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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11일 오후 한양도성 답사에 참여하였다. 서울시민대학의 이현군 박사 주관 강좌의 답사코스 중 하나였다. 이동을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도성과 이동의 수단이 되는 도로, 전차, 지하철 등 교통로의 결합이 주제였다. 

 

서울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에서 보면 E~D 구간에 해당하는 지역을 답사하였다. 광희문에서 시작하여 성곽이 사라진 구간을 찾아가며 흥인지문까지 이동하면서 복원된 이간수문, 오간수문이 있던 곳, 구한말에 건설되었던 전차 차고지 등을 살펴보았다.

 

1902년 한양 지도. 한양의 모습과 도성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위의 한양도에서 광희문, 흥인지문 주변 부분을 확대해보았다.

광희문에서 흥인지문 사이에 청계천의 물길이 도성 밖으로 빠지는 통로였던 이간수문과 오간수문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훈련도감에 속한 관청의 하나인 '하도감' 도 성곽 가까이에 표시되어 있다. 부근에 '훈련원' 표시가 보이는데, 조선 건국 초부터 있었던 군사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 앞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훈련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도성 내에서 청계천의 하류에 해당하여 "아랫대(下村)"라 불렸으며, 청계천의 상류에 해당하는 인왕산 동쪽 일대는 "웃대(上村)"라고 불렸다고 한다.

 

광희동사거리에 위치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번 출구 앞에서 집결하여 답사를 진행하였다.

 

복원된 광희문. 문의 이름을 알려주는 현판은 도성의 바깥 쪽에만 달려 있다. 남산 방향으로 약간의 성벽이 남아 있다.

 

광희문의 홍예 부분 천장에는 용 두마리가 노닐고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창건할 때 세워진 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은 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문으로도 사용되어 시구문으로도 불렸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파손되었다가 1976년에 복원되었는데, 자동차 도로가 넓어지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성벽의 돌들 중에는 사연을 새긴 각자성석이 보이곤 한다. 멀리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읽어볼 수는 없었다. 멀어서 안보이는거다.ㅠ.ㅠ

 

각자성석의 내용은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이라고 한다. 위 사진의 것과는 다른 돌인갑다.

 

도로 건너편에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도성이 분수계를 따라 축성되었으며, 도로 가운데 위치했던 광희문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복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광희문의 통행가능한 폭은 승용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지금의 도로폭과 비교하면 도저히 원래 위치에 그대로 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교통이 발달하면서 도성의 성문은 수난을 겪게 된다.

 

전차의 궤도가 건설되고 노선이 확대되면서 도성은 파괴의 아픔을 겪었다. 서울 전차 궤도가 건설되면서 훼손되고 있는 숭례문과 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옛날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93402에서 인용)

 

광희문에서 도로 건너편에 도성의 흔적이 약간이나마 남아 있다.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흔적에 대한 안내판이 바로 앞에 세워져 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니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그곳의 거대한 건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유려한 곡선미를 마음껏 표현하고 있는 건물로 이라크 출신의 건축가인 Zaha Hadid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벽들과 바닥, 천정들이 섞이고 확장되어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유기적인 구조로 표현함으로써 파격적이면서도 부드럽게 부유하는 역동적인 공간 미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격적으로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는 건물이다.^^

 

DDP 옆으로 성곽 구간을 일부 복원해놓았다.

 

DDP를 포함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동대문 운동장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이다. 

 

1968년 동대문운동장 보수공사 시 설치되었던 야간 조명 시설 일부는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봉화대도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화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55년 개최된 제36회 전국체육대회로 성화대에 불을 옮기는 최종 주자는 고 손기정이었고, 성화의 전국 일주는 1969년 제50회 전국체육대회가 최초였다고 한다.

 

공원 내 한쪽 구석에 이간수문이 복원되어 있다.

 

돌의 일부에는 구멍이 파여 있다. 

 

그 구멍은 나무로 벽을 덧대는 용도였다. 성곽의 일부 구간이 이간수문이었고, 물이 흘러 빠져나가면서도 방어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일부 돌들에는 거울, 십자표식 등이 껌딱지로 붙어 있다. 성벽의 뒤틀림 같은 변형을 주기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지표가 아닌가 생각된다.

 

발굴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2008년 9월초, 이간수문의 홍예 상단이 처음으로 노출된 모습.

2008년 11월 초, 호예 내부의 퇴적물 위에 놓여 있는 박석의 모습.

2008년 12월 초의 발굴 완료 상태. 퇴적물을 모두 제거하고 난 이후 드러난 이간수문의 축성 상태.

 

이간수문을 살펴보고 나오는 배나온 답사대원.....

 

 

청계천 지류 구간이 복개되었기 때문에 이간수문의 복원을 이렇게 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패션 쇼핑몰을 지나간다. 외국인들이 참 많다. 도로와 골목에 오토바이가 참 많다.

 

청계천을 만나 오간수교 아래로 내려간다. 공사기간에 쫓겼을까... 오간수문을 저렇게 만들어놓았다.

 

오간수문이 있던 곳인 오간수교.

 

오간수교 아래 오간수문의 사진과 그림이 남아 있다. 그림은 오간수문 부근에서 청계천의 쌓인 토사를 준설해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여러 차례의 준설 공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영조 때의 것이었다. 여러 마리의 소까지 동원되어 준설 공사를 하는 것을 임금께서 친히 납시어 오간수교 위에서 감독하고 있는 그림이다.

 

1760년에 영조의 명으로 청계천 준천을 마치고 그 과정을 4첩의 채색기록화로 남겼다. 김희성의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준천 작업을 묘사한 것은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중이다.

 

그리고 영조께서는 수고했다는 어필을 남기시었다.

준설해낸 토사의 양이 많아 청계천 부근에 假山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이후 그곳에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모여살며 환경이 악화되자 꽃나무를 심어 그 향기가 널리 퍼져 芳山이란 이름이 붙었고, 이후 이곳에 들어선 시장은 방산시장이 되었다.

 

청계천의 유로는 평소에는 수돗물로 유지되지만.............

 

비가 오면 부근의 수많은 복개 하천들로부터 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한 수문들 중 하나. 자동으로 열린다. 사전에 대피하라는 방송이 나온다 하니 제발 말 좀 바로 듣길 바라요~

 

드디어 커다란 흥인지문을 만난다. 광희문은 4소문 중 하나, 흥인지문은 4대문 중 하나...건너편의 녹색 언덕은 흥인지문공원, 공위의 윗쪽으로 낙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보인다.

 

동대문역 8번 출구 부근에 '전차 차고 터' 표석이 있다. 구한말에 운행이 시작되어 1968년 철거된 전차의 차고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와 구한말 전차 운영회사인 한성전기회사의 기계창도 있었다. 전차 운영이 필요한 차고지, 기계창, 발전 시설이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이다.

 

동대문 부근의 차고지와 발전소, 그리고 동대문의 모습을 보여주는 옛날 사진이다.

그리고 동대문 앞을 지나는 전차. 1960년대의 모습이다.

(위 두 사진 모두 서울역사박물관 전시,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93402에서 인용)

 

다른 사진을 보자. 화력발전소가 열심히 전기를 만들어 준 덕택에 동대문의 홍예 사이로 전차가 달리고 있다. 동대문을 전차가 통과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전차의 크기가 커지면서 동대문을 우회하여 지나게 된다.

(https://pzkpfw3485.tistory.com/2242620에서 인용)

 

길건너의 동대문역 7번 출구 앞에는 '경성궤도회사 터' 표석이 있다.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똑섬, 광나루까지 다니던 궤도전차가 출발하던 곳이었다.

 

경복궁의 월대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전차 궤도가 발견되면서 서울의 전차에 대한 관심이 커진 바 있다. 다른 곳의 노선은 모두 철거하였는데, 이 구간은 그냥 매립하고 도로 포장을 하였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흥인지문이 있는 구간은 성곽이 모두 사라지고 대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 1398년에 세운 한양 도성의 동쪽 문이며, 현재의 문은 1869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바깥쪽으로 방어를 견고히 하기 위해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의 성문 중에서 유일하다.

 

흥인지문공원의 성곽구간을 답사하였다.

 

옹성을 갖춘 흥인지문의 모습이 뚜렷하게 잘 보인다. 멀리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방향으로 성곽이 이어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흥인지문 앞의 도로 건너편에 멋진 신식 건물이 보인다. 전차 차고지가 없어지면서 그 부지는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로 이용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이 폐쇄된 이후 주차장으로 이용되다가 들어선 JW 메리어트 호이다. 그 뒤로 동대문 종합시까지 전차 차고지와 발전소 부지였던 곳이었다.

 

...

 

오늘의 답사코스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호선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4번 출구에서 시작하여 광희문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이간수문 - 오간수교 - 흥인지문 - 흥인지문성곽공원으로 이동하였다. 2.7km,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그리고 흥인지문에 밤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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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4일에 한양도성 일부 구간을 답사하였다. 

2017년에도, 2018년에도 답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지 못한 그 이전의 답사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2013년 11월 16일(토)에 사진들만 남아 있어 10년 만에 사진들만 정리를 해본다.

 

답사경로는 이와 같다.

경복궁역 주변에 집결하여 버스를 이용해 창의문까지 이동하여 숭례문까지 걸어서 이동했었다.

 

사진을 촬영했던 뽀인트들을 표시한 지도.

GPS 로그 기록을 남겼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 로그 파일이 남아 있질 않다.ㅠ.ㅠ

 

2013년 11월 13일. 오전 9시 12분에 촬영한 사진이다.

청계천 발원지. 윤동주 문학관 옆 도로가에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 백운동천의 시작점에 해당한다.

 

바로 인근에는 1968년 1월21일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했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를 막아내는데 공헌, 희생한 이들의 동상이 서 있다.

 

9시 18분. 답사를 인솔했던 이현군 박사가 한양지도를 놓고 안내를 하고 있다.

 

요 지도이다.

 

창의문彰義門은....

서울 한양도성의 북서쪽에 낸 사소문 중 하나로 다른 이름으로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부른다. 조선 태조 5년(1396) 다른 문들과 함께 축조됐으며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문이다. 인조반정(1623) 당시에 거사에 가담한 군대가 이 문을 통해 들어왔는데 그 사연과 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한 현판이 지금도 문루에 걸려 있다. 성문의 홍예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고 천장에도 봉황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창의문 바깥 지형이 지네의 형상이라서 지네의 천적인 닭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봉황을 새기고 그려넣은 것이라는 속설이 전한다.

창의문 밖으로 나가면 환기미술관, 백석동천과 백사실 계곡, 세검정, 대원군 별장이었던 석파정의 사랑채 건물, 탕춘대성의 홍지문, 보도각 백불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날 답사에 담가했던 대원들의 단체 사진이 남아 있다.

그런데 어떤 단체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ㅠ.ㅠ

 

답사를 출발한다. 한양도성 순성 코스 중 숭례문-창의문 구간을 반대로 이동하였다.

 

9시 35분. 창의문앞 교차로에서 창의문로를 건너 인왕산 방향으로 들어간다.

 

9시 40분. 경치가 좋으다.ㅎㅎㅎ

 

윤동주 시인의 언덕 한쪽에 그린 한 폭이 소개되어 있다.

정선의 작품, 장안연우(간송미술관 보관).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내리는 날에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 서울 장안을 내려다 본 전경을 그린 것이라 한다.

11월이라 늦가을인데, 안개가 짙게 깔려 정선이 작품이 이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이 장안연우를 그릴 때의 분위기를 느끼며 자하문로를 걷는 답사대원들의 모습.

 

9시 53분. 인왕산 위의 한양도성 구간.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인왕산의 화강암이 닳고 닳았다.

" 자, 저쪽에 뭐가 보이지요?"

"안개요!"

 

산지 사면을 따라 만들어진 도성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숨이 차다!!!

방어를 위한 시설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철조망이 있다!!!

 

복원한 부분은 돌의 때깔이 다르다. 

 

안개가 몰려온다. 쌀쌀하다. 어으~~ 춥다.

 

10시 8분. 안개로 축축한 널바위 구간에서 이현군 박사의 설명이 있었다.

 

10시  30분. 정상에 오르다.

 

종로구는 이런 경계점 놀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서대문구와 종로구의 경계점.

2004년에 주요 경계점 10곳에 경계점 표석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검색된다.

 

10시 35분. 안개 속으로 올라왔다가 안개 속으로 하산한다.

 

사진찍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이제는 이런 정도는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일텐데....

 

이정표가 보이면 촬영해두는 습관...

 

10시 40분. "여러분 춥습니까~?"

"네~"

 

계단의 경사가 아름답다~~~~

 

이렇게 허술해 보이는 구간도 존재한다. 그래도 산의 경사가 험하니까...

 

안갯속으로 한양도성의 허연 복원된 부분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조기다. 이날 안개는 참 대단했다.

 

10시 50분. 한계단 한계단 조심조심...

 

달님인 듯한 햇님...

 

11시. 서울 시내 방향의 조망 상태.

 

11시 10분. 뒤를 돌아보았다. 완전 오리무중이다.

 

11시 26분. 북악이 저곳에... 청와대의 지붕이 살짝 보인다.

 

11시 45분. 어느 틈에 홍난파 가옥 앞에 섰다.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을 홍난파가 인수해서 살았던 곳이다.

1930년대의 서양식 건물 특성을 그대로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입구에 홍난파의 조각상이 있다.

 

12시. 경교장을 방문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49년 6월26일 암살 당하기 전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2층 창문에 총알에 맞은 자국을 구현해놓았다.

 

12시 5분. 정동사거리에서 돈의문 터 주변을 살피고 있는 이현군 박사.

돈의문敦義門은 서울 한양도성의 서쪽 큰 문으로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의 다른 문들과 함께 준공됐는데 서대문·새문·신문이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라 전차궤도를 복선화한다는 명목으로 철거해 정확한 위치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은 돈의문의 위치를 ‘정동사거리’로 추정할 뿐이다.

 

12시 11분. 정동길로 들어섰다.

 

정동사거리에서 대한상공회의소까지의 구간의 도시화 과정이 중첩된 곳이다.

여러 차례의 개발 과정에서 도성의 모습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변해버렸다.

 

12시 15분. 이화여자고등학교 정문 길건너편, 이화 사주문 앞에 위치한 '대소인원개하마'라 적힌 하마비.

人은 보통 사람, 員은 관직이 있는 사람을 가리켰던 것이라네...

 

러시아 대사관 옆을 스쳐 지나간다.

 

12시 22분. 서울 성곽이 끊어진 구간 표시. 사유지이기 때문에 복원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아쉬움.

 

'터'를 나타내는 표지석을 저곳에 설치한 이가 누구일지 궁금하다. 찾아가볼 방법이 없는 곳이다.

소의문터.

 

12시 37분. 대한상공회의소 부근의 복원 구간이다.

 

12시 45분. 숭례문에 도착하였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인왕산 - 숭례문 구간의 한양도성 답사였다.

오전 9시 12분의 첫 사진에서부터 오후 12시 45분의 마지막 사진까지 4시간 정도를 진행한 빡쎈 답사였다.

 

 

이것은 비공식 일정의 기록이다.

오전의 답사를 성실히 수행하였기에 점심 식사 시간도 지나는 즈음이라 식당을 어렵게 찾아 점심 식사를 여러 답사 대원들이 함께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오랜 만에 만난 얼굴들이 서로 반가워.... 좀 반가워.... 좀 오래 반가워했었다.

그렇게 골목을 다니며 여러번 반가워 하다가 나의 기억은 log data가 삭제되었다.

다음 날 보니... 카메라는 잘 챙겨왔는데, 전화기가 따라오질 않았더라.

어디에다가 흘렸는지를 찾는 과정이 재밌었다. 네이버와 다음의 로드뷰를 십분 활용하여 위치 찾기를 했었다.

찾는 과정은 재밌었으나 다시는 당연히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여러번 있었던 스마트폰 분실사도 한번 정리해볼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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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의 하나가 수선전도일 것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도성의 상태가 온전한 것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북악과 남산 사이에 배치된 4대문과 4소문의 위치를 확인해보자.

 

한양의 도성을 찾아 따라 걷는

'지오트립'에서 마련한 행사에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었다.

도성이 온전한 구간도 있었고, 본격적으로 복원한 구간도 있었고,

군데 군데 끊어진 곳을 찾아가면 걸어보는 구간도 있었다.

그 행사들은 일찍부터 한양도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이현군 박사가 인솔하는 행사였었다.

서울시민대학 동남권캠퍼스에

"역사공간과 현대식 빌딩이 공존하는 서울(현대편)"이란 강좌가 개설된 것을 확인하고,

서울시평생학습포털을 통해 수강신청을 했다.

다행히 개설되자 마자 신청하여

서울시민대학 23학번 학생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2023년 5월 4일에 두번째 야외답사가 진행된 곳은 백악마루 아랫 구간이었다.

혜화문에서 와룡공원 언저리까지 와서 암문을 통해 성을 몰래 빠져나가 북정마을을 답사하였다.

대표

한양도성은.....

 

 


 

 

한성대입구역 5번출구 앞에서 집결하였다.

20여 명의 참가자들이 이동과정에서 안전을 챙기기 위해 목걸이를 하나씩 하고 패용한다.

 

지하철역 출구 바로 옆에 성북동의 유래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 후기 들어서부터 사람들의 정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성대입구역 교차로에서 성북로를 건너간다.

 

원래 관문은 도로 한가운데 위치하면서 통행을 조절하는 것인데, 도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도로 바깥쪽으로 "치워졌다". 역사의 한 흐름이랄까...

 

혜화문에서 저쪽 건너편으로 도성 구간이 낙산공원 쪽으로 이어진다. 흥인지문까지 낙산공원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괜찮은 코스이다.

한양도성의 북동쪽에 위치한 혜화문은 처음엔 弘化門이었다가 1511년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로 동소문으로도 불린다. 사소문 중 하나이지만 통행량은 사대문 못지 않았다고 한다. 한양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경원가도가 혜화문과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어 혜화문이 그 역할까지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창의문과 마찬가지로 혜화문의 홍예 천장에도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들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봉황을 그려넣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성문 위의 문루도 없는 상태였는데, 영조때 문루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1928년에 문루가 헐렸고, 1938년에는 홍예마저 없앴다. 그랬던 것을 1994년에 본래 위치보다 북쪽으로 옮긴 자리에 홍예와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러니 사진의 혜화문은 온전히 "새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인근에 '한양도성혜화동 전시안내센터'가 위치한다.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활용한 것이다. 한양도성의 가치를 키우기 위해 열심히 복원작업을 하는 와중에 서울시장이란 사람이 그 도성위에서 살고 있다? 그런 이면이 있었기에 공관이 한양도성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주 약간 남아 있던 도성 위에 새롭게 복원된 성벽이 잘 어울린다.^^

한양도성은 조선 태조 때 처음 축조된 이후 세종과 숙종 때 대규모의 수축과 개축을 거쳤다. 세 시기에 쌓은 성벽은 돌의 모양도 다르고 쌓는 방법도 달라 쉽게 구별된다. 이제 네 시기의 축성 방법이 되겠구나.

이 구간에 남아 있는 성벽은 아래 자료를 참고하면 세종 때의 것이 아닌가 싶다.

 

 

두산빌라는 한양 도성 위에 건축되었다. 성벽을 보면, 태조 때의 것일 것 같은데... 강점기 이후 도성에 대한 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파괴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중요한 가치를 갖는 한양의 도성이었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던 시기를 거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일 것이다.

두산빌라로 들어가는 골목의 좁은 도로가 작은 고갯마루이다. 종로구와 성북구의 분수계에 해당하는 경계를 이룬다.

 

마찬가지로 태조 때 축성된 도성 위에 교회도 앉아 있다.

 

이제 그러한 도성의 흔적마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경신고등학교 운동부 학생들의 함성이 기운차게 들리고 있었다.

 

언덕위에 자리잡은 경신고등학교 건물의 아랫쪽. 도성의 약간이나마 남은 흔적과 축대와 학교의 담장이 혼재되어 있다.

 

서울과학고등학교 구간은 도성이 없어졌다.

 

서울과학고등학교 후문 쪽 길바닥에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점 표식이 설치되어 있다.

종로구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종로구는 도성의 안쪽, 성북구는 도성의 바깥쪽이다.

 

성북동쉼터이다. 이곳에서부터는 도성이 복원되어 있다.

 

올라간다. 자주 걷다보면 건강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더라.

 

건강해진다~~~

 

성북동은 녹색지대이다. 동네옆의 숲속으로 도성이 주욱 이어진다. 그러니까 성북동은 도성의 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인 것이다.

 

도성을 따라 숲이 이어진다. 자주 걸으면 건강해질 것이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 북악 팔각정이 작게 보인다. 저 능선의 왼쪽에 북악이 있고, 오른쪽으로 쭈욱 가면 북한산에 이른다.

 

계단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와룡공원이다. 우리 팀은 성곽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도 답사해보기로 했다.

 

도성에 제대로 된 유명한 통로가 아니라 그냥 개구멍처럼 몰래 아는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암문이라 한다. 숨겨진 문이라는....

원래 암문은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하거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만든 아주 작은 문이다. 평소에는 돌로 막아두었다가 전시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하는 비밀통로인 것이다. 현재 한양도성에는 모두 여덟 곳의 암문이 있다.

 

 

북정마을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심우장에 이르기도 하고...

 

 

옛날 개발의 시대 같았으면 진즉에 재개발을 하겠다고 덤벼들었을 법한 그런 동네로 보인다.

 

안내도 조차도 재개발이 필요하다. 개발 '계획' 없이 들어선 마을이다. 그러다 보니 길이 제대로 만들어질 겨를이 없었다. 차량은 들어와야 하고 길은 좁다. 그래서 일방통행으로 해결하고 있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게 되어 있다.

 

일방 통행해야 하는 도로.

 

1983년 소방도로준공기념비가 보인다. 소방도로가 필요하다고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이전 일방통행의 좁은 도로조차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좀 묵은 동네이다 보니 노인인구의 비율이 높다. 노인정, 경로당이 여럿. '할머니경로당'이 따로 있네....

 

북정마을의 중심지이다.

버스정류장이 있고, 노인정이 있고, 북정카페가 있고, 약간의 주차가능 공간이 있고,

게다가 화장실이 있다!!!!!!!!!!

 

조 앞으로 도성의 모습도 아주 잘 보인다.

 

도성을 바라보고 뒤돌아 아주 아주 좁은 골목길로 내려간다. 심우장 가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 오른쪽으로 비둘기공원이 있다. 비둘기 책방도 있어 책을 꺼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계속 날아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성북동 비둘기'이다.

 

좁은 길이라고 했다. 분명히...........ㅎ

 

주욱 내려가다가 담 너머로 심우장이 보인다. 아담한 공간이다.

 

심우장은 24번지이다.

 

selfie 딱 한 장 만들었다.

 

만해 할배가 앉아 있었음직한 자리에 앉아 혼자 몰래 분위기를 잡아 보았다.

 

님의 침묵의 필사본도 만져보았다. 내용은???

 

이게 머니?????? 필사본이기는 하구나...ㅠ.ㅠ

 

만해 한용운은 1933년에 이곳에 심우장을 짓고 정착하였다 한다.

 

 

만해 한용운과 인연이 닿은 곳들이다. 백담사, 건봉사, 신흥사, 서대문형무소, 만해산책공원, 심우장까지 가보았네...

.

 

 

심우장을 나선다. 북정마을이다.

붉은 페인트로 × 표시가 되어 있다. 공가, 빈집이란 표시란다. 빈집들이 지방의 산골 뿐 아니라 서울시내에도 볼 수 있는 지역인 것이다.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쉬어간다. 다음 일정에 대한 안내도 이루어졌다.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집터였다는 표식이 바닥에 있더라.

 

바로 아래에 만해산책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심우장 만을 방문하려 한다면, 성북로를 따라 올라와 만해산책공원에서 골목을 올라가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고, 한양도성구간을 살짝 즐기며 방문하는 방법이 있겠다. 양쪽을 모두 즐길 수도 있겠고...^^

 

성북로를 따라 걸어서 내려왔다. 쌍다리돼지불백 왼쪽 골목이 북정마을로 올라가는 길이다. 운전하기에 난코스이다. 제한속도 30을 꼭 지켜야 하는 구간.

 

서울과학고등학교의 뒷편에 위치한 성북동쉼터. 성북역사문화공원이라는 간판을 달아놓았다.

 

성북로변에 선잠단지가 있다.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서 왕비가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며, 선잠제도 고려시대부터 꾸준히 시행되었다고 한다. 강점기에 들어서 금마덜이 중단시켰다.

 

선잠단지는 요로케 생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옆에 선잠박물관을 만들었다. 왜? 모할라꼬??

 

성북로에 조성된 가로공원이 아주 예쁘더라. 방송에서 잠시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이곳이었네.

 

5월 4일 한양도성 및 북정마을 답사를 따라와서 이동한 코스가 이렇다. 3.9km 구간, 약 2시간이 소요되었다.

 

2023년 5월4일. 이현군 박사를 따라다닌 서울시민대학 동남권 캠퍼스의 "역사공간과 현대식 빌딩이 공존하는 서울(현대편)" 답사기록.................이었다.

 


참고로 한양도성의 순성 코스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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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7일 화요일을 시작한다.

10시 8분. 천산천지를 향해 이동하는 길가에 거대한 공장이 보였다. 커다란 냉각탑이 두개 보이길래 구글지도에서 검색해 보았는데.... 나오질 않는다.

 

10시 17분. 천산천지 입구에 도착하였다. 우루무치에서 북동쪽으로 약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안내도...

 

입장권이 필요하다.

 

10시 30분. 셔틀버스로 갈아탄다.

 

11시 15분. 셔틀버스에서 내린다.

 

걸어올라간다.

 

11시 20분. 천산천지에 도착하였다.

 

호수 안쪽 저 멀리 허연 만년설이 보인다. 8월에 눈이 쌓여 있으니 만년설일 것이다.

호수의 면적은 약 4.9제곱킬로미터, 평균 수심은 40m 정도이다. 가장 깊은 곳은 105m에 이른다.

 

사진 하나...

 

천지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유람선이 있다.

 

이런 배를 타고 호수 안쪽을 다녀올 수 있다.

 

배 위에서~

 

작은 사찰 구경...

 

박격달봉에 조금 더 가까이 와보았다.

 

골짜기가 무너져 내리면서 둑을 만들었고,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던 빙하 녹은 물이 고이면서 만들어진 호수가 천산천지이다.

 

이정표. 어디로 가시렵니까?

 

비룡담 쪽으로 걸어내려간다.

 

폭포들을 여럿 볼 수 있다.

 

예쁜 무지개도 볼 수 있다.

 

급경사를 격류를 이루며 쏟아져 내린다. 장관이다.

 

1시 17분. 천산천지유객복무중심까지 걸어내려왔다.

 

1시 20분.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이랬던 아이가...

 

이렇게 되더니...

 

이렇게 변했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을지.....

 

천산천지에서 돌아다닌 궤적인데...

 

4시. 신강 빅믈관을 방문하였다. 투란 미녀의 미이라를 보관 중인 곳으로 유명하다.

 

신강 박물관은 신강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12개 소수 부족의 공예품과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전시물의 배치와 진열이 잘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입구 로비에 전시된 신강 지역의 지도.

 

투란에서 발견된 아가씨의 미라. 나보다 4,000살 정도 누님이시다.

 

5시40분. 우루무치의 명소인 홍산공원에 올랐다.

 

홍산공원을 즐기는 시민들.

 

홍산에 올라 우루무치 시내의 멋진 모습을 조망해본다.

 

홍산탑.

 

임칙서 아저씨. 서안 비림의 현판에서 '비'의 점 하나를 빼먹은 인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우루무치 구경을 다 한다.

 

시원한 그늘에서 장기를 즐기는 고수들.

 

7시 20분. 우루무치 그랜드 바자르를 방문하였다.

 

다양한 견과류.

 

스마트폰 삼매경.

 

칼칼...

 

10시 50분. 저녁 식사가 마무리 되어간다. 사진 속의 두 분이 누군지 알 것 같다....^^

 

11시 25분. 몽롱한 우루무치 거리를 달린다. 공항으로 달린다.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 수속을 하고 기다리다가 무사히 날아왔다.

8월8일 새벽 1시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8월8일 6시 비행기 날개에 여명이 물들기 시작한다.

 

비행기가 기울어진다. 저 아래 섬은...?

 

날개의 플랩이 늘어진다. 착륙 모드다.

 

 

날개에 부채가 펼쳐졌다.... 저 부채 이름은???

 

7시 10분. 랜딩.

 

이렇게 실크로드 여행 세번째, 중국 여행 네번째의 일정이 마무리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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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에서 우루무치를 향해 달려가는 길은 볼 때마다 시원하다. 두번 보았다.ㅎㅎㅎ

오른쪽 방향으로 멀리 하얀 머리의 박격달봉, 보거다 봉이 보여 눈을 시원하게 한다. 해발고도가 5,445m.

 

투루판을 떠나 오른쪽으로 박격달봉의 만년설을 구경하면서 달린다.

다반성 지구를 지나면 염호들이 나타나고, 우루무치 강을 따라 왼쪽으로 골짜기를 올라가면 남산목장이 나온다. 오늘의 일정은 그곳까지...

 

길가에 하얀 염호가 보인다. 그냥 퍼내면 소금이 된다.

 

지나던 길가의 작은 회족 마을. 淸眞이란 간판이 보인다. 모스크이다. 老回民이란 간판이 계속 나타난다.

 

오후 1시 40분. 잠시 정차했다. 왜?

모르겠다......식당이긴 한데.....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던것일까....ㅠ.ㅠ

간판 한쪽에 湖南人이라 그려져 있다. 이건 무엇일지...

 

2시50분. 투루판과 우루무치 사이는 바람골이다. 강한 바람이 지속적으로 불기에 거대한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4시 30분. 우루무치로 흘러드는 우루무치 강 상류에 위치한 명소인 남산목장에 도착하였다.

게르에서의 숙박, 양고기 식사, 계곡 상류 폭포까지의 말타기 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말타기 체험을 하였다.

 

무지개 다리를 새로 만들어두었더라.

 

원한다면 예쁜 옷을 빌려 입고 폭포 아래에서 예쁜 사진을 만들어볼 수 있다.

 

여럿이 함께 시원한 사진을 남기는 총각들.

 

폭포 아래에서 외롭게 혼자 서 있는 사진을 안만들고 그냥 왔구나. 계곡의 물은 시원하게 흘러내려간다.

 

6시 35분. 말타기 체험을 해보고 내려왔다.

이들은 위구르 족이 아니라 카자흐 족인 것 같다. 카자흐 요리를 판매한다고 써있다.

 

주변 산지에 초지가 무성하다. 목장으로 이용하기에 제격이겠다.

 

줄지어 선 파오들이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6시 40분. 잠시 파오 방문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7시35분. 우루무치 강의 양안은 하안단구가 여러 층 모식적으로 잘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잠시 차를 돌려 지형 관찰의 시간을 가졌다.

 

구글어스의 도움을 받아보았다. 붉은 선은 우리 차량이 지나간 궤적이다. 반대편에 계단이 여러 층 나타난다. 모두 하안단구이다.

 

답사대원들의 탐구 현장.

 

 

2012년 8월6일 우루무치에서의 숙소는 프랜드 호텔이었다. Friend Holiday Inn.

이름이 귀에 익다 싶었는데, 2년 전에 방문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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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6일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이동하는 날이다.

어제 투루판을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오늘을 위해 교하고성 한곳을 남겨 두었었다.

투루판교하장원주점, 교하 장원 호텔은 너른 포도밭 가운데 있어서 아침 산책하기에 좋았을 것 같은데.... 사진이 하나도 없다. 많이 피곤했었나보다.

 

9시 50분. 교하고성을 두번째로 방문하였다. 커다란 평면 안내도가 게시되어 있는데 이것만 보고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교하고성은 투루판 시가지에서 서쪽으로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의 인공위성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두개의 하천이 만나는 곳에 섬처럼 남아있는 곳이다. 두 하천이 만나기에 交河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두껍게 쌓여 형성된 지역이 이후 침식되어 고도가 점차 낮아졌는데, 침식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하안단구와 유사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주변보다 20여m 높은 베틀 북 형태의 지형이라고 설명된다. 길이는 1,650m, 폭은 300m 정도이다.

 

동쪽으로부터 올라가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런 유적을 보면 쌓아올린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대부분의 유적지가 지표면 위에서 아래로 파내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거의 다 부서져 구별이 어려운 상태로만 남아 있다.

교하는 BC. 108~ AD. 450까지 차사전국의 수도였다. 무역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450년 이후 당나라의 교현으로 편입, 관리되었다. 640년에 교하현이 만들어졌고, 658년에는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었다.

교하성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 위에 만들어졌기에 방어에 필요한 성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동쪽과 서쪽은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북쪽에서는 불교 사원과 탑이 발견된다. 동남쪽에서는 묘지와 관청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3세기 징기스칸에 휩쓸고 간 이후 인적이 끊겨 버려진 古城이 되었다.

 

주변은 깍아지른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적인 방어시설로 기능하였다.

 

퇴적층이었기에 그 흔적을 찾기는 쉽다.

 

연구자들의 답사모습.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달과, 렌즈에 묻는 먼지......ㅠ.ㅠ

 

주거지의 흔적이라고 한다.

 

남아 있는 불탑, 스투파.

 

불교 사원의 흔적이라고 한다.

 

물 저장고였다고...

 

아래로는 하천이 흘러 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고성 부분은 잿빛인데 아랫 부분은 그야말로 녹색으로 빛난다.^^

 

전시된 교하고성의 항공사진.

 

2006년, 2012년 이렇게 두번에 걸쳐 교하고성을 방문해보았다.

버려진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는 유적은 볼 때마다 쓸쓸한 감상에 빠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러한 감상에서 벗어서 신장위구르 자치주의 핵심인 우루무치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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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역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투루판으로 달려왔다.

아침 식사도 해결했을 것 같다. 사진들이 없다.ㅠ.ㅠ

투루판 역에서 2012년에는 투루판 지구(2015년에 투루판 시로 승격하였다.)로 이동하였다.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이동 중에 보이는 수많은 펌프들. 석유를 뽑아내고 있는 장면이다. 석유 생산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는 투루판이었다.

 

 

투루판 시에서 북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투루판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카얼정 박물관이다. 

다음에 고창고성, 아스타나 고분군, 천불동, 화염산 순으로 방문하였다.

투루판 시내로 들어와 위구르 민가를 방문하고 소공탑을 방문하였다. 이후 남쪽 저지대 멀리 떨어진 애정호를 답사하였다.

양고기를 잘하기로 유명한 식당에서 약간의 퍼포먼스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고 교하장원주점에서 하루를 묵었다.

 

입장권이 이것 하나 남이 있는데... 어데 입장권이었을지...

 

 

12시에 투루판 카얼정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베이징 기준의 표준시를 사용하기 때문에 시간 개념에 오차가 생긴다.^^

 

카얼정은 중국 용어이다. 세계지리 시간에는 카나트, 카레즈라고 배웠을 것이다. 건조한 지역에서 지하수를 이용하는 시스템이다. 수로를 만들어 보았자 뜨거운 햇볕이 금방 말라버리므로 물길을 지하로 개착한것이다. 매우 지난한 작업이었으리라. 간단한 도구만을 가지고 거의 수작업으로 경사지를 따라 지하에 물길을 만들어야 했고, 사고로 인명 피해도 많았지만 사막에서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감수해야 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진 지하 관개수로가 카얼정이다.

고산지대의 만년설은 서서이 녹으면서 풍부한 지하수의 원천이 된다. 그곳에서 저지대의 농경에 유리한 지역까지 물길을 만들었다. 계속적인 보수가 필요했기에 수로의 필요한 부분으로 쉽게 접근하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을 유지했단다.

 

어떠한 보강시설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뚫어놓은 지하수로가 카나트, 카얼정이다.

 

측량 작업을 묘사한 전시물. 지상 작업자가 방향을 잡아주면....

 

지하 작업자가 그에 맞추어 채굴 작업을 진행한다. 지하 작업자가 파낸 토사는 구멍을 통해 밖으로 지상 작업자가 끌어올리게 된다. 그렇게 작업했단다.

 

그렇게 해서 확보한 지하수를 이용하여 생산하는 대표적인 농산물이 포도이다. 투루판은 질좋은 포도의 대량 생산지로 유명하다. 일조시수가 길기 때문에 건조 기후 지역은 사실 농업에 아주 유리한 지역이다. 다만 물이라는 필수 조건 한가지만 없어서 농사를 짓지 못하는데, 그 물조건이 해결되니 농산물 생산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투루판에서 도로를 따라 이동하다보면 흔히 동그란 둔덕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커얼정이 있는 곳이다. 인공위성 영상으로 보면, 줄줄이 널려 있다. 중국의 카얼정 지하 수로의 길이를 모두 더하면 수천 km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시 11분. 과거의 투루판의 지하에는 카얼정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석유다. 도처에서 펌프질이다.

 

 

2시 40분. 고창고성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나 바로 예약되었던 나귀차에 탑승한다.

 

동력은 1 HP, 1 마력이다. 아마도...

 

비포장 도로를 잘도 다려간다.

 

고창고성은 투루판에서 동쪽으로 45km 정도 떨어져 있다. 성의 둘레가 5.4km이며, 내부에 호수도 있었단다. 460년 건국된 고창왕국의 근거지였다. 9세기 후반에 위구르인들이 이곳에 위구르고창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13세기 중엽 몽골 유목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망했다. 그래서 古城이다.

 

오늘날 고창고성의 중요한 기능은..... 그늘 제공이다.^^

 

버려진 폐허로 남아 있을 뿐이다.

 

2006년 방문했을 때 잠시 사용해본 공간. 지금은 고창고성의 일부분이 되었다. 사용되지 않는다.

 

원래는 외성, 내성, 궁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다.

 

사막 식생이 잘 자라고 있다. 낙타풀이란다. 작은 수박 모양의 열매가 달린다.

 

고성, 그리고 고성을 찾는 사람들...

 

3시 30분. 고창고성을 떠난다.

 

3시 50분. 고창고성 인근에 위치한 아스타나 고분군을 방문하였다.

 

줄지어 입장해서......

 

지하의 묘실을 방문한다. 햇볕이 워낙 뜨거워 땅속으로 대피하는 느낌이었다.

 

4시 20. 베제클리크 석굴을 찾아가는 길에 잠시 멈추었다.

가는 방향 쪽에 있는 천산산맥의 눈녹은 물이 흘러내려오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바닥을 따라 물기가 있기에 녹색의 공간이 이어진다.

 

4시 40분. 베제클리크 석굴, 천불동에 도착하였다.

 

돈황의 막고굴과 마찬가지로 절벽에 굴을 파고 만든 석굴들이다.

 

7~12세기에 만들어진 석굴이라 한다. 80여 개의 석굴 중 50여 개의 석굴 내부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막고굴과 함께 실크로드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불교 벽화와 함께 위구르 족의 마니교적인 벽화들도 함께 보존되었다.

 

19세기말~20세기초에 걸쳐 많은 부분들이 파손되고 도굴되었지만 남아 있는 부분들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대부분 석굴이 보존을 위해 잠겨 있으며, 공개된 석굴들도 실내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직접 보고 싶어 멀리서 찾아온 탐방객의 처진 어깨는 그의 실망감을 대변하는 것 같다.

 

5시 20분. 도로가에 멈추어 화염산이라 알려진 산지를 구경하고 지나간다. 서유기의 그 화염산이라 하는데...

 

5시 50분. 투루판 시내로 들어왔다. 위구르 민가 방문의 시간이다.

 

생산된 포도의 출하 작업을 하는 작업자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자.

 

그 유명하다는 투루판 포도 시식의 시간~~

 

그 유명하다는 투루판의 건포도 시식의 시간~~~ 여러가지 종류를 시식해볼 수 있었다.

 

잘 자셨으면... 이제는 이쪽으로......

 

투루판 포도가 빛나는 시간이었다.

 

6시25분. 투루판의 대표적인 모스크인 소공탑을 방문하였다.

1750년대 청나라는 몽골과 위구르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서는 정복 지역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통치 정책을 취했다. 그 일환으로 1778년에 완공된 소공탑이다. 투루판 장군이었던 에민호자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기에 현지에서는 에민 미나레라고 부른다. 한자어로 소공탑일뿐...

 

내부 공간.

 

탑의 높이는 44m에 이르는데 중국에 있는 미나레 중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처음 와보는 곳이다. 아이딩호(애정호). 해수면보다 154m가 낮은 저지대이다. 사해 다음으로 낮은 곳이며, 당연하게도 중국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다. 

 

애정호는 수심 1m 미만의 내륙 함수호인데, 대부분 물을 말라버리고 대형 염전으로 남아 있다.

 

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도 "세계내륙최저지점"이란 표지를 사용한다. 여긴 중국이다.

 

사진을 보니 렌즈에 먼지가 많이 붙었었나보다.ㅎ

 

낮은 곳에 왔으니 기념하는 사진 하나 남겨보았다.

 

9시 넘었다. 길가의 포도 출하 작업장에 버스 기사와 현지 가이드 아저씨가 다가간다. 포도 구입을 시도했었을 것이다.

 

11시가 넘었었다.

양고기를 먹어보자 하고 찾아간 식당이었다. 투루판에서 양고기 전문점으로 유명한 곳인 것 같다. 다른 블로그에도 보이더라. "서역소양항"이란 간판을 달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식으로 도축된 양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다. 또한 무희들과 함께 즐거운 공연을 즐기는 시간도 갖는다.

 

맛있게, 그리고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하고 우리의 숙소를 찾아갔다.

 

투루판의 포도밭 사이에 위치한 투루판교하장원주점(吐魯番交河莊園酒店)이란 근사한 숙소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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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4일에는 돈황의 명소인 막고굴과 명사산의 월아천을 방문하고 유원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를 이용해 투루판으로 달려갔다.

아래 지도를 보면, 돈황의 남쪽에 위치한 기련산맥 쪽으로 동쪽에는 선상지 지형이 형성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엄청난 양의 모래가 퇴적된 명사산이 분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황이 예로부터 동서 교역의 요충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아시스였기 때문이다. 메마를 때도 있지만 당하강을 통해 물이 공급되고 그보다 많은 수자원이 기련산맥으로부터 지하를 통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돈황과 기련 산맥 사이에는 여러개의 선상지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저 높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에 의해 운반되는 토사가 골짜기 아래에 퇴적되어 형성된 지형이 부채 모양이라 해서 선상지로 불린다.

돈황 바로 남쪽의 거대한 선상지의 제일 꼭데기 부분에 막고굴이 위치한다. 그 선상지를 만들어놓은 하천이 '대천하'이다. 거의 메마른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름은 거대한다. 大泉河.

 

9시 25분. 돈황을 출발하여 대천하 하곡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남쪽의 기련산맥에서 흘러내리기 때문에 대천하는 남쪽이 상류, 북쪽에 위치한 돈황 방향이 하류가 된다. 넓은 물길 모양은 있지만, 물은 안보인다. 건너편 절벽에 있는 구멍들이 막고굴이다.

 

또... 왔노라...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아예 짐을 모두 맡기고 가야 한다. 귀중품과 돈을 빼고...

 

방문자들이 기념 사진을 남기는 뽀인트. 가장 규모가 큰 96호굴이다.

대천하변 절벽을 따라 1천여 개의 석굴이 뚫려 있어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한다. 492개의 석굴이 발굴되었다고 하며 소수의 석굴들만 번갈아가면서 공개한다.

1900년 17호 굴에서 5만 점 이상의 경전, 문서, 자수 등이 발견되어 이를 연구하는 '둔황학'이 탄생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연히 이 자료들을 발굴했던 왕원록이 외국 조사대에게 헐값에 팔아넘겨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6천여 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때 팔려간 자료 중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었고, 그래서 프랑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게 된 것이라고...

그런 문화재 탈취의 현장이었다.

 

2시 20분. 명사산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맡기도 아주 아주 아주 멀리 걸어와야만 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놓았다.

 

입장권이 깔끔하다.

 

모래 세상 명사산이다.

 

기다리다가 번호표를 뽑았다. 낙타 표이다. 22번을 뽑았다.

22번 표를 뽑았는데, 123호 낙타를 배정받았다.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보통은 낙타를 이용한다. 돈황에서 며칠씩 보내는 경우라면, 그냥 물통 하나 짊어지고 걸어서 다녀보는 것도 괜찮겠다....

 

걸을테면 걸어보라고 계단도 설치해주었다. 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우리는 낙타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하...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길래 따라쟁이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간다.

 

결국 사구 꼭대기로 올라왔다.

 

높은 곳엘 올라오니 아래가 다 보인다.

 

2006년에 있었던 재밌는 모래 썰매가 사라졌다. 공산당 어느 한 사람의 어느 한마디에 그냥 사라졌단다.

대신 활쏘기가 생겼다.

 

별로 익사이팅한 것이 없다. 하산한다.

 

월아천도 6년 만이네...

 

월아천의 물은 늘 그대로라 하더니, 그것은 옛말이다. 수량이 점점 줄고 있는 추세란다. 없어질지도... 관광산업을 위해 수돗물을 채울지도 모르겠다.

 

명사산이 돈황에서의 마지막 일정지였다.

 

G215번 도로를 달려 돈황에서 유원으로 이동하였다.

역에서 탑승 수속을 하고 T197 침대열차에 탑승하였다. 표를 찍어둔 사진이 남아 있네.

 

밤 10시 20분 차로 예정되었던 것이 10시 42분으로 연발했던 모양이다. 늦은 시간이라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잤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자고 났더니.... 투루판에 다음 날 도착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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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3일. 돈황에서 잠이 깼다. 2006년 방문 이후 두번째였다.

이동경로를 표시하여 만들어 둔 지도이다.

 

GPS log 파일이 없어 그냥 위치 표시만 새로 해보았다.

돈황을 출발하여 제일 멀리 위치한 마귀성을 먼저 방문하고 한대장성, 옥문관, 양관 순으로 이동하였다. 돈황 일대는 기련산맥의 눈녹은 물이 지표, 지하로 공급되면서 생존이 가능한 오아시스 지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8시 46분. 호텔 주차장 주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돈황국제호텔은 좋은 호텔이다. 2006년에도 같은 호텔을 이용했던 것 같다.

 

9시 11분. 돈황 길거리의 노점상 모습을 촬영하고 싶은 분이 내리셨다.

 

11시반. 돈황야단에 도착했다. 돈황지질공원이라고도 하지만 보통은 그냥 마귀성이라고 하는 곳이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멋진 이름에 대한 저작권이 없다. 그래서 그럴싸한 곳에는 그냥 멋져 보이는 이름을 그냥 붙인다. 아단지모 혹은 야단지모도 그렇게 마귀성이라는 이름도 여러 곳에 있다. 그렇다....

 

풍화작용을 오래 받으면서 기이하고 다양한 바위들이 장관인 곳이다.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상당히 넓게 마귀성이 깔려 있다. 

 

차를 타고 사막 어드벤처를 즐길 수 있다. 익스트림하고 서스펜스까지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배내밀고 걷는다.

 

돈황에서 멀고 외진 곳이기에 찾는 이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더라.

 

마귀성 정복자. 마귀성 슬레이어!!!

 

지학박물관이 가동 중이다.

 

이 지역의 제4기 지질 연대표를 보자. 보았으니 다들 무슨 내용인지 파악했을 ......

 

황량한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로는 2000년 개봉한 와호장룡, 2003년에 개봉한 장예모 감독의 영웅 등이 유명하다.

 

3시. 한대장성에 또 왔다.^^

 

한나라 시절에 이곳까지 영역이었고, 방어를 위해 이 메마른 땅에 성벽을 만든 것이다. 풀과 흙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건조기후 지역이기 때문에 마르고 난 다음에는 아주 단단하게 굳기 때문에 장성벽 만들기에 적절하지 않았나....

 

탐방객들.

 

3시 반. 옥문관에 또 왔다.^^

 

2006년에 방문했었을 때는 저 비석의 아랫부분이 바람에 파여 있었는데, 보수 공사를 해놓았다. 원상 복구.

 

주변 유적지 분포

한무제 때 이광리가 페르가나 원정을 한 이후 돈황의 오아시스가 군사기지로 발전하면서 옥문관은 양관과 함께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8세기 이후 당이 쇠퇴함에 따라 거점은 동쪽으로 후퇴하고 옥문관은 버려지게 된다.

 

5시. 양관으로 점프.

 

양관 일대의 가이드 맵.

 

멋진 기념 사진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아저씨들이 왜 여기에??

한대의 유적지에 진나라 때의 것을 가져다 놓으면 워쩐다냐!!!

 

마차타고 사주지로를 달려가는....

 

수봉관양.....

 

6년 전 방문하였을 때와는 비교도 안된다. 하늘 상태가.... 황사 세상.

 

사막이라고 해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 아주 가끔 내리는데 그 양이 적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많은 양이 쏟아지기도 한다. 그때는 사정없이 땅바닥을 파고 내려간다. 그러한 살벌한 침식의  흔적이 양관과 돈황을 연결하는 큰 도로 주변에 마구 나타나더라.

 

 

7시반. 저녁 식사를 즐기는 일행의 사진들이 남아 있으니 그때 저녁 식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시 반이었다. 돈황의 야시장을 돌아보다가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중국 상품, 紅牛. 가이드 아저씨가 굉장히 좋은 중국제이라고 추천해주더라. 홍우....

그것은 바로 RED BULL 이었다. ㅎㅎ

그렇게 홍우와 함께 돈황의 밤이 깊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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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2일을 가욕관빈관에서 시작하였다. 현관의 모습.

 

건물 옥상에 간판 글자들이 보인다. 건물이 그렇게 컸을 것 같지는 않다.

 

숙소에서 출발하여 만리장성과 관문의 모습을 알기 쉽게 만들어놓은 관광지인 장성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만리장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현벽을 직접 걸어보고 만리장성의 끝단이라고 알려진 제1돈을 답사하였다. 그리고 G30 고속도로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 돈황으로 이동하였다.

 

"천하 제일의 웅장한 관문 - 가욕관"이란 판떼기가 있는 곳을 가장 먼저 방문하였다. 장성박물관이라 보심 되시겠다.

 

과거에는 캬라반이 낙타를 끌었지만, 오늘날은 행글라이더를 탄다.

 

줄서서 입장하여 언덕을 올라가면 보이는 복원된 관문 모양에 "천하웅관"이란 글자가 그려진 낡아보이는 판떼기가 달려 있다.

 

안내지도.

 

공사중...

 

중국 문명의 보호, 계승 및 혁신적 발전을 위한 시범 지역을 조성하기 위해 가욕관 문화유산 보호 프로젝트를 구현한다고 적혀있다.

 

남아 있는 것에 "새" 옛날 것들을 더 웅장하게 열심히 덧붙이고 있다.

 

우리 연구자들의 답사 모습.

 

멀리 보이는 기련산맥, 중간에 보이는 열심히 달리는 기차, 가까이 보이는 도로.

 

재현해 놓은 병영 모습.

 

이곳의 장성은 토성이었다.

 

무엇을 근거로 했을까 하는 궁금한 점도 있지만 열심히 복원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빠진 병사!!

 

공연 중인 병사!!!

 

헤어 스타일에 신경을 좀 쓰는 병사!!!!

 

짱박히... 아니 창박힌 병사!!!!!

 

도대체 가면이 몇 겹이었는지... 세다가 포기하게 한.... 누구??

 

'야외' 박물관을 보았으니 이제 '실내' 박물관을 본다.

 

이 정도 남아 있는 것들을 열심히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인가보다.

 

유명한 출토물인 것 같다. "마답비연". 날아가는 제비를 딛고 뛰는 말의 모습을 표현했단다.

1969년 감숙성 무위의 뇌태한릉에서 출토된 청동조각상인데, 후위의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적인 명마라 일컬어지는 한혈마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현지 여행사 설립을 꿈꾸고 있던 현지 가이드 아저씨가 가이드 자격증에 마답비연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보여주었었다.

 

위진벽화묘에 있는 그림 벽돌도 전시되어 있더라.

 

가욕관을 묘사한 디오라마.

 

장성 제1돈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기련산맥에서 눈녹은 물이 흘러내려 형성된 하천인 북대하 주변에 형성된 하안단구 지형을 이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시. 현벽장성경구에 도착하였다.

 

저거다. 저렇게 높게 있어 '매달린 벽'이란 의미의 "현벽"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힘들어 보여도 한발한발 걸어가면 된다. 힘들다....

 

먼저 걸어가는 팀이 있더라. 장성을 넘어 서역으로 가고 있는 캬라반을 묘사한 조각상.

 

현벽장성의 상태를 보면... 복원해놓은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진짜 저기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있구나!! 누구였을까??

 

나는 가는 척만 하고 말았는데...

 

나는 옆으로 빠졌다.

 

이건 머지??? 접대실???????

 

보은당은 뭐꼬? 

 

높은 곳마다 무엇인가가 만들어져 있다. 역시 높은 곳은 아래에서 보아야 높아보인다.

 

사막의 생명줄인 관개수로,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 주변에 위치한 대초탄 저수지로부터 공급되는 물이다.

 

물길을 조절하는 수문. 옆에 적혀있는 게 뭔가 했더니, 티켓없이 입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말이더라.

 

열려있는 수문.

 

여기가 현벽장성이었다.

 

2시. 가욕관 시내의 초원영웅식당을 나온다. 가욕관빈관 주변에 위치한다.

 

메뉴판이다.

배가 많이 고팠던가... 식당 사진들을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야 만들어두었더라.

 

장성의 끄트머리, 하천변에 돈대를 설치했던 흔적이란다.

 

안내지도.

 

멀리 보이는 기련산맥에서 발원하는 북대하가 좁은 골짜기를 이룬다. 주변에 병영을 근사하게 복원해놓았다.

 

출렁다리가 만들어져 있어 출렁출렁을 즐기며 건너가 볼 수 있다.

 

퇴적층의 두께가 상당하다. 그 아래로 많은 흐르는 흙탕물.

 

퇴적물이 마구 뒤섞여 있다. 이런 상태를 보여주는  곳은 퇴적물질들이 서서히 퇴적된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걸쳐 급작스럽게 많은 운반물질이 쓸려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돌들은 상당히 둥글다. 이것은 하천을 따라 꽤 오래 멀리 운반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고 마찰되면서 깎여나갔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메마르고 뜨거운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석 상태이다. 햇볕에 가열되어 바짝 마르면서 암석 내부에 있던 온갖 미네랄들이 표면으로 끌려나오는 것이다.(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ㅠ.ㅠ)

 

비가 내리곤 하나... 바닥에 메마른 소금기...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수분을 뽑아내어 생존하고 있는 사막 식생.

 

하천 반대편의 저 시설은 벙커....가 아니라 짚라인을 타는 곳이다.

 

이쪽으로 날아와 저기에 팍 부딪히고 살아남으면 된다...... 살아야 한다. 직원의 뒷편의 그늘에 숨어 삐대고 있다.

 

사막의 로망은 역시나! 먼지닷!!!!

3시 10분. 가욕관을 떠나자.

6시. 길가에 잠시 쉬어간 곳이다. 돈황까지 절반 왔다.

길가의 "아단지모" 표지판. 야단지모라고도 하는데 처음 실크로드를 지나며 보았을 때 그것이 해당 지역의 지명인 줄 알았었다. 나중에 보니 아무데나 야단지모가 널려 있었더라. 야단 떨만한 땅 모양, 지형이 있는 곳이면 그냥 야단지모! 감숙성 안서 지방의 극도로 건조한 사막 지형을 야단지모라고 하였는데, 전혀 야단 떨만한 곳은 아니었다.

 

오후 8시 반. 돈황국제호텔에 도착했다.

해가 훤한 것은 베이징 중심의 단일 시간대를 사용하는 넓은 중국의 사정 때문이다. 서쪽 멀리 떨어진 곳인데 동쪽 먼 지방을 기준으로 정해진 표준시를 사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시간대를 사용하도록 해야할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어느 지방에 대해 중앙과 다른 무엇을 인정해주면 발생하게 될 정치적 문제를 극도로 조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사진은 또 없네. 먹고 잤을 것이다.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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