴게소에 6시 40분 쯤 도착하여 정비하고 몸을 풀고,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하늘을 보며 휴식을 취하였다.

 

열심히 달렸다. 호남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8시 20분 경 이서휴게소에서 두번째로 휴식을 취하였다. 날이 맑지 아니하면 드론을 어찌 날리나 하는 걱정을 하게 하는 하늘님이시다.

 

일찍 도착하였다. 9시 20분 쯤 고창읍성 주차장에 주차하고 드론을 올려보았다.

 

고창읍성인 모양성은 언제 보아도 참 예쁘다.

 

먼저 도착한 멤버들끼리 모양성을 들어가보았다. "고창방문의 해"라서 입장료가 없을 줄 알았는데, 받고 있었다. 대신 같은 액수의 고창군 지역상품권을 준다. 공짜나 마찬가지다.

 

모양성 안쪽에 세워져 있는 척화비와 오랜 만에 재회하였다. "奉敎 이동석 현감 立"

 

고창읍성의 안쪽 경관. 아늑한 느낌 풀풀...

 

10시 반쯤 모든 멤버가 집합하였다. 원래 계획에서는 '상담부두'에서 아점을 먹는 것이었는데 공사 중이더라. 부근의 다른 식당에서 맛있는 순두부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차량 두대에 나누어 타고 신안군으로 달렸다. 일단 자은도의 면전해변을 답사하고 남강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비금도의 가산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비금도에서 타포니 지형을 잘 보여주는 덕산을 드론으로 살피고 도초도로 이동하였다. '자산어보 촬영장'을 방문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일찍 푹 쉬었다.

 

천사대교를 건너 암태도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은암대교를 건너 자은도로 들어가 면전 해변에 깔린 모래포집기 경관을 드론으로 포착해보았다. 

 

드론으로 하늘에서 내려다 본 면전해변의 모습. 재봉틀로 해안선을 따라 오바로크를 친 것 처럼 보인다. 그것이 모래포집기 시설이다.

 

해변의 모래가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만들어진 모래포집기가 안보일 정도로 모래가 채워져야 할 것인데 잘 안되는 모양이다.

 

2021년 5월 18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안보인다. '모래포집'이 과연 되는 것일까?

 

왔다 갔다는 인증 셀피 하나 남겨보자.

 

다른 곳을 더 답사할 시간은 있었지만 뱃시간을 놓치면 많이 일정이 어그러지는 고로 일단 남강 선착장으로 향했다. 배와 버스를 환승하는  '버스환승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한장의 표를 이용해 두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하기에 '환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일지 궁금하다.

승선권을 구입하고 찻집에서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연출해본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선박인 것으로 보인다. 

 

남강에서 가산까지 섬들 사이를 요로케 지나서 갔다. 13.2km를 45분 정도에 날았다. 파도가 약하고 바다가 잔잔한 편이었는데, 내해라는 위치와 함께 조차가 한달 중 가장 작은 '조금'날이라 조류의 흐름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카더라.

 

비금도의 가산 선착장으로 접근하고 있는 섬드리비금고속페리호.

 

선착장의 주차장을 장식하는 조형물들. 

 

비금도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동염전 부근에 위치한 덕산, "떡메산 혹은 떡뫼산"으로 향했다. 

 

덕산이 떡메산이라 불리게 된 사연을 기록한 석물이 떡메산 바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일단 나의 인증 사진부터 만들고 시작하자.

 

떡메산 바로 아랫녁에는 경지가 개간되어 있고 스프링클러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떡메산의 전경. 정상의 해발고도가 81m인 야트막한 산이지만 주변이 모두 저평하여 우뚝 솟아 있는 느낌을 준다.

 

비금도는 유천층군에 속하는 백악기 산성 응회암 및 제4기 충적층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응회암 산지의 이곳 저곳에 구멍이 뻥뚫려 삿갓처럼 보인다 하여 삿갓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위 표면이 움푹움푹 파여 있어 전형적인 타포니 지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타포니는 풍화작용에 의해 수직절벽이나 경사면의 암석층에 패여 들어간 소규모 공동(空洞)을 지칭하는 것으로, 염풍화(salt weathering)와 함께 바람, 온도, 습도 등의 기후조건, 광물 및 암석학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형성 원인과 관계없이 형태적인 의미에서 타포니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니는 원래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암석의 측면부에 발달하는 구형태의 을 지하는 것으로, 어로 멍투성이이라는 을 가진 타포네라(tafonera)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떡메산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타포니들.

(출처: 정철환, 김정빈, 2017, 신안 비금도 덕산의 지형 및 지질, 한국지구과학회지, 38(7), 557.)

 

떡메산 너머에는 대동염전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대동염전은 증도의 태평염전과 함께 2007년 11월 등록문화재(제362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염전은 거의 보이지 않고 태양광 패널로 채워져 있는 신기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제는 소금이 아니라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비금도에서 서남문대교를 건너면 도초도로 넘어간다. 

 

팽나무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는 환상의 정원을 지나 달린다.

 

그 길로 계속 진행하면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에 도착한다.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섬이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우이도이다.

 

흑산도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데 흑산도에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 도초도에서 촬영했다니....ㅎㅎ

 

영화 속의 한 장면.

 

유명한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라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그런 유명한 곳에 왔으니 또 인증을 해 두어야 한다.

 

도초 여객터미널 앞에 자리잡은 유명한 식당을 찾았다. 간재미회무침과 장어탕으로 속을 가득 채웠다.

 

어둠이 내린 도초도. 해가 떨어지면 어둠만 내려야 하는데 비도 내리더라. 그래서 숙소를 찾아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는 도초항 인근의 수국민박.

이날 저녁 박대장이 가져온 글렌피딕 한병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있다. 소문이...

 

내일은 우이도를 들어가 "풍성사구"를 만나는 날이다. 풍성사구를 오르는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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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에 금강산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과 금강산 체험학습을 진행한 것이다. 교사 15명, 학생 166명, 학부모 1명이 참가하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이후 대학 입시에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온 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실기 시험 준비 등이 필요한 학생들은 참가하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 체험학습으로 진행하였다.

2005년 12월 10일 토요일, 08시 50분에 학교에 집합하여 출발하였다.

12:00  내설악휴게소에 도착하여 개별 지참한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17:30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숙소를 배정하고 저녁 식사 후에 방북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였다.


2005년 12월 11일 일요일. 금강산콘도에서 맞이 한 여명.

아침 식사 후 차량 탑승하여 관광증을 교부하였다. 받았다.

 

08:50   남측 CIQ. 통행 검사.

 

금강산 관광 안내 전도.

 

온정리의 문화회관에 도착하였다.

 

11:00  금강산온천장 부페에서 점심 식사.

12:00~16:00  구룡연 코스 탐방

빈터만 남아 있던 곳에 신계사를 복원하고 있더라.

 

'새로 만든' 신계사 대웅보전. 사진 속에 '스님'도 담겼다.

 

두번째로 방문하는 목란관.

 

북에서는 겨울의 금강산을 눈이 쌓인 봉우리를 뜻하는 '설봉산'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암봉들이 그대로 드러나 뼈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골산'이 더 적합해 보인다. 앙상하다. 그러하지 아니한가!!

 

지난 여름의 씁쓸하고 쫄리는 기억이 남은 곳. 이 돌덩어리 주변의 경계석을 발로 건들었다고 한참 지도원 동무에게 혼났었다. 아씨~

 

다시 만난 금강문.

 

다시 만난 옥류동의 무대바위.

 

옥류담으로 흘러내리던 옥류천의 물이 얼어붙었다. 미끄럼 타면 재밌겠다.^^ 

 

미끄럼 방지 설비를 갖추어놓았다. 온통 얼음이라 이런 정도의 설비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도 다들 조심조심.

 

비봉폭포가 얼었다.

 

계곡이 깊어 한낮이지만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다. 쌀쌀한 겨울의 개골산을  오르며 구룡폭포를 찾아간다.

 

관폭정과 구룡폭포. 구룡폭포는 얼음벽이 되어버렸다.

 

얼음 덩어리로 변한 구룡폭포와 구룡연.

 

화장실은 유료이다. 1달라. 

 

날이 추워 상팔담 쪽으로는 올라가지 않고 하산하였다. 지난 여름에 와서 칼질하여 갈라놓고 갔던 바위가 그대로 남아 있다.

 

햇볕을 받고 있는 저 윗쪽의 봉우리들이 부러웠다. 저 위는 햇볕을 받아 따뜻하니까 온도가 높아서 상승기류가 발생하고, 그러면 골짜기 아랫쪽에서 위로 공기의 이동이 이루어지니까 곡풍이 발생하게 되고......

 

개골산의 흔들다리도 뼈로 보인다...

 

하산길에 만나는 금강문이다.

 

개골산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화강암 덩어리.

 

계곡의 얼음 사이로 물이 흐르면서 녹은 부분 속에 금강산이 담겨 있다.

 

쓸쓸한 목란관. 기념품 판매점의 직원들이 학생들에게 담배구입을 권하더라는 이야길 들었다. 북에서는 끽연에 대해 제한이 없는 것 같았다. 남녀노소가 함께 맛담배라도 피우는 풍속을 가진 것인가???

 

16:30~18:00  문화회관에서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교예를 단체로 관람하였다.

 

18:00~19:00  금강산온천장 부페에서 저녁 식사후 자유시간(온천 및 쇼핑)

지난 여름에 이용하지 못했던 온천에 입장해보았다.

야외 온천도 있었는데, 눈발이 살짝 날리는 모습이 신기했다. 좋은 기억.

 

숙소인 구룡 빌리지, 구룡마을은..... 좀 거시기하다. 난방은 다 된다.

 


 

숙소는 컨테이너 비슷하게 만들어진 곳이었다. 구룡마을이라 하더라. 

12월 12일 월요일의 여명.

 

07:00  온정각에서 아침 식사.

08:30  삼일포 관광 출발.

 

온정각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화강암 돌덩어리, 닭알바위산. 

 

09:00  곰돌이 아저씨가 낚시하고 있는 삼일포에 도착했다.

 

단풍관과 삼일포.

 

소나무에 솔방울이 엄청 크게 많이 달렸더라.

 

집으로 돌아갈 시간에 맞추어야 해서 서둘러 일정을 마감하였다.

 

10:35  북측 CIQ 도착하여 통행검사.

11:30  남측 CIQ 도착하여 통행검사.

13:00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

18:00  학교에 도착하여 해산.

 

2박3일의 일정이었지만 금강산에서는 1박2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던 금강산 체험학습에 참여하여 개골산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금강산과 봉래산의 모습을 찾아야 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 이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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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금강산을 다녀왔었다. 2005년의 일이었다. 8월에 봉래산을 즐기고, 12월에 개골산을 보았었다.

(북한에서는 겨울철의 금강산을 '개골산'이 아니라 '설봉산'으로 부르더라. 2005.12.11. 촬영)

 

두번을 다녀왔더니 아래 안내자료에 있는 표현대로 "가슴에 남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머리에는 남은게 하나도 없더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2005년 8월 17~19일의 2박3일, 12월 11~12일의 1박2일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계절별로 네 장을 모았어야 했는데, 두 장에 그쳤다.

 

8월에는 패밀리비치호텔에서 숙박을 하였고, 12월에는 구룡마을의 컨테이너 숙소에서 숙박을 하였다.

 

8월의 금강산 탐방은 서울시교육청에서 진행했던 "금강산 통일체험 연수"에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2005년 8월 17일 압구정동의 현대백화점 공용주차장에 집결하여 단체로 버스를 타고 금강산콘도까지 이동하였다.

13:00  금강산콘도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금강산관광증을 수령하였다.

14:30  금강산콘도 집결지를 출발.

15:00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남측 CIQ(세관, 입국심사, 검역절차) 도착, 통행검사.

(2005.12.10. 촬영)

16:35  남측 CIQ 출발하면서 안내교육. 버스 창밖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 하지 말라고 재삼재사 당부. 북측 CIQ 도착하여 통행검사.

16:50  숙소 체크인. 바로 인근에 위치한 호텔해금강에서 저녁을 먹었다고 일정표에 나와 있다. 

 

고성항 해변의 영락정의 모습이 외로워보인다. 구름 속으로 숨어들고 있는 금강산 자락.

호텔해금강의 사진이 하나도 없다. 왜? 모르겠다.

지인들을 만나 온정리에 위치한 온정각으로 이동하였다. 셔틀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온정각 앞의 매점에서 대동강 맥주를 한모금했다. 안주로 먹은 땅콩은 기억난다. 땅콩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수확하면서 깨끗하게 닦에서 출하하는 것이 아니라 캐낸 그대로 내놓은 것이다. 자연산이었다. 껍질을 까먹기 위해 손이 흙투성이가 되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자연산이니까...

 

고성항 바닷가에 위치한 금강산비치호텔의 야경. 숙소로 귀환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보인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투숙하기까지가 하루 일정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8월 18일 2일차 일정이 진행되었다.

07:00  호텔해금강에서 아침식사가 제공되었다고 일정표에 적혀있다.

 

2005년 당시에는 시설을 확장하고 새로운 숙소를 건설하는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2005년에는...

 

08:10  관광버스로 이동하여 구룡연 코스를 탐방하였다. 여기까지는 기본 코스이다.

 

온정각에서 구룡연코스 아래의 주차장까지 버스로 이동하였다. 이동 중에 가이드가 여러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해주었다. 위반시 벌금이 상당하며 잘못하면 귀국을 못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하였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목란다리를 건너면 목란관이 위치한다. 이곳에서부터 구룡연으로 오르는 계곡 탐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온정리의 시설들은 현대아산에서 운영하지만 이곳부터는 북한에서 전적으로 운영하는 시설이다.

 

화강암 산지가 좁고 깊게 침식된 골짜기를 오르기 때문에 사면의 양쪽을 이동하면서 코스를 개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쪽저쪽으로 왔다갔다하는 다리들이 많다. 아래 지도를 보면, 목란다리, 양지다리, 금수다리, 만경다리, 흔들다리 등이 보이는데, 이외에도 많은 다리들이 있다.

 

주의사항의 공포 속에 금강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돌덩어리 옆으로 지나면서 바닥에 있는 경계석을 살짝 밟았나보다. 시커먼 옷을 입은 시커먼 얼굴인데 눈빛은 레이저를 쏘는 듯한 아저씨가 오라고 부르더라. 뭔가 했더니 '교육 제대로 안받았냐', ' 왜 하라는 대로 안하느냐',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등등의 무서운 말을 하더라. 돌덩어리만 건들지 않으면 되지 않나 싶었는데, 그 주변의 경계석도 건들면 안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쫄았다. 조심하고 기분좋게 놀다 가라하더라. 쫄았다. 이쒸~ㅠ.ㅠ

 

금수다리를 건너가자.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화강암이 기반암이 전형적인 돌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곳곳에 멈추어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다.

 

계곡 바닥의 거대한 암괴들. 서서히 풍화 및 침식 작용을 받아 원마도가 높아지고 있다. 

 

만경다리를 건너 다시 반대편 사면으로 옮겨간다.

 

거대한 암괴들 사이의 틈으로 지나가야 한다. '금강문'이라 하더라. 흐릿하게 보이는 다른 이름은 '금룡관'.

 

흔들다리는 흔들린다.

 

계곡에 물이 고인 소. 물은 진짜 너무나도 깨끗하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간다고 玉流洞 계곡이라 한다.

 

옥류동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418호란다.

 

09:35  잠시 쉬어가보자. 계속 오르막이라 숨이 많이 차더라.

 

수직 절벽 아래로 통로가 개척되어 있다. 종종 탐방로를 보수하는 저쪽 전문가들의 작업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넓은 너럭바위가 계곡에 걸쳐져 있다.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무대 바위이다.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춘 곳이라는 스토리를 붙여 놓았다.

 

계곡에는 옥류다리, 하늘에는 '구름' 다리.

 

옥류가 흐르고 옥류가 고여 소를 이루는 옥류동 계곡.

 

두 개의 연못이 위 아래로 연결되어 마치 이어진 구슬과 같다는 연주담. 옛날에 선녀가 하늘에서 놀러 내려왔다가 구슬 두 알을 흘리고 간 흔적이라는 스토리도 있다고 한다.

 

금강산 4대 폭포 중의 하나인 비봉폭포이다. 높이 139m. 봉황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봉황이 춤추는 것 같다는 무봉폭포.

 

여름의 금강산인 봉래산은 짙은 녹색으로 채색된 틈새로 암봉의 향연이 펼쳐진다.

 

금강산에 혼을 빼았겼다. 넋이 나간 탐방객.

 

멋진 경치의 암벽의 공간마다 낙서를 해놓았다. 정치 선동 구호이지만 경관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흉물이다. 다행인 것은 글자에 빨간색을 칠해놓지 않은 정도... 

 

구룡폭포 윗쪽의 구룡대에서의 경관. 건너 능선의 세존봉 산봉우리들이 뾰족뾰족하다.

 

세존봉 능선. 금강산을 일만이천봉이라 표현할 만 하다. 봉우리의 숫자를 세다 잊을 정도.

 

그곳에 2005년 8월 18일에 있었다. 주차장에서 3,960m 떨어진 곳이었다.

 

구룡폭포의 윗쪽이다. 여덟개의 연못이 구슬처럼 꾀어 있어 이를 '상팔담'이라 하더라. 상팔담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구룡대 전망대에서 100m 쯤 더 윗쪽에 위치한 '비룡대'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2023년에 알게 되었네. 어쩌지...

 

구룡폭포의 절벽. 절벽 아래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구룡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관폭정'이다.

 

11:30  관폭정에 왔다.

 

구룡폭포의 멋진 모습과 그 아래의 구룡연. 폭포의 수량이 좀 적어 보이는 것이 아주 작은 흠이다.

 

간 김에 칼질해서 금강산의 바위 좀 갈라놓고 왔다.

 

화강암이 기반암인 곳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지형이다. 양파껍질처럼 풍화되어 침식되는 '박리 돔'. 계곡을 흘러내리는 깨끗한 물에 손이라도 담가보고 싶지만 '금지 행위'에 속한다. 천천히 금강산의 자연 경관을 즐기며 하산하였다.

 

다시 만난 금강문.

 

금강산의 멋진 소나무.

 

13:30  금강산호텔에서 점심.

 

오후에는 평양모란봉교예단의 종합교예공연을 관람하였다. 흔히 말하는 써커스 공연이다. 일반석 요금 25달러.

공연 과정에 사진 촬영금지. 오로지 눈으로 최고의 써커스 공연을 관람하였다.

눈꽃조형, 봉재주, 원통북치기, 장대재주, 비행가들, 공중 2인 회전조형, 널뛰기, 공중비행 등의 '교예' 종목들이 공연되었다. 대단했었다. 

공연을 마치고......

 

온정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문화회관에서 통일교육 특강 및 발표가 있었다고 일정표에 남아 있다.

기억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2005년 8월 19일. 3일차의 일정은 선택 관광으로 진행되었다. 만물상 코스 또는 삼일포/해금강 코스 중에 택일하면 되었다.

왜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뱃속과 머리 속이 심하게 불편하여 만물상 코스가 힘들 것 같아 바닷가로 나섰다.

 

09:30  해금강에는 비가 내리고 파도가 날린다.

 

전망대.

 

해금강은 거센 파도에 저항하며 부서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시스택' 지형들이다.

 

파도 소리도 대단하였다.

 

파도에 흔들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난 밤의 무엇인가 때문에 불편했던 속이 더 울렁거린다.

 

10:50  곰돌이들이 낚시하고 있는 삼일포에 도착하였다. 계속 내리는 빗살이 어여쁘다.ㅠ.ㅠ

 

단풍관 그리고 삼일포 호수 가운데 위치한 와우도. 삼일포는 둘레가 4.5km 정도인 호수이다. 북한에서 3대 호수의 하나로 꼽고 있다.

 

호수 안쪽으로 돌출한 바위산인 봉래대는 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봉래대에서의 조망.

 

12:00  온정각에서 점심식사

14:05  구선봉의 북측 CIQ 도착 / 통행검사.

15:00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남측 CIQ 도착 / 통행검사.

17:00  내설악광장휴게소에서 저녁 식사

21:00  서울 도착하여 해산...

 

사진 몇 장과 일정표, 입장권 등만 일부 남아 있는 첫번째 금강산 여정을 정리해보았다.

봄의 금강산과 가을의 풍악산을 즐길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우연히 발생한 사고와 양측의 자존심 싸움이 길어진 끝에 금강산 관광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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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고궁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경복궁일 것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이라 하여 창경궁과 창덕궁을 묶어 '동궐'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궐의 전체적인 모습을 주변부를 포함하여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이 남아 있다. 동궐도이다. 두 궁궐과 주변의 산세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대단한 작품이다.

동궐도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1820년대 후반에 비해 현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어 찾아보았다. 동궐도는 고려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 각각 소장본이 존재하는데 모두 국보 제 249호로 등재되어 있다. 

보다 고화질로 구할 수 있는 동아대학교 소장본 파일의 누런 바탕색을 조금 제거해보았다.

 

그리고 창덕궁 후원 부분을 크롭하고 건물들의 이름을 넣어보았다.

부용지와 주합루 일대, 옥류천 일원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은 많이 달려졌다.

위의 지도와 아래의 지도를 보면 변화된 부분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창덕궁관리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창덕궁" 가이드북에 게재된 창덕궁의 건물 배치도이다.

  쉽게 관람할 수 있는 '전각' 부분과 쉽지 않았으나 점점 쉬워지고 있는 '후원' 부분으로 나뉜다. 후원 관람을 위해서는 전각 관람 요금까지 지불해야 한다. 그냥 후원 관람 예약을 받으면서 관람료를 전각을 포함해도 될텐데 따로 관리되고 있다. 불편하게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서 두번 결재를 해야 한다. 전각관람료 3,000원, 후원관람료 5,000원.
  창덕궁(후원 포함),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및 종묘 관람권까지 포함된 통합관람권이 10,000이다. 고궁 관람을 모두 하고 싶은 사람은 이 통합관람권이 나을 것이다. 3개월 동안 사용 가능하나 한번씩만 입장 가능하다.

 

 

2023년 9월 20일 12시 창덕궁 후원 관람을 예약하였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관람이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예약을 취소하지 않았다.

빗속의 고궁 산책... 생각만해도 운치가 넘치지 않는가.ㅎㅎㅎ

 

지난 번 관람 때는 후원관람 예약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여 전각을 돌아보질 못했다.

똑같이 12시 입장권을 예매했지만 이번에는 일찍 가서 전각도 관람하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늦게 출발하여 30분 정도 밖에 시간을 갖질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음 기회를 또 가져야 한다.^^

 

 

 

창덕궁의 입구인 돈화문이다. 멋지다.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역대 왕들의 업무 및 생활공간으로 가장 오래 이용된 궁궐이었기 때문일까?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당시 창덕궁 앞에 종묘가 위치하여 궁의 진입로를 남서쪽으로 치우치게 하였다고 한다.

궁궐의 대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만 출입문으로 기능을 했고, 신하들은 서쪽에 위치한 작은 금호문을 통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한 것이다.

 

돈화문으로 들어와 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진선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작은 돌다리가 있다. 금천교이다.

 

궁궐을 조성할 때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는데, 이 물길이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였기에 금천이라고 하였다. 금천은 창덕궁 북쪽에서 흘러들어와 돈화문 동쪽을 지나 궐 밖으로 빠진다. 금천교는 궁궐에 남아 있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보물이다.

 

창덕궁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진선문이다.

'신문고'라고 하는 것을 이 진선문 앞에 설치했었다고 한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겪은 일반 백성이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나 이곳까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을까. 웃기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문고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반 백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러한 제도는 그냥 백성들을 어여삐 여긴다는 왕도정치 시대 통치자들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 뿐? 그래서 백성들은 하소연 할 곳이 없어 왕의 행차가 있다고 하면 그 앞으로 뛰어들었던 것일 것이다.

 

왼쪽으로 인정문이 보인다.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다. 경복궁과 비교하면 많이 아담하고 소박한 편이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진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루던 곳이다. 중층 지붕을 갖고 있어 2층 건물인 듯 보이지만 내부는 그냥 통층 건물이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소실과 재건이 반복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03년(순조 3)에 복원된 것이다.

 

행사가 있을 때면 신하들은 '조정'의 품계석 위치에 자신의 계급에 맞게 도열하였을 것이다.

 

매우 불편해보이는 의자. 그 위로 일월오봉도가 선명하다.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선정전으로 연결되는 숙장문이다.

숙장문 양쪽의 담 길이는 먼저 들어온 진선문 쪽에 비해 한참 좁다. 인정문 앞쪽 공간이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이다. 앞에 있는 산 때문에 지형을 고려하여 이렇게 만든 것이다.

 

선정전의 입구인 선정문.

 

행사용으로 사용된 인정전에 비해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인 선정전의 규모는 아주 소박하다. 소실된 이후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한 것이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건물이 작고 주변이 비좁다. 그래서 나중에 공간이 좀 더 넓은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가게 된다.

 

선정전 내부 모습. 이곳에서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의 각종 회의가 매일 열렸다.

 

빗속의 단체 관람객, 자유 관람객 그리고 소나무 숲.

 

성정각 일원이다. 세자의 일상이 숨쉬던 동궁이었다.

임금은 태양이고, 왕비는 달이기에 일월오봉도에 그렇게 등장한다. 세자는? 이제 떠오르는 태양이다. 그래서 궐 안에 동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東宮이라 불렀다.

 

후원 매표소이다. 창경궁 입장권을 구매하여 입장할 수도 있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경우 이곳에서 입장권과 교환하여야 한다.

 

입장권은 이렇게 생겼다. 2명 요금이 10,000원.

 

입장권을 검표하고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가이드 투어를 시작한다.

 

시작했다. 원래 인터넷 예매 50명, 현장 구매 50명으로 구성된다. 비 때문인지 많이 조촐하다. 그리고 가이드 투어를 원치 않으면 자유롭게 개별적으로 이동을 하면서 창덕궁 후원을 즐길 수 있다. 다음에는 자유 관람이닷!!! 그렇게 할꺼닷!!!

 

녹색으로 짙게 물든 예쁜 언덕을 넘어가면서 보이는 영화당. 부용지 바로 앞에 위치한다.

 

비내리는 부용지 일대. 이곳에서부터 창덕궁의 진짜 후원이라 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배치하였다.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해낸 절묘한 솜씨와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부용지와 부용정. 참 예쁘다. 부용정은 부용지에 피어난 한송이 꽃처럼 보인다. 보물이다.

 

후원의 첫번째 중심 정원인 이곳은 휴식과 학문, 교육을 하던 상당히 공개된 장소였다. 2층짜리 누각인 주합루의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이었고, 그 옆의 서향각은 각종 도서를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이었다. 2층은 책을 보며 학문을 논하던 공간인 열람실이었다.

부용지에서 주합루로 오르려면 어수문을 지나야 한다. 어수문 옆으로 생나무 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놓았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왕이 친견하는 군사훈련,  과거 시험, 임금이 주관하는 잔치와 같은 각종 행사가 이곳 영화당과 춘당대에서 치루어졌다고 한다. 

 

애련지 쪽으로 들어가는 불로문이다. 

 

冂자 모양으로 다듬은 통짜 돌로 만든 문이다. 不老門이라...

 

불로문을 들어서면 애련지와 애련정이 비맞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주 애련하다~

 

애련지 남쪽에 위치한 두 건물.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가 만든 소박한 건물이다. 서재로 즐겨 이용하였었다 한다. 지금은 '기옥헌'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바로 옆의 한칸 반 짜리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다. '운경거'로 추정된다.

 

연경당은 사대부의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의 접견실이었다. 1828년(순조 28)에 효명세자가 의례를 행하기 위해 창건했는데,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궐도와 완전히 달라졌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잔치를 베푸는 등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서재인 선향재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선향재 뒷쪽 높은 곳에 위치한 농수정.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라고 표현된다.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폄우사가 나타난다. 멀리 존덕정이 보인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 지붕이 2층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정자이다.

 

존덕정 안쪽에는 정조대왕의 글이 새겨진 나무판이 게시되어 있다.

 

확대해보았다.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고 시작하고 있다. 왕권의 지엄함을 밝히는 표현이란다.

 

존덕정 아래에 관람지와 관람정이 비를 맞고 있다.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에 이어 옥류천 계곡 일대가 후원의 주요 관람 명소이다. 그런데......

올해 연말까지 출입금지라고 한다. 일부 정자에 문제가 발생하여 보수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90분이었던 관람시간이 70분으로 줄었던 것이었다. 나머지는 자유 관람을 하라고 풀어준다.^^

자유롭게 퇴장한다. 동행자의 배고프다는 하소연이 내 배도 비었음을 깨닫게 한다.

효명세자의 공간이었다고 하는 의두합을 다시 만난다. 금마문을 통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한복을 입으면 고궁 관람 무료. 참 좋다고 생각한다. 고궁과 잘 어울리고 너무 예쁘다.

 

그렇게 창덕궁의 일부만 살짝 구경하였다. 빗속의 아름다운 고궁 산책이었다.

 

램블러한테 물어보니 이렇게 걸어다녔다고 나온다. 3.3km를 두시간에 걸쳐 즐긴 경험이었다.

 

그리고는... 쌈밥집에서 반찬을 리필시켜가며 과식했다. 그리고는... 저녁과 야식을 모두 생략해야 했다....ㅠ.ㅠ

이제서야 사진 속에서 찾았다. '처음처럼'. 제길... 그냥 물병이었다.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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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한 백수들이 만나 한양도성길의 일부 구간을 걸어보자고 합의가 되었었다.

하체가 부실하여 오래 멀리 걷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 다른 백수들은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하더라.

장충동에서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장충체육관 부근에서부터 남산 봉수대를 올랐다가 숭례문까지의 구간을 걷기로 했었다.

그래서 한양도성길 중 일부 구간 지도를 단톡방에서 미리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약속의 날, 2023년 9월 13일에 서울 전역에서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나오더라. 망설이다가 강수량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그냥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부실한 조그만 우산들을 들고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걷는 것이 곤란하여 남산공원길을 따라 걷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가을단풍길, 남산북측순환로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길이다. 산책로의 이명 그대로 가을에 단풍들면 아주 멋진 풍광을 보일 분위기가 넘치더라.

 

오후 1시에 장충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공원역에서 빗속을 천천히 즐기며 걸었다.

 

'먹자골목'으로 지정된 곳들이 참으로 많다.

 

정확한 약속 시간에 도착하였다.

 

어젯저녁에도 족발을 먹었는데, 오늘 점심도 족발이었다.^^ 좋은 족발이다.

 

식사 후에는 공굴리기 놀이를 좀 하였다.

 

오후 3시. 장충단 공원. 수표교를 오랜 만에 만나고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청계천에 있던 수표교를 임시로 이전한 상태에서 계속 자리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의 문제로 인해 원상복구는 곤란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이준 열사 동상이 장충단 공원에 모셔져 있다.

 

장충단공원에서 길을 건너 장충리틀야구장 옆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한적한 남산공원길을 만나 서쪽 방향으로 빗속의 산책을 즐긴다.

 

중간 중간에 벤치들이 놓여 있으나 앉아 쉬는 것을 사양한다. 비 때문이다. 젖었다.

 

시내 구경도 하면서 여유를 즐긴다. 빗속에...

 

빗속의 공원길도 멋지지만 나중에 단풍 들면... 오메~

 

오늘의 산책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일까... 조지훈 시비에 '파초우'가 새겨져 있더라.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파초우.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다방이 있더라. 아메리카노의 따스함으로 한기를 녹여보았다.

 

남산에서 서울을 바라보고 계신 호랑이 어르신.

 

드디어 한양도성을 만났다.

 

도성을 따라 '수크렁'을 잔뜩 심어 놓았다. 왜 하필 이걸...

 

남산공원에 왔었더라~~~ 아, 남산공원이 뒤집혔다.

 

한양도성 복원 구간.

 

고가도로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가본 적은 없다.

 

그래서 가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더라. 있으니 이용한다.

 

좀 묘한 공원이다. "서울로 7017"

 

고가를 통행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양쪽으로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구 서울역사를 구경하고 사진을 촬영하라는 배려인 것 같다. 구멍이 뚫린 부분이 있다.

그 배려를 받아들여 옛날 서울역과 새 서울역 청사 사진을 남겼다. 비가 내린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고가 공원 '서울로 7017'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이색적인 공원이다.

 

숭례문에 왔다.

 

우산을 던지고 숭례문과 함께 셀피~~ 비 쯤이야...

 

5.7km 정도를 걸었다. 2시간 18분 걸렸다. 천천히 비를 즐기며 걸으니 전혀 힘들지 않더라.

 

숭례문 부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퇴직 동기와 랑데뷰하여 맛있는 중국요리를 즐겼다.

먹으며 수다 떨다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어 헤어졌다. 네 방향으로......

 

회현역으로 걸어가 4호선을 탈 것이냐, 시청역으로 걸어가 1호선을 탈 것이냐

고민을 좀 하다가 1호선을 이용해 귀가하였다.

2023년 9월 13일 하루가 그렇게 빗속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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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대학의 동남권캠퍼스에서 수강신청했던

"역사경관과 현대식 빌딩이 공존하는 도시 서울(현대편)"의 현장 답사 마지막 날이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동대문역에서 청계광장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을지로입구역에서 합류하여 일정을 함께 했다.

 

 

답사 진행을 위한 집합 장소였던 을지로입구역 4번 출구 앞. 다람쥐공원이라 되어 있다.

 

오후 4시가 되자 바로 답사를 시작한다.

길건너편의 남대문로9길 입구에 보이는 '음식문화거리'라는 표지판이 있는 위치 즈음에 소광통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계천의 지류 하천들의 분포를 보여주는 지도를 찾아보았다.

 

확대해보자. 지도에서 동그라미 친 창동천 구간이 오늘날의 '남대문로10길' 되시겠다.

 

18세기에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구할 수 있었다. 창동천과 청계천 일대가 세세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소광통교에서 청계천 합류 지점(곡교)까지가 남대문로 10길이다. 소광통교에서 서쪽 구간은 남대문로 9길에 해당한다.

 

 


 

100년 전에 건설된 지하배수로가 공사 중 발견되어 서울시 문화재(제38, 39호)로 지정된 바 있다.

남대문로 지하배수로 구간은 회현동천 유로와 일치하며, 소광통교 구간은 창동천의 유로와 일치한다. 

이들 지류 하천들을 복개하고 지하화하면서 만들어진 배수로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상업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청계천의 다른 지천에 비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암거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이 일부 구간에서나마 발견된 것이었다.

(https://news.seoul.go.kr/culture/archives/52788)

 


집결지에서 출발하여 '남대문로10길'을 따라 청계천한빛광장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다른 도로들을 모두 남북 방향의 격자 모양을 이루는데 이 길만 빗금 방향으로 되어 있다.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지류 하천이 흐르던 곳이기 때문이다.

(을지로입구역 부근에서 GPS 로그 궤적의 오류가 심하다. 이리저리 막 튀었네. 하나은행 지하의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공간을 좀 오래 이용한 결과이다. GPS는 하늘만 보고 있어야 하니까...)

 

광통교가 있었던 곳에는 '광교'가 위치하고 있다.

복개했던 청계천의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자그마한 광교로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위치를 서쪽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광교가 건설된 것이다.

 

광교 북단에 위치한 신한은행 건물 앞에 자그만하게 광통교의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광교의 길이가 상당히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더 넓게, 더 깊게 파낸 것이 현재의 모습이겠다.

돌다리인 광통교의 석재로 정릉의 신장석을 가져다 사용했다는 것이 독특하다.

 

현재의 광교 주변 안내도.

 

청계천 징검다리를 건너는 답사대원들.

 

'개천' 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둑의 양쪽에 석축을 쌓았다는 안내문.

'개천'이라 하였다. 토사가 하천 바닥에 쌓여 물이 넘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하천 바닥을 준설하는 준천 작업 또한 반복되었다. 그래서 하천을 열어준다는 '開川'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에야 '청계천'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상류의 '淸風溪'에서 청계천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다음 자료를 보면, 지금의 세운상가 있는 부근까지 석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노혜정, 1994, 서울시 중소하천의 경관변천에 관한 연구, 지리학논총, 제24호, 88)

 

수선전도를 탐구하는 답사대원들.

 

삼일빌딩 맞은편에 위치한 워터 스크린.

이 위치가 을지로입구역 부근을 지나 온 회현동천과 합류한 창동천이 청계천에 합류되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동천이 청계천에 합류하는 지점의 곡교 모습을 보여주는 1950년대 사진이 남아 있다.(서울역사박물관 보도자료, 2020년 7월 3일, 10쪽)

 

삼일교 아래에는 한화불꽃이 이글거린다.

 

청계천 복원 공사후 개통 첫 날,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삼일교의 중앙분리대에 조형물 설치 및 투광 목적으로 구멍이 주욱 뚫려 있었는데, 출입이 금지된 도로 한가운데의 조형물을 가까이 보려 다가왔다가 온 김에 아래의 구멍을 좀 깊숙이 쳐다보시다가 그만... 사망 사고였다. 그래서 지금은 조형물은 제거되고 구멍들을 모두 막혀있다.

 

가짜 수표교. 원본은 장충단공원에 계시는데 여러차례 원래 위치로의 이전이 시도되었었으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이제는 논의가 중단된 상태이다.

현재 수표교의 위치도 원래 위치에서 어긋나 있다. 청계천 남북의 수표로를 잇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동쪽으로 30여 미터 차이가 난다. 원본께서 돌아오실 날을 기다리는 것일까???

 

서울의 중심 도로인 종로이다. 길 건너편으로 '송해길'이 이어진다.

 

조선시대 시장을 관리하던 관청인 '경시서'가 있던 터 표지석.

이 일대에 시전, 육의전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육의전PC방, 육의전 귀금속방 등이 성업 중이다.

 

퇴직하면서 나의 노후생활의 터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혼자 답사도 왔던 곳이다. 탑골공원, 입구인 삼일문.

 

탑골공원 속의 나......

 

탑골공원의 핵심 뽀인트인 팔각정.

 

주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 저기낄려면 장기 정도는 배워두어야 하는가...

 

낙원악기상가 건물 옆을 지났다. 외관을 보면 보수 공사가 시급해보인다.

 

소머리국밥집 골목. 음~~~~ 햐~~~~~

여기서 답사에서 빠졌었으면............ 발걸음이 안떨어졌었는데...

 

그 분께서 즐겨 찾으셨었다는......

요기까지는 노인들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드디어 익선동이다. 여기부터는 젊은이들의 공간이다.

 

골목이 좁고 혼동된다 하여 지도를 하나 인쇄해 들고 왔다.ㅎㅎㅎ

 

익선동 답사...

 

"한옥거리"라고 하지만 '한옥'은 보이질 않는다. 그냥 좁은 골목길이다.

 

그래서 높은 곳을 찾아 올라왔다. 종묘가 보인다.

 

창덕궁, 보현산까지 아주 잘 보이는 곳을 찾아 올라왔다.

 

높은 곳에서 익선동 한옥거리 쪽을 조망하였다. 기와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러니 골목이 좁을 수 밖에 없다.

옛지명인 '익랑골'과 한성부 중부 '정선방'의 명칭을 합쳐서 만들어진 지명이 익선동이다.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서울의 주거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도 탐을 내기 시작했을 때 민족자본가인 정세권이 그들의 의도를 막아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주택개발업체인 '건양사'를 설립해 서울 곳곳에 한옥 주택을 지어 분양하였으며, 분양대금을 월단위로 나누어 내도록 하여 입주자들의 정착을 도왔다.

 

익선동 일대에서 정세권이 소유했던 지역과 한옥의 규모별 분포도를 보자. 다양한 규모의 다양한 형태의 가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와 전기를 설치하고 좁지만 마당까지 마련하여 한옥의 실용성을 최대한 살려냈다.

(이두현, 2023, "전통을 활용한 골목재생, 익선동" 월간 국토, 통권 496호, 61쪽.)

 

최대한 가옥들을 배치하기 위해 골목은 좁을 수 밖에 없었고,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면서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위치는 서울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종로 화류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다.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3대 요정의 하나였던 '오진암'이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오진암, 명월 등 요정이 성업을 하게 되면서 필요하고 도우이 되는 서비스업이 따라 들어왔다고 한다. 악기상가나 한복상가 등이 성업하게 된 배경 중 하나라고 하더라. 한복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소수만 남아 있다.

 

 

"100년 전의 해어화를 쫓다…오진암과 명월의 추억이 있는 종로"

( 100년 전의 해어화를 쫓다…오진암과 명월의 추억이 있는 종로 (mk.co.kr) )

 

오진암의 옛모습은 연합뉴스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화나무가 그렇게 근사했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16, https://www.yna.co.kr/view/AKR20100915228200004)

 

오진암이 있었던 곳에는 이비스앰배서더 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화류 문화의 핵심이었기에 영업 중지이후 해체될 때 오진암의 보전 논의가 활발했었다. 그 결과 오진암이 있던 곳에는 이비스 호텔이 들어서고, 해체된 오진암은 부암동으로 이사갔다.

부암동에 안평대군이 지었었다던 무계정사는 소실되었지만, 2014년에 그 자리를 복원하면서 무계원을 조성하였다. 무계원의 한옥 건물이 오진암을 옮겨온 것이다. 부암동을 가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정세권 아저씨가 만든 공간이 익선동 한옥거리, 한옥골목을 과거의 요정을 생각해보면 떠난다.

 

오늘의 답사도 9시 넘어서 완료되었나 보다.... 

'종로3가역'이 보이길래 1호선인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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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대학의 동남권캠퍼스에서 수강신청한 강좌인

"역사경관과 현대식 빌딩이 공존하는 도시 서울(현대편)"의 현장 답사 마지막 날이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답사 시작 전에 청계천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을지로입구역에서 합류하여 일정을 함께 했다.

 

4호선 지하철을 이용해 동대문역으로 달려가 오간수교에서부터 청계천을 따라 상류를 향해 걸었다.

 

1주일 만에 다시 만난 동대문, 흥인지문이다. 잘 계시더라.^^

 

8번 출구 옆에 설치된 '전차 차고지' 표지석으로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구한말에 설치되었던 전차의 차고지와 발전소가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청계천 변에 위치한 신평화시장.

 

평화시장. 서점들이 많더라. 헌책방들도 있는 것 같더라.

한때 헌책방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였었는데.. 다음에는 이곳이 목표일 것 같다.

 

전차 차고지 자리를 차지한 JW메리어트 호텔과 동대문종합시장.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늘 북쪽의 통로만 이용했었는데, 오늘은 남쪽의 통로를 걸어본다.

 

오간수교가 오간수교인 것은 옛날 이곳에 오간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도성 한폭을 흘러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청계천의 출구였었다.

 

청계천은 주변 평지에 비해 하천의 깊이가 매우 얕았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장마철마다 물이 넘쳐 주기적으로 하천 바닥을 준설하는 공사를 하곤 했다.

영조 때인 1760년에 아주 큰 공사를 벌였고 그 과정을 기록한 '수문상친림관역도'가 오간수교 아래 옮겨져 있다.

 

그린 그린하다.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좋구나.

 

청둥오리 한쌍이 노닐고 있고...

 

쥐똥나무도 보인다.

 

찔레꽃이 피어 있는데...

 

참새들이 요란하다.

 

작품 활동 중인 외국인 작가도 보인다.

 

잉어들의 덩치가 아주 실허다. 잘들 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가짜 수표교엔 '수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역시 가짜다.

 

워터 스크린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는 엄청나다. 화성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들르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은 이곳에 있다.

 

광교 틈새에는......

 

모전교 아래로 청계 케스케이드가 살짝 보인다. 다왔다.

 

동대문역 부근의 오간수교에서 이곳까지 사진 만들면서 천천히 걸어오니 45분 정도 걸리더라.

 

청계광장에서는 행사 준비가...

 

답사를 위한 집합 장소인 을지로입구역 4번 출구앞에 도착했다. 답사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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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11일 오후 한양도성 답사에 참여하였다. 서울시민대학의 이현군 박사 주관 강좌의 답사코스 중 하나였다. 이동을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도성과 이동의 수단이 되는 도로, 전차, 지하철 등 교통로의 결합이 주제였다. 

 

서울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에서 보면 E~D 구간에 해당하는 지역을 답사하였다. 광희문에서 시작하여 성곽이 사라진 구간을 찾아가며 흥인지문까지 이동하면서 복원된 이간수문, 오간수문이 있던 곳, 구한말에 건설되었던 전차 차고지 등을 살펴보았다.

 

1902년 한양 지도. 한양의 모습과 도성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위의 한양도에서 광희문, 흥인지문 주변 부분을 확대해보았다.

광희문에서 흥인지문 사이에 청계천의 물길이 도성 밖으로 빠지는 통로였던 이간수문과 오간수문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훈련도감에 속한 관청의 하나인 '하도감' 도 성곽 가까이에 표시되어 있다. 부근에 '훈련원' 표시가 보이는데, 조선 건국 초부터 있었던 군사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 앞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훈련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도성 내에서 청계천의 하류에 해당하여 "아랫대(下村)"라 불렸으며, 청계천의 상류에 해당하는 인왕산 동쪽 일대는 "웃대(上村)"라고 불렸다고 한다.

 

광희동사거리에 위치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번 출구 앞에서 집결하여 답사를 진행하였다.

 

복원된 광희문. 문의 이름을 알려주는 현판은 도성의 바깥 쪽에만 달려 있다. 남산 방향으로 약간의 성벽이 남아 있다.

 

광희문의 홍예 부분 천장에는 용 두마리가 노닐고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창건할 때 세워진 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은 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도 사용되어 시구문으로도 불렸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파손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되었는데, 자동차 도로가 넓어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성벽의 돌들 중에는 사연을 새긴 각자성석이 보이곤 한다. 멀리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읽어볼 수는 없었다. 멀어서 안보이는거다.ㅠ.ㅠ

 

각자성석의 내용은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이라고 한다. 위 사진의 것과는 다른 돌인갑다.

 

도로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도성이 분수계를 따라 축성되었으며, 도로 가운데 위치했던 광희문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복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광희문의 통행가능한 폭은 승용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지금의 도로폭과 비교하면 도저히 원래 위치에 그대로 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교통이 발달하면서 도성의 성문은 수난을 겪게 된다.

 

전차의 궤도가 건설되고 노선이 확대되면서 도성은 파괴의 아픔을 겪었다. 서울 전차 궤도가 건설되면서 훼손되고 있는 숭례문과 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옛날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93402에서 인용)

 

광희문에서 도로 건너편에 도성의 흔적이 약간이나마 남아 있다.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흔적에 대한 안내판이 바로 앞에 세워져 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니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그곳의 거대한 건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유려한 곡선미를 마음껏 표현하고 있는 건물로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인 Zaha Hadid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벽들과 바닥, 천정들이 섞이고 확장되어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유기적인 구조로 표현함으로써 파격적이면서도 부드럽게 부유하는 역동적인 공간 미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격적으로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건물이다.^^

 

DDP 옆으로 성곽 구간을 일부 복원해놓았다.

 

DDP를 포함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동대문 운동장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이다. 

 

1968년 동대문운동장 보수공사 시 설치되었던 야간 조명 시설 일부는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봉화대도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화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55년 개최된 제36회 전국체육대회로 성화대에 불을 옮기는 최종 주자는 고 손기정이었고, 성화의 전국 일주는 1969년 제50회 전국체육대회가 최초였다고 한다.

 

공원 내 한쪽 구석에 이간수문이 복원되어 있다.

 

돌의 일부에는 구멍이 파여 있다. 

 

그 구멍은 나무로 벽을 덧대는 용도였다. 성곽의 일부 구간이 이간수문이었고, 물이 흘러 빠져나가면서도 방어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일부 돌들에는 거울, 십자표식 등이 껌딱지로 붙어 있다. 성벽의 뒤틀림 같은 변형을 주기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지표가 아닌가 생각된다.

 

발굴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2008년 9월초, 이간수문의 홍예 상단이 처음으로 노출된 모습.

2008년 11월 초, 호예 내부의 퇴적물 위에 놓여 있는 박석의 모습.

2008년 12월 초의 발굴 완료 상태. 퇴적물을 모두 제거하고 난 이후 드러난 이간수문의 축성 상태.

 

이간수문을 살펴보고 나오는 배나온 답사대원.....

 

 

청계천 지류 구간이 복개되었기 때문에 이간수문의 복원을 이렇게 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패션 쇼핑몰을 지나간다. 외국인들이 참 많다. 도로와 골목에 오토바이가 참 많다.

 

청계천을 만나 오간수교 아래로 내려간다. 공사기간에 쫓겼을까... 오간수문을 저렇게 만들어놓았다.

 

오간수문이 있던 곳인 오간수교.

 

오간수교 아래 오간수문의 사진과 그림이 남아 있다. 그림은 오간수문 부근에서 청계천의 쌓인 토사를 준설해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여러 차례의 준설 공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영조 때의 것이었다. 여러 마리의 소까지 동원되어 준설 공사를 하는 것을 임금께서 친히 납시어 오간수교 위에서 감독하고 있는 그림이다.

 

1760년에 영조의 명으로 청계천 준천을 마치고 그 과정을 4첩의 채색기록화로 남겼다. 김희성의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준천 작업을 묘사한 것은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중이다.

 

그리고 영조께서는 수고했다는 어필을 남기시었다.

준설해낸 토사의 양이 많아 청계천 부근에 假山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이후 그곳에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모여살며 환경이 악화되자 꽃나무를 심어 그 향기가 널리 퍼져 芳山이란 이름이 붙었고, 이후 이곳에 들어선 시장은 방산시장이 되었다.

 

청계천의 유로는 평소에는 수돗물로 유지되지만.............

 

비가 오면 부근의 수많은 복개 하천들로부터 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한 수문들 중 하나. 자동으로 열린다. 사전에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하니 제발 말 좀 바로 듣길 바라요~

 

드디어 커다란 흥인지문을 만난다. 광희문은 4소문 중 하나, 흥인지문은 4대문 중 하나...건너편의 녹색 언덕은 흥인지문공원, 공위의 윗쪽으로 낙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보인다.

 

동대문역 8번 출구 부근에 '전차 차고 터' 표석이 있다. 구한말에 운행이 시작되어 1968년 철거된 전차의 차고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와 구한말 전차 운영회사인 한성전기회사의 기계창도 있었다. 전차 운영이 필요한 차고지, 기계창, 발전 시설이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이다.

 

동대문 부근의 차고지와 발전소, 그리고 동대문의 모습을 보여주는 옛날 사진이다.

그리고 동대문 앞을 지나는 전차. 1960년대의 모습이다.

(위 두 사진 모두 서울역사박물관 전시,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93402에서 인용)

 

다른 사진을 보자. 화력발전소가 열심히 전기를 만들어 준 덕택에 동대문의 홍예 사이로 전차가 달리고 있다. 동대문을 전차가 통과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전차의 크기가 커지면서 동대문을 우회하여 지나게 된다.

(https://pzkpfw3485.tistory.com/2242620에서 인용)

 

길건너의 동대문역 7번 출구 앞에는 '경성궤도회사 터' 표석이 있다.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똑섬, 광나루까지 다니던 궤도전차가 출발하던 곳이었다.

 

경복궁의 월대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전차 궤도가 발견되면서 서울의 전차에 대한 관심이 커진 바 있다. 다른 곳의 노선은 모두 철거하였는데, 이 구간은 그냥 매립하고 도로 포장을 하였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흥인지문이 있는 구간은 성곽이 모두 사라지고 대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 1398년에 세운 한양 도성의 동쪽 문이며, 현재의 문은 1869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바깥쪽으로 방어를 견고히 하기 위해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의 성문 중에서 유일하다.

 

흥인지문공원의 성곽구간을 답사하였다.

 

옹성을 갖춘 흥인지문의 모습이 뚜렷하게 잘 보인다. 멀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방향으로 성곽이 이어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흥인지문 앞의 도로 건너편에 멋진 신식 건물이 보인다. 전차 차고지가 없어지면서 그 부지는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로 이용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이 폐쇄된 이후 주차장으로 이용되다가 들어선 JW 메리어트 호이다. 그 뒤로 동대문 종합시까지 전차 차고지와 발전소 부지였던 곳이었다.

 

...

 

오늘의 답사코스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호선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광희문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이간수문 - 오간수교 - 흥인지문 - 흥인지문성곽공원으로 이동하였다. 2.7km,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그리고 흥인지문에 밤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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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4일에 한양도성 일부 구간을 답사하였다. 

2017년에도, 2018년에도 답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지 못한 그 이전의 답사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2013년 11월 16일(토)에 사진들만 남아 있어 10년 만에 사진들만 정리를 해본다.

 

답사경로는 이와 같다.

경복궁역 주변에 집결하여 버스를 이용해 창의문까지 이동하여 숭례문까지 걸어서 이동했었다.

 

사진을 촬영했던 뽀인트들을 표시한 지도.

GPS 로그 기록을 남겼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 로그 파일이 남아 있질 않다.ㅠ.ㅠ

 

2013년 11월 13일. 오전 9시 12분에 촬영한 사진이다.

청계천 발원지. 윤동주 문학관 옆 도로가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 백운동천의 시작점에 해당한다.

 

바로 인근에는 1968년 1월21일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했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를 막아내는데 공헌, 희생한 이들의 동상이 서 있다.

 

9시 18분. 답사를 인솔했던 이현군 박사가 한양지도를 놓고 안내를 하고 있다.

 

요 지도이다.

 

창의문彰義門은....

서울 한양도성의 북서쪽에 낸 사소문 중 하나로 다른 이름으로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부른다. 조선 태조 5년(1396) 다른 문들과 함께 축조됐으며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문이다. 인조반정(1623) 당시에 거사에 가담한 군대가 이 문을 통해 들어왔는데 그 사연과 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한 현판이 지금도 문루에 걸려 있다. 성문의 홍예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고 천장에도 봉황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창의문 바깥 지형이 지네의 형상이라서 지네의 천적인 닭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봉황을 새기고 그려넣은 것이라는 속설이 전한다.

창의문 밖으로 나가면 환기미술관, 백석동천과 백사실 계곡, 세검정, 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의 사랑채 건물, 탕춘대성의 홍지문, 보도각 백불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날 답사에 담가했던 대원들의 단체 사진이 남아 있다.

그런데 어떤 단체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ㅠ.ㅠ

 

답사를 출발한다. 한양도성 순성 코스 중 숭례문-창의문 구간을 반대로 이동하였다.

 

9시 35분. 창의문앞 교차로에서 창의문로를 건너 인왕산 방향으로 들어간다.

 

9시 40분. 경치가 좋으다.ㅎㅎㅎ

 

윤동주 시인의 언덕 한쪽에 그린 한 폭이 소개되어 있다.

정선의 작품, 장안연우(간송미술관 보관).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내리는 날에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 서울 장안을 내려다 본 전경을 그린 것이라 한다.

11월이라 늦가을인데, 안개가 짙게 깔려 정선이 작품이 이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이 장안연우를 그릴 때의 분위기를 느끼며 자하문로를 걷는 답사대원들의 모습.

 

9시 53분. 인왕산 위의 한양도성 구간.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인왕산의 화강암이 닳고 닳았다.

" 자, 저쪽에 뭐가 보이지요?"

"안개요!"

 

산지 사면을 따라 만들어진 도성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숨이 차다!!!

방어를 위한 시설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철조망이 있다!!!

 

복원한 부분은 돌의 때깔이 다르다. 

 

안개가 몰려온다. 쌀쌀하다. 어으~~ 춥다.

 

10시 8분. 안개로 축축한 널바위 구간에서 이현군 박사의 설명이 있었다.

 

10시  30분. 정상에 오르다.

 

종로구는 이런 경계점 놀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서대문구와 종로구의 경계점.

2004년에 주요 경계점 10곳에 경계점 표석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검색된다.

 

10시 35분. 안개 속으로 올라왔다가 안개 속으로 하산한다.

 

사진찍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이제는 이런 정도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일텐데....

 

이정표가 보이면 촬영해두는 습관...

 

10시 40분. "여러분 춥습니까~?"

"네~"

 

계단의 경사가 아름답다~~~~

 

이렇게 허술해 보이는 구간도 존재한다. 그래도 산의 경사가 험하니까...

 

안갯속으로 한양도성의 허연 복원된 부분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조기다. 이날 안개는 참 대단했다.

 

10시 50분. 한계단 한계단 조심조심...

 

달님인 듯한 햇님...

 

11시. 서울 시내 방향의 조망 상태.

 

11시 10분. 뒤를 돌아보았다. 완전 오리무중이다.

 

11시 26분. 북악이 저곳에... 청와대의 지붕이 살짝 보인다.

 

11시 45분. 어느 틈에 홍난파 가옥 앞에 섰다.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을 홍난파가 인수해서 살았던 곳이다.

1930년대의 서양식 건물 특성을 그대로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입구에 홍난파의 조각상이 있다.

 

12시. 경교장을 방문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49년 6월26일 암살 당하기 전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2층 창문에 총알에 맞은 자국을 구현해놓았다.

 

12시 5분. 정동사거리에서 돈의문 터 주변을 살피고 있는 이현군 박사.

돈의문敦義門은 서울 한양도성의 서쪽 큰 문으로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의 다른 문들과 함께 준공됐는데 서대문·새문·신문이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라 전차궤도를 복선화한다는 명목으로 철거해 정확한 위치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은 돈의문의 위치를 ‘정동사거리’로 추정할 뿐이다.

 

12시 11분. 정동길로 들어섰다.

 

정동사거리에서 대한상공회의소까지의 구간의 도시화 과정이 중첩된 곳이다.

여러 차례의 개발 과정에서 도성의 모습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변해버렸다.

 

12시 15분. 이화여자고등학교 정문 길건너편, 이화 사주문 앞에 위치한 '대소인원개하마'라 적힌 하마비.

人은 보통 사람, 員은 관직이 있는 사람을 가리켰던 것이라네...

 

러시아 대사관 옆을 스쳐 지나간다.

 

12시 22분. 서울 성곽이 끊어진 구간 표시. 사유지이기 때문에 복원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아쉬움.

 

'터'를 나타내는 표지석을 저곳에 설치한 이가 누구일지 궁금하다. 찾아가볼 방법이 없는 곳이다.

소의문터.

 

12시 37분. 대한상공회의소 부근의 복원 구간이다.

 

12시 45분. 숭례문에 도착하였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인왕산 - 숭례문 구간의 한양도성 답사였다.

오전 9시 12분의 첫 사진에서부터 오후 12시 45분의 마지막 사진까지 4시간 정도를 진행한 빡쎈 답사였다.

 

 

이것은 비공식 일정의 기록이다.

오전의 답사를 성실히 수행하였기에 점심 식사 시간도 지나는 즈음이라 식당을 어렵게 찾아 점심 식사를 여러 답사 대원들이 함께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오랜 만에 만난 얼굴들이 서로 반가워.... 좀 반가워.... 좀 오래 반가워했었다.

그렇게 골목을 다니며 여러번 반가워 하다가 나의 기억은 log data가 삭제되었다.

다음 날 보니... 카메라는 잘 챙겨왔는데, 전화기가 따라오질 않았더라.

어디에다가 흘렸는지를 찾는 과정이 재밌었다. 네이버와 다음의 로드뷰를 십분 활용하여 위치 찾기를 했었다.

찾는 과정은 재밌었으나 다시는 당연히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여러번 있었던 스마트폰 분실사도 한번 정리해볼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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