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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8일. 날이 밝았다. 숙소 창 밖의 오션 뷰~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Republika Hrvatska, 인구 약 425만 명) 제2의 도시(인구 약 47만 명)이다. 아드리아 해의 중부에 위치한 달마티아 지역의 경제, 행정 중심지인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1979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호텔 서랍 속에서 좋은 말씀을 발견했다. 국제 기드온 협회의 성경책이다. 중, 고등학교를 미션스쿨로 다녀 익숙하다.^^ 거기에 모르몬 교의 성경책도 있네. 크로아티아는 인구의 87%가 로마 가톨릭이라는데.... 이게 뭐지...?

 

아침에 좋은 말씀을 읽으며 영혼을 정화시킨다..............

 

깨끗해진(^^) 영혼으로 6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7시 57분에 버스 탑승을 완료한 일행은 오늘의 투어 일정을 시작한다.

8:16  리바 거리 초입에서 하차에서 UNESCO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두 시간을 보냈다. GPS 궤적이 중간에 날뛰는 것은 지하묘를 방문했었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거의 정사각형의 형태를 이룬다. 동서남북 방향에 네 개의 게이트가 있다. 남문인 브라스 게이트로 입장해 북문인 골든 게이트 방향으로 투어를 진행하였다. 이후 자유롭게 이동하는 시간에 서문인 아이언 게이트로 돌아서 입장하여 동문인 실버 게이트로 나와 부근의 그린 마켓에서 신선한 농산물들을 만났다.

 

08:20  전직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직 후 거주지를 방문한다. 3세기 말 로마제국의 Diocletianus 황제가 건립한 궁전으로 유명하며, 궁전은 로마 후기 건축 양식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비잔틴 및 초기 중세 건축사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브라스 게이트로 입장하는 일행. 게이트의 크기는 그냥 쪽문 정도이다.

브라스 게이트의 크기가 작을 수 밖에 없다. 리바 거리가 있는 부분은 원래 바다였다. 브라스 게이트는 아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배를 타기 위해 바다 쪽으로 나오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이용하는 문이 아니라 유사시 탈출 통로 정도의 의미만을 가졌던 곳이라고 한다.

 

천정 상태가 안좋아 보인다. 습기가 많은 지하라는 분위기가 팍팍 난다. 왼쪽에 지하묘가 위치하는데, 관리하는 근무자가 9시에 출근한다고 하며, 문은 잠겨 있다. 그래서 외부 공간을 먼저 투어하기로 한다.

 

남문으로 들어와 계단을 오르면 처음 만나는 공간인 열주랑 Peristil 공간이다. 사진에서 남문이 있는 오른쪽 방향의 건물이 황제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남문에서 열주랑 사이의 지하 공간은 창고로서 기능을 했었는데, 중세에는 거주지로 이용되다가 19세기부터 쓰레기 하치장이 되었단다.O_O  수백년이 지나면서 이곳의 역사적 가치가 망각되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리라. 그래서 궁전 내부의 공간은 지금은 거의 개인들의 거주지 혹은 소규모의 상점가로 활용되고 있게 된 것이다. 200채 정도의 주택에 3천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고 소개된다.

 

페리스틸, 열주랑 혹은 열주 광장의 모습이다. 기둥은 모두 16개, 코린트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오른쪽의 열주랑 뒷쪽으로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재위 시절 기독교 박해를 했는데, 사후 그의 묘가 있던 자리에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을 653년에 건축하고 성당의 이름도 당시 순교한 주교의 이름으로 지었으니 복수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성당의 건물은 열주랑과는 다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까만돌로 만들어진 스핑크스가 궁전 입구 옆에 엎드려 있다. 이집트에서 가져왔다 라는 정보 밖에 없다.

 

Vestibule이라 불리는 공간이다. 황제의 거처로 들어가는 중간 통로 쯤 된다. 천정이 동그랗게 뚫려 있다. 20세기까지도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여길 닭장으로 이용했었다니...ㅎㅎ

 

베스티불을 지나오면 황제의 거주지가 있어야 하는데 사라졌다. 없고 대신에 10세기 이후 건축된 중세의 건물들이 나타난다.

 

남쪽으로 바다쪽을 조망할 수 있는 창문들이 달려 있는데 수백년의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내부만 보강했는데...

 

황제가 연회를 베풀곤 했다는 Triclinium이라는 공간인데,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트리클리니움의 폐허 위로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의 종탑만 거대하게 보인다.

 

북문으로 향하는 중이다. 동문으로 향하는 골목이다. 저쪽에 화장실이 위치하니 유사시 이용하면 된다는 안내~^^

 

북문으로 이동하는....

 

북문의 모습이다. 금문이다. 황제와 그 가족만 출입할 수 있는 대단한 문이었다.

 

방어의 목적상 중요한 곳이라서 그런 것인지 북문에는 한쪽에 하나의 문이 더 있다.

 

북문 밖에는  유명한 '닌의 그레고리 Gurgura Ninskog'  주교 동상이 있다. 거대하다. 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아줌마가 자꾸 만지며 윤을 내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조각가인 이반 메스트로비치 작품이다. 원래는 궁전 내부의 열주 광장 가운데 위치하였었는데, 1941년에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파손되었다가 1954년에 현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페리스틸을 재방문하였다.^^

 

계단을 내려가 다시 만나는 지하 공간.

 

지하묘로 입장하였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 죽기 전에 자발적으로 퇴직한 경우가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그러한 일을 저지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많은 일을 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촌놈 기질을 버리질 못했지 않나 싶다. 최초로 분할통치 체제를 만들었고 동방정제에 있다가 퇴직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제위에 복귀해달라는 청원을 서방정제로 있던 막시미아누스가 했었다고 한다. 그러한 요청에 대해 퇴직 황제는 "내 손으로 직접 심은 양배추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도 권력을 추구하는데서 행복을 찾는 것을 그만둘텐데..."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Salona 촌놈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여생을 위해 305년에 지은 궁전은 경치가 좋은 바닷가였다. 이곳에 궁전을 건축하고는 자기 고향의 물맛을 잊지 못한다며 고향인 살로나를 지나 흐르는 Jadro 강의 상류에서 궁전까지 물길을 내어 그 물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614년에 몽골계 유목민인 아바르 Avari 족이 침략하였을 때 살로나 사람들이 궁전으로 피신하였고, 그들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었다. 이들이 그대로 정착하면서 중세 도시 스플리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며 점차 서쪽으로 거주지가 확장되면서 15세기에는 두 배로 넓어지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전직 황제.

 

이 지하 공간이 모두 쓰레기로 채워져 있었다니... 천정과 벽재의 마감 상태가 심히 다르다.^^

 

일부 공간만 복원된 것이며 아직 손대지 않은 공간도 있다.

 

내부 공간을 지탱하는데 사용된 목재들도 발견되었다.

이에 대한 안내 도면...

 

우물이었을까?

 

금문으로 나와보았다. 황제와 가족만 통행할 수 있었다던 그 곳...

 

궁전 밖의 통로로 산책 중 쉬어가기...

 

왕좌의 게임 드라마를 스플리트에서도 촬영하였나 보다. 왕좌의 게임 박물관이 있다. 이 드라마 시즌 2에서 멈추었는데, 언제 다 보냐???

 

트러플 가게도 있다.

 

서문인 아이언 게이트이다. 저 밖은 스플리트의 유명한 나로드니 광장이다.

 

골목 안쪽은 일반 거주지와 작은 상점들...

 

금방 동문, 실버 게이트에 도착하였다. 역시 '과거'의 모습 그대로의 상태를 보인다.

 

동문 밖. 동쪽이라 강렬한 지중해의 아침 햇살이 그대로 비춰진다.

 

Srebrna Vrata, 실버 게이트란 의미일 것 같다. 고지도에 SPALATO라고 되어 있다. 이태리어에서 온 옛지명이다. Spalato에서 모음들이 빠지고 들어가고 해서 Split가 되었단다.

 

크로아티아가 축구를 좀 하는 나라라고 한다. 특히 10번 선수 모드리치가 좀 한단다. 도처의 상점에서 그의 유니폼을 판매하고 있다.

 

농산물을 판매하는 그린 마켓이다. 슬슬 철수하고 있다.

 

많은 도시에서 여행객들을 위해 기념 사진 뽀인트를 만들어놓고 있다. 스플리트의 스플리트는 스플리트 시의 해변 거리 리바 거리의 동쪽 끝 부분에 위치한다.

 

"JADROLINIJA는 크로아티아의 국영선사로서 연안의 섬들과 육지 사이의 여객과 화물 운송을 책임지고 있답니다."라고 소개해주고 있는 아줌마...

 

자유시간을 마감하니 버스가 도착했다. 

10:05  스플리트에서 버스가 출발했다. 자다르로 145km를 달렸다.

 

10:24   Gornja Ozrna라는 작은 동네다. 마을 위로 육교가 지난다. 그런데 그 옆에 "1950"이라고 크게 적혀 있다. 뭐지?

 

"1950"이 또 보인다. 뭐냐!!!

 

Krka 대교 앞에 위치한 크르카 휴게소의 화장실엘 들렀다. 1유로 무인 화장실을 지키고 있는 친구이다.

 

멋진 크르카 대교.

Krka대교 밑으로 크르카 강이 흐른다. 오른쪽의 상류로 올라가면 크르카 국립공원이 있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라 한다. 접근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이 아주 사소한 단점이라 하겠다.

대표적인 뽀인트인 Skradinski buk 폭포의 모습만 잠시 살펴보자. 위키미디어 홈페이지에 빌려온 사진이다. 멋지다!

 

그리고 크르카 국립공원 내의 Skradinski buk 폭포 아래에 유럽 최초로 수력발전이 이루어진 역사가 있다고 한다. Krka(후에 Jaruga로 이름이 바뀜) 수력발전소가 그것이다. 1895년 8월 28일에 최초로 가동되었다. 지금은 없지만 공원 내의 박물관을 들러볼 수 있을 것이다.

 

전망대에서 상류쪽으로 아담한 마을이 살짝 보인다.

 

놀러 오란다.............

 

자다르와 선약이 되어 있었던지라 다음을 기약하고 달렸다.

 

현지가이드의 여러 이야기들...

자다르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바다 오르간, 태양의 인사 등.

에디슨의 경쟁 상대였던 안타까운 니콜라 바디치 이야기.

드리올리 가문의 체리 증류주로 유명한 마라스키노 이야기가 나오니 버스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버스를 길옆에 멈추더라. 그러더니 선반에서 병을 하나 꺼낸다. 현지가이드가 마라스키노라고 환호하더라.

작은 컵을 꺼내어 한모금씩 마라스키노를 시음하는 경험을 하였다. 달다!

유럽 최초의 대학을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14세기에 만들었다는 이야기.

최근에 참치 양식을 하면서 일본으로 거의 수출한다는 이야기.

코르나키 열도의 코르나키 국립공원 소개.

크로아티아의 고속도로가 교통량이 적고 한산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 등을 듣다보니 12시 15분 즈음에 자다르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제 자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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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7일은 두브로브니크의 성벽 투어를 하는 날이다. 이에 대비하여 아침을 간단하고 든든하게...

 

일단 호텔 투어부터....

 

동네 꽃길 투어도 하고...

 

공원 투어도 하고...

 

ATM기 투어도 하고...

 

계단 투어도...

 

8시 40분에 출발하기로 했다. 짐을 모두 챙겨 나선다. 가방을 호텔에 맞기고 성벽 투어에 나선다.

표를 받았다. A4 1장 크기로 되어 있다. 여러 곳에서 체크하니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란 주의를 받았다.

티켓을 편집해보았다. 35유로짜리 티켓이다. 하루 종일 아무 때나 쓸 수 있다. 왠만한 곳은 꽤 여러 곳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뽀인트는 따로 입장료를 또 내야 한다고 한다. 우리팀은 오늘 이것으로 성벽 City Walls 투어와 자유 시간이다. 나는 Lovrijenac Fortress를 다녀오는 자유를 누릴 예정이다.

 

필레 게이트 안쪽에서 왼쪽으로 틀면 바로 성벽을 올라가는 계단 입구가 있다.

 

묶어서 35 유로이므로 성벽투어만 따로 요금? 그런 것 없다. 성벽 투어는 다른 것들과 묶어 패키지로만 판매되는 상품이다. 그냥 35 유로.

 

그렇게 성벽에 올라 1,940m 한바퀴를 일주 했다. 그리고 로브리예낙 요새를 다녀온 후 일행과 합류하여 점심을 모셨다.

 

성벽에 올라 필레 게이트 위에서 플라차 거리를 내려다 본다. 번화가이다. 아직 붐빌 시간은 아니가보다. 9시가 넘었는데...

 

도브로브니크 성에는 네 개의 주요 성채가 있다. 보카르, 성 요한, 레벨린, 민체타의 네 곳이다. 서쪽에 위치한 주요하지 않은 Puncjela 성채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다.

 

저 건너편의 구조물이 로브리예낙 요새이다. 조금만 기다리려무나.

 

작은 공간이 있는 곳마다 카페 혹은 식당이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은 8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5~16세기였다. 성벽의 길이는 1,940m, 높이는 25m, 성벽의 넓이는 4~6m이며, 옆으로 바라다 보이는 바다쪽 폭은 1.5~3m가 된다. 이 성벽은 베네치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이며, 14세기에는 베네치아 군이 쳐들어왔을 때 모든 개인 소유의 건물과 교회도 적군이 전략적인 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자체적으로 허물 수 있도록 만들라는 공표까지 있었을 정도이다. 후에 베네치아로부터 지켜달라고 나폴레옹 군에게 부탁했는데, 지켜달라고 불러들인 군대에게 멸망당한 것도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어느 틈에 저기까지 도망가셨나.....

 

건너 편에 보이는 섬을 탐내시는가보다. 로크룸 섬이다. 공작들이 많이 서식하여 공작섬이라고도 하지만 사람들이 이 섬을 찾는 진짜 이유는 '누드 비치'가 있기 때문이다. 거길 가시려는가?

누드 비치의 입장 조건은 한가지이다. '벗어!'

당연히 사진 촬영은 금지이다. 당연하지?

하지만 굳이 촬영하고 싶다면 비법이 있다. 보트 타고 접근하면 된다. 바다 쪽에서는 많이들 촬영한다고 한다.

 

로크룸 섬의 누드 비치 쪽을 자꾸만 쳐다보는 아줌마...

 

대포 쏘는 아줌마...

 

올드 포트를 내려다 보는 아줌마...

 

어느 틈에 북동쪽에 위치한 민체타 요새까지 달려온 아줌마...

 

건물들의 지붕에 올려진 기와가 새것이라면,

그 건물이 지난 내전에서 포격을 받아 부서졌었던 건물이라고 알려주는 아줌마...

 

낡은 기와 건물과 새 기와 건물 기와의 건물 사진을 찍고 있는 아줌마...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하냐며 계단 위로 날아가고 있는 아줌마...

 

두브로브니크 성벽에서 가장 높은 민체타 요새 등반을 자랑하는 아줌마...

 

끌려다니기 힘들다며 불평하는 할배...

 

또 도망치는 아줌마...

 

다이빙??

 

로브리예낙 요새를 오르며 두브로브니크의 지형에 대해 논하다. 저렇게 생겼으니 계단들이 그리 힘든!!!

 

대포 쏘는 아줌마...

 

대포알 던지는 아줌마... "어떤 걸로 맞을래?" 환청이 들린다...

 

어이!

 

옙!!!

 

날씨가 아주 좋다......

 

좋아......

 

플라차 거리의 아줌마...

 

계산하시죠~~

 

모르겠다~~~~~~~~~~~~~

 

세상 뭐...

 

마르코 폴로가 인근에 있는 코르출라 섬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 식당을 찾아왔다.

문어 카르파초와 크로아티아식 파스타. 예쁘다. 맛있다.

크라이티아에 와서 이런 새우 요리를 만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좀 뜨겁긴 하지만 그냥 손으로 잡고 뜯어 먹는 것이 편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고 싶었을 정도로 맛있다. 물 좀 섞어 라면 사리를 끓였었으면... 와~~

 

13:32  식사를 맛있게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버스에 탑승하고 출발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국경노선을 이용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는 펠례샤츠 반도 코스로 이동하여 스플리트까지 달렸다. 230km를 달렸다.

스플리트에서 멀리 않은 곳에 위치한 블라치 섬은 여행지로도 매력적이지만 수천 년 동안 대리석의 채석장으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도 채석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미국 워싱턴 DC의 백악관을 비롯하여 중요한 건물이나 기념물의 석재로 이용되었다.

흐바르 섬은 광대한 라벤더 재배지가 인상적인 곳이다.

코르출라 섬의 구시가지 안쪽에는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생가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즉, 그의 출생지인 것이다.

 

14:24  출발한 지 1시간 쯤 되었다. 펠례샤츠 반도에 접어들었다. 스톤 브릿지의 터널을 통과한다.

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에서 도로로 이동할 때 기억에 남은 것 중의 하나가 터널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형버스가 마주쳤을 때 속도를 줄여 조심해서 지나야 할 정도로 도로가 좁다는 것도... 몬테네그로에 와서 터널을 만났고, 크로아티아는 터널이 많다. EU에 가입하면서 보조금을 마아안이 지원받아 그것으로 도로 확충을 많이 했다고 한다. 고속도로가 싱싱하다. 관광객과 화물차량 이외에는 거의 없어 한산하다. 터널이 싱싱하다. 완공된 지 얼마 안되었다. 이쪽 도로와 터널과 교량도 작년에 완공된 것이라 하더라.

 

이쪽 동네는 포도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와인으로 유명하지 않은 나라가 없으니까.

 

uvala brijesta 만의 안쪽으로 수산 양식 시설이 많이 깔려 있다. 

석회암 동네다운 지명이다. uvala라니... 기반암이 석회암이 지역에서 빗물에 석회암이 많이 용식되어 만들어진 구덩이를 doline라고 하며, 이러한 돌리네가 더욱 커져 여러개가 합쳐질 정도가 되면, 그것을 uvala라고 한다. 카르스트 지형 용어가 지명으로 나타나는 곳을 만났다.ㅎㅎ

 

EU의 자금 지원을 받아 건설한 펠례샤츠 반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2.4km길이의 교량 Pelješac Bridge이다. 이 작업에 투입될 노동력이 없어 중국인들이 들어와 작업을 했다고 한다.^^  2013년 7월 크로아티아의 EU 가입 이후 지원된 EU 펀드 규모가 100억 유로가 넘었!!!!!!!!!!!

남의 돈으로 남의 손을 빌려 이런 거대한 인프라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나라들은 그렇게도 EU에 가입하려 하는 것이고, 기존의 가입국가들은 새로운 멤버의 가입을 그리 반겨하지는 않는 것은 아닌가 싶다.

 

네레트바 강 하구의 삼각주이다. 넓은 퇴적 평야가 발달하여 오렌지, 포도, 감귤, 수박 등등 다양한 농작물들이 재배되고 있다. 

 

남의 돈으로 남의 손을 빌려 이런 인프라를 확충한 것은 좋은데, 한편으로는 심각한 환경 파괴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

 

16:15  HIPHOP 휴게소. 이곳에서 판매하는 햄버거를 보고 침을 흘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16:32  고속도로 톨 게이트 통과.

 

17:14  로마의 퇴직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거주했던 것으로 유명한 스플리트에 도착하였다.

 

해변의 리바 거리가 스플리트의 중심가라고 한다.

 

리바 거리 산책을 하고 촙스 그릴을 방문하였다.

 

스플리트 필름 페스티발을 하는 기간 중에 방문하였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차지한 아줌마...

 

스플리트에도 도시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리바의 여인...

 

잠수함을 가진 여인...

 

해변의 여인...

 

크로아티아 국기를 들고 시위 중인 할배를 보고 의아해 하는 아줌마...

크로아티아 국기는 원래 25개의 모자이크 윗쪽에 다섯개의 문장이 들어가야 한다. 어찌 저 할배는 문장이 빠진 국기를 들고 다니는 것일까?

다섯 개의 방패 모양 문장은 가장 오래된 크로아티아의 문장과 두브로브니크, 달마치아, 이스트리아, 슬라보니아의 문장들이라고 한다. 적백청의 세가지 색깔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시 크로아티아 총독으로 1848년에 책봉된 요시프 옐라치치가 입었던 유니폼의 색상에서 유래한 것이고...ㅎㅎ

 

촙스 그릴에서는 저녁식사로 비시수아즈, 트러플 소스를 곁들인 아귀구이, 디저트를 준비했다. 맛있다.

 

리바 거리 한쪽의 무대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

 

낙태 반대 행사인 것으로 보였다.

 

스플리트 시내에서 좀 떨어진 LE MERIDIEN LAV를 찾았다. 해가 넘어간다.

 

넘어간다.

 

서쪽으로 별이 하나 떴다.

 

오늘의 이동 거리는 262km였다.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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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를 말발굽 모양이라 하더라. 말발굽 밑에 붙이는 편자 모양인가... 그게 그거군.

(출처: 주크로아티아 대한민국 대사관, 2019 크로아티아 개황)

보통은 국가의 영토가 섬을 제외하면 한 덩어리로 구성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다른 나라의 영토 너머에 자국의 영토가 존재하기도 하는 것을 월경지라고 한다. 이런 월경지는 자국 내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크로아티아 지도의 남쪽 끄트머리를 보면 내륙국가처럼 보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영토의 아주 일부가 아드리아해와 접하고 있는 것이 구별된다. 그로 인해 두브로브니크 일대는 크로아티아의 다른 영토 부분과 분리되어 버렸다. 그래서 크로아티아 본토에서 두브로브니크를 가려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국경을 두번 통과해야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펠례샤츠 반도에서 교량이 연결되어 국경통과없이 육로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7세기 무렵에 도시가 형성되면서 도시 국가인 라구사 공화국이 만들어졌다. 9세기부터 발칸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 무역 중심지로 성장하였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뒤 베네치아의 지배 하에 있다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5~16세기에 무역의 전성기를 맞이 했다. 남들은 전쟁을 할 때 이들은 교역을 했다. 많은 나라들과 중개무역협정을 맺고 교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16세기 중엽에 대형선박을 180척 이상 소유하고 있었다니...

 

이런 깃발을 배에 달고 다니면서 교역을 했다고 한다. LIBERTAS가 '자유'라는 뜻이라네. 아드리아 해에서 베네치아와 경쟁을 하며 잘 나갔었는데 1667년 4월 6일에 대지진을 겪으면서 쇠퇴기로 접어든다. 당시 지진으로 5천 명 이상의 시민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국력이 약화되자 외부에 의존하고자 했고, 기댄 상대가 오스만 제국이었다. 호시탐탐 자신들을 노리고 달려드는 베네치아와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기 위해 해당 지역의 땅덩어리를 조금 떼어 오스만 제국에 상납하고 보호를 요청한 것이다. 그 지역이 오늘날의 "네움 Neum"이었다. 헌데 오스만이 망하면서 그 땅을 보스니아가 차지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멀리하고 했던 베네치아가 차지했던 지역은 자신들과 같은 크로아티아가 되면서 월경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네움 일대의 해안선은 12마일, 20km가 조금 안되는 정도이다. 크로아티아에서 국경선을 두번 통과하면서 신호등 두번 통과하면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사실상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의 나라를 지나다는 것이 불편했는지 펠예샤츠 반도를 육로로 통과하여 자국의 영토와 다리를 연결해버렸다.

 

2023년 6월 16일은 이러한 나라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니크를 방문하는 날이다.

빨리 두브로브니크를 가고 싶은 아줌마는 열지도 않은 식당에 나와 빨리 밥달라고 재촉하더라...

 

간단하고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는다. 오늘도 국경을 넘는 날이다. 빵이 맛있더라...

 

몬테네그로의 헤르체그노비에 위치한 숙소를 출발하여 두 나라의 세관을 통과, 두브로브니크까지 가면 된다. 약 75km, 금방이다.

 

8시에 출발하여 코토르 만을 벗어난다. 아디오스~~

 

그냥 스스륵 통과한다. 몬테네그로 CRNA GORA 안녕~

 

크로아티아로 입국하는 버스 여행객들. 몬테네그로에서는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별로 신경 안쓴듯한 인상인데, 크로아티아는 신경 써준다. 그래서 오래 걸린다.ㅠ.ㅠ

 

하여튼 두브로브니크가 버스 창 밖으로 보이니 되었다. 에게~~ 코딱지 만하다.

 

두브로브니크 속으로 들어가 살펴보기 전에 조금 떨어져서 보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코토르에서는 뒷산의 성벽을 걸어 올라갔지만, 두브로브니크의 뒷산은 좀 높아서 승합차를 대여하여 탑승하도록 예약했다. 그 승합차들을 만나서 약속된 뽀인트로 달려갔다.

약속된 뽀인트는 두브로브니크를 지나 두브로브니크 신항과 신시가지를 지나 새로 만든 다리를 건너서 위치한 주차 공간이었다. 두브로브니크는 길이 좁아 버스 주차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하기로 했다. 아마도...

다리 이름은 Dr. Franjo Summer Time Tuđman Bridge, 크로아티아 자체 기술로 만든 것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한 518m의 다리이다. 자부심 덩어리라서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다리에 붙여 놓았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어야 할 승합차 팀이 없다. 오지도 않는다. 왜 안오는지 걱정이 태산인 여행객...

 

약속 장소를 승합차 팀이 바꾸었단다. 바꾸고는 연락을 할 때까지 연락을 하지 않는 매너. 두브로브니크로 달려 갔다. 서둘러 하차하여 길가에 기다리던 승합차들에 막 분승한다. 그렇게 탑승하고 좁은 길을 무섭게 달려 두브로브니크의 뒷산인 스르지 산을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아래 지도에 표시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길도 있다. 지그재그 9번이면 된다. 트라이~~

 

산 정상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케이블카로도 올라갈 수 있다. 카페도 있고, 상점도 있고, 십자가도 있고...

 

최고급 대리석인 브라치 섬의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십자가이다. 1991년 내전 때 부서진 것을 다시 기증받아 만든 것이라 하더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손잡았네......

 

지나가다 손잡은 기념선물로 버기카 한 대~~

 

우리팀이 이용했던 승합차. 번호판 좋다. 비가 내렸다.

 

하산하여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즉 성벽 내부 투어를 시작했다. 세 개의 출입구가 있다. 필레, 부자, 플로체 게이트. 부자 게이트로 입장했다. 

 

두브로브니크는 바닷가의 평지에 만들어진 성이 아니다.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스르지 산의 경사를 따라 내려오다가 다시 바다 방향은 고도가 높아진다. 서쪽의 필레 게이트에서 입장하여 동쪽으로 이어지는 두브로브니크의 번화가인 스트라둔(플라차) 거리가 가장 저지대를 이루고 남쪽과 북쪽으로 고도가 높아진다. 그래서 그 방향으로 이동할 때는 상당히 경사가 급한 계단을 만나게 된다.(사진은 내일 로브리예낙 요새에 올라가서 찍은 것이다. 멀티버스다...)

 

북쪽에서 부자 Buza 게이트를 통해 두브로브니크로 스며드는 일행들.

 

급경사의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조심하면서 내려가야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왼쪽에 있는 드래곤의 굴 속으로 빠질 수 있다. 아... 왕좌의 게임 관련 기념품들 좀 사오는 것인데...ㅠ.ㅠ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을 모신 성 블라호 성당을 보면서 지나간다.

 

라구사 공화국 시절의 유명한 바로크 시인인 이반 군둘리치 동상도 그냥 지나간다.

 

유명한 예수회 계단도 그냥 부지런히 걸어서 올라간다.

 

그냥 쭈욱 달려온 이유는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감자를 밑에 깔고 구운 오징어를 올렸다. 좀 짜지만 맛있다.

 

두브로브니크를 한 바퀴 돌아가는 1,940m의 성벽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성 마가렛 성채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식당이다.

 

뱃속에 오징어가 좀 들어갔으니 힘차게 움직여본다.

성모 마리아 승천 대성당이다.

12~14세기에 만들어졌던 이전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 1667년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후 18세기초에 다시 만든 것이다. 3차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돌아가는 길에 로크룸 섬에 조난 되었다가 1192년 목숨을 구한 영국의 사자심왕 리차드가 봉헌예물로 기부한 돈으로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승천하는 성화가 모셔져 있다.

 

대성당 맞은편 위치한 멋진 렉터 궁전이다. 고딕-르네상스 양식인데, 수차례의 리모델링을 거친 결과물이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최고위 자리에는 세 개의 위원회와 렉터라 불리는 영주가 자리했다. 렉터는 한 달 간만 재임할 수 있었고 위원회의 모든 위원들이 같은 권리를 갖고 있었다. 한달 동안만 통치권을 가진 렉터는 공적인 목적이 아니면 궁전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궁전에서 생활할 때는 가족과 헤어져 혼자 입대.... 아니 입궁해야 했다고 한다. 딴 생각하지 말고 일에 쳐죽으.... 아니 일만 하라고.

 

렉터 궁전에는 동상이 단 하나만 있다. 로푸드 출신의 부유한 뱃사람이이었던 미호 쁘라짜트가 많은 재물을 기부하였기에 그의 청동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렉터 궁전의 아름다운 아트리움.

 

두브로브니크는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도시국가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업무도 무역이었으므로 렉터궁전은 항구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올드 포트의 모습. 맞은 편의 바닷가 보이는 주황색 지붕의 건물들이 그 유명한 전염병 격리 병원이다. 40일간 격리를 하면서 무사한지 확인했기에 Quarantine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성 블라호 성당 앞의 공간이 루쟈 광장이다. 그 광장의 한 복판에 예쁜 아저씨 오를란도(롤랑)가 칼을 들고 서 있다가 철망에 갇혀 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함부로 칼을 휘둘렀을까?

 

사식이라도 넣어줄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오를란도 조각상의 상태가 안좋다. 지진의 후유증일까, 내전 때 날아와 터진 폭탄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여기저기 금이 가 있다.

북유럽 도시들에서 나타나는 중세기사 롤랑이 어찌 고딕양식의 기둥과 함께 이곳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설따라.... 왔다. 조각상이 설치된 위치가 자주 이동되었고, 1825년 바람에 쓰러져 50년 이상 창고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의 오른손 팔꿈치 길이가 길이 측정의 기준으로 이용되었다 한다. 소위 '두브로브니크의 팔꿈치'라고 하면 51.2cm에 해당한다.

 

시청 건물의 1층은 식당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어.... 스폰자 궁전은 수리중이다.

 

이렇게 생긴 건물이다. 멋진 건물이다.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중요한 장인이었던 파스코예 밀리쳬비치가 설계한 것이다.

(출처: 문화예술의 도시 두브로브니크, 60쪽)

 

수리 중이라도 내부 관람을 일부 가능했다.

고딕-르네상스 양식의 짬뽕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건물이다. 공화국 시절에는 세관 사무실과 창고로 이용되었었다. 세관 이외에 정부의 조폐국, 은행, 재무국과 금고, 무기고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두브로브니크의 가장 큰 번화가인 플자짜 거리. 비가 온다. 6월 지중해에 비라니.... 비가 내린다니....

 

어...

 

필레 Pile 게이트 앞에는 오노프리예 대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위에 개가 한마리 올라가서 지키고 있다.

분수 위에 개, 개 위에 비둘기.

1438년 나폴리의 건축가였던 오느프리오 델라 까바가 만들었다. 12km 떨어진 두브로브니크 강에 있는 수원지에서 도시 안으로 물을 끌어와 만든 것이다. 얼굴 모형 부조품이 16개 있고, 그 입에서 물이 흘러나온다. 나오다 안나오다 한다.

 

필레 게이트 내부 왼쪽에 위치한 프란시스코 수도원이다.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수도원인데 문은 15세기에 만들어졌다.

 

건물 내부는 열주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의 윗쪽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부조물로 장식되어 있다.

 

수도원은 1317년부터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약국으로 유명하다. 그 비법 문서.

 

한 페이지를 몰래 펼쳐 필사해왔다.

 

프란시스코 수도원까지 공동의 시간이었고, 이제 개별적인 자유 시간이다. 왕좌의 게임 속으로 달려왔다.

 

입맛만 다시고 돌아선다. 기념품 구매권이 없다. 내게 자유를!! LIBERTAS!!!

 

"세상의 그 어떤 보물도 자유와는 바꿀 수 없다."

 

내전 당시 주로 세르비아 인으로 구성된 유고 정부군은 두브로브니크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당시에 공격받은 상황을 지도에 표시해두었다. 이렇게 소중한 UNESCO 유산이 무식하게 공격받아 파괴되자 많은 지식인들이 두브로브니크로 달려와 인간방패 역할을 해주었다. 그들을 '두브로브니크의 친구들'이라 한다. 그 때의 구호를 각국 언어로 기록해두고 있다.

 

'자유' 시간에 사랑하는 계단도 즐기고, 오느프리예 대분수의 물을 생수병에 담아간다.

 

플라체 Place 게이트를 나가면 두브로브니크의 모형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격리병원으로 사용되었던 곳도 방문해보았다. 지금은 문화센터, 극장, 식당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거리 곳곳에 많이 보이는 꽃, 부겐베리아 Bougainvillea.

 

다시 플라차 거리로 들어와 자유를 즐기다가....

 

쇼핑이라는 것도 해보았다. 기념품 한 점과 "문화와 예술의 도시 두브로브니크"라는 한글판 책자 한 권. 70.03유로.

 

서문에 해당하는 필레 게이트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문의 윗쪽에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 성인인 성 블라호의 부조물로 장식되어 있다.

 

자유시간을 마치고 모두 모여 오늘의 숙소로 걸어간다. 숙소가 필레 게이트 인근에 위치한다. 근사한 숙소이다.

 

저녁 식사는 필레 게이트 바로 옆인 이곳에서... 포사트 레스토랑.

 

최고다. 맛있다.

 

필레 게이트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광장을 장식하는 판과 님프의 동상을 올린 Amerling 분수대를 구경하고, 내일 꼭 가보자는 약속을 로브리예낙 요새와 하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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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5일 목요일, 4시 좀 넘어 잠이 깼다.

창밖엔 비가 내린다. 지중해성 기후 지역으로 여름이 고온건조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꼭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닌가보다.

창밖을 보니 티라나의 도심지에는 독특한 모양의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더라. 숙소인 The Plaza 호텔은 창밖에 돌조각들을 붙여놓았는데, 이게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거리를 안겨준다.

 

걱정을 했으니 이제 식당을 찾아가 아침을 뱃속으로 모신다. 요리들이 정갈하고 깔끔하여 식욕을 부추킨다.

 

8시에 출발한다 하였는데 7시 53분에 버스 탑승을 완료하였다.

누가 무슨 짐을 호텔에 두고 나왔다 하면서 다시 찾아들어가는 일 한번 없이 주욱 주욱 잘도 진행된다. 역시나 여행을 많이 다녀보신 분들이다. 그리고.... 여전하게 버스 창밖에도 빗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알바니아를 떠나 몬테네그로로 넘어가는 날이다. 빗속을 달려서...

일단 점심 식사를 위해 182km를 달렸다. 부드바에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코토르로 입성하였다.

티라나에서 몬테네그로와의 국경 통제소까지 이동한 도로의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스칸데르베그 산맥이다.

 

멀리 창밖으로 산등성이 위의 성이 또 하나 보인다. 티라나 국제공항 인근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Preza Castle일 것 같다. 알바니아에는 성이 몇개나 있을까? 문화유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성만 158개에 이른다고 한다. 작은 나라에 성이 참 많기도 하다. 알바니아 공국 시절에 많은 성이 만들어졌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는 3천 개 이상의 성이 있다고 하니 유럽에서 158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ㅎㅎ


티라나에서 몬테네그로 방향으로 이동하는 도로의 오른쪽으로 직선상의 산줄기인 스칸데르베그 산맥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아래로 구름이 물감이 번지듯 산자락을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뭉클거리는 듯 하기도 하고 그대로 멈추어 있는 듯한 구름띠였다. 산비탈을 따라 느리게 흘러내린 차가운 공기로 인해 형성된 기온역전층일지도 모르겠다.

 

09:30  레저 Lezhë에 접어들었다. 맞은 편 작은 봉우리 위에 또 성이 있다. Lezhë 성이다. 마을과 성 사이에는 작은 하천이 흐르는데 드린 강의 지이다. 북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호수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이곳을 지나 아드리아 해로 유입되는 것이다.

 

가파른 경사를 가진 작은 산지 위에 또 성이 보인다. Rozafa 성이다. Shkodra 성이라고도 한다. 성의 동쪽으로는 오흐리드 호수에서 흘러온 드린 강의 본류가 흐르고 성의 서쪽으로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스코다르 호수에서 흘러오는 부나 강이 흘러 방어에 아주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다. 규모도 상당히 커보인다. 현지가이드가 과거 스칸다르베그가 오스만 제국에 항전했던 장소 중의 하나라고 안내해준다. 일리리안 시대로부터 이어진 유서깊은 성으로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성이라고도 한다.

 

10:23  국경통제소 인근의 요충지에 위치한 Celiku 호텔에서 잠시 정차하고 쉬고 간다. 사람도 쉬고, 버스도 충분히 쉬어간다. 호텔이 있고 기념품 가게가 셋이나 있다. 그리하여 몬테네그로로 가는 혹은 몬테네그로에서 알바니아로 들어오는 차들이 거쳐가는 곳이다.

 

기념품 판매점에 전시된 스칸데르베그 님들을 마음 속에 담아둔다. 40도 짜리 브랜디 되시겠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마시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듯한 느낌이 오는 듯 하는 듯 하다.

 

11:11  국경통제소. 알바니아의 출국 수속을 하러 갔던 버스기사가 여권들을 그냥 들고 오더니 생수 두병만 다시 챙겨간다. 출국 수속 끝이다. 국경을 넘나드는데 여권이 이렇게 무시당하다니!!!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기둥에 붙은 판떼기를 망원으로 촬영해보았다. 알바니아어로 알바니아를 Shqipëria 혹은 Republika e Shqipërisë라고 하는가보다. 그 아래의 작은 글씨는 재정경제부 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아주 큰 글씨는 이 동네 이름이다.

 

몬테네그로는 아예 출입국 수속을 하는 국경통제소의 세관을 없애버렸다네. 그냥 통과. 그래서 가상화폐로 세계적인 사기를 친 한국인이 몬테네그로에 숨어들었던 것일까? 결국 잡혔지만...

몬테네그로는 '검은 산'을 뜻하는 이탈리아 어이다. 베네치아 지배를 오래 받은 영향 때문이다. 몬테네그로의 원어명은 쯔르나 고라 Crna Gora이다. 면적은 13,812km²이며, 인구는 63만 명 정도인 작은 나라이다. 아드리아 해 연안 지역은 관광 산업이 발달하였다.

 

11:24  멀리 보이는 능선 위로 풍력 발전기들이 줄지어 서있다. 잘 돌아간다.

 

11:38  길가에 아주 규모가 큰 채석장이 보인다. Billy Gradnja이다. 버스가 좁은 골짜기를 달릴 때면 스마트폰 신호가 끊어진다. 그러다가 다시 연결되면 로밍이 되면서 외교부와 통신사로부터 문자가 쏟아진다.

 

풍력발전기들이 참 많이 보이더라.

 

12:00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중해이다. 아드리아 해이다. 그러면 쨍한 햇볕이 쏟아져야 하는데..... 구름이 잔뜩이다. 진짜 지중해가 맞는 것일까?? 저 구름 속에서 포르코의 빨간색, 커티스의 파란색 프로펠러 기가 날아들어 도그 파이팅을 할 것만 같기도 하다.

 

12:54  예쁜 섬이 보인다고 잠시 쉬어 간다며 멈춘 곳이다. 스베티 스테판이다.

성 스테파노 정도 되는 지명이다. 15세기부터 어부들이 들어가 살던 조그만 섬에 교회가 생기더니 개발업체가 인수하여 리조트를 만들어버렸다. 아주 고급이라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소피아 로렌, 커크 더글라스, 클라우디아 쉬퍼, 엘리자베스 테일러, 실베스타 스탤 등등의 유명인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촌놈은 어색한 셀피 하나 만들고 떠난다. 이번에는... 그냥 가지만 다음엔 두고 보자. 스베티 스테판!

 

13:10  드디어 찾고 찾던 부드바 해변에 도착한다.

 

임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어촌 식당이므로 메뉴는 해물 모듬이다. 생선에 홍합, 새우, 오징어, 문어 등이 출현했다. 맛있다.^^

 

식사하고는 흐린 날씨의 아드리아 해의 바닷물 맛을 본다.

 

날씨가 안좋아 해변 영업은 접었다. 모래 해변이 아니라 자갈 해변이다.

 

14:30  코토르를 향해 출발.

아드리아 해 쪽에서 코토르 만 안쪽에 위치한 코토르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험준한 브르막 Vrmac산을 넘는 위험한 도로를 이용해야 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브르막 산을 뚫었는데, 공사 자금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다가 2007년에야 완성되었다.

길이가 1,637m나 되는 터널에 진입하였는데 도대체 앞으로 나가질 못하였다. 반대편 차로는 쭉쭉 빠져나오는데 이쪽은 계속 쭉쭉 차들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너무 지체되니까 현지가이드가 대안을 제시하였다. 터널을 나오자마자 코토르까지 1km 정도를 걸어가자는 것이었다. 물론 당연히 동의하는 사람들만 참여하기로 했다. 

 

그렇게 터널을 나오자마자 버스에서 내려 걸었다. 

 

차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걸었다. 코토르의 배후산지인 석회암 덩어리가 큼지막하게 보인다.

 

금방이더만. 코토르의 성채가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나라 몬테네그로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코토르이다. 이곳에 크루즈가 3척이 들어온 날이라 한다. 그래서 길이 그렇게 막혔던 것이라고 가이드가 가이드하더라. 코토르만 방문하기 보다는 두브로브니크와 묶어서 여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코토르의 서문 앞에서 현지인 로컬 가이드를 만나 가이드를 받았다. 내부의 주요 건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뒷산을 올라 성모마리아 교회에서 코토르와 코토르 만을 조망하며 즐겼다. 하산하여 마음껏 코토르를 따로 즐기는 자유시간을 가졌다. 북문앞의 성채에서 남문앞의 성채까지 순성하였다.

기원전 1세기부터 이곳에 로마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1002년에 불가리아 제국에 통합되었다가 13세기 이후는 베네치아 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2차 대전 때는 이탈리아에 통합되었었다. 1945년 이후 유고연방의 몬테네그로에 통합되었다.

 

작은 도시 코토르를 한국인들이 그래도 꽤 찾는 것 같다. 한국어로 작성된 안내지도가 존재한다. 현지 로컬 가이드가 한장씩 나눠주더라. A3 크기이다. 뒷면에는 이런저런 광고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바탕을 왜이리 시커멓게 디자인했는지 모르겠다.

색상을 반전시켜보았다. 음... 역시 편집은 어렵구나......

 

코토르의 서문이다. 바다쪽에 위치하여 바다문이라고도 부른다. 1555년에 만들었다고 위의 지도에 써있다.

출입구 바로 위에 "21-XI-1944"라고 적힌 별 하나의 판떼기가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가 이끈 빨치산이 독일군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을 해방시킨 날을 기념하여 새긴 것이다.

 

서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만나는 메인 광장이다. 왼쪽의 건물은 '왕자의 궁전', 오른쪽에 유명한 시계탑이 있다. 이 시계탑은 1602년에 만들어졌는데 1667년의 지진으로 인해 서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다시 세웠었다. 그런데 1979년에 대지진으로 다시 기울어졌다. 북쪽과 동쪽은 고딕 양식, 일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시계탑 아래에는 죄인을 잡아두고 코토르 시민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한 '수치의 기둥'이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비잔타 궁이다. 오래된 건물들에 모두 palace라고 하니 '궁'이라 부를 수 밖에...

 

피마 궁이다. 17세기에 만들었다고 한다.

 

1166년에 만들어진 성 트리푼 교회이다. 네오 고딕 양식으로 유명하다.

멋진 내부.

 

입구에는 크로아티아 왕국 초대 왕인 토미슬라브를 기리는 부조물이 붙어 있다.

 

왼쪽 건물이 해양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그루그리나 성이다. 1732년에 만들어졌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카람파나 분수. 샘터였다고...

 

맞은편 건물이 1909년에 만들어진 성 니콜라스 교회이다. 십자가의 모양이 다른 세르비아 정교회이다.

 

1195년에 만들어진 성 루카 교회가 오른쪽에 있는데 외면하고 맞은편의 성 니콜라스 교회만 바라보는 여행자.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지나는 쪽에 있는 문이라 강문, 혹은 북문이라 불리는 곳. 1540년에 만들었다.

 

코토르 뒷산을 올라가는 성벽투어 입구이다.  밤 10시 이후에는 머물 수 없다고 문짝에 적혀 있다.

요것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 8유로.  산길 조금 올라가는 것인데, 너무 비싸다.

 

오래된 고성의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오래된 고성이므로 오래된 느낌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오래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다. 

 

조심해서 올라가야 한다. 우리나라 처럼 자기가 다친 다음에 내가 다치는 것을 너희들이 막아주지 않았다며 대들고 소송하고 할 수 없다. 본인이 주의하고 책임져야 한다.

 

선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성모 마리아 교회가 있는 곳에 오르면 코토르 시가지와 만의 모습이 잘 보인다. 1518년에 만들어졌으며, 건강의 여신의 교회라고도 한다.

 

전시된 고지도. 아드리아 해에서 육지쪽으로 해안선이 들어와 있는 부분을 '만'이라 한다. 그 만에서 다시 안쪽에 형성된 코토르 만의 가장 안쪽에 "Cattaro"(코토르의 옛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이렇게 안쪽에 위치하였으니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하여 일찍부터 항구로 발달했을 것이다. 그래도 방어를 위해 성채를 쌓고 산성까지 만들어두었다.

 

전망대에서 쉬면서 코토르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토론 중인 일행들. 

파란 바다에 떠서 파란 하늘을 향해 파란 연기를 계속 뿜고 있는 저 배는 무엇??

 

교회 뒷쪽으로 계속 산길을 올라 여러 요새를 다녀올 수 있다. 이곳을 통과해서. 입장료를 8유로 씩이나 받으면 이런 길 정비도 좀 해야지...

 

한탄하다가 하산한다.

 

부여받은 '자유시간' 중에 성벽을 올랐다. 북문 부근에서 뒷산에 뚫린 구멍을 조사 중인 탐사대원.

 

스마트폰의 카메라도 망원이 되기는 한다. 석회암 덩어리에 뚫린 구멍이니 석회동굴 되시겠네. 내부 탐사는 다른 대원들에게 양도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성채의 서쪽으로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저 윗쪽의 골짜기에는 물이 보이지 않는데 이게 웬 일? 

코토르의 배후 산지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석회암의 빗물과 지하수에 포함된 약산성으로 인해 쉽게 구성물질이 용해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점차 지표와 지하에 물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확대시키게 되어 싱크홀, 동굴, 갑자기 땅속으로 사라지는 하천 혹은 갑자기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 등을 포함하는 지하 배수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카르스트 지형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발칸 반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연구된 학문 분야이다.

지중해 연안 지역은 주로 겨울철을 중심으로 우기를 형성하는데도 불구하고 지표에 하천이 늘 흐르는 경우가 드믄 것은 기반암이 석회암이라는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꾸 물이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지하로 이동하던 물길이 갑자기 지표로 솟구치기도 한다. 코토르의 서쪽 골짜기 아랫부분에도 큰 샘이 있기에 윗쪽의 골짜기에는 보이지 않던 물길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발달한 도시 부근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코토르 성과 산성의 요새들을 묘사한 고지도. 왼쪽에는 침략을 해온 적군의 모습을 묘사했다. 대포를 쏜다.

 

대포를 동원한 공성전에 대비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 '병사'.

 

순찰중인 '병사'.

 

길을 잘못들어 남문까지 걸어야 했다. 1470년에 만들어진 구르디치 성채.

 

다행히 일행과 랑데뷰하여 버스를 기다릴 수 있었다.

 

멀리 파란 연기를 뿜고 있는 크루즈 선이 보인다. 코토르 만에서는  생각보다 수산물 양식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토리가 만들어져야 볼거리가 되는 것이다. 코토르 만 안쪽에 있는 작은 바위섬들. 한 어부가 바위섬에 돌을 하나씩 던지기 시작하였다. 섬이 커졌다.  이후 왼쪽 섬에는 성당이, 오른쪽 섬에는 수도원이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도 정기적으로 돌을 던져넣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스토리~

 

19:28  헤르체그노비 인근에 위치한 숙소 Carine Hotel Park Bijela에 도착했다.

262km를 이동한 하루였다. 2만보를 넘게 걸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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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4일. 북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를 출발하여 스트루가 시를 지나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의 국경통제소에 도착했다. 출국 및 입국 수속을 하고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까지 약 140km를 이동하였다.

 

14:21  북마케도니아의 국경통제소. 일단 여권을 걷어간다. 일행은 그냥 버스에 대기.

14:33  출국 수속이 끝났단다. 뭐지?

14:34  알바니아 국경통제소 도착.

버스기사가 여권만 들고 간다. 현지 가이드도 아니고 버스 기사가 그냥 왔다 갔다 한다. 신기하다. 생수 두병을 직원들에게 전달하고 알바니아 입국 수속이 끝났다. 그런데 여권에 도장도 안찍어주더라... 한참 새로운 도장을 찾았는데...

14:38  버스 출발. 이제 알바니아 땅을 달린다.

 

기원 전 10세기 경부터 발칸반도 서부에 알바니아 인들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된 국가는 형성하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인 로마, 비잔틴, 슬라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알바니아는 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발칸 반도의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았다. 언어, 민족 등이 주변 국가들과 달라 독특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최근 알바니아를 찾은 관광객 중 아시아 인의 비율이 어느 정도일지를 맞추어 보라며 현지가이드 노진아 님이 퀴즈를 내더라. 아무도 맞추지 못하였으며, 감조차 잡질 못했다. 상상도 못했다. 아시아 인 전체인데 1% 미만이란다. 거기에서 다시 한국인을 추려내면 얼마나 될까? 그만큼 한국인들이 찾지 않은 숨겨진 나라가 알바니아가 되겠다.

왜 그렇게 알바니아는 숨겨진 나라가 되었을까..............?

 

국경을 지나 오흐리드 호가 보이지 않는 능선을 넘자마자 도로 옆의 산비탈에 버려진 벙커들 여럿이 보였다. 핸드폰으로 사진 찍으려 하니 셔터랙의 지체로 인해 촬영 실패. 이후 신경써서 시도했지만 직접 촬영은 실패했다. 벙커, 이렇게 생긴 것이다.

(출처: Concrete Mushrooms: Bunkers in Albania)

 

이탈리아 소렌토에서 날아와 현지가이드로 수고하고 있는 노진아 님이 알바니아의 정치, 현대사에 대해 정리해주었다. 알바니아를 수렁으로 빠뜨린 독재자 엔베르 호자 이야기였다. 2차 세계 대전 중 빨치산 활동 경력을 통해 집권하게 된 엔베르 호자는 유고연방의 티토와 대립하면서 소련으로 기울었는데, 스탈린 보다 더 강력한 스탈린주의자였다고 한다.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두와의 관계를 단절했기에 알바니아는 쇄국 정책을 취하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모두와의 관계를 단절하다보니 고립이 심화되었고 정권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강조하였다. 그 끝판왕이 전국을 벙커로 뒤덮은 것이었다. 종교를 금지시키고 자기 개인의 우상화를 종교 수준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알바니아의 면적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수준인데, 그 면적에 인구는 약 283만 명이 거주하면서 17만 개 이상의 벙커를 건설했다고 한다. 극심한 물자 및 식량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벙커 종교에 빠진 것이었다.

알바니아 영토 내에 건설된 벙커의 분포 지도이다. 주로 해안선과 국경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고산 지대에도 많은 수가 분포되어 있다. 수도인 티라나 주변에도 집중 분포한다.

(출처: Verzaj 외, 2020, "Albanian bunkers, Modern fortifications built in socialism," Defensive Architecture of the Mediterranean, Vol.11, p.1010.)

 

15:40  Shkumbin 강변의 작은 주유소 Gega oil에 잠시 정차하였다. Bar market의 화장실을 도움 받았다.

 

16:00  버스 출발.

Elbasan을 지나 A3 고속도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달린다.

티라나 주로 접어들었다.

4:40  산등성이 위로 성이 보인다. Petrela 성일 것 같다. 알바니아 공국 시절 전국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 옛날엔 성을 만들었고, 현대엔 벙커를 만들었다니... 방어에 진심인 민족인 것 같다.

 

 

티라나 시내에 들어왔다. 건물에 나무가 무성하다(?) 건물 이름은 Lion Residence인데...

 

티라나에 예약된 숙소 The Plaza 앞에 도착했다. 숙소 앞이 공원이다. 바로 앞에 근사한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Friendship Monument. 어떤 의미를 담은 구조물일까?

 

플라자 호텔을 출발하여 에템베이 모스크를 지나 광장으로 진입하였다. 로컬 현지인 가이드의 안내로 국립역사박물관 투어를 진행했다. 그리고 벙커 박물관을 관람하고 젊은이들이 모인다는 거리를 지나 상가 및 식당가로 이용되고 있는 티라나 캐슬을 구경하고 호텔에 체크인 하였다.

 

알바니아 수도인 티라나는 기원전 3,500년 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전체 인구의 25% 이상이 거주하는 정치, 경제, 문화 및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티라나의 중심지에 스칸데르베그 과장이 위치하는데 그 중심에 스칸데르베그 동상이 건설되어 있다.

 

알바니아 인구의 60% 가까이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인접한 북마케도니아에도 알바니아계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데 이슬람교를 신봉하여 모스크가 많으며 그들이 모여사는 지역에는 알바니아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국가보다는 종교, 민족이 우선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스칸데르베그 광장 한쪽에 위치한 에템베이 모스크이다. 높은 첨탑과 시계탑과 함께 한다.

18세기 후반에 건축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 완공된 유서깊은 모스크이다. 이 모스크를 건축한 Ethem Bey의 이름을 따서 모스크의 이름도 지어졌다. 어떠한 장식도 허용되지 않아 코란의 문구나 아라베스크 무늬 정도만 있는 보통의 모스크와는 달리 나무, 폭포, 다리 등을 묘사한 프레스코 화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높이 35m의 시계탑은 에템베이의 아들이 1822년에 모스크 옆에 만든 것이다.

 

발칸 반도 국가들의 무슬림 분포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슬람 신자의 비율은 코소보에서 가장 높으며, 숫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알바니아가 많다.

(출처: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칸, 유럽의 가장 오래된 이슬람," 20160901)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명장으로 이름 높은 스칸데르베그의 동상

 

광장 북쪽에 위치한 국립역사박물관을 향하는 일행.

 

건물 정면의 모자이크 화가 멋지다. 이렇게 일반 국민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묘사하여 자랑하는 모습이 부럽다.

 

박물관 로비에서 알바니아 국기에 손을 대보았다. 붉은 바탕에 쌍두 독수리 문양이 들어 있다.

 

준비된 선수로부터 입장 개시!!!

 

선사 시대의 유물들로부터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유명한 아가씨의 모자이크라고 한다. 기원전 4세기의 아가씨이니 많이 연세가 많으신 누님이다.

자세한 설명을 첨부한다.

 

로마 제국과 싸웠던 일리리아의 바토 장군 동상.

 

오스만 제국과의 싸움을 너무 잘 해서 적군이었던 오스만에서 알렉산더 대왕만큼이나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여 "스칸데르 베우"라는 호칭을 받게 된 장군이 있었으니....

이 아저씨. 광장에도 멋진 동상이 있다.

알바니아의 장군으로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의 군대를 막아낸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장군. 알바니아 어로는 '스컨데르베우', 영어로는 '스칸데르베그'로 불린다.

 

그리고 마더 테레사 코너도 있다. 혈통이 알바니아 계라고 자국민이라 주장한다. 그녀의 어릴 적 사진이다.

 

그리고 알바니아 역사를 과거로 한참 되돌려버린 엔베르 호자 코너가 이어진다.  그의 동상을 쓰러트리는 순간을 담은 사진이다. 1991년 2월 20일.

 

모든 물자의 부족에 시달리던 시절의 모습.

 

그러면서 통제에 통제에 통제를 가했던 시절. 정상적으로는 통제가 어렵자 비밀경찰을 통해 가혹하게 통제를 계속했고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걸고 알바니아 탈출을 결행해야 했을 정도였다. 아주 사소한 건만으로도 실종되고 사형되고 장기간 고문과 수감이 다반사로 이어졌다고 한다.

 

박물관을 나서면서 다시 만나는 스칸데르베그 광장. 주변보다 중심부가 높게 만들어져 있다. 빗물이 주변으로 쉽게 흘러내리도록 만든 설계일 뿐 아니라 지하에 주차 공간을 마련하는데 이용되었다고 로컬 현지인 가이드가 안내하더라.

어렵게 알바니아를 탈출하여 외국에 정착한 사람들이 또 열심히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본국의 친인척들에게 송금을 해온단다. 그래서 물가의 인상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탄하더라.

 

스칸데르베그 동상 바로 아래에 주차하고 있는 이동식 ATM. 티라나 시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번화가이니 다들 돈을 뽑아다가 마구 사용하여 알바니아 경제을 살려달라는 의미로 보인다.

 

에템베이 모스크 옆에 위치한 티라나 시청. 국기가 걸려 있으면 관청이다.

 

국기가 걸려 있다. 농림부 정도? 그 관청 앞에 벙커가 있다. 관광객을 위한 모형이다.

 

이름하야 '벙커 아트'

 

내부의 전시 공간. 오후 6시에 문닫는다. 

 

티라나 캐슬이다. 내부는 대부분 식당가이다.

 

신기한 문물을 발견했다. 이중 굴절 버스.

 

티라나 중심부의 중심부 위치한 The Plaza. 근사한 호텔이다.

 

근사한 호텔의 근사한 식당에서 만난 근사한 식사. 고기가 참 맛있다.

 

 

호텔 밖의 공원과 광장으로 나가 산책을 해볼만도 한데 그냥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이 좋아서가 아니라.... 시체가 되기 위해서, From Dusk to Dawn......

154km를 이동한 하루였다. 꼴까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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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케도니아에서 하룻밤을 잤다. 아주 푸욱 잤다.

창 밖으로 잔잔한 오흐리드 호수가 구름 아래 잠겨 있다. 건너편 스투루가 시 방향의 골짜기에 구름 한가닥이 흘러내리는 듯 마는 듯하다.

 

이름 그대로 인 Hotel Park Lakeside...

 

일찍 잠에 빠져 버렸기에 일찍 깼다. 아침 식사 전 산책이라는 어색한 행위를 하고 있다.

 

저쪽으로 보이는 곳이 오흐리드 구시가지이다. 오늘의 목표 뽀인트.

 

호텔 조식인데 부페식이 아니다. 코로나 경보에서 아직 벗어나질 않고 있는 식당이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주문하면 식당에서 만들어 직원이 배달해준다. 아침 식사는 오믈렛.

 

8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에 비치된 생수를 챙긴다. 보통 저가 실속형 패키지 여행을 하는 경우 이 생수 한병을 1유로에 구입해야 한다. 우리 팀은 그냥 마셔지는대로 꺼내가면 된다. 평소 물을 많이 마시는 나는 '신남' 모드이다.

 

발칸 반도의 오래된 도시들은 수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즉, 수백년 전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도시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거대한 버스가 진입할 수 있는 넓은 도로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에 외곽에서 도보로 이동하며 즐길 수 있다.

오흐리드 또한 마찬가지이다. 광장에서 현지인 로컬 가이드를 만나 안내를 받았다. 진주 만들어 파는 가게에서 소개를 받고 성 소피아 교회를 방문한 후 고대 원형극장을 올라갔다가 시가지와 호수를 조망하면서 성 클레멘드 교회, 성 요한 카네오 교회 방향으로 하산하였다. 선착장으로 이동하여 유람선으로 오흐리드 호수를 즐긴 후 카네오 레스토랑에 배를 대고 하선하여 멋진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 알바니아로 출국하였다.

 

6월 14일 8시 39분.  오흐리드 신시가지 쪽에 버스를 두고 걸어가는 일행. 간밤에 비가 조금 내린 것 같다.

 

광장을 지키고 있는 성 클레멘트와 나움의 동상. 둘 모두 키릴 문자를 만든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이다. 성 클레멘트는 오흐리드를 한손에 들고 있고, 성 나움은 성경을 들고 있다.

 

오흐리드 시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많아 1979년에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1980년에는 오흐리드 호수가 UNESCO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지배 하에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빛의 도시라는 뜻의 '리치니두스'라고 불리었다. 9세기 이후 불가리아 제국의 영역이 되면서 오흐리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발칸 반도의 중요한 종교 및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여 한때 365개의 예배당(교회)이 있어 발칸의 예루살렘이라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오흐리드의 옛지명 '빛의 도시'가 상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오리지날 오흐리드 펄~ 

 

건물도 길바닥도 석회암이 대분인데, 수백년 동안 사람들이 밟고 다닌 길바닥은 맨질맨질하여 윤이 날 정도이다.

 

Holy Mother Bolnichka 정교회. 아담하고 예쁜 정교회 건물인데 문을 닫았다. 담 너머로 구경하며 지나간다.

 

오흐리드 구시가지의 독특한 건물 유형이다. 1층보다 2층의 건평이 더 넓다. 사람들이 다녀야 하니 골목의 공간은 확보하고, 가능하면 건물 실내의 활용 면적을 넓히려는 의도가 만들어진 양식으로 보인다. 가로등의 모양도 이러한 건물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골목의 윗부분을 통째로 막고 연결하여 건물을 만들기도 했다. 골목이 터널 모양이 되어버리네.

 

오흐리드에서 가장 부잣집의 가장 큰 집이다. Куќата на Робевци (House of Robev Family). 오흐리드 전통 가옥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규모도 크다. 1827년에 건축되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1864년에 재건된 건물이다. 건물 자체가 기념물로서 국립박물관의 관리를 받고 있다. 다양한 콜렉션을 소장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내부 관람을 하지는 못하였다. 제한된 시간 안에 이동해야 하는 패키지 여행의 한계가 아닐까 싶었다.

전시 안내.....일 것 같았다.

 

9:20 성 소피아 교회를 방문하였다. 북마케도니아에서 중세시대의 건물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처음에는 불가리아 정교회 건물로 지어졌는데,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모스크로 이용되었다. 현재는 북마케도니아 정교회 건물로 이용된다. 

 

내부 공간은 상당히 넓은 편이며, 음향 설계가 잘 되어 있어 매년 오흐리드 여름축제를 개최한다고 한다.

 

모스크로 이용하면서 건물 내부에 있던 프레스코화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위에 석고를 칠해 가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11~13세기 비잔틴 양식의 프레스코화가 잘 보존될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레스코화를 복원하였다.

 

그런데 복원 기술이 제대로 축적되기 전에 너무 서둘러 복원을 시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WHY SO SERIOUS?

 

언덕 위의 원형 극장. 5천 명 정도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었다고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다. 여름축제기간에 세계적인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무대 설비가 남아 있다.

기원전 3~2세기에 만들어져 후기 헬레니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것 같은 감이 온다...

 

오흐리드는 고담인가?? 길가에 배트카가 주차되어 있다. 배트맨은 부근의 식당에서 식사중일지도...

 

성 클레멘트 교회와 판텔레이몬 수도원. 슬라브 인들에게 키릴 문자를 널리 알려주었던 성 클레멘트 교회이다. 내부 입장은 하지 않고 지나갔다. 오흐리드 호수를 배경으로 한 멋진 그림으로 감상한다.

현지인 로컬 가이드인 다니엘라가 영어로 한참 설명을 하고 현지 가이드가 부지런히 통역을 해준다. 빠르게 생소한 내용이 지나가니까 수신기로 들리는 내용이 머릿속으로 전혀 입력이 되지 않는다.^^ 녹음이라도 해야 했을까??

 

다른 대성당의 흔적이 성 클레멘트 교회 주변에 널려 있다. 성 클레멘트 교회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성 클레멘트 유니버시티이다.

 

언덕 윗쪽에 있는 사모일 요새를 한번 쳐다보고는 오흐리드 언덕을 내려간다.

 

길가에 거북이가 나타나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동헤르만 육지거북이라고 검색되더라.

 

그리고............ 오흐리드의 상징인 성 요한 카네오 교회가 눈앞에!!!

 

이쪽으로 사진 하나...

 

이쪽으로 사진이 잘나온다며 현지 가이드가 찍어준 사진. 나무 옆에 전화 통화하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이 가이드님께서는 그냥 찍어버렸네. 사진이 아주 그냥... 사람 하나를 사진 속에서 삭제하느라....ㅎ

 

부지런히 선착장으로 달려가는 발길.

 

오흐리드 광장 앞의 선착장에서 지붕에 의자들이 있는 큼지막한 배를 탄다.

 

그리고 이렇게 오흐리드 호수 위를 미끄러져 다녔다.

 

출항하여 오흐리드 구시가지를 따라 서쪽으로 항해하였다.

 

호수쪽에서 성 요한 카네오 교회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냥... 오흐리드 호수. 날씨 참 좋다~~

 

지난 밤을 신세 진 레이크사이드 파크 호텔.

 

그 부근의 숲속에는 외부에서 잘보이지 않도록 은폐된 근사한 건물이 있다. 과거 유고 연방의 지배자였던 티토의 별장이다. 유고연방이었던 각지의 경치 좋은 곳마다 티토는 별장을 만들어두고 즐기며 살았던 티토.

 

새벽엔 비가 내리고 아침엔 흐렸었는데, 낮엔 해가 쨍하니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멀리 오흐리드 시가지가 구름과 호수 사이에 낑겨있다.

 

멀리서 보니 오흐리드 언덕 위로 사모일 요새의 모습이 구별된다. 정상에 북마케도니아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선착장에 접안하고 다시 앞에 보이는 식당까지 걷는 줄 알았다. 헌데...

 

호수변의 유명 식당 카네오 앞으로 바로 배를 접안하더라. 오우예~~

 

그리고 오흐리드 전통식을 만났다.

커리 소스를 곁들인 치킨, 감자와 당근이 접시 위에 있네.

 

식당 내부의 벽에 옛날 그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전시해놓았다.

 

오래되어 다 부서져가는 건물들...

 

옛날에만 다 부서진 것이 아니라 현재도 거주자가 없어 방치된 건물은 상태가 매우 안좋다.

 

위의 건물 벽에 붙어 있는 안내문. 19세기의 오리지날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유일한 건물이라고 한다.

 

버스가 주차된 곳까지 열심히 걸어서 이동했다.

13:34 인원 확인후 바로 출발한다.

버스가 출발하자 드디어 수금이 이루어진다. 완납한 여행경비 이외에 현지에서 소요되는 비용으로 1인당 110유로를 따로 지불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2인이니 220유로를 지불했다. 500유로를 환전하여 왔는데, 22/50가 사라졌다.

 

오흐리드를 출발하여 스트루가 시를 지나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의 국경통제소에 도착했다. 출국 및 입국 수속을 하고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까지 약 140km를 이동하였다.

오흐리드 호수에서 유출되는 물을 호수 북쪽에 위치한 스트루가를 지나 골짜기로 흘러든다. 이후 알바니아의 드린 강을 이루며 흐르다가 아드리아 해로 유입된다.

 

14:21  북마케도니아의 국경통제소. 일단 여권을 걷어간다. 일행은 그냥 버스에 대기.

14:33  출국 수속이 끝났단다. 뭐지?

이제 알바니아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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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케도니아 스코페 여행  (6)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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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반도와 주변 지역을 보여주는 Nations Online Project에서 제작한 지도이다.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 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5개국의 주요 도시들을 여행하는 상품이 있길래 2023년초에 신청하고 6월에 다녀왔다.

 

발칸 반도는 알프스 산맥에서부터 이어지는 신기 조산대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복잡한 지질 구조를 갖고 있는 산악 지형이 대부분이며, 기반암은 석회암의 비율이 높아 카르스트 지형이 흔하게 나타난다. 아래 지도는 구글 지도의 지형 지도를 변형한 것이다. 슬로베니아는 율리안 알프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디나르 알프스,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는 샤르 산맥이 지난다.

 

북마케도니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하면서 국명을 마케도니아로 정하였으나 이웃한 그리스와의 갈등과, EU 및  NATO 가입과 맞물려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2019년에 국명을 변경하였다.

 

공항의 식당가를 둘러보다가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주문한 메뉴를 식탁 앞으로 배달해주는 로보트를 처음 보았다. 신기한 세상이다.^^

 

인천공항에서의 미팅에서 여행사 직원이 나눠준 지퍼백을 열어보니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다. 잘 챙겨들고 여행에 나섰다.^^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를 한가득 가슴에 품고 인천공항에서 보잉777-300ER 비행기는 날아갔다. 이스탄불로 11시간 35분을 날아갔다...

 

6월 12일 밤 11시 36분에 날아오르더니 한국시간으로 0시 40분에 저녁을 주더라.

 

터키 항공의 장거리 비행 물품. 안대, 슬리퍼, 양말, 칫솔과 치약, 귀마개 등등...

 

이스탄불에 착륙하기 전에 아침을 주더라.

 

이스탄불에서 같은 터키 항공의 에어버스 321-200 비행기로 환승하여 스코페로 1시간 25분을 날아갔다.

 

예정보다 연착했다. 활주로에 비행기가 랜딩하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아담한 공항에 도착하여 셀피부터 만들어둔다. 도착하여 입국 수속도 간단하다.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는 정도...

 

발칸에서의 여행을 함께 할 현지 가이드와 랑데뷰하여 스코페 시내로 이동하였다.

 

북마케도니아 전체 인구가 209만 명 정도이며, 수도인 스코페의 인구가 55만 명 정도이다. 인구 55만...

경찰의 도로 통제로 인해 일부 구간에 정체가 발생하였다.

 

서울의 바글바글한 인간들 속에서 치이다가 55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에 들어오니 많이 어색하다.^^

마케도니아 아치, 개선문 부근에 하차하여 도보로 투어를 시작하였다.

 

개선문에서 스코페 광장으로 진입하였다가 마더테레사 기념관, 돌다리, 바자르를 돌아보고 멋진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유명한 스베티 스파스 교회를 방문하고 오흐리드로 이동하였다.

 

출발 전에 전달받았던 수신기를 꺼내 준비한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니 멀리서도 가이드의 해설을 잘 들을 수 있었다.

 

곳곳에서 굉장히 많은 동상들을 볼 수 있다. '스코페 2014'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동상들을 무진장 깔아놓았단다. 포스트-사회주의 국가의 도시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보이는 도시 재생을 위한 투자였지만, 지나치게 많이 설치된 동상들은 현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고...

 

스코페의 중심이 되는 스코페 광장이다. 인구 55만 명짜리 도시의 중심지이다. 왼쪽에 보이는 동상은 데임 그루예프, 오른쪽의 동상은 고체 델체프인데 모두 독립운동을 한 혁명가들이다.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 마더 테레사 기념관의 모습이다. 

 

2층의 전시실에 여러가지 물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3층의 예배실에서는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기념관은 마더 테레사가 태어난 집이 있었던 곳 부근에 조성되어 있다. 집터가 있던 흔적만 남겨져 있다. 이곳에서 태어났기에 북마케도니아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 북마케도니아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북마케도니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좀... 알바니아계로 오스만 제국 국적으로서 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영토에서 태어났다 하는 정도로 정리가 될런지... 스코페 일대를 차지했던 나라들을 모두 따지면 마더 테레사의 국적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많아진다. 혈통을 근거로 알바니아가, 출생지를 근거로 북마케도니아가, 활동지역을 근거로 인도가 각각 자기네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삼파전을 벌이고 있다.

 

슬라브 족이 건설한 국가임에도 북마케도니아가 마케도니아가 되고 싶어하게 만드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 스코페 광장 중앙에 위치한다. 동상 주변을 바쁘게 지나는 스코페 시민들.

 

11개의 아치로 구성된 터키식 돌다리이다. 스코페 광장이 위치한 신시가지와 바르다르 강 건너편의 구시가지를 연결한다. 15세기 오스만 시대에 술탄 메메트 2세가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각 아래에는 다이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이버의 모습이 모두 보이면 바르다르 강물의 수위가 낮은 것이고 안보일수록 수위가 높아진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돌다리 건너편에도 많은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특히 키릴 문자를 만들고 다듬은 키릴과 메토니오, 그리고 제자들인 클레멘트와 나움의 성인상이 유명하다. 

 

주먹질을 하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분수대, 바로 옆에는 아이를 얼르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분수대...

 

오스만 제국 시절에 건설된 대표적인 공공 건축물로 꼽히는 다우트 파샤(취프테 아맘) 목욕탕 건물이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스코페의 올드 바자르. 

 

12세기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올드 바자르에 인접한 거대한 농산물 시장이다. '그린 마켓'. 신선한 식재료들이 눈길을 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스코페에서 물먹었다.

 

올드 바자르의 귀금속 거리.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면서 지나간다. 돌이다, 돌이다, 도리다...

 

스베티 스파스 교회를 방문하려 하였는데, 외국에서 귀인이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어 입장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빨리 지나가라고 성화다.

 

그런 입장이라 언덕 위에 위치한 무스타파 파샤 모스크 옆에 위치한 부시 리조트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먼저하였다.

 

이번 일정에서 제대로 만나는 첫번째 식사였다. 양갈비와 닭고기. 맛있었다.

 

식사 중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지더라. 오후 1시, 이곳저곳의 모스크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였다. 동시에 울리지 않고 조금씩 차이가 나더라. 내용도 조금씩 다르고...

 

식당 앞에 나오니 스코페 요새 너머로 멀리 거대한 십자가가 보인다. 해발고도 1,066m 높이의 Vodno 산 정상에 66m 높이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2002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세르비아 정교회에서 마케도니아 정교회가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중요한 정치적, 국가적 상징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정교회 이외의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바로 옆에는 뭔가 멋진 건물을 건축하고 있는 중이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나왔더니 스베티 스파스 교회를 방문했던 귀인이 돌아간 모양이다. 철통같이 경비하던 요원들이 안보여 후다닥 입장을 하였다. 16세기 중반에 지어진 마케도니아 정교회 건물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모스크보다 낮게 교회를 지어야 해서 언덕 아래에 낮은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마케도니아 대학 한국어학과에서 교수로 계시는 분께서 스코페 여정을 도와주셨다.

 

교회 내부의 제단과 성화.

 

교회 마당에는 북마케도니아의 독립열사인 고체 델체프의 기념관이 있는데, 화환이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을 방문했던 귀인이 추모를 하고 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기념관 입구가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입구에 전시된 고체 델체프의 사진.

 

스코페 투어를 마치고 오흐리드 호수 변에 위치한 오흐리드로 이동하였다. 180km를 달렸다.

 

이동 중 해발 1,227m 고도에 위치한 휴게소에서 쉬고 갔다.

 

도로 양쪽에 식당이 있는데 판매하는 주요 품목이 메키치 Mekici이다. 가이드가 강추하는 메뉴였다. 고로케 비슷한 맛이라 하더라.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고 이 휴게소에서만 먹어볼 수 있다고 했는데, "Mekicite od Straza"라는 북마케도니아 프랜차이즈 브랜드더구만.

 

북마케도니아의 국기가 고갯마루에 휘날린다.

 

오흐리드 호수변의 숙소에 도착하여 먼 나라에서 날아오며 쌓인 피로를 푼다. 

 

첫날의 숙소는 오흐리드 구시가지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했다. 호수의 물이 너무나도 깨끗하더라~

 

저녁은 오흐리드 호수에서 올라온 송어 요리.

 

비행기에서 내려 208km를 이동하였다. 여행의 피로와 시차 적응 과정이 더해지니 무진장 피곤하더라.

현대전자의 TV를 감상하면서 일찌감치 잠 속으로 그냥 빠져들어갔다. 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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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대학의 동남권캠퍼스에서 수강신청했던

"역사경관과 현대식 빌딩이 공존하는 도시 서울(현대편)"의 현장 답사 마지막 날이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동대문역에서 청계광장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을지로입구역에서 합류하여 일정을 함께 했다.

 

 

답사 진행을 위한 집합 장소였던 을지로입구역 4번 출구 앞. 다람쥐공원이라 되어 있다.

 

오후 4시가 되자 바로 답사를 시작한다.

길건너편의 남대문로9길 입구에 보이는 '음식문화거리'라는 표지판이 있는 위치 즈음에 소광통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계천의 지류 하천들의 분포를 보여주는 지도를 찾아보았다.

 

확대해보자. 지도에서 동그라미 친 창동천 구간이 오늘날의 '남대문로10길' 되시겠다.

 

18세기에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구할 수 있었다. 창동천과 청계천 일대가 세세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소광통교에서 청계천 합류 지점(곡교)까지가 남대문로 10길이다. 소광통교에서 서쪽 구간은 남대문로 9길에 해당한다.

 

 


 

100년 전에 건설된 지하배수로가 공사 중 발견되어 서울시 문화재(제38, 39호)로 지정된 바 있다.

남대문로 지하배수로 구간은 회현동천 유로와 일치하며, 소광통교 구간은 창동천의 유로와 일치한다. 

이들 지류 하천들을 복개하고 지하화하면서 만들어진 배수로인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상업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청계천의 다른 지천에 비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암거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이 일부 구간에서나마 발견된 것이었다.

(https://news.seoul.go.kr/culture/archives/52788)

 


집결지에서 출발하여 '남대문로10길'을 따라 청계천한빛광장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다른 도로들을 모두 남북 방향의 격자 모양을 이루는데 이 길만 빗금 방향으로 되어 있다.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지류 하천이 흐르던 곳이기 때문이다.

(을지로입구역 부근에서 GPS 로그 궤적의 오류가 심하다. 이리저리 막 튀었네. 하나은행 지하의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공간을 좀 오래 이용한 결과이다. GPS는 하늘만 보고 있어야 하니까...)

 

광통교가 있었던 곳에는 '광교'가 위치하고 있다.

복개했던 청계천의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자그마한 광교로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위치를 서쪽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광교가 건설된 것이다.

 

광교 북단에 위치한 신한은행 건물 앞에 자그만하게 광통교의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광교의 길이가 상당히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더 넓게, 더 깊게 파낸 것이 현재의 모습이겠다.

돌다리인 광통교의 석재로 정릉의 신장석을 가져다 사용했다는 것이 독특하다.

 

현재의 광교 주변 안내도.

 

청계천 징검다리를 건너는 답사대원들.

 

'개천' 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둑의 양쪽에 석축을 쌓았다는 안내문.

'개천'이라 하였다. 토사가 하천 바닥에 쌓여 물이 넘치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하천 바닥을 준설하는 준천 작업 또한 반복되었다. 그래서 하천을 열어준다는 '開川'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에야 '청계천'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상류의 '淸風溪'에서 청계천이란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다음 자료를 보면, 지금의 세운상가 있는 부근까지 석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노혜정, 1994, 서울시 중소하천의 경관변천에 관한 연구, 지리학논총, 제24호, 88)

 

수선전도를 탐구하는 답사대원들.

 

삼일빌딩 맞은편에 위치한 워터 스크린.

이 위치가 을지로입구역 부근을 지나 온 회현동천과 합류한 창동천이 청계천에 합류되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동천이 청계천에 합류하는 지점의 곡교 모습을 보여주는 1950년대 사진이 남아 있다.(서울역사박물관 보도자료, 2020년 7월 3일, 10쪽)

 

삼일교 아래에는 한화불꽃이 이글거린다.

 

청계천 복원 공사후 개통 첫 날,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삼일교의 중앙분리대에 조형물 설치 및 투광 목적으로 구멍이 주욱 뚫려 있었는데, 출입이 금지된 도로 한가운데의 조형물을 가까이 보려 다가왔다가 온 김에 아래의 구멍을 좀 깊숙이 쳐다보시다가 그만... 사망 사고였다. 그래서 지금은 조형물은 제거되고 구멍들을 모두 막혀있다.

 

가짜 수표교. 원본은 장충단공원에 계시는데 여러차례 원래 위치로의 이전이 시도되었었으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이제는 논의가 중단된 상태이다.

현재 수표교의 위치도 원래 위치에서 어긋나 있다. 청계천 남북의 수표로를 잇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동쪽으로 30여 미터 차이가 난다. 원본께서 돌아오실 날을 기다리는 것일까???

 

서울의 중심 도로인 종로이다. 길 건너편으로 '송해길'이 이어진다.

 

조선시대 시장을 관리하던 관청인 '경시서'가 있던 터 표지석.

이 일대에 시전, 육의전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육의전PC방, 육의전 귀금속방 등이 성업 중이다.

 

퇴직하면서 나의 노후생활의 터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혼자 답사도 왔던 곳이다. 탑골공원, 입구인 삼일문.

 

탑골공원 속의 나......

 

탑골공원의 핵심 뽀인트인 팔각정.

 

주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분들. 저기낄려면 장기 정도는 배워두어야 하는가...

 

낙원악기상가 건물 옆을 지났다. 외관을 보면 보수 공사가 시급해보인다.

 

소머리국밥집 골목. 음~~~~ 햐~~~~~

여기서 답사에서 빠졌었으면............ 발걸음이 안떨어졌었는데...

 

그 분께서 즐겨 찾으셨었다는......

요기까지는 노인들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드디어 익선동이다. 여기부터는 젊은이들의 공간이다.

 

골목이 좁고 혼동된다 하여 지도를 하나 인쇄해 들고 왔다.ㅎㅎㅎ

 

익선동 답사...

 

"한옥거리"라고 하지만 '한옥'은 보이질 않는다. 그냥 좁은 골목길이다.

 

그래서 높은 곳을 찾아 올라왔다. 종묘가 보인다.

 

창덕궁, 보현산까지 아주 잘 보이는 곳을 찾아 올라왔다.

 

높은 곳에서 익선동 한옥거리 쪽을 조망하였다. 기와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러니 골목이 좁을 수 밖에 없다.

옛지명인 '익랑골'과 한성부 중부 '정선방'의 명칭을 합쳐서 만들어진 지명이 익선동이다.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서울의 주거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도 탐을 내기 시작했을 때 민족자본가인 정세권이 그들의 의도를 막아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주택개발업체인 '건양사'를 설립해 서울 곳곳에 한옥 주택을 지어 분양하였으며, 분양대금을 월단위로 나누어 내도록 하여 입주자들의 정착을 도왔다.

 

익선동 일대에서 정세권이 소유했던 지역과 한옥의 규모별 분포도를 보자. 다양한 규모의 다양한 형태의 가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와 전기를 설치하고 좁지만 마당까지 마련하여 한옥의 실용성을 최대한 살려냈다.

(이두현, 2023, "전통을 활용한 골목재생, 익선동" 월간 국토, 통권 496호, 61쪽.)

 

최대한 가옥들을 배치하기 위해 골목은 좁을 수 밖에 없었고,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면서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위치는 서울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종로 화류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다.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3대 요정의 하나였던 '오진암'이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오진암, 명월 등 요정이 성업을 하게 되면서 필요하고 도우이 되는 서비스업이 따라 들어왔다고 한다. 악기상가나 한복상가 등이 성업하게 된 배경 중 하나라고 하더라. 한복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소수만 남아 있다.

 

 

"100년 전의 해어화를 쫓다…오진암과 명월의 추억이 있는 종로"

( 100년 전의 해어화를 쫓다…오진암과 명월의 추억이 있는 종로 (mk.co.kr) )

 

오진암의 옛모습은 연합뉴스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화나무가 그렇게 근사했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16, https://www.yna.co.kr/view/AKR20100915228200004)

 

오진암이 있었던 곳에는 이비스앰배서더 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화류 문화의 핵심이었기에 영업 중지이후 해체될 때 오진암의 보전 논의가 활발했었다. 그 결과 오진암이 있던 곳에는 이비스 호텔이 들어서고, 해체된 오진암은 부암동으로 이사갔다.

부암동에 안평대군이 지었었다던 무계정사는 소실되었지만, 2014년에 그 자리를 복원하면서 무계원을 조성하였다. 무계원의 한옥 건물이 오진암을 옮겨온 것이다. 부암동을 가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정세권 아저씨가 만든 공간이 익선동 한옥거리, 한옥골목을 과거의 요정을 생각해보면 떠난다.

 

오늘의 답사도 9시 넘어서 완료되었나 보다.... 

'종로3가역'이 보이길래 1호선인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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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대학의 동남권캠퍼스에서 수강신청한 강좌인

"역사경관과 현대식 빌딩이 공존하는 도시 서울(현대편)"의 현장 답사 마지막 날이다.

조금 일찍 출발하여 답사 시작 전에 청계천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을지로입구역에서 합류하여 일정을 함께 했다.

 

4호선 지하철을 이용해 동대문역으로 달려가 오간수교에서부터 청계천을 따라 상류를 향해 걸었다.

 

1주일 만에 다시 만난 동대문, 흥인지문이다. 잘 계시더라.^^

 

8번 출구 옆에 설치된 '전차 차고지' 표지석으로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구한말에 설치되었던 전차의 차고지와 발전소가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청계천 변에 위치한 신평화시장.

 

평화시장. 서점들이 많더라. 헌책방들도 있는 것 같더라.

한때 헌책방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였었는데.. 다음에는 이곳이 목표일 것 같다.

 

전차 차고지 자리를 차지한 JW메리어트 호텔과 동대문종합시장.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늘 북쪽의 통로만 이용했었는데, 오늘은 남쪽의 통로를 걸어본다.

 

오간수교가 오간수교인 것은 옛날 이곳에 오간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도성 한폭을 흘러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청계천의 출구였었다.

 

청계천은 주변 평지에 비해 하천의 깊이가 매우 얕았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장마철마다 물이 넘쳐 주기적으로 하천 바닥을 준설하는 공사를 하곤 했다.

영조 때인 1760년에 아주 큰 공사를 벌였고 그 과정을 기록한 '수문상친림관역도'가 오간수교 아래 옮겨져 있다.

 

그린 그린하다.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좋구나.

 

청둥오리 한쌍이 노닐고 있고...

 

쥐똥나무도 보인다.

 

찔레꽃이 피어 있는데...

 

참새들이 요란하다.

 

작품 활동 중인 외국인 작가도 보인다.

 

잉어들의 덩치가 아주 실허다. 잘들 살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가짜 수표교엔 '수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역시 가짜다.

 

워터 스크린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는 엄청나다. 화성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들르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은 이곳에 있다.

 

광교 틈새에는......

 

모전교 아래로 청계 케스케이드가 살짝 보인다. 다왔다.

 

동대문역 부근의 오간수교에서 이곳까지 사진 만들면서 천천히 걸어오니 45분 정도 걸리더라.

 

청계광장에서는 행사 준비가...

 

답사를 위한 집합 장소인 을지로입구역 4번 출구앞에 도착했다. 답사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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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폰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4월부터 터져나온 7개월 무료 요금제에 혹해서 신청을 해보았다.

핀다이렉트의 Z패스인가 뭐가 신청을 하였었다. Z 패스데이에만 가입할 수 있고, 그 '데이'는 언제될 지 모르니 신청을 해두면 자기들이 알려준다는... 카톡 메시지를 받았을 때 바로 신청을 했다. 

그런데 신청한 지 2주가 넘어가도 아무런 연락이 없네. 전화연락이 안되는 업체라 확인할 방법도 없고...

그래서 포기하기로 하고 다른 업체를 찾다가... 스마텔이란 곳에 부부가 같이 신청을 넣었다. 이틀만에 마나님의 몫인 유심이 배송되었는데, 내 몫의 것은 나흘이 지나도 오질 않네. 왜 발송이 안되었는지 카톡으로 문의를 넣은 상태인데 4시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 확인이 안된 상태...

마나님의 유심은 도착했기에 홈페이지에서 '셀프 개통'을 하려 했는데, 잘 진행되다가 단말기 인증단계에서 멈추어고는 진행이 되질 않아 난감했다. 처음부터 안되면 차라리 나을텐데 한참 여러 단계를 거치다가 거의 마지막 부분일 것 같은 곳에서 막히니 재밌다.^^ 컴퓨터로 안되니 스맛폰으로도 진행을 해보았다. 혹시나 될까 하는 기대를 하고서...

스맛폰으로 셀프개통을 진행하면 본인인증단계에서 막히더라. 카드회사를 통한 본인인증이 통과되는데 에러메시지를 뿜고는 죽는다. 이거 머냐~?

스맛폰으로 진행하면 본인인증단계에서, 컴퓨터로 진행하면 단말기 인증단계에서 멈춘다. 재미있지 아니한가~.

상담사를 연결하여 개통하는 방법도 안내되어 있어 연락 전화번호로 신청했는데, 2시간 내에 연락준다고 되어 있건만.... 오전 10시반에 신청한 것에 오후 6시가 넘어도 답이 없네요. 중간에 다시 문자를 보냈는데도... 문자 확인은 하고서도 해피콜을 안주는 해피하지 않은 상황...

괜히 쓸데없는 일을 벌인 것일까? 전화를 별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7개월 무료를 뭐하러 탐을 내었을꼬...


 

화요일 신청한 유심이 토요일에 드디어 도착하였다.

스마텔 홈페이지에서 "셀프개통신청"을 하여 무사히 완료하고, 전화기의 USIM을 바꾸고 세 번 부팅하고 나니 작업 완료.

7개월간 무료 요금의 혜택을 '일단' 누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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