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6일 저녁. 식사 모임에 가지 않았다. 밥만 먹고 가라는 전화도 왔으나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내가 안다. 절대로 밥만 먹을 수는 없다는 것을.... 다음 날 새벽에 답사를 가야 하기에 모임에 가질 못한다고 사전 양해를 구하였지만, 그래도 찔러본다. 나도 많이 그랬었다.
무엇을 빼먹었을까. 이것저것 답사 물품을 챙겼다고 생각하는데.. 이리저리 고민하고 다시 뒤적여보고 했다. 이번에는 두고 가는 것이 없겠지 했다. 다음 날 보니 안경을 닦아주는 걸레를 가져오지 않았다.ㅎㅎ
11시 쯤 잠자리에 누웠다. 새벽 3시50분에 알람을 설정했다. 잠이 이 시간에 올리가 없다. 그래도 뒤척이며 자려 노력했다. 야자를 마치고 오는 고3 아들의 소리.....그리고...잠이 오려는 찰나 줄기차게 외치는 "까톡!" 오늘 저녁 모임을 했던 사람들이 헤어져 집에 가면서 카톡 메시지로 정을 나누었던 것이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것이 카카오톡의 알림 소리 설정을 무음으로 바꾼 일.
이후, 선식 한봉지 털어 넣고 씻고 털고 출발. 밖은 어둡고 눈은 감긴다. 길은 뚫려 차는 자기가 마구 달린다. 가슴은 떨리지만, 차가 달려가는 것이니 나는 그냥 두었다.
다행히 중동고 지하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하여 주차하고 단 5분이라도 눈을 붙여볼까 하는데, 차밖에서 두드리는 손이 있다. 나가자.
서울에서 출발하는 일행들이 모두 모여 출발하였다. 버스 전용차선을 달릴 수 있는 차. 남원 Intercity Bus Terminal에 도착하여 광주에서 버스로 오신 분들을 랑데뷰.
남원 대강면 사무소 앞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오늘의 답사 인원 집합.
27일의 답사 이동 경로.
입면 제월리 습지에서 답사를 시작한다. 표지석이 있었다.
섬진강 살리기를 했단다. 언제 죽었었지?
그런데, 그 살리기가 자전거 길이다.
자전거 길 만들면 강 살리기인가?
다행히 한강 등 처럼 강둑을 깎아내고 콘크리트 쳐바르는 짓은 "아직" 하지 않은 것 같다.
습지가 초지로 덮여 있다. 모래가 많이 있는 곳일 것이란다. 습지의 모래톱은 어떤 '역할'을 할까?
자.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답사 안내를 맡은 조헌 박사. 답사 준비와 진행 살림을 맡은 남사장.
남해안 중부권의 산지 환경과 하천의 특색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 강의가 진행되었다.
지리산 일대의 생태적 안정성이 화강암 산지보다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섬진강 하곡의 배열 양상이 서해로 유입하는 하천들과 다른 면은 무엇이 있을까?
청계동교로 이동
곡성의 테마 조형물이 다리 난간에 조성되어 있다. 골짝나라 곡성.
보통 하천은 하류로 가면서 유량이 증가하여 하폭이 넓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제월리를 지나 하류로 가면서 하천의 폭이 좁아져 협곡을 이룬다.
주변 산지의 암석은 화강암질............(더 이상 설명은 생략!!!)
섬진강 하구에서 내륙으로 62km 올라오면 압록에 예성교가 있다.
예성교
놀고 있다.
성삼재로 이동하였다. 비가 온다. 자기가 가면 날씨가 늘 좋아진다고 자랑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리산 할매는 그 기원을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비가 꽤 내렸다.
이런 표지판이 있다.
구름도 울~고 넘는, 노고단 언저리....
화강암 산지와 편마암 산지의 지형적 특징이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장실 옆에 만들어 놓은 지리산국립공원 관련 게시물.
하늘아래 첫 동네 이정표.
늦은 점심. 산채 비빔밥. 내용물은 공개할 수 없다.
식당 실내 조명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운치 있다. 스팟 측광 촬영.
19번 섬진강대로를 따라 가다가 '석주관 칠의사묘' 조금 못 미쳐 '신바람난 국수'집이 있다. 그곳에 전망대가 있어 송정리 협곡의 섬진강을 조망할 수 있다.
송정리 협곡의 모습.
산지 하천에서 측방 공급물은 하천 지형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기념 사진.
비가 계속 온다.
그 이름도 유명한 '화개'
강변의 이 건물은?
강의 준비 중....
화개교의 교각에 자가 그려져 있다. 당연히 수위 측정용이겠지. 수표교다.^^
악양 토지리. '최참판댁 '이라고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끌고 있다. 그런데...그 근처의 노인정에 딸린 정자에서 비를 피하며 악양분지에 대해 공부.
악양분지에는 산록대에 피복물층이 두껍에 쌓여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의 기후 지형 혹은 구조 지형의 발달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
답사비를 내지 않고 몰래 듣는 청강생.
비가 계속 내려 하동 전망대를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숙소로 이동하였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한 다음, 피곤하기도 하고 내일의 답사를 위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8일의 답사 이동 경로.
어젯밤을 신세진 숙소 및 식당.
식당 메뉴판. 하나씩 다 먹어보고 싶은데...
은성식당의 자랑. 재첩.
홍매실도 취급하는데, 올해는 끝. 내년 것은 주문받을 수 있단다.
은성식당이 이렇게 대단한 곳이다.
강변으로 내려와 산책.
우천시에는 빠지지 마세요.
길. 길. 길....뭔 길이 이리도 많은지...
섬진강 변에 위치한 남도 모텔과 은성 식당. 그 주변에 차밭과 매실 과수원 등이 혼재되어 있다.
2015년 5월 23일(토). 새벽 3시 38분에 일어났다. 부지런히 씻고 준비해 놓았던 가방들을 들고 출발했다. 4시 15분쯤 차를 빼고 달렸다. 눈이 감기려 한다. 조심조심 총알같이 달렸다. 중동고등학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엔진을 끄고 기다리니 주차장내 전등이 자동으로 꺼진다. 깜깜하다. 또 너무 일찍 도착했다. 기다리다가 4시 55분 쯤 밖으로 나왔다. 5시 좀 넘어 남사장의 시커먼 차가 보였다. 약속한 사람들 모여 남사장 차로 출발. 인천 연안부두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하는데 맞은 편에 유·민 커플이 보인다. 인사하고 같이 내려 터미널에 들어가 '농심가락국수'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8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덕적도를 거쳐 굴업도에 도착했다.
파란선이 굴업도를 들어간 경로, 빨간선은 굴업도에서 나온 경로이다.
인천에서 출발한 배는 "스마트 호". 덕적도에 내려 바로 "나래 호"로 갈아탔다. 나래 호는 덕적도의 자도들을 순환하는 배이다. 홀수 날에는 굴업도 쪽을 먼저, 짝수 날에는 반대쪽으로 순환한다. 23일이었으므로 '운좋게' 바로 굴업도에 입도할 수 있었다.
23일과 24일의 굴업도-덕적도 간의 항로 비교. 상당히 다르게 운항한다. 왜? 아...몰랑~
굴업도에서의 이틀 이동 경로.
23일에는 먼저 목섬을 다녀왔다.
물이 빠지면서 두 섬 사이를 걸어서 건널 정도가 되었다. 신기한 서해이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대규모의 노치(notch)가 형성되어 있었다. 바다물에 의한 작품이겠지. 그리고 목기미 해변을 지나 연평산을 올랐다. 빡쎘다. 해발고도 123미터라고 하는데, 진짜로 바다 높이에서부터 순수하게 올랐다. 경사가 매우 급하여 기어 오른 구간이 꽤 된다. 다리가 후달렸지만 돌아보았을 때의 경치는 직전의 모든 괴로움이 한방에 날아갈 만큼 기가 막히다. 내려오는 길에 붉은 모래 해변을 들러 숙소(산장모텔민박)로 귀환했다.
지형도 참고..
(김태석 외, 2012, 굴업도 지형지, 한국사진지리학회지, 제22권 4호, 27쪽)
굴업도 인근의 해도이다. 주변의 다른 방향의 바다는 수심이 매우 얕다. 서해답다.
그런데, 동쪽은 85미터까지 해도에 나올 정도로 수심이 깊다.
그러한 수심의 차이가 굴업도의 동쪽 해안선과 서쪽 해안선에 서로 다른 지형이 발견되는 배경일 것이라고 인솔자인 이상영 교수님을 말씀하셨다.
7시. 인천연안여객터미널 내부. 출항 시각을 기다리는 사람들.
표, 승선권을 받았다.
출발한다. 스마트호. "덕적도" 행이라 표시되어 있다.
10시 30분. 굴업도에 다가가고 있다. 굴업도의 유명한 목기미 해변의 거대한 사구가 보인다.
굴업도에 배가 닿자 하선을 준비하는 사람들. 공사용 자재를 실은 트럭도 함께 실려왔다.
준비해 온 짐들과 함께 하선하여 각자 예정하였던 방향으로 흩어진다. 여러 모둠이 같은 배를 타고 도착하였다. 민박집이 다섯 곳이 있다고 하며, 텐트를 이용하는 비박 인원도 상당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10시 52분. 굴업도의 아름다운 숲길로 접어들었다.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곳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숨어있기도 하다.^^
공사 과정에서 노출된 노두를 관찰하며 공부하고 연구하는 답사객.
길에서 방황하다가 짧은 생을 살다 간 살-모-사
부동산 등기 관련 구멍을 이용하여 굴업도의 상당부분 토지를 흡수한 업체가 있다고 한다. 곳곳에 경고문이 붙어 있다.
'전기'라는 은총을 선물해주는 태양광 발전소가 있다.
굴업도 큰말 해변이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작은 섬이 토끼섬 혹은 목섬이다. 물 때가 맞아야 건너갈 수 있다.
해안의 사빈 안쪽으로 사구가 발달하고 있으며,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다. 사구 위에는 각종 염생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아직은 물이 빠지지 않아 목섬으로 걸어서 건너지 못한다.
에이 굴이나 까자......소위 말하는 자연산 굴을 직접 까서 그냥 먹었다.
절리가 발달한 기반암의 풍화 상태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답사대원들.
공부하다 보니 물이 빠진다. 목섬으로 이렇게 건너갈 수 있었다.
토끼섬의 동쪽 해안에는 파식대가 잘 발달해 있다.
절벽 밑으로 깊게 해식와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굴업도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지형으로 꼽힌다.
굴업도와 토끼섬 사이의 암석들에 나타나는 절리를 잘 관찰할 수 있다.
노출된 기반암은 절리를 따라 빠른 속도로 풍화, 침식된다.
섬을 나와 마을 앞의 큰마을 해수욕장의 사빈에 딸린 사구를 살피고 지나간다. 사구 위의 나무들은 방풍림이겠지.
목기미 해변이다. 굴업도의 상징과도 같은 해안 지형인 거대한 풍성사구이다.
망가져 사용하지 않는 전봇대들 옆을 지나간다.
목기미 해변은 육계사주의 형태를 보인다.
목기미 해변 반대편에는 큰 구멍이 뚫린 '씨 아치'가 서 있다. 홍예문, 코끼리 바위라 한다.
물론 침식에 의해 점차 무너지는 중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홍예문을 통해 사람들이 들락거릴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이 크다.
연평산을 오르는 길에 있는 사구. 사면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 수 있을 정도이다.
이번 답사에는 가족팀이 많았다. 미래의 지리 희망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의 한 싸나이가 사구 사면에서 미끄럼을 시도하고 있다.
연평산을 오르는 길에 아스라이 보이는 덕적군도의 작은 섬들. 씨스택 들.
연평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았다. 두 섬을 잇는 목기미 해변의 모래사장이 아주 잘 보인다.
4시 50분. 연평산 정상이다. 128미터라고 고도 표시가 되어 있다.
정상에서의 인증 사진.
단체 사진.
급경사를 이룬 산이라 조금 힘들긴 했지만 땀을 흘리며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앞선 힘든 기억을 모두 잊게 한다. 멋지다, 굴업도.
붉은 모래 해변. 모래가 붉은 색이다. 입자가 굵고 거칠다. 주변의 암석도 붉은 색이 많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음...머더라...
사구 안쪽의 습지. 지하에는 물이 상당히 많다고....
습지 한가운데 있는 물저장 탱크. 그 속에서 수서 생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목기미 해변의 사구. 해변의 한쪽에 무너진 방파제가 있다. 방파제에 의해 바람의 흐름이 차단되는 방향으로 사구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전봇대가 다른 곳에 비해 매몰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단체 사진 하나 더...
해가 저물고 있다. 예약된 숙소인 산장모텔민박집으로 이동한다.
답사 준비팀에서 조그만 프로젝터를 준비하였더라. 저녁 식사 전에 굴업도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굴업도의 밤은 깊어갔다. 그리고 잤을거다.. 잤겠지...
5월24일. 일요일의 답사를 시작한다.
민박집은 숙소와 식당을 겸하고 있다.
마을의 농경지의 대부분이 이렇게 그물로 보호되고 있다. 방목하는 가축들 때문인지, 아니면 뱀 때문인지 뭔지 궁금하네.
역시 개머리능선 쪽도 사유지이니 너님 들어오지 말란다. 하지만 무엇이라고 써 있는지 그 때는 알아보지 못하여 옆으로 그냥 지나갔다.
굴업도에서 통화가 되지 않는 국내 굴지의 통신회사가 있다. 하나다. 다른 회사의 것은 통화가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중계탑이겠지.
중계탑을 설치한 곳의 기초를 이루는 콘크리트가 밤새 열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때문일까? 큼지막한 뱀이 한마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일행 중에는 뱀을 드시는 분이 없었는지 입맛을 다시는 분이 아무도 없었다.
'낙우암'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다. 소를 키우겠다고 초지를 조성하고는 소를 방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들이 절벽 가까이의 풀을 뜯다가 실족하여 바다로 떨어져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더이상 소는 키우지 않는다. 그냥 '느다시 억새밭'이라 불린다.
느다시 억새밭에서 덕적군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보았다.
느다시 억새밭 아래의 해변에 보이는 침식곡. 관입이 이루어진 절리를 따라 곡이 형성되었다. 이곳의 절벽은 그냥 절벽이다. 심장이 쫄깃쫄깃. 결국 작은 심장은 가장 아래까지 내려가지 못하였다.
절벽 위에서 폼 잡으시는 분.
해안절벽의 바닥을 경험하신 분. 큼지막한 포획암 옆에서 포~즈.
개머리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바람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가 소사나무들을 서로 의지하여 밀집 대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뒷 편으로 바람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를 받는 쪽에서 어린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단체 사진 하나 더.....
개머리능선의 끝부분에 보이는 여러 여행객들이 이용한 텐트. 흠.....부러웠다.
식사중이었다. 그것도 부러웠다.
모두 커플들이었다. 그것도 매우 부러웠다.
절벽 끄트머리에 매달린 사람들.
해식애의 절리가 심심하지 않다.
해식애, 시스택. 그리고 사진 속 어딘가에 매의 둥지가 있단다.
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정확한 위치는 공개하지 않는다...
"아윌비 빽!" 바위.
바다 건너편 남쪽으로 보이는 섬들. 아마도 각흘도, 선갑도, 울도???
다시 개머리 능선을 따라 마을로 귀환한다.
큰마을 해수욕장의 사빈에서 물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조차가 상당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틀 간 식사를 한 식당. 숙소는 식당 뒷편에 위치한다.
점심 식사를 하고 잠시 쉰 다음에 짐을 챙겨 선착장으로 걸었다.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서 걸었다. 예정된 시간 보다 10분 정도 연착한 나래 호.
굴업도 들어오는 손님들 내리고, 나가는 손님들 탄다.
덕적도에 도착하여 스마트 호를 기다려 승선한다.
5시40분 경 인천부두에 도착하여 연안여객터미널에 들어가보니 더이상 떠나는 배가 없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함께 한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전국으로 해산하였다. 다음에 또 다른 곳의 답사에서 뵐 수 있기를...
차를 맞긴 중동고등학교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대리운전업체의 경영에 도움을 주고 귀가하였다. 이상 끄읕~~~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630년(신라 진덕여왕 8)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고증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은 전하지 않는다.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여 명으로 적군을 물리치자 나라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그러나 1742년(영조 18)에 불이 난 뒤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1964년 수덕사에 머물던 비구니 명안(明岸)이 중창을 시작하여, 이듬해 4월 8칸의 법당을 세웠다. 이 때 절터에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백자 조각이 많이 수집되었다. 1973년에는 경내에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상이 출토되었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1979년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우고, 1980년에 선방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삼성각·선방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아미타삼존불과 극락후불탱화·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폐사된 절터에 버려져 있던 석조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1964년 충주시에 사는 한 무당(巫堂)이 이 석조불좌상에 대한 꿈을 꾸고는 석불을 가져가려고 산 밑까지 옮겼다가 갑자기 심신이 괴로워져서 운반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 뒤 산 아래 비산리 마을사람들의 꿈에 석불이 나타나 다시 절터로 옮겨달라고 하므로 마을사람들이 다시 원래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명안이 이 절에 머물며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절에서 700∼800m 떨어진 곳에 있는 미타사마애불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거대한 화강암 동쪽면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얼굴과 어깨가 두드러지게 강조되었고 머리가 크며 관모를 썼다. 상호는 풍만하나 눈과 입의 표현이 간략하며 코도 납작하다. 바위 높이는 535cm이고 불상 높이는 405cm이다. 이밖에 1976년 법당 앞 채소밭에서 발굴된 지름 170cm의 초대형 맷돌이 전하는데, 아랫부분만 남은 것으로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타사 [彌陀寺] (두산백과)
가섭산의 다른 사면에 위치한 가섭사로 달린다. 미타사는 산자락의 끝부분 완경사지에 입지하고 있지만, 가섭사는 정상부에 가깝다. 급경사를 올라간다. 운전하기 무서웠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365년(공민왕 14)에서 1376년(우왕 2) 사이에 나옹(懶翁)이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벽암(碧巖)이 중건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응진암(應眞庵)이라 불렀다. 1938년에 불탄 뒤에는 주지 윤원근(尹元根)이 중건하였다. 1985년 미륵석불을 조성하였고, 1986년 대웅전이 무너져 위치를 옮겨 지금의 자리에 극락보전을 새로 지었다. 1990년 삼성각을 개축하였고, 요사를 옛 대웅전 자리에 지었으며, 1988년 일주문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의 극락보전과 3칸의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높이 90㎝의 아미타여래좌상은 음성읍 용산리 상봉악사(上鳳岳寺)가 폐사되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과, 음성군 감우리 성주사(聖住寺)가 폐사된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그 재료는 나무라는 설과 싸리나무로 엮어서 만든 부처라는 설이 있지만, 현재 개금되어 있어 확인할 수가 없다. 이 밖에도 6폭의 탱화와 1930년에 주조한 종, 조선시대에 만든 길이 150㎝의 석조(石槽)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섭사 [迦葉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인데 금박으로 인해 정확한 재료는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삼성각일 것이다. 절벽에 붙어 있다. 멋지다.
가섭산 정상 가까이의 급사면에 입지하였기에 음성읍내 쪽으로의 전망이 아주 좋다.
양촌 권근 3대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 묘역은 1만8000평 정도로, 권근을 비롯하여 그 아들인 권제(權踶), 손자인 권람(權擥)의 3대 묘소가 함께 있다. 묘소는 작은 구릉 위에 위치하며 맨위 권근의 묘부터 차례대로 내려썼다. 대개 봉분의 높이는 180㎝·둘레 2,500㎝이며, 석상·묘비·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문인상을 세웠다. 구릉 아래 좌측 평지에는 신도비가 보호각 안에 있으며, 우측으로 300m 아래에 사당이 있다.
권근의 신도비는 1447년(세종 29)에 세웠는데 비문은 이개(李塏)가 짓고 서거정(徐居正)이 썼으며, 권람의 신도비는 신숙주(申叔舟)가 글을 짓고 권반(權攀)이 글씨를 썼다. 권근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권제(1387∼1445)의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 또는 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로 권근의 둘째 아들이며, 사헌부감찰·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권람(1416∼1465)의 자는 정경(正卿), 호는 휴한당(休閑堂)이며, 시호는 익평(翼平)으로 권제의 아들이며,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앞장섰다.
열심히 일한자, 먹어라. 점심 때가 되었다. 꽤 유명하고 큰 식당이다. 유명해서 그런지 간판도 보이질 않는다.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질 않아도 손님들이 몰리니까 밖에 대문짝만한 간판이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간판이 요렇게 쪼꼬만하다.
선지국 먹자고 갔는데, 난 내장탕을 시켰다. 눈치보니 내장탕이 대표메뉴 같아서. 들어온 다른 손님들 대부분 내장탕을 시키길래, 따라하기. 괜찮다. 하지만 비싸다. 이것이 일만원 하고도 이천원을 더 받는 내장탕이다. 읍 단위의 비싼 식당인데도 손님들이 넘쳐난다. 큰 식당의 많은 자리가 부지런히 순환된다. 하지만 난 쌍문동 한우마을의 6천원짜리 내장탕이 더 좋다.
먹고 났으니 가자. 진천으로 가자. 농다리로 가자.
생거진천, 들어본 유명한 문구이다.
충청북도 진천에 사는 허주부의 딸이 용인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시어머니가 곳간 열쇠를 안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시어머니는 곳간에 아무것도 없어서 어딜 갈 때에도 곳간 열쇠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다녔다. 허주부의 딸은 ‘곳간에 아무것도 없으니 열쇠를 안 주는구나!’ 깨닫고 남편과 열심히 일을 했다. 일한 만큼 소득을 올리니 살림살이도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시부모가 돌아가시고 남편 또한 세상을 떠나자 허주부의 딸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자 길을 떠났다. 허주부 또한 ‘이것이 남편을 잃고 어떻게 사나!’ 하고 궁금하여 딸을 보고자 길을 나섰다. 죄전고개를 넘어가던 허주부가 힘이 들자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진천서 젊은 유생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마침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고개를 올라오자 유생은 여인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뜰 수가 없으니 눈 좀 불어 주시오.” 하였다. 이에 여인은 유생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허주부가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제 딸이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일로 허주부는 ‘저런 괘씸한! 외간 남자하고 두 번이나 입을 맞춰!’ 하면서 오해를 하게 되었다. 허주부는 딸이 집으로 돌아오자 노발대발하면서 가라고 호통을 치며 그 집 귀신이 되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연유도 모르고 남편을 원망하며 겨우 딸을 하룻밤 재워 보냈다. 허주부의 딸은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낙방하고 돌아오던 유생을 만났다. 유생은 “지난번 내 눈을 불어 주던 여인이 아니오?” 하며 “나는 아직 장가도 못 갔으니 같이 삽시다.” 하였다. 그리하여 허주부의 딸은 유생과 함께 진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허주부의 딸은 아들도 낳고 딸도 낳아 잘 살고 있는데, 용인에 살던 자식이 건장하게 자라서 외갓집에 와 어머니를 찾았다. 외할머니가 “네 어머니는 진천으로 시집갔느니라.” 하고 알려주자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가서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진천에 있는 아들딸들도 어머니를 뺏기고 싶지 않자 용인 자식과 진천 자식 사이에서 싸움이 났다. 그러자 원님이 “살아서는 진천에서 거하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거하라!”는 판결을 내려 주었다. 여기에서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진천 지방은 예부터 평야가 넓고 비옥하며, 가뭄의 해가 없어 농업 경영이 순조로워 살기 좋은 곳이기에 생거진천 사거용인’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공갈 폭포. 물이 없다. 세금으로 물 퍼올려 산비탈에 흘려버리면 돈이 나오냐? 건너편에는 초평저수지가 있다. 그 물을 끌어다가 공갈 폭포를 만드는 것일 것 같다. 아마도.
농다리.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다리'라고도 한다.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이다. 30㎝×40㎝ 크기의 사력암질 자석(紫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으나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원래는 28수를 응용하여 28칸의 교각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양쪽 2칸씩이 줄어 24칸만 남아 있다. 그 위에 길이 170㎝, 내외 넓이 80㎝,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 1개나 길이 130㎝, 넓이 60㎝, 두께 16㎝ 정도의 장대석 2개를 나란히 얹어 만들었다.
교각에서 수면까지 76㎝, 수면에서 하상까지 76㎝로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로 하상이 높아졌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천 농교 [鎭川籠橋] (두산백과)
다리를 건너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되돌아나와 차로 들어간다. 빗방울이 굵다.
비가 온다고 그냥 서울로 갈까 하는 의견을 내는데, 기각시켰다. 김유신 출생지 이야기를 음성에서 진천으로 오는 내내 했는데 그냥 갈수는 없다. 빗속을 달렸다. 둘이서.
요기다. 입구를 지나쳤다가 되돌아왔다. 직진본능. 네비게이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구를 일찍 나가버리거나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 동행자를 불안하게 했다. 어쨓든 직진은 잘하니까....☞☜....
...... 그렇게 해서 이현군 박사와 괴산 지역 답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지금은 괴산군 하나이지만 옛지도를 토대로 하면 괴산, 청안, 연풍 세 지역을 1박2일로 답사를 하게 된 것이다.
7월 26일(화) 괴산 일대에서 필요한 지역을 답사하고 청안을 거쳐 연풍을 지나 다시 괴산으로 돌아왔다.
중부 내륙 지방은 고추? 괴산군도 음성군도 고추를 지역 특산물이라며 상징으로 삼고 있다.
괴산 고추.
음성 고추.
괴산군의 지역브랜드 이미지에서 고추만지며 자랑하고 있는 이는 임꺽정이다.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가 괴산사람이란다. 이번 답사의 시작 지점인 이탄유원지 내의 제월대 앞에 문학비가 건립되어 있다.
1902년에 편찬된 괴산읍지에 포함되었던 지도이다.(옛지도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가져왔다.)
첫번째 답사지. 이탄 유원지에 제월대 그리고 고산정이 있다.
괴산 고산정 및 제월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충청북도 기념물 제24호. 1596년(선조 29)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유근(柳根)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별서(別墅)를 꾸며 만송정(萬松亭)이라 부르다가 광해조에 이르러 어려운 정치를 피하여 이곳으로 하향, 고산정이라 개칭하였다. 맑은 냇물이 발 아래로 굽어보이는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동남에는 제월대(霽月臺)라 이름한 암반이 있어서 정자 남쪽에 전개된 야산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인조 때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올 때 유근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가 시문(詩文)의 교류가 두터워 태화가 「고산정사기(孤山精舍記)」를 지어 보내니 지금까지 명문(名文)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현판에 새겨 정자 안에 걸어놓았다. 그 밖에도 사부사(謝副使)가 지어 보낸 「만송정팔경시(萬松亭八景詩)」가 있는데, 만송정팔경은 일명 고산팔경(孤山八景)이라고도 하며, 만송정을 비롯하여 영객령(迎客嶺)·제월대·관어대(觀魚臺)·영화담(映花潭)·황니파(黃泥坡)·창벽(蒼壁)·은병령(隱屛嶺)의 여덟가지 경관을 일컫는다. 정호현판(亭號懸板)은 이원(李元)의 글씨이고, 「호산승집(湖山勝集)」의 현판은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괴산 고산정 및 제월대 [槐山孤山亭─霽月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산정 아래로는 달천(괴강)이 흐르고 있으며 건너편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분지 지형 내에 위치한다.
다음으로 괴강관광지였다. 한창 공사중이다. 찾아보니...조감도만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괴산읍내로 향하였다. 괴산향교 - 읍사무소 - 도서관 - 경찰서 순으로.
먼저 괴산향교를 들렀다.
홍살문이 반겨준다. 날 더운데 고생 많다고....
말에서 내렷!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간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주차장 정도 표식이 아니었을까?
오랜 지역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라 그런지 오래된 나무가 많고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었다. 괴산향교의 보호수는 괴산5호. 1982년 지정 당시 220년이었으니 이제 수령이 250년 넘는다.
명륜당
입구는 잠겨 있다. 담 넘어로 내부 모습 한 컷. 동재와 서재, 내삼문 뒤로 대성전이 조금 보인다.
괴산유림회관. 향교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교회 괴산지부이며 전통혼례식장, 인성교육장 등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지나는 시커먼 답사객.
옛지도를 들고 동헌을 찾는다. 혹시 읍사무소에 있을까? 없다.
대신 수준점이 있다.
읍사무소 부근에 도서관이 있다. 부근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가본다. 있다. 옆에 깨끗하게 보호되고 있다.
괴산 보호수 1호님 되시겠다. 800년이 넘었다고. 도서관에 있다.
괴산동헌.
깔끔하다. 역시 잠겨 있다. 관리하는 곳을 찾아 열고 들어가볼까 하다가 안해주었을 때의 심리적 충격을 미리 예상하고는 그냥 참기로 했다. 대신 담 너머로 카메라를 디밀고 찍어본다.
괜찮다. 이렇게 보존하려면 역시 그냥 잠가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바로 옆에 괴산경찰서가 있다. 예쁜이들이 어서 와보라 한다. 이곳에도 보호수가 있다. 느티나무.
괴산 보호수 2호 되시겠다. 500년도 안되었는데(^^) 2호이다.
괴산버스터미널에 있는 주차장식당을 찾았다. 소개받은 곳이다. 점심으로 올갱이해장국을 먹었다. 사진은 다음날 아침에 찍은 것이지만 같은 메뉴라서 비슷하다. 올갱이에 계란을 한번 입혀 끓여내었다. 30여 년전에 처음 먹어보았을 때와의 아주 사소한 차이랄까.
괴산에서 청안으로 달린다. 지도는 26일의 이동 경로. 카메라 아이콘들 있는 뽀인트가 답사한 곳이다. 아니, 사진 찍은 곳들이다.
1872년 지방지도의 일부인 청안현지도.
독립된 현이었지만 이제는 괴산군 청안면이 되었다. 일부는 증평군에 포함되고.
청안초등학교를 찾았다. 동헌이 위치했던 경우가 많기에. 개교100주년이 넘은 학교이다.
역시나 대단한 나무가 있다. 무려 천연기념물이다. 165호.
담장 넘어에 면사무소가 있다. 7년 연속 인구증가를 축하합니다!!!
만세운동유적비.
역시 보호수. 회화나무. 68호.
동헌이다. 아주 잘 보전되어 있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 1405년(태종 5) 청안현에 도안현(道安縣)이 합병될 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마지막으로 1915년에 중수되었으며, 한때 청안지서로 사용되어 건물이 개조되었던 것을 1981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낮은 석축기단 위에 전면과 우측에는 네모로 가공된 주춧돌을 놓고 후면은 자연석 추춧돌을 놓았으며 기둥은 주로 두리기둥을 세우고 내부에 일부 네모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성은 전면 한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그 뒤로 왼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 도합 6칸의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4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동쪽의 측면 한칸도 툇마루를 두었으나 여기에는 문짝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의 동헌건물이 익공집에 겹처마건물인데 비하여 이 건물은 민도리집에 홑처마로 하여 격식을 낮추었는데 이는 청안현이 큰 고을이 아니었음을 반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안동헌 [淸安東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곳은 살며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마루에 손바닥 딱 한번만 대보고 나왔다. 어쨓든 손 댄 것인가...
옆에 위치한 파출소에도 대단한 나무가 있다. 고려초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이다. 그런데 보호수 리스트에는 빠져 있다. 왜일까? 천년 가까이 되는 나무인데..
역시나 담 넘어로 카메라를 디민다. 명륜당과 대성전이 보인다. 그러나 동재와 서재는 없다.
괴산향교에는 사마소가 함께 있다. 사마소는 결과적으로 지역유지들의 압력단체로 변질되어(원래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16세기 초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儒林)이, 그 당시 지방자치 기관으로서 수령의 자문기관 노릇을 한 훈구파(勳舊派)의 유향소(留鄕所)에 대항, 향권을 주도하기 위해 만든 자체 협의기구이다. 대개 각 고을의 관아 근처에 자리잡고 하나의 특수기관처럼 행세하면서, 생원·진사의 친목과 학문, 정치토론 및 교육활동 등을 펼침으로써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유향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수령의 지방통치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또 노비와 토지를 확보하여 재산을 늘이고, 향리·백성을 함부로 잡아다 형벌을 주는 등의 폐단을 가져왔는데 이런 폐단은 특히 호남·영남 지방에서 심하였다. 결국, 이러한 폐단과 유향소와의 끊임없는 마찰이 문제가 되어, 1603년(선조 36) 류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폐지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 그릇된 습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소 [司馬所] (두산백과)
청안을 떠나 들린 곳은 우암송시열묘 신도비.
옆의 은행나무도 괴산군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묘로 올라가는 계단. 여기까지...날이 매우 덥지만 않았다면 올라가보는 것인데, 너무너무너무 더워서...
화양계곡의 우암송시열유적도 찾아보려했었다. 그런데, 아 그런데 계곡을 올라가는 길을 막고 주차장 장사를 하고 있었다. 승용차 한대에 주차비를 5000원 내라고 했다. 동행자가 그냥 가자고 했다. 말씀하시는대로...
화양구곡과 우암송시열유적에 대해 깔끔하게 잘 정리해놓은 자료가 있어 그것으로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을 채워보자. 아래 링크 참조.
어렸을 때는 좀 있었던 것 같은데, 관계를 정확하게 기억도 하질 못했다. 커서는 더욱 왕래가 없어 잘 모른다. 더 크니까 그런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집안 일이 생겼을 때 서로를 인지하여야 하니까.
이모들이 세분 계셨었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셨다. 상가에서 볼 때마다 모임 만들자, 자주 좀 보자 라는 합의가 늘 이루어졌었다. 작년에 셋째 이모부 상 때, 각 집안의 첫째들끼리라도 모임을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하여 계금도 모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며칠 전에 대장이 전화하여 강화도에서 도예공방을 하는 이종사촌네를 방문하게 되었다.
장어에 소주 한잔하자라고 시작하였다. 차를 갖고 오지 말라 하데. 대중교통수단을 검색하여 보니 세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나왔다. 다시 연락하여 자고 오는 것으로 하였다.. 가는 것은 가는 것이지만 오는 것이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방에 전시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잘 수 있다 하였다.
갔다. 한 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네비게이션 아이나비가 갈 때는 행주대교를 건너라 하고, 올 때는 가양대교를 건너라고 하였다. 중간에 길이 없어진 것이 반영되지 않아 좀 돌았다.
공도방예가 아니다. 도예공방이다. '반'. 사촌이 하다가 후배님에게 물려준 것이라 한다. 일이 있을 때 종종 들르는 것이라 한다.
...
가마라고 한다. 도자기를 굽는 곳.
가마는 가스를 연료로 사용한다. 네 통이 연결되어 있다.
완성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 전시장.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식사할 때 사용하는 앞접시.
양념 접시.
국그릇.
잔.
오늘의 메인 메뉴. 장어. 가격이 엄청나더라. 더리미 장어거리의 식당에서 1킬로에 9만원 정도를 한단다. 시장에서 직접 사면 반 값 정도.
이종사촌이 마침 생일이었단다. 거의 도착 즈음에서야 전화 통화를 통해 알았다. 생일이라고 강화도에서 친하게 지내는 분들 몇 분이 같이 자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처옴 본 분들과 떠들석하게 먹고 일찍 잤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10시 반에 잠자리에 들다니. 평소보다 세시간 이상 일찍 잤다.
그래서 지축을 울리는 코고는 소리가 있었지만 잘 쉬었다.
강화도. 7월23일에 뜬 해. 비가 온다고 하더니만 또 틀린 일기예보.
공방이 이런 곳에 있다. 도로의 끝자락에 있는 땅을 임대한 곳이라 한다.
도착하자마자 모기와의 상생을 생각했었다. 기대보다는 모기들이 별로 없었다. 새까만 산모기 몇 마리에게 나의 것을 좀 나누어주었다.ㅠ.ㅠ
아침까지 잘 얻어먹고 귀가하였다. 방문객들은 휴일이라고 갔지만 손님을 맞이했던 사람들은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집안에 일이 생긴 상황이 아닌데 따로 모여 식사를 같이한 것은 최초. 다들 바쁜 사람들이고 생활 리듬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 모이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시작하였으니 가끔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2016년 7월 16일 토요일. 예정되었던 평창 답사. 전국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빗 속을 뚫고 달린다. 어둠 속에서 저 빛의 세계로!
비오는 날은 역시 여행이나 답사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라는 것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이젠 비밀도 아니다. 고속도로가 미어터진다.
서울에서 열심히 달려 평창에서 강원도지역 선생님들과 랑데뷰하여 평창, 대화 쪽을 답사하였다.
구글지도에서 '지형' 옵셥을 주면 지도가 이렇게 지형 기복을 보여준다.
이쪽 동네는 왜 강이 꼬불꼬불? 이렇게 만들어진 땅덩어리라서 그러하다.
(자료: 서원명. 아래의 어려운 자료들 모두)
이 동네 지질도도 추가해둔다.
평창 가는 길목에 안흥이 있다. 안흥이 유명한 것은 찐빵이다. 김샌다.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 하기 위해!(동명성왕의 후손 김동명 선생님이 쏨)
진빵을 먹다보니 평창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속초,고성,양양 지역 지리교사들(모임 이름이 SKY)과 랑데뷰하였다. 오늘 안내를 맡아주신 서원명 선생님과는 2년 만에 만났다.
비가 많이 내려서 예정하였던 일정 진행과 관련한 관계자 대책 회의. 특히 첫번째 장소인 장암산의 활공장(활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활공하는 곳이다^^)이 문제였다. 비가 계속 많이 내리면 '조망'을 전혀 할 수 없으므로. 하지만 지리과다. 간다. 급할 것도 없다. 올라가서 개이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 갔다.
지도를 보면 평창강이 평창읍을 휘돌고 있고, 그 동쪽으로 장암산이 위치한다.
장암산에 올랐다. 아스팔트 포장길이다가, 시멘트 포장길이다가, 비포장길로 바뀐다. 작은 흙탕물 구덩이도 있다. 역시 오프로드. 산길을 꼬불꼬불 올랐다. 4륜구동 작동!
장암산 위에 평창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위치한다. 이곳에서 평창읍 쪽으로의 조망이 기가 막히다.
평창읍을 휘돌아 흐르는 평창강과 평창강 상류의 지형을 조망하기 위해서 활공장에 올라왔다!
기가 막힌 전망이다! 막힌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렸다.
기다렸더니 잠시 비가 주춤할 때는 아래가 언뜻언뜻 보인다. 평창읍을 휘도는 곡류하도 평창강의 모습이 보인다.
장암산 쪽은 변성암 산지이고, 평창읍 쪽은 석회암 산지라고 한다. 변성암 산지에 비해 석회암 산지는 뾰족뾰족하여 대충 구별된다고 한다.
사전답사에서 드론을 사용하여 촬영한 평창읍의 모습(남호석)을 찾아보며, 구름 속에 숨어 속을 보여주지 않던 평창의 아쉬움을 달래본다. 평창강이 사진의 오른쪽에서 흘러내려오기 때문에 노성산과 만나는 부분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여 절벽을 이루고 있다. 노성산의 반대쪽은 침식 작용이 약하여 완경사지와 평야가 형성되었다. 하안단구 지형이다. 그곳에 평창읍이 발달한 것이다.
평창읍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노성산이다. 그 일대는 평창강의 하안단구에 해당한다고 한다. 기반암이 석회암인 하안단구 위쪽에 석회암이 용식작용을 받아 형성된 큼지막한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그 내부에 노성정이 있고, 활쏘는 곳을 만들었다.
쩌어쪽에 과녁이 있다. 국궁의 과녁은 양궁보다 두배 정도가 더 멀다. 145미터. 화살을 쏘아 과녁을 맞추면 된단다. 화살이 꽂히는 것은 아니고...
노성정의 모습. 지금은 평창정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아담하고 예쁘다. 아..새거다. 노성정의 아래에 활쏘는 사대가 있다.
서원명 선생님이 여러가지 자료를 사용하면서 평창 및 인근 지역의 지형에 대한 강의를 환타스틱하게 해주셨다.
대화고등학교 부근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여튼 뽕나무 백숙이었던 것을 보니... 하박국 식당이 아니었을까싶다.
2016년에 방문하였으니.......
식후에 대화면 배골마을로 이동하였다.
대화고등학교 맞은편 낮은 구릉지의 정상부에는 동-서 방향의 단열을 따라 긴 배 모양의 용식 와지가 발달되어 있다. 이 용식 와지는 여러 돌리네가 연결되어 형성된 것이다. 돌리네 doline가 여럿 연결된 것은 우발라 uvala라고 부른다. 와지의 사면은 산지로 연결된다.
위성 영상으로 확인해보자. 다섯개의 돌리네가 합체되었다는 것을 뚜렷이 구별된다. 골짜기 아랫쪽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배골마을은 평창군 대화면 대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화천 좌안으로는 면사무소가 위치할 정도로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남쪽으로 흐르는 대화천 우안은 산기슭을 이루며 석회암 산지이다. 배골마을이 들어선 지형은 우발라 주변 산은 해발고도 550~700m 정도이고, 농경지로 이용되는 곳은 해발 485m 정도이다. 우발라의 길이는 약 700m, 폭은 120m 정도이다.
돌리네의 토지이용은 밭농사. 배수가 잘되어 지표수가 부족하기에 논농사에는 어려움이 있다라고 한국지리 교과서에 나온다. 수확이 이미 끝난 농경지.
배골 마을 와지의 동쪽 끝 부분에는 입구가 1.5미터 정도되는 싱크홀(sink hole)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싱크홀은 와지인 돌리네 내부의 물이 지하로 스며드는 커다란 구멍인데, 이곳의 싱크홀은 호우시의 원활한 배수를 위해 인위적으로 확장시킨 흔적도 있다고 한다.
모여서 출석부 만들기.
대화 일대. 대화의 왼쪽 사면쪽으로 배골이 위치한다.
태백산지에서는 곡류하천 주변에 곡저 평야를 발달시키기도 한다. 평창강과 대화천, 안미천 세 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대화면 안미리 일대에는 예단평야로 불리는 넓은 곡저 평야가 있다. 이 평야는 평창강 유역이 발달한 곡저 평야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서쪽 산지를 감싸며 곡류하는 하천이 평창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대화천, 동쪽에서 흘러 합류하는 하천이 안미천이다. 합류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넓은 곡저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지도에서 평창강을 따라 이어지는 424번 도로에서 남서쪽 산지의 골짜기에 위치한 한국전통직업전문학교 쪽으로 평창강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다. 미날교이다. 미나리가 많이 서식하여 마을 이름이 미날이었다고. 이곳에 다리가 연결되기 이전에는 평창강을 건너는데 줄배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74년8월23일 집중호우가 내리자 단축수업을 마친 안미국민학교 아이들 20명과 주민 2명이 오후2시30분경 함께 강을 건너다 나룻배가 전복되면서 주민 2명과 어린이 7명이 익사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던 곳이란다. 이 사고도 정원 15명의 배에 22명이라는 초과승선이 문제가 될 수 있었고, 아이들 7명을 구하고 숨진 의인 이야기도 있고... 이후에야 강을 건너는 미날교가 만들어졌다고. 미리 알았으면 걸어가보았을텐데...
평창강을 따라 424번 도로를 통해 북상하여 면온IC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금당산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봉평면 유포리에 평창강(이곳에서는 금당천이라고 부름)의 유로가 변경된 흔적이 보인다. 424번 도로가 곡류가 절단되어 형성된 구하도를 따라 지나고 있다.
개수리에서 속초,고성,양양 지리교사 모임팀과 헤어졌다. 서울팀은 면온IC를 거쳐 고속도로를 열심히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7시30분에 중동고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오후 7시 20분경 원위치하였다. 약 12시간, 약 430킬로미터 이동.
그들은 그냥 소심한 보통 병사였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은 끝났다. 그런데 그 때의 기록을 남겼고,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된 것이다.
2012년 노르웨이 영화.
국내 개봉 영화 포스터는 가관이다.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 장면들을 편집하여 집어 넣었다. 이런 포스터를 보고 극장에 들어왔던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무엇이라 하였을까?
욕 많이 먹었을 것 같다.
사기!
원판 포스터이다. 영화의 등장 인물 다섯. 노르웨이의 산악 지대의 설원으로 격추되는 비행기. 이것이 이 영화의 내용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가 날고 기총소사 소리가 점점이 들리더니 눈보라 속에 격추된 독일 폭격기의 잔해.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부상, 둘은 멀쩡하다.
비행기에서 챙길 수 있는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이동한다. 어디로? 중위의 손짓 방향으로. 어딘지 모른다. 그냥 간다. 사방이 모두 THE WHITE.
해가 떨어지자 눈에 구멍 파고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 날 눈보라 속에 이동하다가 절벽에 미끄러지면서 식량을 모두 잃게 된다. 식량이 없다!
하릴 없이 이동하다가 대피소로 만들어진 오두막을 발견. 살았다!
이 때 밖에서 떠드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영국 병사들. 조종사와 소총수. 이 병사가 영화 해리포터에서 해리의 친구인 론으로 나왔던 얼라다.
이들은 오두막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곧 독일 병사들의 포로 상태가 된다. 이후 서로 견제하고 자극하고 기싸움이 시작된다.
반대로 독일 병사들이 포로가 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하지만 식량과 연료가 없이 고산 지대에 고립된 상황에서 헤게모니를 잡는다고 해도 써먹을 곳이 없다. 결국 양측은 단독강화를 한다. 총을 밖에 던져버리고 함께 생존을 위한 자연과의 싸움을 하게 된다. 이끼도 파먹고, 운좋게 토끼 사냥도 하고.
하지만 이들은 노르웨이군에 모두 잡히게 된다. 한 명은 사살 당하고.
영국 병사가 독일군과 전투하지 아니하고 함께 있었던 상황에 대해 조사 담당관은 '반역'을 이야기 한다. 이에 대해 영국인 조종사 데븐포트 중위는 눈을 부릎뜨고 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것 뿐이라고 말한다. 상대방도 다행히 그걸 인정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혹독한 상황이니까.
전혀 전쟁영화 답지 않은 전쟁 영화이다. 아주 소소한 에피스드들로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 지를 묘사해나가고 있다. 자신들의 감정 속에 숨기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기도 하고, 서로가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을 경계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또 달라지는 것은 오두막이다.^^ 어떻게? 그것은 영화 속에!
간만에 괜찮은 전쟁영화를 만났다.
외국 영화를 우리나라에 들여올 때 원 제목을 영어로 그냥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의 경우도 그냥 '인투 더 화이트'라고 게으로게 붙이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대공습'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