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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중국

2006년 7월31일 돈황에서 실크로드를 즐기다

by 딱한걸음 2020.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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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의 마지막 날이다. 부지런히 일어나 돈황에서의 둘째 날을 즐긴다.

 

9시 20분. 돈황 막고굴이다. 大泉河라는 하천이 흘러야 하는데, 물이 말라 하천이었던 흔적만 보여준다. 이 메마른 건천의 건너편에 구멍이 뽕뽕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구릉 위에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이었던 돈황에는 구법승, 대상, 병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때문에 경제적인 융성 뿐만 아니라 돈황 예술도 꽃피울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흔적이 세계적인 불교 유적지로 유명한 막고굴이다.

 

돈황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며, 시냇가의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이 막고굴은 366년 승려 樂樽이 석굴을 파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이후 14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역경사, 석공, 도공, 목공, 시주 들이 드나들면서 하나 둘씩 굴을 판 것이 천개에 가깝게 된 것이다.

 

천 여 개의 굴이 있다 하여 천불동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에는 굴마다 불상의 형태나 벽화의 내용이 다르다. 그러나 한결같이 어떤 종교적 고행의 흔적이 느껴지며, 종교와 예술의 피땀어린 결정체이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굴 속의 유물들은 일찍이 약탈을 당해 수만 점이 해외로 유출되어 현재에는 10여 개 국의 박물관과 도서관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9시 30분. 막고굴 입구에 도착하였다.

 

다큐 제작중.

 

막고굴 서점.

 

입구에 만들어 놓은 불탑들.

 

여기 저기 여러 곳에 불탑이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줄 알았는데, 세계문화자연유산이란다.

 

막고굴, 천불동 앞쪽을 흐르는.... 아니 물이 흐르지 않고 있는 건천. 하천의 이름은 찾질 못했다.

 

막고굴 입구의 패루.

 

입장에 필요한 입장권. 100원에다가 외국어 통역해준다고 20원이 덪붙여져 있다. 반드시 가이드와 함께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보호를 위한 조치라고 하는데, 이해된다.

 

비천상이 여럿 보인다.

 

드디어 왔구나 막고굴에. 그런데 입구에서 들어가면서 카메라와 헤어져야 했다. 실내 촬영 엄금. 천불동 내부의 사진은 없다.

 

외국 관광객이 오면 해당 외국어가 가능한 안내원이 나와 안내를 해준다. 보통 10여 개 정도의 동굴을 개방하여 안내한다. 한국어가 가능한 안내원 중에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었던 것 같은데, 돈황연구원에 근무한다 했었다. 열쇠를 들고 다니며 일반인들의 경우보다 조금 더 많은 동굴을 개방해주었다.

 

가장 규모가 큰 96호굴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앞에서 기념 사진을 다들 남기고 간다.

 

나도 남들처럼 남겨 보았다.

 

사진을 직접 찍지 못하였고, 15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정리를 하려니 막막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 숨겨져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할 수 없어 조만간 다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2012년에 한번 더 갔었지만 부족하다. 또 다시 가자~

 

돈황연구원

 

1900년 경 돈황에서 도교사원을 지을 곳을 찾던 왕위앤루(王圓籙)가 이곳 석굴까지 찾아들었고, 그의 조수가 16호 굴에서 다른 벽과 소리가 다른 벽을 찾아내어 그 벽을 헐면서 17호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으로 이어지면서 막고굴이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나 황실에서는 이 유물에 관심을 갖질 않자 왕원록은 다시 석굴을 막아버렸다. 이런 소문을 들은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이 왕원록에게 푼돈을 주고 설득하여 1907년 25 상자 분량의 고서들을 추려 영국으로 반출하였다. 왕원록은 양 한마리 값을 받고 위치 정보를 누출하였단다. 으이구~

같은 해 프랑스의 고고학자 펠리오는 일일이 문서를 확인하여 알짜들만 골라 29 상자나 반출하였다. 그 속에는 왕오천축국전도 들어 있었다. 얼마 후 펠리오의 둔황 고서 발견은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불관에서도 천불동에 있던 문화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인 오오타니 고즈이가 약탈한 문화재가 강점기 박물관에 보존된 채로 해방을 맞으면서 우리나라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오오타니는 원래 승려였는데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중앙 아시아 탐험에 나섰고, 돈황과 쿠차 등지에서 많은 문화재를 털어왔다고 한다. 영국에 유학가서 좋은 것 배워 온 놈이었던 것이다. 으이구~

그런 문화재 도둑놈들 이야기를 절절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 이곳 돈황연구원의 전시실이다. 전시실에서 안내를 하면서 이 문화재는 누가 훔쳐갔고, 이건 누가 훔쳐갔고 하는 식으로 이야길 해준다.

 

2시반.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고 돈황 골목 구경에 나선다.

 

돈황 재래시장.

 

 

돈황 시내의 비천상.

 

3시 10분. 돈황 박물관을 찾았다.

 

좀 많이 썰렁했다.

 

3시 30분. 명사산으로 들어간다. 사구들이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이동하는 소리가 많은 날이면 멀리까지 들린다고 하여 명사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명사산 입구에 진을 치고 있는 상가 때문에 꽤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서 이동해와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에서 보장하는 명사산월아천풍경명승구 되시겠다.

 

입구이다. 여길 지나가려면?

이게 필요하다. 80원이었다.

 

입구를 통과하여 들어왔다. 명사산이닷!

 

안내도. 

 

사구의 곡선은 언제 보아도 유려하다.

 

번호표를 뽑고 있다.

낙타표. 내가 1번이었다.

 

이렇게 줄지어 낙타를 타고 사구를 오른다. 거리도 꽤 되고 높이도 높다. 그냥 걸어가기엔 무리가 있다. 젊었을 때는 가능했을지도..ㅎㅎ

 

낙타의 발걸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카메라를 품에 안고 사진을 만들었다. 내가 찍힌 사진은 없다.^^

 

일행의 뒷 쪽으로도 차알칵~! 33명 일행이다보니 낙타 행렬이 기이일다~

 

걸어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두었다. 땀 좀 날듯...

 

4륜 바이크도 준비되어 있다. 물론 옵션이다. 

모래썰매는 1회 이용했다고 되어 있다.

 

월아천

 

명사산 안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가 월아천이다. 남북 길이가 100m, 폭이 25m 정도이다.

 

 

월아천을 향해 걷는다.

 

소만호. 인공호라고 한다.

 

명사산을 걸어서 오르는 젊은이들. 젊은이들~

 

월아천.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원천인 지하수가 용출하며, 광풍이 불어도 월아천은 모래에 덮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막 오아시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뭔가 알 수 없는 유적일 것 같기도 하다.

 

명사산의 그림같은 사구들과 인사를 한다. 다시 또 보자꾸나~~

 

곤륜산맥 언저리에서 이제 천산 산맥 언저리를 향한다. 유원역에서 침대 열차를 이용하여 투루판으로 이동한다. 내일 아침은 투루판에서 먹게 될 것이다. 쭉 뻗은 빈 도로를 질주한다.

 

잠시 쉬어가기~ 목화밭이 보였다.

목화가 열심히 자라고 있다.

 

유원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목화밭' 노래를 같이 불렀다. 내가 기억하는 가사 부분은 "목화밭~ 목화밭~" 전부인데..

 

유원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역에서 8시20분 쯤에 탑승 수속을 하였다. 역에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열차에 탑승하여 4인 1실 배정 받아 웃고 떠들다가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소주병이 참 많았었다.

(시체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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