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7일(수)의 이동 경로. 괴산을 떠나 음성 지역 답사를 하고 진천을 거쳐 귀경하였다.
넓은 진천분지의 북동부는 음성군. 남서부는 진천군에 속한다.
진천분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고.
http://webbook.me.go.kr/DLi-File/F004/000/140210.pdf
27일 아침이 밝았다. 늦잠을 자도 되는데, 그럴수록 잠은 일찍 깨더라.
'방송출현 맛집'에서 올갱이해장국으로 아침 해결.
괴산을 뜬다.
음성군청을 목적지로 했는데, 가장 큰 길인 '시장로'가 막혔다. 장날이라고 도로를 통제하고 장이 선다. '포터' 트럭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어서 판을 벌리고 있었다.
음성군청을 찾았는데, 네비게이션의 지도에 향교가 보인다. 음성향교 - 수봉초등학교 - 음성군청 - 장터 순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미타사와 가섭사, 양촌권근 3대 묘소를 들렸다가 진천으로 향했다.
음성현지도(1872년지방도)
음성향교. 위의 지도에 '향교'가 표시되어 있다.
홍살문. 하마비.
역시 닫혀있다. 역시 담넘어로 카메라 디민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향교마다 은행나무가 있다. 음성향교의 은행나무에는 은행이 엄청 달려 있다.
공덕비들. 줄을 서시오~~~
향교 서쪽에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음성현지도에 표시되어 있어 혹시 관련 유적이나 문화재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수봉초등학교에 들렀다.
역시 개교 100주년은 기본이다.
옛지도와 관련되는 유적이나 문화재는 찾질 못했다. 아름다운학교 뽑기대회? 별 것이 다 있었다 싶다.
군청이다. 규모가 엄청크다. 문화홍보과에 자료 제출받으러 동행자가 올라갔다. 3층이니 올라갔을 것이다.
꽤 넓은 주차장이 세 곳이나 된다.
지진가속도 계측시스템이 군청 앞의 공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2013년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아래 링크 참조.http://www.jbknews.co.kr/news/view.asp?msection=5&ssection=8&idx=66580
http://usjachi.com/detail.php?number=12657&thread=27
활력을 위해 담배피는 시설도 있다.
음성읍을 지나는 음성천의 일부구간을 복개(1994~1997년 공사)하여 주차장으로 이용한다. 이용료를 따로 징수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좋다.
1997년에 음성천을 복개한 구간이다.
장날이라고 하여 장구경을 나섰다.
껍데기, 닭발 요리를 준비중이시다. 모델료 내야 한다고 자꾸 말씀하셔서.......도망쳤다.
옛지도에 음성의 동쪽에 수정산이 있고, 정상부에 수정산성이 표시되어 있다. 네비게이션이 수정산성을 입력하고 달렸다. road end.
수정산과 수정산성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더라.
아래 링크 참조. 정리가 아주 잘되어 있다. 훌륭한 블로거들 참 많다. 좋다.
가섭산 미타사를 향했다.
우와~~~~~~~~~~~~~~~~~~~~~~~
우와와아~~~~~~~~~~~~~~~~~~~~
납골묘였다. 거대한 지장보살께서 보살펴주시는.
셀피.
동양최대크기의 지장보살 입상.
혹시 금박을 입힌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진짜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극락전에서 법회가 한창이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630년(신라 진덕여왕 8)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고증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은 전하지 않는다.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여 명으로 적군을 물리치자 나라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그러나 1742년(영조 18)에 불이 난 뒤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1964년 수덕사에 머물던 비구니 명안(明岸)이 중창을 시작하여, 이듬해 4월 8칸의 법당을 세웠다. 이 때 절터에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백자 조각이 많이 수집되었다. 1973년에는 경내에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상이 출토되었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1979년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우고, 1980년에 선방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삼성각·선방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아미타삼존불과 극락후불탱화·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폐사된 절터에 버려져 있던 석조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1964년 충주시에 사는 한 무당(巫堂)이 이 석조불좌상에 대한 꿈을 꾸고는 석불을 가져가려고 산 밑까지 옮겼다가 갑자기 심신이 괴로워져서 운반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 뒤 산 아래 비산리 마을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다시 절터로 옮겨달라고 하므로 마을사람들이 다시 원래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명안이 이 절에 머물며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절에서 700∼800m 떨어진 곳에 있는 미타사마애불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거대한 화강암 동쪽면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얼굴과 어깨가 두드러지게 강조되었고 머리가 크며 관모를 썼다. 상호는 풍만하나 눈과 입의 표현이 간략하며 코도 납작하다. 바위 높이는 535cm이고 불상 높이는 405cm이다. 이밖에 1976년 법당 앞 채소밭에서 발굴된 지름 170cm의 초대형 맷돌이 전하는데, 아랫부분만 남은 것으로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타사 [彌陀寺] (두산백과)
가섭산의 다른 사면에 위치한 가섭사로 달린다. 미타사는 산자락의 끝부분 완경사지에 입지하고 있지만, 가섭사는 정상부에 가깝다. 급경사를 올라간다. 운전하기 무서웠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365년(공민왕 14)에서 1376년(우왕 2) 사이에 나옹(懶翁)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벽암(碧巖)이 중건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응진암(應眞庵)이라 불렀다. 1938년에 불탄 뒤에는 주지 윤원근(尹元根)이 중건하였다. 1985년 미륵석불을 조성하였고, 1986년 대웅전이 무너져 위치를 옮겨 지금의 자리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었다. 1990년 삼성각을 개축하였고, 요사를 옛 대웅전 자리에 지었으며, 1988년 일주문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의 극락보전과 3칸의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높이 90㎝의 아미타여래좌상은 음성읍 용산리 상봉악사(上鳳岳寺)가 폐사되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과, 음성군 감우리 성주사(聖住寺)가 폐사된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그 재료는 나무라는 설과 싸리나무로 엮어서 만든 부처라는 설이 있지만, 현재 개금되어 있어 확인할 수가 없다. 이 밖에도 6폭의 탱화와 1930년에 주조한 종, 조선시대에 만든 길이 150㎝의 석조(石槽)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섭사 [迦葉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인데 금박으로 인해 정확한 재료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삼성각일 것이다. 절벽에 붙어 있다. 멋지다.
가섭산 정상 가까이의 급사면에 입지하였기에 음성읍내 쪽으로의 전망이 아주 좋다.
양촌 권근 3대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 묘역은 1만8000평 정도로, 권근을 비롯하여 그 아들인 권제(權踶), 손자인 권람(權擥)의 3대 묘소가 함께 있다. 묘소는 작은 구릉 위에 위치하며 맨위 권근의 묘부터 차례대로 내려썼다. 대개 봉분의 높이는 180㎝·둘레 2,500㎝이며, 석상·묘비·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문인상을 세웠다. 구릉 아래 좌측 평지에는 신도비가 보호각 안에 있으며, 우측으로 300m 아래에 사당이 있다.
권근의 신도비는 1447년(세종 29)에 세웠는데 비문은 이개(李塏)가 짓고 서거정(徐居正)이 썼으며, 권람의 신도비는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권반(權攀)이 글씨를 썼다. 권근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권제(1387∼1445)의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 또는 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로 권근의 둘째 아들이며, 사헌부감찰·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권람(1416∼1465)의 자는 정경(正卿), 호는 휴한당(休閑堂)이며, 시호는 익평(翼平)으로 권제의 아들이며,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앞장섰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촌권근삼대묘소 [陽村權近三代墓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은 언덕 위에 3대 묘가 있다.
사당. 멋지다.
신도비와 비각.
열심히 일한자, 먹어라. 점심 때가 되었다. 꽤 유명하고 큰 식당이다. 유명해서 그런지 간판도 보이질 않는다.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질 않아도 손님들이 몰리니까 밖에 대문짝만한 간판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간판이 요렇게 쪼꼬만하다.
선지국 먹자고 갔는데, 난 내장탕을 시켰다. 눈치보니 내장탕이 대표메뉴 같아서. 들어온 다른 손님들 대부분 내장탕을 시키길래, 따라하기. 괜찮다. 하지만 비싸다. 이것이 일만원 하고도 이천원을 더 받는 내장탕이다. 읍 단위의 비싼 식당인데도 손님들이 넘쳐난다. 큰 식당의 많은 자리가 부지런히 순환된다. 하지만 난 쌍문동 한우마을의 6천원짜리 내장탕이 더 좋다.
먹고 났으니 가자. 진천으로 가자. 농다리로 가자.
생거진천, 들어본 유명한 문구이다.
충청북도 진천에 사는 허주부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시어머니가 곳간 열쇠를 안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시어머니는 곳간에 아무것도 없어서 어딜 갈 때에도 곳간 열쇠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다녔다. 허주부의 딸은 ‘곳간에 아무것도 없으니 열쇠를 안 주는구나!’ 깨닫고 남편과 열심히 일을 했다. 일한 만큼 소득을 올리니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시부모가 돌아가시고 남편 또한 세상을 떠나자 허주부의 딸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길을 떠났다. 허주부 또한 ‘이것이 남편을 잃고 어떻게 사나!’ 하고 궁금하여 딸을 보고자 길을 나섰다. 죄전고개를 넘어가던 허주부가 힘이 들자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진천서 젊은 유생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마침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고개를 올라오자 유생은 여인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뜰 수가 없으니 눈 좀 불어 주시오.” 하였다. 이에 여인은 유생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허주부가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제 딸이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일로 허주부는 ‘저런 괘씸한! 외간 남자하고 두 번이나 입을 맞춰!’ 하면서 오해를 하게 되었다. 허주부는 딸이 집으로 돌아오자 노발대발하면서 가라고 호통을 치며 그 집 귀신이 되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연유도 모르고 남편을 원망하며 겨우 딸을 하룻밤 재워 보냈다. 허주부의 딸은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낙방하고 돌아오던 유생을 만났다. 유생은 “지난번 내 눈을 불어 주던 여인이 아니오?” 하며 “나는 아직 장가도 못 갔으니 같이 삽시다.” 하였다. 그리하여 허주부의 딸은 유생과 함께 진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허주부의 딸은 아들도 낳고 딸도 낳아 잘 살고 있는데, 용인에 살던 자식이 건장하게 자라서 외갓집에 와 어머니를 찾았다. 외할머니가 “네 어머니는 진천으로 시집갔느니라.” 하고 알려주자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가서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천에 있는 아들딸들도 어머니를 뺏기고 싶지 않자 용인 자식과 진천 자식 사이에서 싸움이 났다. 그러자 원님이 “살아서는 진천에서 거하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거하라!”는 판결을 내려 주었다. 여기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진천 지방은 예부터 평야가 넓고 비옥하며, 가뭄의 해가 없어 농업 경영이 순조로워 살기 좋은 곳이기에 생거진천 사거용인’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생거진천 유래」 [生居鎭川 由來]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진천 농교(농다리)
공갈 폭포. 물이 없다. 세금으로 물 퍼올려 산비탈에 흘려버리면 돈이 나오냐? 건너편에는 초평저수지가 있다. 그 물을 끌어다가 공갈 폭포를 만드는 것일 것 같다. 아마도.
농다리.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다리'라고도 한다.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이다. 30㎝×40㎝ 크기의 사력암질 자석(紫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으나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원래는 28수를 응용하여 28칸의 교각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양쪽 2칸씩이 줄어 24칸만 남아 있다. 그 위에 길이 170㎝, 내외 넓이 80㎝,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 1개나 길이 130㎝, 넓이 60㎝, 두께 16㎝ 정도의 장대석 2개를 나란히 얹어 만들었다.
교각에서 수면까지 76㎝, 수면에서 하상까지 76㎝로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로 하상이 높아졌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천 농교 [鎭川籠橋] (두산백과)
다리를 건너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되돌아나와 차로 들어간다. 빗방울이 굵다.
비가 온다고 그냥 서울로 갈까 하는 의견을 내는데, 기각시켰다. 김유신 출생지 이야기를 음성에서 진천으로 오는 내내 했는데 그냥 갈수는 없다. 빗속을 달렸다. 둘이서.
요기다. 입구를 지나쳤다가 되돌아왔다. 직진본능. 네비게이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구를 일찍 나가버리거나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 동행자를 불안하게 했다. 어쨓든 직진은 잘하니까....☞☜....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안내.
탄생지는 이곳이나 태실은 다른 곳에 있다. 그런데 태실이 뭔데?
아래 링크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78686
왕자도 아니면서 태실을, 김유신의 미친 존재감.
아래 링크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4240
진천현 지도. 진천만 빼먹기 그러하여 그냥 추가한다.
서울로 달렸다. 새로 개통된 강남순환고속도로를 처음 이용해보았다. 양재IC에서 진입하는데 차가 많아 애먹었다. 애먹을 것도 없지만...신호를 여러번 대기해야 했다. 땅굴로 들어가 금방 관악 출구로 나왔다. 서울대 정문 앞이 공사판이었다.
집에 왔더니, 인사가 '옥수수 안사왔냐' 였다. 괴산에 다시 가야할 것 같다.
ㅠ.ㅠ
2016년 7월 27일(수)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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